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2등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재벌 기업의 광구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긴 자가 독식하는 게임 시장이야말로 이 문구가 딱 들어맞는 곳일지 모르겠다. 승자를 기억하는 시장의 논리는 당연한 것이지만, 패자의 분투를 되새기는 인간적인 여유를 갖는다고 해로울 일은 없을 터이다.
비디오게임업계의 영원한 마이너리티 세가는 게이머들에게도 항상 뜨거운 감자이다. 그 장인정신에 대한 찬양과 열광은 대중성을 무시하는 도도한 고집에 대한 비판을 달고 다니기 마련이다. 즉, 열렬한 추종자만큼이나 이유없는 비판자들도 많이 따라붙는 회사가 세가이다. 찬반론이야 어쩄든간에, 80년대에 오락실을 출입했던 사람이라면 세가 게임이 준 충격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애프터 버너>, <아웃런>. <버추어파이터>를 제대로 즐기겠다는 일념에 멀리 떨어진 대형 업소로 향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말이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도 세가는 제왕 닌텐도의 유일한 경쟁상대였다. 마리오보다 빠른 소닉이 열심히 내달린 덕분이었는지, 북미에서 세가의 메가드라이브(북미명은 제네시스)는 닌텐도의 슈퍼패미콤(북미명은 SNES)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한편, 16비트 게임기의 시대가 저물어갈 무렵인 1994년이 되자, 세가에게도 서서히 기회의 문이 열렸다.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시장의 패러다임과 트렌드를 읽는 자가 승리할 것이 확실했다. 세가는 32비트 게임기 시장에 대해서 단절과 연속이라는 양면의 전략을 수립했다. CD 롬을 덧붙여 매체의 단절을 추구하면서도, 2D 그래픽을 완벽의 경지로 끌어올려 이전과 연속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세가의 시장 진입 전략에 소니가 복병으로 등장했다. 슈퍼패미콤에 부착될 CD롬 기기제작건으로 닌텐도에게서 배신 당한 소니가 독자적인 플랫폼을 내놓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게임업계에서는 애송이에 불과했던 소니였기에, 모두들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 것이고 전망했다. 하지만, 시장의 흐름은 오히려 소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3D 그래픽이라는 구다라기 켄의 과감한 기술적 예측, 소니 뮤직을 통해 수혈된 탄탄한 CD 비즈니스의 유통 경험, 그리고 게임 개발사들에 대한 적극적인 개발 유도 전략이라는 삼박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나갔다.
여기서, 가장 역설적인 대목은 3D 그래픽이라는 플레이스테이션의 비전이 개발사에게 수용되는 데에 세가가 일조했다는 사실이다. 세가의 기념비적인 3D 격투게임 <버추어파이터>는 3D 그래픽에 대한 개발사들의 공감대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업소용 게임을 통해 3D 그래픽을 개척했으면서도, 가정용 게임기로 이를 확대하려 하지 않은 세가의 판단 착오였던 셈이다.아사쿠라 레이지의 책 한 구절을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회사 C(필자-캡콤을 칭한다)는 첫번째 회의에서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소니는 정말 게임 사업과 함께 자살하려고 하느냐? 우리 문화는 2D 이미지의 문화이다. 3D 이미지에는 흥미가 없다. 우리가 소니 쪽에 참여하기 위해선 전세계적인 하드웨어 판매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수치를 말한다면 3백만대이다.” … 이전의 자세와는 판이했다. … 회사 C는 지금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도록 한 것일까? “세가의 <버추어파이터>가 굉장하던데요.”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정말 컴퓨터 그래픽이 3D로 가고 있구나! 우리는 깜짝 놀랬어요.” (아사쿠라 레이지, {소니를 지배한 혁명가}, 황금부엉이, 2003, 80쪽)
새턴의 2D 능력은 당시로서는 어떤 기기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2개의 CPU와 2개의 VDP를 지닌 병렬 프로세싱 구조 때문에 게임의 개발이 간단치 않았다. 게다가, 광원이나 투명 효과와 같은 기본적인 3D 기술을 하드웨어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3D 효과를 내려면 소프트웨어 코딩이라는 개발자의 ‘노가다’가 필요했다. 요컨대, 새턴은 3D 그래픽에 있어 개발상의 난점을 지닌 기기였다.
길에서 벗어난 이야기지만, 이러한 새턴의 처지를 플레이스테이션2와 대조해보는 일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병렬 프로세싱과 3D 기술의 하드웨어 미지원에 따른 게임 개발의 어려움은 최근에도 많이 들었던 말들이 아닌가? ‘유연한’ 기기인 새턴의 난점을 공략해 ‘손쉬운’ 3D로 시장을 거머줘었던 소니가 오히려 플레이스테이션2에서는 새턴의 예를 따라 유연성을 추구했다는 것은 꽤나 묘한 느낌을 준다. 최근 등장하는 플레이스테이션2의 게임들이 한계를 초월하는 그래픽을 과시하고 있듯이, 빛을 보지 못한 새턴판 <쉔무>의 3D 그래픽 역시 플레이스테이션의 게임들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새턴의 실패 이후 세가가 겪은 시련을 구구하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록, 비즈니스에서 쓴 잔을 마셔온 세가지만, 그 게임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참신함과 재미를 갖추고 있다. 속편이 대세를 형성한 플레이스테이션2의 보수성에 비춰본다면, 드림캐스트의 <크레이지 택시>, <젯 셋 라디오>, <쉔무> 등은 세가의 색채를 머금고 있는 진보적인 작품이었다.
소프트웨어 전문 제작사로 변신한 세가의 실적은 아직 그리 신통치 못하다. 체제 정비 이후, <버추어 파이터>, <젯 셋 라디오>, <팬저 드래군>과 같은 자사의 대작 시리즈를 다양한 기종으로 선보였지만, 시장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버추어 파이터 4>와 세가 스포츠 시리즈가 거둔 실적은 드림캐스트 시절에도 미치지 못해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하드웨어를 지고가는 편이 낫겠다는 의견이 들려오기도 한다. 앞으로 세가에게 어떤 기회가 더 남아 있을까? 콘솔의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하면, 세가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리게 될까? 어쨌든, 한 사람의 소박한 게이머로서 세가의 게임을 계속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영원하라, 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