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은 모처럼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를 털어버리고 미래지향적인 동반자로 거듭나자고 서로 약속한 우호의 해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호보다 분쟁의 해, 또 다른 분쟁의 시작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최근의 일련의 사태들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한승조 교수, 군사평론가 지만원 씨 등이 식민 지배를 합리화 하는 발언을 했고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듯일본의 시마네현에서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다케시마의 날을 조례로 선포하는 등, 앞으로 교과서 검정 문제까지 기다리고 있다 하니, 양국간의 골이 어디까지 깊어질지 모르겠다.
한 사람의 게임 크리에이터 입장에서, 일생 동안 일본의 게임을 즐기고 사랑해 온 사람의 입장에서 이처럼 반일감정이 높아지는 것을 바라 보는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 된지 6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일본 문화에 대해 가감 없이 받아 들일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기는 아직 멀었는가 보다. 한국의 이전 세대들이 저질러 놓은 오해와 반목의 잔재, 일본의 일부 우익들이 생각하고 있는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직도 무겁게, 무겁게 전국민의 가슴속에 불을 지피고 있기 때문이다.
화해의 기본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서 2찬넬을 인용하여 일본 네티즌들의 악의적인 반응만을 짜집기해서 올린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는 누가 봐도 일본인에 대해 악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끔 생각되는 내용만 소개한 것이었다. 딱 보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지며 5년 전의 2찬넬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2000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난, 뒤늦게 코미케라던지 일본의 동인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동인 활동의 중심 선상에 있는 Y씨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는 평소 프로그래머로서 본연의 업무를 열심히 하다가 여가나 비는 시간을 이용해서 코미케의 운영회를 맡는 등, 변태적이거나 한가지 요소에 집착하는 진성 오타쿠와는 다른 성실한 청년이었다.
여느 오타쿠와 달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나, 자신의 주관도 확실한 사람이어서 이야기 하다 보면 다소 정치적인 문제로 흘러가는 경우도 꽤 있었는데, 한번은 일본이 한국에 사죄해야 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펼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박정희 시대의 보상은 약했다고 주장하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럼, 이상은 그 보상금을 대한민국 정부가 어디에 썼는지 알고 있어요?"
순간, 말문이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보상금액이 적은 감이 있었고 서둘러 체결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보상 금액의 얼마를 어디에 쓰고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런 나에 비해 Y씨는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어서 포항제철준공, 1호선 지하철 건설, 청계천 고가 건설 등의 사용 예를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그 날은 한국인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기 힘들었고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당분간 도서관에 틀어 박혀 한일 관계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다녔고, 자연스럽게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었다. 서울에 돌아오기 전에 Y씨가 양국 관계를 재조명하려면 먼저 서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5-6개월 뒤 도쿄로 갔을 때 우리는 신주쿠의 이자카야에서 밤 늦도록 한일관계에 대해 토론을 했고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서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돼서 코드가 같은 사람끼리 가감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건배를 했다.
기분 좋게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Y씨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그런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으면 2찬넬이라는 곳에도 들어가 봐요”
2찬넬이라는 곳이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인터넷에서 서로 자유로운 주장을 올리는 곳이라고 했다. 알겠다고 말하고 돌아가려 하니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는지 나를 다시 불러 세워서 말한다.
“들어가서 보더라도 원래 한국에 대해 좋지 않은 글들이 올라오는 곳이니 이해를 해줬으면 합니다”
요는, 원래 한국이던 중국이던 어떤 주제건간에 무례하고 시비조로 올라오는 글이 다반사이니 그 점을 이해하고 참고로 봐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거기 있는 내용은 극히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다는 한마디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2찬넬이라는 곳을 들어가 보았다. 한국에 대한 카테고리가 만들어져 있어 집중적으로 한국에 대한 토론이 열린다. 아무래도 보수적이고 우익 성향이 강한 곳이다 싶어 조심스럽게 의견을 올려 본다.
“일본은 가해자이고 한국은 피해자였으니 여러분이 이 점을 인식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 짤막한 글 한 줄로 카테고리는 발칵 뒤집어 졌다. 다음날 들어가보니 의견이 수백 개나 올라와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 한국인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2000년 당시는 2찬넬의 존재 여부를 알고 있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이번엔 진위 여부를 묻는 논란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인이면서 한국인인척 하고 들어와서 글을 쓴다’, ‘한국인이 일본어로 저런 수식어를 사용 할 줄 아나?’ 라고 하는 것이었다.
답답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그들이 묻는 시험성 질문 몇 가지에 답을 해주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국보급 유적은 무엇, 살고 있는 주소지의 이름 같은 것들……
기나긴 질문과 답변 끝에 한국인이라는 점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되었는가 싶더니, 이번엔 여지 없이 맹렬한 비판이 이어진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었지만, 한가지로 요약하자면 일본은 절대 가해자가 아니며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는 한국인들에게 과분한 것이었다는 발상.
화가 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들의 이런 생각을 고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인 문제, 이론적인 것들을 들고 토론해봐야 답이 안 나온다. 더구나 상대는 수백 명…… 이미 내가 올린 의견에 모든 시선이 집중 되어 있어 내가 짤막한 답변을 달면 거기에 수십 개의 의견이 실시간으로 올라 온다. 애초부터 진지한 토론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생각 끝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달고 토론을 끝내기로 했다.
“이렇게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한 동네에 A라는 아이와 B라는 아이가 사는데 어느 날 A와 B가 아주 심하게 싸웁니다. 그 결과 A는 B에게 너무 심하게 맞아서 불구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경찰이 와서 입회하고 재판도 거쳐서 B는 A에게 법적인 모든 보상을 해주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한다는 것으로 화해합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A는 계속 불구자로 살아가게 되고 B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이 안 날 수 없겠죠. 반면, B의 입장에서는 A를 볼 때 마다 이해가 안 갈 수 있는것이구요. 내가 법적인 보상을 다 해주었는데 쟤는 왜 자꾸 저러나…… 화해하자고 했는데 왜 저러나?.. 한일 관계란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토론을 맺겠다고 하자, 이제까지 비판적으로 몰아가던 사람들 중 50% 정도는 수긍하는 분위기로 돌아 선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최근 일본에서 불고 있는 한류 분위기를 우리 스스로 해쳐서는 안 된다.
동시기에 일본의 아키바에 있는 한 상점에서 키보드를 구매한 적이 있었다. 여권을 제시하면 면세가 된다고 해서 여권을 제시하고 면세 카드를 작성하게 되었는데,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 점원이 한국의 ‘한’이라는 한자를 쓸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점원은 한동안 한자 사전을 뒤적거렸지만 쓰지 못했고, 결국 내가 직접 면세카드에 한자로 적어주는 해프닝이 있었던 것이다.
한류 열풍이 불기 전까지만 해도 대다수 일본인 들에게 한국은 김치와 태권도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지, 지정학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과거에 일본과 무슨 관계였는지, 역사적 사실과 상황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던 것이, 보아, 겨울연가의 욘사마로 이어지는 한류 열풍에 의해 많이 달라졌다. 거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방일 때 일본의 시청자들과 직접 대화하면서 보여준 성의나, 공동 월드컵 개최국이라는 이미지도 많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이 한국인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길거리에서 한국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한국말로 대화를 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도쿄 어느 곳에서나 심심치 않게 발견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가끔 일본의 게임 업체 사람들과 업무적으로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삼성전자가 해내지 못한 일을 욘사마 혼자서 해냈다”
그러나, 이런 한류 열풍을 내심 반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 2찬넬의 열렬한 보수 우익 사람 들이나, 일제 시대를 경험한 노년층 중에 제국주의 시대의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 등, 한국인이 일본에 와서 일본인들에게 추앙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일본 전체에 몰아 닥치는 한류 열풍을 잠재우고 일본 국민들이 한국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게 되길 바라는 길인데, 우리가 스스로 이 사람들의 도우미가 될 필요가 있을까?
언론부터 자제를 해야 한다.
얼마 전 일부 언론들이 욘사마 때리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더니 급기야, 안정환 선수와의 인터뷰에 있어서는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서 지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에 급급한…… 한국인의 내셔널리즘을 이용해서 이 참에 특종이라도 한 건 해야겠다는 그런 소인배적 발상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기사들이 계속해서 여러 포탈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언론사의 농간에 따라서 네티즌들이 움직인다.
언론이 먼저 움직이고, 네티즌들이 따라서 움직이면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번져서 전국민이 감정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있지도 않은 사실들이 사실로 부풀려지고 누구든지 거리에 있는 일본인에게 다가가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윽박지르지 않으면 매국노로 낙인 찍히는-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 일 양국 정부는 하루 빨리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얼마 전 총리실로 들어가기 전에 방송국 기자들에게 둘러 싸여 질문 받는 고이즈미 총리의 모습을 본적이 있다. 방송국 기자들의 질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배상과 사과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는 것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시종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국내용이 아니겠느냐는 짤막한 답변으로 자리를 피한 것으로 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배상과 사과의 문제에 있어서 계속 번복하는 모습을 보여 왔지만 이번엔 문제가 약간 다르다. 작년, 방일 때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의 국민들이 패널로 참여한 토크 프로그램에 나와서 대표적인 친한파로 알려진 초난강씨와 함께 일본 국민들에게 방송 채널을 통해 더 이상 사과와 배상은 필요 없다고 공언했다.
당시 나는 회사에서 점심을 먹다가 이 부분을 뉴스에서 보았는데, 내심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정말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을 건가? 하고…… 독도 문제도 걸려 있고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도 있다. 이런 점들을 모두 간과 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가겠다?? 뭔가 석연찮은 부분은 있었지만 워낙 화해 무드가 달아오르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나도 그 분위기가 좋아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삼일절에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이것에 대해 일본 국민들이 느끼는 정서적인 충격은 대단하다. 한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와서 초난강과 함께 약속했던 이야기를 1년도 안돼서 뒤집었다고……
일본인들에게 독도를 한국이 지배하는가, 일본이 지배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 한국의 대통령이 직접 일본의 방송국에 나와서 한 이야기를 뒤집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욘사마를 한국의 언론들이 앞서서 매국노로 몰아나가는 작금의 상황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우익들이 바라는 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 들여지면 한국은 국제 외교의 기본을 모르는 나라, 한가지 의견에 모두 동조해야 하는 다양성이 없는 나라, 언론의 자유가 없는 나라로 일본 국민들의 머릿속에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을 스스로 철폐 할 수 있도록 시마네 현을 유도해야 하고 한국 정부는 지금 불고 있는 맹목적인 반일 감정을 어떻게 하면 진정 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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