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비가 내리고 안개가 서리는 한 밤중이면 어김없이 여자 귀신이 나타난다. 소복 단장이 아니라 녹의홍상(綠衣紅裳)을 한 처녀 귀신. 88간이나 되는 거대한 한식 저택의 안방에 나타나 잠들어 있는 사람의 배 위에 올라타고 밤새 못살게 군다는 것. 이제는 사람 그림자 조차 얼씬하지 않아 폐가가 되어 버린 이 집의 안방에 들어가 귀신과 싸우며 피서를 즐길 용감한 독자는 없는지···.
경상북도 안동(安東)군 도산면 의촌동 108번지라면 안동(安東) 일대에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세운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는 곳. 이 곳에서 동쪽으로 약 1km쯤 가면 낙동강 상류가 조그만 냇물을 이뤄 흐르는데 이 냇물가 경기가 좋은 곳에 문제의「귀신 나오는 집」이 있다.
집 구조는 한자의「이룰 성(成)」자와 비슷하게 되어 있다.(약도 참조) 어찌나 오래 비워 두었는지 집안에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고 기둥마다 이끼가 끼어서 고풍스런 냄새가 짚게 풍긴다. 더구나 집안 구조부터가 묘하게 되어 있어 어두컴컴한 것이 금방 뭔가 튀어 나올 것같아 땀이 싹 가신다.
현재 88간의 거대한 저택으로 남아 있고, 방마다 거미줄이 얼기얼기 얽혀지고, 먼지가 발을 덮게 수북한가 하면 깨진 그룹 따위가 나뒹굴어 대낮인데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왔다는 선입관 때문일까? 설사 그런 소문을 안 들었다고 해도 이 집안은 영락없이 없는 귀신도 나오게 생겨 먹었다.
처녀 귀신은 반드시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는 한 밤중이라야 나타난다고 한다. 건너편 주봉산(周鳳山) 밑 서낭당에서 쏴아 하는 소리가 나면 거의 같은 시간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안방의 문이 열리며 바람이 들이 닥친다는 것. 이 소리에 놀라 자던 사람이 일어나면 파랑색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은 처녀 귀신이 배 위에 올라 타고 꼼짝 못하게 짓누른다. 흔히 여자 귀신은 소복 단장을 한다는 데 이 처녀 귀신은 녹의홍상(綠衣紅裳).
대개는 이때 기절하여 의식을 잃기 마련이나 혹시 강심장이 있어 귀신을 상대로 싸운다고 해도 허사다. 소리를 쳐도 소리가 나오지 않고, 밀어뜨려도 요지부동이며 때려도 묵묵히 올라 타고만 앉아 있다. 밤새 그렇게 있다가 새벽녘이 되어 닭이 울면 처녀 귀신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고. 이 귀신을 직접 보았고, 싸웠다는 사람들의 얘기다.
먼저 본시 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이원필(李源弼·50·大邱 거주)에 대한 얘기.
『더이상 살다가는 정신이상이 되어 그냥 집을 버리고 떠난다고 그러더군요. 이 분은 고향에 다니러 와도 자기 집에 절대로 가지도 않고 마을에서 자지도 않는다고 그래요. 처녀 귀신 때문에 좋은 집 하나 버렸다고 혀를 차더군요』(안동군 문화공보실장이며 이(李)씨의 친구인 김형직(金炯稷·43)의 말)
이(李)씨의 사촌형인 이원정씨(58·서울 거주·일정시대 프로복서였음)가 코웃음치며 궂은 비에 안개가 자욱한 어느날 밤, 자신의 강심장을 자랑하기 위해 이집에 들어갔다. 이날 밤 어김없이 처녀 귀신이 나타나 이(李)씨의 무릎을 타고 앉아 온갖 흉물을 떠는 바람에 기절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핼쑥한 얼굴로 그는 서울로 줄행랑.
69년이었다. 이해 8월, 당시 영남대학 1학년이었던 이동수(李東洙)·이동우(李東宇) 두 학생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공부나 하겠다고 도산서원에 왔다가 귀신 이야기를 들었다, 웃기지 말라면서 두 학생은 안방을 치우고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했다. 2일만에 비가 왔고, 엎드려 공부하는 이들의 엉덩이에 올라 타고 꼼짝 못하게 했다.
갑자기 바윗덩이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된 두 학생은 이튿날 집을 나와 그곳을 떠나 버렸다. 이들은 마치 눈동자에 초점도 없이 몽유병을 않는 환자처럼 흐물흐물해 있더라는 마을 사람들의 얘기.
현재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이는 이진국(李進國·46). 문간채에 기거하면서 웅장한 본채에는 범접도 못하고 있다. 본시 이 집은 고종(高宗) 2년(1865년) 이모씨(성명 미상·아호는 치옹(癡翁)· 당시 正二品의 문관)가 지었던 집.
경복궁(慶福宮) 근정전을 중수한 목수가 민간에선 99간 이상 못짓게 했던 것을 이치옹(李癡翁)의 요구로 1백77간에 걸쳐지었다. 치옹(癡翁)은 대원군과 친했던 실력자로서 1백17간이나 지어도 좋을 만큼 세도가 당당했던 것. 대원군(大院君)은「좌산(左山)」이란 이 집의 현판을 자신의 친필로 써 주었고 조정에선「번남(樊南)」이란 현판을 하사했다. 현재는 29간이 낡아 없어지고 88간만이 남아있다.
처녀 귀신이 최초로 나온다는 주봉산(周鳳山)의 서낭당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치옹(癡翁)의 손부가 가마 타고 시집 오던 날, 가마 뒤에 이상하게 꿩털 한개가 붙어 따라 왔다. 신혼 첫날 밤 신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나는 마을의 주인인데 편히 지낼 집을 지어 달라』고 요구, 『어느 곳이 좋겠느냐』고 하니『가마에 붙은 꿩털을 날려 보내 그 털이 떨어지는 곳에다 내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튿날 신부는 어른들과 상의해서 꿩털이 날아간 주봉산(周鳳山) 밑에 서낭당을 지은 뒤 매년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이진국(李進國)씨는 조상대대의 집에 대한 내력을 얘기하면서 처녀 귀신이 나온다고 솔직히 시인.
『어느 날 처녀 귀신을 만나 죽을 셈 치고 제가 물었어요. 네가 나에게 원한이 있느냐고 했더니 고개를 흔들더군요. 그럼 우리 조상에게 원한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여요. 비로소 우리 조상에게 원한을 품고 죽은 처녀의 원혼인 줄 알았어요. 그 뒤론 우리에겐 잘 나타나지 않더군요. 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처녀 귀신이 나타날 겁니다』
마을에선 이 처녀 귀신이 치옹(癡翁)의 여러 몸종 가운데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원혼일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어쨌든 집주인마저 자기 집에 귀신이 나온다고 한정하고 있는 이상 귀신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을 듯. 이 집은 앞으로 2년 뒤면 안동(安東)댐 공사가 완공되어 물 속에 잠길 판이다.
용기있는 애독자들 가운데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분, 또는 귀신과 싸워 볼 용의가 있는 분은 한번 가볼만 하지 않겠는가?
<안동(安東)=조성호(趙誠鎬)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7월29일 제6권 30호 통권 제25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출처 : 인스티즈 썩어로주세용. 님
경상북도 안동(安東)군 도산면 의촌동 108번지라면 안동(安東) 일대에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세운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는 곳. 이 곳에서 동쪽으로 약 1km쯤 가면 낙동강 상류가 조그만 냇물을 이뤄 흐르는데 이 냇물가 경기가 좋은 곳에 문제의「귀신 나오는 집」이 있다.
집 구조는 한자의「이룰 성(成)」자와 비슷하게 되어 있다.(약도 참조) 어찌나 오래 비워 두었는지 집안에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고 기둥마다 이끼가 끼어서 고풍스런 냄새가 짚게 풍긴다. 더구나 집안 구조부터가 묘하게 되어 있어 어두컴컴한 것이 금방 뭔가 튀어 나올 것같아 땀이 싹 가신다.
현재 88간의 거대한 저택으로 남아 있고, 방마다 거미줄이 얼기얼기 얽혀지고, 먼지가 발을 덮게 수북한가 하면 깨진 그룹 따위가 나뒹굴어 대낮인데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왔다는 선입관 때문일까? 설사 그런 소문을 안 들었다고 해도 이 집안은 영락없이 없는 귀신도 나오게 생겨 먹었다.
처녀 귀신은 반드시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는 한 밤중이라야 나타난다고 한다. 건너편 주봉산(周鳳山) 밑 서낭당에서 쏴아 하는 소리가 나면 거의 같은 시간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안방의 문이 열리며 바람이 들이 닥친다는 것. 이 소리에 놀라 자던 사람이 일어나면 파랑색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은 처녀 귀신이 배 위에 올라 타고 꼼짝 못하게 짓누른다. 흔히 여자 귀신은 소복 단장을 한다는 데 이 처녀 귀신은 녹의홍상(綠衣紅裳).
대개는 이때 기절하여 의식을 잃기 마련이나 혹시 강심장이 있어 귀신을 상대로 싸운다고 해도 허사다. 소리를 쳐도 소리가 나오지 않고, 밀어뜨려도 요지부동이며 때려도 묵묵히 올라 타고만 앉아 있다. 밤새 그렇게 있다가 새벽녘이 되어 닭이 울면 처녀 귀신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고. 이 귀신을 직접 보았고, 싸웠다는 사람들의 얘기다.
먼저 본시 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이원필(李源弼·50·大邱 거주)에 대한 얘기.
『더이상 살다가는 정신이상이 되어 그냥 집을 버리고 떠난다고 그러더군요. 이 분은 고향에 다니러 와도 자기 집에 절대로 가지도 않고 마을에서 자지도 않는다고 그래요. 처녀 귀신 때문에 좋은 집 하나 버렸다고 혀를 차더군요』(안동군 문화공보실장이며 이(李)씨의 친구인 김형직(金炯稷·43)의 말)
이(李)씨의 사촌형인 이원정씨(58·서울 거주·일정시대 프로복서였음)가 코웃음치며 궂은 비에 안개가 자욱한 어느날 밤, 자신의 강심장을 자랑하기 위해 이집에 들어갔다. 이날 밤 어김없이 처녀 귀신이 나타나 이(李)씨의 무릎을 타고 앉아 온갖 흉물을 떠는 바람에 기절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핼쑥한 얼굴로 그는 서울로 줄행랑.
69년이었다. 이해 8월, 당시 영남대학 1학년이었던 이동수(李東洙)·이동우(李東宇) 두 학생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공부나 하겠다고 도산서원에 왔다가 귀신 이야기를 들었다, 웃기지 말라면서 두 학생은 안방을 치우고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했다. 2일만에 비가 왔고, 엎드려 공부하는 이들의 엉덩이에 올라 타고 꼼짝 못하게 했다.
갑자기 바윗덩이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된 두 학생은 이튿날 집을 나와 그곳을 떠나 버렸다. 이들은 마치 눈동자에 초점도 없이 몽유병을 않는 환자처럼 흐물흐물해 있더라는 마을 사람들의 얘기.
현재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이는 이진국(李進國·46). 문간채에 기거하면서 웅장한 본채에는 범접도 못하고 있다. 본시 이 집은 고종(高宗) 2년(1865년) 이모씨(성명 미상·아호는 치옹(癡翁)· 당시 正二品의 문관)가 지었던 집.
경복궁(慶福宮) 근정전을 중수한 목수가 민간에선 99간 이상 못짓게 했던 것을 이치옹(李癡翁)의 요구로 1백77간에 걸쳐지었다. 치옹(癡翁)은 대원군과 친했던 실력자로서 1백17간이나 지어도 좋을 만큼 세도가 당당했던 것. 대원군(大院君)은「좌산(左山)」이란 이 집의 현판을 자신의 친필로 써 주었고 조정에선「번남(樊南)」이란 현판을 하사했다. 현재는 29간이 낡아 없어지고 88간만이 남아있다.
처녀 귀신이 최초로 나온다는 주봉산(周鳳山)의 서낭당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치옹(癡翁)의 손부가 가마 타고 시집 오던 날, 가마 뒤에 이상하게 꿩털 한개가 붙어 따라 왔다. 신혼 첫날 밤 신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나는 마을의 주인인데 편히 지낼 집을 지어 달라』고 요구, 『어느 곳이 좋겠느냐』고 하니『가마에 붙은 꿩털을 날려 보내 그 털이 떨어지는 곳에다 내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튿날 신부는 어른들과 상의해서 꿩털이 날아간 주봉산(周鳳山) 밑에 서낭당을 지은 뒤 매년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이진국(李進國)씨는 조상대대의 집에 대한 내력을 얘기하면서 처녀 귀신이 나온다고 솔직히 시인.
『어느 날 처녀 귀신을 만나 죽을 셈 치고 제가 물었어요. 네가 나에게 원한이 있느냐고 했더니 고개를 흔들더군요. 그럼 우리 조상에게 원한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여요. 비로소 우리 조상에게 원한을 품고 죽은 처녀의 원혼인 줄 알았어요. 그 뒤론 우리에겐 잘 나타나지 않더군요. 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처녀 귀신이 나타날 겁니다』
마을에선 이 처녀 귀신이 치옹(癡翁)의 여러 몸종 가운데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원혼일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어쨌든 집주인마저 자기 집에 귀신이 나온다고 한정하고 있는 이상 귀신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을 듯. 이 집은 앞으로 2년 뒤면 안동(安東)댐 공사가 완공되어 물 속에 잠길 판이다.
용기있는 애독자들 가운데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분, 또는 귀신과 싸워 볼 용의가 있는 분은 한번 가볼만 하지 않겠는가?
<안동(安東)=조성호(趙誠鎬)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7월29일 제6권 30호 통권 제25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출처 : 인스티즈 썩어로주세용.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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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 안동댐 물 속에 있겠네요. 자동으로 물귀신 클래스 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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