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PSP] 용사 30 :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있다

[루리웹]

  2009년이 저물어가던 지난 12월 30일. PSP로 독특한 게임 하나가 발매되었습니다. 일본 마벨러스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하고 CFK가 한글화 작업을 거쳐 발매한 \'용사 30\'이라는 묘한 제목의 이 게임은 초속 RPG/슈팅/시뮬레이션/액션이라는, 제목보다 더욱 수상한 장르가 나열된 게임입니다(일본 버전의 장르는 초속 RPG). 한국 정식 발매 시에도 일부러 30이라는 숫자에 맞추려고 12월 30일에 발매했을 정도로 본 게임에서 30이라는 숫자는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그것도 30초. 용사 30이라는 하나의 게임에는 RPG, 슈팅, 시뮬레이션, 액션이라는 다양한 장르의 모드가 준비되어 있고, 이 모든 모드에는 대원칙이 있습니다. 30초 안에 모든 작업을 끝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막 한글화를 거쳐 발매된 용사 30.	모든 모드에는 30초 제한이 걸려 있다.

  용사 30은 본디 개인이 만든 무료 배포 게임인 \'30초 용사\' 라는 게임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고 부가적인 모드를 추가해서 하나의 패키지 게임으로 만들어낸 타이틀입니다. 무료 게임이었던 30초 용사가 정식 패키지 게임인 용사 30이 되었다고는 해도 본 게임의 가장 중요한 뼈대 시스템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초. 세계를 멸망시킬 주문은 30초 후면 발동이 되고, 용사는 그 이전에 어떻게든 레벨업을 하고/동료를 구하고/마을 사람들을 돕고/길을 헤쳐나가서/마왕과 싸우고/전투에 이겨서/마왕의 주문을 막아내야 합니다. 제한 시간 30초, 아무리 시간을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 달려든다고 해도 세계를 구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본 게임에서는 어떻게든 됩니다.

용사 30의 원조격인 30초 용사(30秒勇者).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 용사 30.

  조금 반칙 같은 방법이지만 제한 시간 30초가 다 지나가기 전에 시간의 여신님에게 기도를 하면 30초라는 천금 같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성스러운 여신 주제에 경제관념이 투철한 시간의 여신님에게 돈을 삥뜯기는 대신 플레이어는 다시 30초의 여유를 확보하게 되고, 늘어난 시간을 활용해서 레벨업을 하고 돈을 모아서 다시 그 돈으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기본 플레이 방식입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어쩐지 여신의 서비스라기보다는 악마의 계약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시간을 되돌리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여신이 요구하는 액수는 점점 더 늘어나고, 돈이 없으면 빨간 딱지 붙여놓고는 마왕하고 싸우고 있는 도중에도 가차없이 장비를 압류해가는, 돈 있는 것들만 대우받는 더러운 설정이기도 합니다.

  맹렬한 기세로 줄어드는 제한 시간이지만 맵상에 존재하는 몇몇 마을 안에서는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원작이라 할 수 있는 30초 용사에서는 마을에서도 대차게 시간이 흘러가고, 시간 연장 또한 10초씩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PSP 버전은 그나마 어느 정도 대중성을 의식한, 그리 크게 고맙지만은 않은 유저 친화적인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창 레벨업을 하다 보면 마왕보다 강해졌다는 문구가 뜨는 것도 무턱대고 레벨업에만 매달려야 하는 불상사를 막아주기 때문에 꽤 플레이를 편하게 해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오 여신님 오오.	돈을 뜯어가는 것도 모자라 은근 속도 긁어주신다.

  제한 시간 30초라고 해도 시간 연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30초를 아득히 넘어섭니다. 하지만 다른 게임에 비하면 그래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며, 30초마다 시간을 리필해줘야 한다는 압박감은 다른 게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30초씩 찔끔찔끔 시간을 리필해가며 RPG의 모든 요소를 다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제법 빠듯하면서도 묘한 재미를 느끼게 해줍니다. 발 빠른 것 외에는 별 장기도 없는 용사가 발업 켜고 세계를 구하는 용사 30 모드 이외에 공주 30, 마왕 30, 기사 30 등의 모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용사 30이 본 게임의 가장 중심적인 모드라 할 수 있으며, 실질적으로 플레이 시간이 가장 긴 모드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의 스테이지마다 마왕이 존재하며, 세계 파멸의 주문 30초 이내에 마왕을 이길 만큼 레벨을 올려서 마왕을 쓰러트려야 합니다. 스테이지가 거듭될수록 좀 더 극적이고 다양한 루트로 생각해야 하는 플레이가 요구되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게임이지만 그렇다고 설렁설렁 쉽게 일직석으로만 플레이하는 게임은 아니기에 다른 의미로 은근히 자극적이고 중독성 있는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테이지를 진행하다 보면 용병을 돈으로 사거나 동료가 생기기도 하며 드래곤을 도와준 후에는 드래곤을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등 구색은 다 갖춘 RPG이기도 합니다.

게임 오버 시 난데없이 고퀄리티 일러스트가 튀어나오기도.	30초 안에 꽃피는 동료와의 로맨스(같은 건 없다).

  30초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만큼 본 게임은 뭐든지 속전속결입니다. 전투가 발생하면 용사의 공격은 Y모 게임의 빨간 머리 주인공처럼 사나이 냄새 물씬 풍기는 닥치고 돌격 하나뿐. 그마저도 전투 도망 외에는 플레이어의 개입 없이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플레이어가 조작할 수 있는 것은 맵을 돌아다니는 것과 체력을 깎아가면서 이동 속도/공격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말 그대로 시간을 벌기 위해 피를 깎으며 달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플레이하게 되지만 점점 시스템에 익숙해지면서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며, 플레이 시간이 누적되면 될수록 용사 30의 오묘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무기나 장비가 업그레이드되긴 하지만 전투는 한결같이.	스테이지가 진행될수록 어려워지지만 여유는 늘어난다.

  개나 소나 외워대는 파멸의 주문(진짜 개나 소나 외워댑니다)을 저지하고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 용사 30의 핵심적인 스토리라면 마왕 30은 여신력 200년(용사 30은 여신력 100년이 무대)을 무대로 펼쳐지는 초속 리얼 타임 시뮬레이션 장르입니다. 저주 받은 연인을 위해 모험을 떠나는 것이 기본 골자로, 날이 밝기까지의 30초 동안 몬스터를 소환해서 조종당하고 있는 인간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왕 30의 기본 시스템은 파워-스피드-원거리 공격이 각각의 상성을 지닌 이른바 가위바위보 시스템으로, 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물리치기 위해서는 이 상성 관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마왕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천왕 요소도 건드리고 있으며, 바보 마왕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모드이기도 합니다.

  초속 슈팅 장르인 공주 30은 여신력 300년을 무대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보우건을 쏴대며 약초를 찾으러 다니는 공주의 모험을 다루고 있으며, 다른 모드와 마찬가지로 역시 통금 시간(…) 30초라는 제한이 걸려 있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캐릭터들의 얼척없는 대사가 가장 재미난 모드이기도 합니다. 액션 장르이자 여신력 500년이 무대인 기사 30은 다른 3개의 모드를 클리어해야 선택할 수 있는 모드입니다. 30초라는 제한이 걸려 있는 다른 모드와는 달리 현자님이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주문을 외우는 30초 동안 현자님을 보호하는 기사가 되어 현자님이 무사히 주문을 외울 수 있도록 어떤 수를 써서라도 끝까지 버텨내야 하는 처절한 모드입니다.

가위 바위 보 시스템이 중심인 마왕 30.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의 공주 30.

  나름 500년에 걸친 인간과 마왕과의 처절한 싸움을 다양한 캐릭터들의 시각으로 조명한 작품...이란 것이 제작사 마벨러스의 설명이지만 게임 자체는 큰 부담감 가질 필요 없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킬링 타임용 게임에 가깝습니다. 스테이지 하나를 클리어하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고 게임에 대한 접근성도 좋은 편입니다. RPG, RTS, 슈팅, 액션이라는 장르를 하나의 타이틀로 아울렀으며, 용사 30, 마왕 30, 공주 30, 기사 30 이외에 본 게임의 하일라이트라 해도 좋을 용사 300과 초속 RPG를 넘어선 초광속 RPG 용사 3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대단원을 맞이하는 용사 300 모드와 피도 눈물도 없는 용사 3 모드.

  이미 스크린샷을 통해서 알 수 있겠지만 용사 30은 용사 주제에 건방지다, 3D 도트 히어로즈, 록맨 9 등 최근 일본 게임,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레트로풍-한 마디로 패미컴 스타일의 그래픽 방식입니다. 몹시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패키지를 열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UMD를 PSP에 넣어서 돌려보지만 화면에 뜨는 것은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도트로 이루어진 캐릭터들. 시간의 여신님이라고는 자신을 소개하는데 여신이고 용사고 공주고 마왕이고 서로 도트의 위치와 색만 좀 다르다 뿐이지 거기서 거기인 그래픽이 플레이어의 안구를 희롱하듯 PSP의 480*272 사이즈 와이드 액정을 거닐고 있습니다. 솔직히 PSP라는 기기의 성능이 조금 아까워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시간의 여신이라 주장하는 기괴한 도트 생명체.	고결하신 시간의 여신님 일러스트.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차마 미려한 그래픽이라고는 할 수 없는 투박한 도트 덩어리들은 그럭저럭 각 캐릭터의 개성을 제법 잘 살려낸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놓고 도트 덩어리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다 보면 결국 PSP의 성능을 최대한 활용한 그래픽은 바라지도 않으니 아주 약간이라도 좀 더 세밀한 도트로 표현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묘한 희망이 생길 지경입니다. 옛 시절의 느낌을 살려주기엔 충분하지만 아무리 패미컴 시대라고 해도 이것보다는 좀 더 그래픽이 좋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이기도 합니다(물론 용사 30 쪽이 더 좋긴 합니다). 놀라운 것은 본 게임에 참여한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호화 군단이라는 것. 게다가 그 일러스트를 정작 본 게임 안에서는 거의 안 쓴다는 데에서 한 번 더 놀라게 됩니다.

SFC용 FF4 비공정을 처음 탔을 때의 놀라움(뿌우).	본격_2009년의_끝자락에_발매된_게임의_위용.JPG

캐릭터 일러스트와 본 게임 안에서의 모습(원 안).

  사실 요즘 이런 스타일의 그래픽이 유저들의 눈길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비슷한 타입의 게임들이 몇 편 이어지자 크게 새로울 것 없는 수준으로 격하되었고, 어느새 용사 30은 용사 주제에 건방지다 후속작이 아닌가 착각하는 게이머들도 적잖을 정도로 묻혀버린 감도 있습니다. 동시대의 기술력을 뛰어넘고 하드웨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래픽이 펼쳐져도 곧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지는 요즘에 와서 이런 레트로풍의 그래픽은 처음에는 약간의 신선함으로 눈길을 잡아둘 수 있지만 이내 식상해지고 또 불만스러운 부분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 행렬에 뒤늦게 참여하는 타이틀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녀석 정도의 반응을 듣기도 합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용사 30은 옛 시절의 게임을 신선한 아이디어로 재현한 게임임에는 틀림없고, 이러한 그래픽 스타일도 무척 어울린다 할 수 있지만 이 정도로 극적인 화면을 선택하지 않고 평범한 그래픽을 채택해도 무난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물론 용사 30은 다른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시스템이 가장 중요한 게임이라 할 수 있으며, 옛 RPG의 이런저런 요소를 개그 코드로 삽입한 게임인 만큼 이런 레트로풍의 그래픽이 가장 적절한 선택이라 할 수 있고, 게이머에 따라서 좀 더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투박한 본 게임의 그래픽을 참고 플레이하다 보면 얻을 수 있는 일러스트 등은 무척 깔끔하게 그려진 것도 위안이라면 위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사 30과 같은 시리즈로 종종 오해받는 용사 주제에 건방지다.	참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을 주었던 록맨 9.

  투박한 그래픽과 함께 게임에 등장하는 텍스트도 용사 30만의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습니다. 무척 위험한 듯한 내용의 대사와 약간은 나사가 빠진 듯한 대화는 한글화 전문 업체 CFK의 용사스러운 손길이 닿아서 자막 한글화가 이루어졌고, 그저 범접할 수 없는 센스를 갖추신 여신님의 대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대충 패턴이란 것이 정해져 있고 룰 자체도 간단한 편이기에 어찌 보면 한글화의 필요성이 그렇게까지 필요한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적들을 무찔렀을 때의 다양한 대사와 바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듯한 캐릭터들의 대화, 그리고 여신님의 애정 섞인 폭언과 속을 긁어대는 조롱을 읽다 보면 한글화가 되어서 참 다행스러운 타이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즐겁게 대화를 읽을 수 있는 멋진 한글화.	용사 회사가 용사 게임을 냈씀미다.

  투박한 그래픽과 개그 섞인 대사로 인해 일견 가벼워 보이는 게임이긴 하지만 의외로 몰입도가 굉장히 높은 게임이며, 좀 더 빨리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칭호 시스템 등 파고들만한 요소도 준비해뒀기 때문에 게임 전체를 제대로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20여 시간에 달하는 플레이 시간이 요구됩니다.. 하나의 소스를 가지고 다양한 모드를 만들어 여러 장르를 시도한 부분도 꽤 높은 점수를 줄 만한 부분입니다. 모든 게임이 그렇지만 이렇게 리뷰를 읽는 것보다는 용사 30이라는 게임을 데모를 통해서라도 직접 한 번 플레이해보는 것이 확실하게 와닿을 것입니다.

  이젠 입체 화면을 구현하네 마네 하는 시대에 돌입했음에도 캐릭터의 눈을 표현하는 데에 딸랑 도트 하나 찍는 게임이 발매된 것도 참으로 간만이라 은근한 추억을 느끼게 해주고,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피식 웃게 되는 캐릭터들의 대화는 용사 30을 소박하지만 게임으로서의 재미는 적잖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요소입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김에 세상도 한 번 구해보고 딸랑 스테이지 하나 클리어할 때마다 분위기 파악 못하고 튀어나오는 비장미 넘치는 엔딩 스탭롤을 보면서 무척 허탈하게 웃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경험일 것입니다.

의외로 다양한 공략 루트가 존재하고, 재도전을 끈질기게 요구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용사 30은 어떤 의미로는 옛 PRG 플레이 방식의 오마주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개그적인 시각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30초로 압축되어 있지만 그 30초 안에는 오랜 세월 플레이해왔던 RPG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을 사람과의 훈훈한 정이 있고, 동료와의 뜨거운 우정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비애와 마왕을 물리치기 위한 용사의 뜨거운 노력까지 한정된 시간 내에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다른 RPG에 비해서 좀 심하게 압축률이 높은 편이지만 그 또한 용사 30의 독특한 재미라 할 수 있으며, 짧지만 버릴 장면이 별로 없는 무척 강렬한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만큼 강렬하게 다가오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