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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눈을 뜬 것은 불도 다 꺼진 어느 어두운 방 안에서였다.
“.....”
어쩐지,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어떤. 그러나 아무리 낑낑거려도 꿈의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쓰러져 있던 새에 눈물이라도 흘렸는지 눈이 좀 매웠다. 하지만 거울이 없고 조명도 다 꺼졌으니 그걸 확인할 길도 없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자신이 널브러져 있던 자리 - 무슨 동면장치 같은데 - 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목에 걸린, 자그마한 은색 장신구가 달린 목걸이가 그녀의 갈색빛 머리칼과 함께 흔들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여기저기 박살난 잡동사니들과 여기저기 흩어져 읽을 수 없게 된 찢어진 종이쪼가리들 뿐. 여긴 어딜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나는 여기 왜 있는 걸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오직 하나, 그녀 자신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발키리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저격수. 눈보라 아래의 사냥꾼. 혹한 속에 도사리며 명예를 기다리는 하얀 사신. T-8W 발키리 1127번. 그것 하나만큼은 모를 수가 없었다. 바이오로이드로서,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유전자에, 모듈 속에 각인된 그녀의 제품정보니까. 그런 그녀가 왜 조금 전까지 이 어둠 천지인 방 안에 뻗어 있었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도리가 없었지만,
방 안에서 좀 더 단서를 찾아보려 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자 발키리는 자신의 밤색 생머리가 드리워진 이마를 쓸어올렸다. 거기 더 있어봤자 딱히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뭘 더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조심스럽게 어둠 저편에 어렴풋이 보이는 문으로 다가갔다. 혹시 잠겨 있는 것은 아니겠지? 누군가가 그녀를 감금했던 걸까?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우가 무색하게도 문은 - 수동으로 열어야 해서 좀 무겁긴 했지만 - 손쉽게 소리 없이 열렸다. 애초에 안에서 잠그는 문이었으므로.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아무도...없나요...?”
문 바깥은 혹시 불이 켜져 있고 인기척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복도도 그녀가 걸아나온 방과 똑같이 불이 꺼져 있어 사방이 어두웠다. 태생부터 눈이 좋은, 저격수다운 눈을 가진 그녀였지만 그녀의 십자눈금이 새겨진 오드아이는 초장거리의 저격대상을 정조준할 수 있는 물건이지 페로나 포이처럼 어둠 속에서 잘 보게 만들어주는 물건은 아니다. 그랬기에 어둑어둑한 복도 저편을 바라보며 발키리는 작게 심호흡했다. 저 어둠 속에 무엇이 있을지는 그녀도 모르는 것이다. 두렵지는 않지만....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외엔 다른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는 흠칫했다. 어디선가 옅게 피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아서다. 아니, 피 내음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군용 바이오로이드니까. 피냄새에 동요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두려운 것은 복도 저편에서, 그 피내음보다 옅게 느껴지는 약하디 약한 파장이었다.
“......”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뇌파를 감지할 수 있다. 정확히는, 뇌파로 인간을 구분한다. 그리고 예리한 감각을 가진 저격수인 그녀가, 보이진 않아도 그 존재감을 느낀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둠 속에서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진 발키리의 감각이 심장을 두방망이질치며 알려왔다. 근처에, 인간의 기척이 있다고. 바로 근처에, 아주 가까이에, 지금 발키리가 눈앞에 두고 있는 복도의 코너만 돌면.
“이건....”
어쩐지 익숙한 기척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립기도 했다. 너무나, 너무나. 왜 그런지는 그녀 자신도 정말 몰랐다. 어쩌면 한동안 어두운 건물 속을 홀로 헤매다 보니 더더욱 사람의 흔적이 그리워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어둠 속이어서 예민해진 걸까. 아직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감각은 민감하게 인간의 존재감을 느꼈다. 아주 미약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인기척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사람의 흔적이 거기 있다는 것이 어딘가.
그러나.
“....흑...”
가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인기척이 있다는 그녀의 감각은 그와 동시에 원인 모를 두려움과 공포 역시 가져왔다. 그녀는 감히 그 인간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나아갈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그리로 가면 그 뇌파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 테지만, 발키리의 본능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거부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그 감정에 그녀는 스스로도 놀라 몸을 떨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냉정한 저격수로 태어난 T-8W발키리가? 말이 되지 않았다. 군용 바이오로이드, 특히 냉철한 부동심이 요구되는 저격수 바이오로이드에게 이토록 격한 감정은 불필요를 넘어 해악이다. 그런데 왜 지금 그녀는 바로 그 해악스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녀는 차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무시무시한 공포감에 짓눌려 그만 벽에 기대어 주저앉고 말았다. 도저히, 시스터즈오브 발할라의, 하얀 사신답지 않은 겁쟁이 같은 모습으로.
“하아, 하아, 하아...”
바이오로이드가 감지하는 ‘인간의 느낌’을 정확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이, 어쩐지 얕은 숨소리 같이 잔잔하게 요동치는, 또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이 미약한, 작은 새, 구체적으로 말하면 후투티의 지저귐 같기도 한 그 인간의 파장, 혹은 ‘울림’은, 정말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영문도 모르게 겁먹게 했다. 너무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가슴을 다잡으며 심호흡했다. 제발, 그 무서운 기척이 사라져 주길 바랬다.
“하아, 하...”
고맙게도, 그 기척, 어쩐지 익숙했지만 다가가고 싶지 않았던 그 느낌은 사라졌다. 뚝, 하고, 끊어지는 듯이. 툭, 하고, 마치, 마지막 숨을 거두는 듯이.
그토록 무서웠던 그 존재감이 사라지자 발키리의 가슴 속에 안도감과 함께 이유 모를 슬픔, 먹먹함, 후회 같은 것이 찾아왔다. 어쩐지, 눈물이 날 만큼. 어째서일까. 그렇게나 무서웠던 걸까, 아니면....
“사라진....건가...”
작게 혼잣말하며 그녀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으로 거칠던 호흡은 다시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무서워서 차마 그 인간의 느낌이 전해지던 곳으로 다가가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이 무서운 장소를 나갈 다른 경로를 찾기로 했다.
...
밤이었다. 별빛 하나 비치지 않는, 불길하게 흐리고 어두운.
건물을 나가는 다른 길을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고, 곳곳에 핏자국과 그러한 핏자국을 만들었을 총탄 자국, 탄흔, 정체 모를 매캐한 냄새들이 나긴 했지만, 건물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부서진 잡동사니와 설비들, 정말 더 이상 이렇게 파괴될 수 없을 만큼 박살난 잔해들을 보면서 추측해 본 결과 이 건물은 어떤 연구시설이었던 모양이었다. 정확히 어디의 뭘 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딱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이 어둡고 무시무시한 장소,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참상이 일어났던 것이 분명한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중요한 것은 여길 나가는 것이었으니까. 불길한 장소에 더 있어 봤자 좋을 것은 없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이 건물을 나가는 통로를 찾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무너진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머리보다도 몸이 앞선 놀라울 정도로 숙련된 은페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그리한 이유를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또다른, 인간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전 느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아마, 조금 전 뇌파반응이 사라졌던 그 인간과는 다른 인간이리라. 이번에 느껴지는 인간의 기척은, 좀 더, 아니,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육중하고, 거칠었다. 그리고, 피와 탄매의 냄새가 났다.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거세게 요동쳤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무서움을 억누르고 벽 너머를 슬쩍 엿보았다.
어둠 속에서, 뭔가 시뻘겋게 붉은 불빛이 초롱하니 빛나고 있었다. 저게 뭘까. 저게 인간인가? 감지되는 반응은 인간이지만...세상에 저런 인간도 있단 말인가? 아니, 인간과 같이 두 다리로 서 있기는 했다. 하지만...그 ‘인간’의 형상은 직립보행하는 영장류라기보다는 기괴하게 뒤틀린 폴른과 더 비슷했다. 무엇보다 인간은 저렇게 휘번득하니 빛나는 붉은 눈을 가지고 있진 않다.
‘폴른’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비스듬한 십자형의 자국 - 어디선가 얻은 흉터인 듯싶었다 - 이 깊게 나 있는 그 ‘인간’을 바라보자 발키리의 가슴이 더할 데 없는 공포로 터질 것만 같았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극도의 공포라 그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 ‘인간’을 바라보지 못하고 가슴을 부여잡고 그만 벽 아래로 옹크리고 말았다. 그 꼬리 만 개같은 비굴하고 비참한 모습은, 도저히 냉혹한 눈보라 속의 저격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애원했다.
무서워.
무서워.
여길 보지 말아줘.
제발 어딘가로 가 줘.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 떨리는 소리조차 저 너머의 ‘인간’에게 들킬까 봐 그녀는 두려웠다.
“......”
쿵, 쿵, 하고 놈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 인간의 느낌을 가졌지만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그것은, 그렇게 그녀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고 놈이 정말 멀리 갔는지 확인하는 용기를 갖기 위해서는 또 한참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아, 하아, 후, 하....”
놈이 사라진 뒤에, 발키리는 간신히 일어났다. 극심한 공포와 피로감으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아니, 안다기보다는 느꼈다. 이 악몽 같은 곳, 파괴된 건물을 빠져나왔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의 모듈이 그녀에게 자꾸만 충동질했다. 가야 한다고. 한시라도 빨리.
‘어디로?’
스스로에게 반문하자 묘하게도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장소의 좌표가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왜 하필 거기인지, 거기에 뭐가 있는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로 가야 한다는 강박감은 그녀의 무지(無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혀왔다. 좋다. 가보자. 어차피 다른 갈 곳도 없으니. 그녀는 목에 걸린 은색 목걸이를 꽉 쥐었다. 부디 그 마음이 인도하는 곳에는, 그녀를 그토록 공포에 질리게 하는 것, ‘인간’이 없기를 바랬다.
왜 그런 걸 느끼는지는 몰라도.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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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편에 대한 이야기
1) 그렇습니다. 한 번에 두 개의 소설을 동시에 연재하는 미친 짓을 해보겠습니다.
2) 심지어 이 이야기는 기약 없이 진행하는 상당한 장편으로 기획하고 있습니다(물론, 이야기의 흐름이나 결말은 이미 생각해 두었으므로 계획에 따라 진행됩니다). 이제 한 1/3정도 쓰인 상태인데, 제가 분량을 정해놓지 않은 건 그 때문이랍니다.
서투른 글들을 항상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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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물은 아니에요. 비극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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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물은 아니에요. 비극이긴 하지만. | 21.07.04 16: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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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게임 배드엔딩들이 떠오르는군요ㅎ | 21.07.04 16:18 | |
삭제된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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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추종자
저도 모르게 은근히 그런 걸지도요? ㅎㅎㅎ | 21.07.04 21: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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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읍니다 전통의 인기캐...우리 새댁! | 21.07.04 2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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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아요 ㅎㅎㅎ 스카이나이츠 아이돌 소설 때처럼 번호를 매길 거 같습니다 ㅎㅎ | 21.07.05 00: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