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구덩이 속의 세 B급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16)
2편: 구덩이 속의 네 B급(上)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7)
3편: 구덩이 속의 네 B급(下)(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8)
4편: 구덩이 속의 네 B급, AGS 하나(上)(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559)
전편: 구덩이 속의 네 B급, AGS 하나(下)(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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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지하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레프리콘과 브라우니는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 이 순간만큼은 두 스틸라인 병사들의 생각이 전투 앞에 일치했다는 증거였다 - 바이저를 내렸고, 그녀들보다는 침착한 편인 샌드걸은 속으로만, 대신 그보다 더 심한 쌍욕을 내뱉으며 기관총을 꺼내 쥐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쿠아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쿠아, 물러서십시오!”
오르카의 아쿠아들은 철충에 대항하기 위해 강산성 용액을 담은 분사장비를 장착하고 있지만, 지금 그녀들과 함께하는 백 년 전 아쿠아는 완전한 농업용 바이오로이드다.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브라우니! 놈이 톰에게 가지 못하게 막아요! 톰이 파괴되면 우리 모두 끝장입니다!”
레프리콘은 톰이 음성 인식 모듈을 끄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톰은 굴착을 하느라, 그리고 지반이 무너지지 않게 연산을 수행하느라 주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일 것이다. 실제로 톰은 아직도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못 알아차렸는지 저만치서 열심히 바위를 깨부수고 통로를 만드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톰이 무력화되면 아무도 이 어두운 무저갱을 나갈 수 없게 된다.
“쏴요, 브라우니!”
“씨1발, 꺼져, 좃같은 새1끼야!”
브라우니의 패악스런 욕설과 함께 그녀들의 총구에서 일제히 섬광이 치솟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소총과 기관총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과 요란한 발사음이, 태곳적부터 그런 것과는 인연이 없었을 수백 미터 아래 지하를 가득 메웠다. 톰이 바위를 부수며 내던 낮고 육중한 소리가, 그보다는 높고 더 강렬한 소음에 뒤덮였다.
문득, 그녀는 야시경 너머로 보이는, 우악스럽게 다가오는 저 괴물의 몰골이 여기저기 파손되어 있고 비틀거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놈은 레프리콘이나 브라우니, 그리고 샌드걸만큼 운이 좋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저 덩치로 그 높은 곳에서 수많은 돌덩이들과 함께 떨어졌으니 확실히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놈은 지상에서는 마음껏 쏘아 재끼던 샷건이 망가졌는지, 그걸 쏘지 못하고 그게 달린 팔을 난폭하게 휘두르거나 총탄을 막아내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놈의 손상이 극심한 상태인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게 큰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토터스는 철충 군단의 전형적인 ‘탱커’다. 놈이 가진 외장형 반응장갑은, 비록 지하로 떨어지는 도중에 군데군데 심하게 파손된 것이 분명해 보이긴 했지만, 고작해야 놈의 다리 한 쪽 크기 정도밖에 안 되는 B급 바이오로이드 셋이 총탄을 쏘아댄다고 쉽게 뚫릴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가진 탄약을 있는 대로 쏟아부어도 비틀비틀, 비척비척, 그러나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놈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놈의 거대한 덩치가 점점 더 야시경의 시야를 메워올수록, 두 바이오로이드의 얼굴 에 절망감 - 브라우니는 애초에 그런 걸 쉽게 느끼지 못하게 설계되었다 - 이 어렸다.
마침내 놈은, 톰에게 가는 길을 가로막은 세 바이오로이드의 앞에까지 다다랐다. 놈은 주제도 모르고 자기 앞길을 막는 세 잔챙이, 그래, B급에 불과한 잡부스러기들을 치우려 팔을 휘둘렀다.
“젠장!”
“중위님! 피해요!”
“상병님! 조심하십쇼!”
확실히 토터스는 파손이 심한 상태였고 가동능력에 많은 제약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관절부가 손상되었는지 놈의 팔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래서 놈이 팔을 휘두르는 범위도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무지막지한 크기와 무게의 쇳덩이에 맞으면 몸이 안 으깨진다는 얘긴 아니었으므로 셋은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놈의 공격을 피했다. 쾅! 놈의 팔이 대지를 때리며 어둠 속에서 흙먼지와 돌조각이 흩날렸다.
“으크윽!”
“젠장! 이 씹1쌔가!”
“계속 쏘십시오!”
순식간에 토터스의 주변이 파괴된 암석과 먼지투성이 구덩이가 되었다.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는 나락 속에서, 세 바이오로이드는 흩어져 미친 듯이 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총구의 섬광을 쫒으며 난폭하게 휘둘러대는 놈의 팔다리를 피하려 애를 써 댔다.
.....당연히, 비좁은 지하통로에서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윽! 아...”
가장 먼저 브라우니가 놈의 팔에 살짝 스쳤다. 직통으로 후려맞은 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팔 무게만 수십 톤에 달할 것이 분명한 그 거대한 고철덩이는 스치기만 해도 상당한 충격을 줄 만한 운동 에너지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스치기만 했는데도 브라우니의 몸은 붕 떠서 통로 한구석에 내동댕이쳐졌다. 고통스러운 듯 온몸을 감싸안으며 웅크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브라우니!!!”
분대원을 걱정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분대장으로 설계된 레프리콘 기종에 내장된 본능적인 전투모듈이자, 또한 분대장 된 자로서 전우에 대한 당연한 책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은 악수(惡手)였다. 토터스는 어둠 속에서 레프리콘의 비명을 듣고 다음 목표를 그녀에게로 돌렸다.
“개새1끼야! 내 분대원을 건드려? 이거나 쳐먹어!”
레프리콘은 놈이 자신을 항해 그 시뻘건 눈을 돌리자 자신이 다음 목표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다음 목표가 된 것, 분노로 눈이 뒤집힌 그녀는 평소의 그녀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폭언을 내뱉고서는 미친 듯이 경기관총을 갈겨 댔다. 그러나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쏘아댔음에도, 아까 전과 같이 총탄은 놈의 외장갑을 뚫지도, 저지하지도 못했다. 놈은 귀찮은 듯이 두 번째로 팔을 휘둘렀다.
“미쳤습니까, 상병? 물러나요!”
부상당한 토터스의 팔이 느릿느릿 쇄도함에도 레프리콘이 물러나지 않자 샌드걸이 황급히 달려와 그녀를 밀쳤다. 덕분에 레프리콘은 철충의 육중한 팔에 뭉개진 고깃덩이가 되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샌드걸이 그렇게 될 위기에 처했다.
“큭!”
샌드걸은 온 힘을 다해 돌진해 오는 놈의 팔에서 벗어나려 물러섰다. 그러나 그러기엔 놈의 주먹이 더 빨랐다. 그녀는 드디어 죽음이 코앞에 도래한 것을 느꼈다. 주마등이 스친다.
‘이렇게...죽는 건가. 겨우...살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천만 다행히도 토터스의 부서진 어깨관절은 놈의 팔이 휘둘러질 수 있는 범위를 제한했다. 그래서 놈의 팔은 샌드걸의 몸에 닿는 순간 덜걱, 하고 멈춰섰다. 그러나 단지 거기서 전달되는 유휴충격만으로도 샌드걸의 육체를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저만치 나동그라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다급한 충격이 샌드걸의 전신을 엄습했다.
“으하윽!”
온 몸이 아프다. 사지가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질렀다. 죽진 않았지만 속을 온통 뒤집어 놓을 정도는 된다. 콰당 하고 땅바닥에 거칠게 나가떨어지면서 샌드걸은 속엣것이 올라올 것 같은 메스꺼운 고통을 느꼈다. 코피가 터지고 입에 피가 흐르는지 코에서는 싸한 쇠냄새가, 입에서 는 찝찔한 쇠맛이 났다.
“중위님!”
“쿨럭, 쿨럭, 케헥, 으윽, 상병이나...걱정, 크흑, 해요! 다음 거 옵니다!”
그녀는 땅에 나뒹굴며 입에 들어간 흙먼지를 토해냈다. 찝찔한 것이 피가 섞인 것 같다. 부여지는 눈앞을 어떻게든 다잡으며 샌드걸은 억지로 팔을 들어 놈을 조준했다. 팔이 달달 떨렸지만 토터스는 이 구덩이를 가득 메울 정도로 덩치가 컸으므로 조준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레프리콘을 향한 놈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키기 위해 쓰러진 상태에서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런 효익도 없을 걸 알고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놈을 막을 힘이 없지만,
제발.
“아악!”
그러나 샌드걸의 간절한 바람도 부질없이, 가까스로 토터스의 팔을 피한 레프리콘이 그러나 토터스의 무심한 발길질에 걷어차여 내동댕이쳐 나뒹구는 것을 보고 샌드걸의 눈에 절망감이 어렸다. 레프리콘은 어떻게든 피해보려 안간힘을 썼고 다행히 그 노력이 무익하진 않아 발끝에 살짝 걸리는 정도에 그쳤지만, 고작 그 정도 충격만으로도 조그마한 B급 바이오로이드에게는 치명적이었던 모양이다. 죽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꿈틀거리면서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입은 피해는 커 보였다. 무리도 아니다. 원판인 토미 워커의 다리 한 쪽조차 웬만한 바이오로이드보다 휠씬 무겁다. 걷다가 짓밟히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죽진 않았으니까. 절망감 속에서 샌드걸은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기던 손을 떨구었다.
보라. 그저 놈이 걸어나가는 발걸음에조차도 그녀들은 온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한 발악도 소용없이, 세 군용 바이오로이드는 결국 토터스에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하고 처참하게 쓰러졌다. 브라우니는 신음소리를 내며 경련했지만 뭔가 더 하기는 힘들어보였고, 레프리콘은 기절한 것인지 쓰러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샌드걸은 토터스가 무력화된 두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관심조차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며 심한 무력감과 절망감에 몸부림쳐야 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나락 속에서 허우적댔다.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길은 희망을 보여주었다가 희망이 코 앞에 다다랐을 때 그걸 짓밟아 버리는 것이라 했던가. 아자젤이여, 신이 있다면, 이게 신의 취미라면,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약한 자는 부질없는 희망에 몸부림치다가 그저 죽기만 해야 하는가.
결국, 우리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건가.
아무리, 아무리 발버둥쳐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우리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우리가, 약하디 약한 B급만 아니었더라면.
우리에게,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토터스가 통로 한복판에 나가떨어진 채 쓰러져 있는 샌드걸에게까지 다다랐다. 놈은 잠깐 그녀를 쳐다보다가 곧 신경을 끄고 무심하게 전진을 계속했다. 아마 더 이상 위협이 되는 존재도 아니고 하니 그냥 짓밟아 뭉개고 지나가 버리려는 것이리라. 여기까지구나. 샌드걸은 눈을 감았다.
“어, 언니에게 손대지 마!”
눈을 감은 샌드걸의 귀에 작고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뭔가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자그마한 아쿠아의 체구가 거대한 토터스 앞을 가로막은 것이 보였다.
“아쿠아...? 위험합니다! 피하세요!”
“어디로?”
“,......”
샌드걸은 할 말을 잃었다.
앞에는 토터스, 뒤에는 톰이 파고 있는 가로막힌 벽. 그것이 지금 아쿠아에게 주어진 공간의 전부였다. 다시 한번, 그녀는 자신들의 무능과 무력을 자책했다. 이 비좁은 공간을 주려고 그녀들이 이 아이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란 말인가? 이것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버린 아이에게 그녀들이 대신 건네준 것인가?
“어차피 난 이제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
아쿠아의 작은 몸이 달달 떨리는 것이 보였다.
“백 년도 넘게 여기 있었어.”
바이오로이드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음에도 토터스는 어디 한 번 떠들어 보라는 듯이 아쿠아를 내려다보았다.
“외로웠어. 추웠어. 무서웠어”
“......”
철충은 표정을 지을 수 없지만, 어쩐지 샌드걸은 놈이 그녀들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능멸하는 것 같았다.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녀들의 나약함을, 그녀들의 헛된 발악을.
“그러다, 이제야, 이제야 겨우,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
“하지만, 만약, 그게, 그저 한낱 꿈이었다면...”
그녀는 목이 메인 채 토터스에게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이제 난 아무것도 잃을 것 없어.”
놈이 발을 들어올렸다. 아마 샌드걸과 아쿠아를 한 번에 밟아 빈대떡으로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아쿠아는 쓰러진 샌드걸을 끌어안았다. 낑낑대면서 샌드걸을 토터스의 발이 떨어질 자리에서 밀어내려는 것 같았지만 그녀 자신도 샌드걸도 그게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았다.
“미안해, 언니, 아무것도 못해줘서...”
아니오, 내가 미안합니다. 샌드걸은 차마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입 속에서 조금 전의 욕지기가 치어올라오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우리에게, 우리에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무지막지한 힘이 휘두른 콘크리트 기둥에 토터스의 전면이 찌그러졌다.
놈이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휘청했다.
“조용히 하세욧”
일순 균형을 잃은 놈의 머리 위로 두 번째 타격이 내리찍었다. 토터스는 불시의 기습에 뒤로 뒷걸음질키며 와당탕 주저앉았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위로 음산한 기계음이 울렸다.
“아직 이백 살도 안 된 어린 여자아이. 손 대려 함. 여기. 놀이동산 C구역 아님. 료나. 구로. 로리콘. 페도필리아. 그야말로 개-노답.”
그리고 톰은 마치 몽둥이의 재질을 시험해 보려는 듯이 방금 휘두른 콘크리트 기둥 - 브라우니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그 기둥 -을 오른팔에 달린 드릴에 탕탕 두드렸다.
“역사적으로도 이게 약이었음”
샌드걸과 아쿠아는 황망한 표정으로 톰을 돌아보았다.
“톰? 언제 왔습니까?”
“음성 인식 모듈 해제로 주변 상황 인식 지연. 연료 떨어져서 보급 요청하려 시야 모듈 뒤로 돌림. 돌려보니 다들 널브러져 쳐자고 있음. 노예들. 아무 짝에도 쓸데없음.”
톰은 무미건조한 기계음으로 으르렁거렸다.
“아이랑 놀아주는 것도 제대로 못 함? 등짝 스매시 필수.”
‘아니, 그게 말이 되는 비난입니까? 이게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습니까’라고 변명할 힘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토터스가 다시 우직스럽게 일어나서 붉은 눈을 번득인 탓이다.
“역사적 약, 부족함?”
톰은 기계적으로 응답하며 기둥을 들어올렸다. 톰보다 배는 더 큰 토터스의 덩치가 그것을 덮쳐 왔다.
“아쿠아, 피하십시오!”
샌드걸은 두 거수들의 싸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아쿠아의 손을 잡아끌며 뒤로 물러났다. 물러난다고 해봤자 벽면에 찰싹 달라붙어 웅크리는 것이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희망적이지 못한 것은, 톰이 토터스를 이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그녀의 분석 모듈이 전하는 엄격한 판단이었다. 톰은 노련하게 토터스와 거리를 유지하며 기둥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공간은 협소하고 톰이 물러날 곳은 한정되어 있다. 빌어먹을 냉철함, 빌어먹을 합리적 판단. 빌어먹을 희망조차도 못 갖게 하는 빌어먹을 염세주의.
“오래 못 버팀. 바이오로이드 샌드걸, 대책을 강구할 것”
어떻게? 여기서? 무슨 대책을? 그녀의 그 잘난 합리성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합리성과 분석력의 극한을 달리는 그녀 부대의 지휘관기나 아르망 정도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길을 찾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샌드걸의 합리성은 어디까지나 그 지독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서 부차적으로 얻어진 것일 뿐이다. 레오나나 아르망만큼의 고도의 예측은 불가능하다. 단 하나 예측할 수 있는 거라면, 앞에 남은 것은 절망뿐이라는 결과다.
철충에 감염된 AGS는 원본보다도 훨씬 더 강해진다. 그리고 아쿠아가 톰의 출력이 원본에 못지않다고 자랑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본에 ‘버금간다’는 것이지 더 강하다는 얘긴 아니다. 아무리 부상과 파손이 극심하다곤 해도 원본 토미워커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보유한 철충 감염체다. 원본 토미 워커보다도 힘이 부족한 톰 앞에 무게도 덩치도 두 배인 토터스와 맞서 이기라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다. 원본보다 체급이 절반밖에 안 되는 톰에게는 애초에 승산이 너무 없었다. 체급의 차이는 절대적이고, 힘의 차이도 절대적이다. 더구나 아까 톰이 말하지 않았던가. 연료가 거의 떨어졌다고.
샌드걸은 톰이 단지 시간만 벌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으으으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흙투성이가 된 레프리콘은 고개를 들었다. 사지가 부서진 듯이 아프고 감각이 없어서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토터스에게 후려맞아 팔다리가 날아갔거나 반신불수가 된 줄 알았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너무 지치고 피곤한지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전투의 열기가 가시고 무관심 속에 버려진 패배자의 고요함만이 남자 지하의 으스스한 추위가 느껴졌다.
토터스가 그녀들을 무시하고 - 아마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신음소리를 내며 꿈틀대던 브라우니도 이젠 미동도 없이 엎어져 있으니까 - 지나간 덕에 이제 레프리콘은 톰과 맞서는 놈의 뒤통수를 볼 수 있었다. 두 거대한 고철덩이의 싸움의 진행상황은 바이오로이드 측에 그렇게 희망적이진 않아 보였다. 톰은, 비록 노련하게 괴물과 거리를 두며 버티고 있었지만, 점점 밀리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놈의 후방장갑이 특히나 심하게 부서지고 파손되어 금이 가고 장갑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떨어질 때 등부터 떨어진 모양이군, 인간님들의 기갑장비도 그렇지만 원래 장갑병기는 후면장갑은 얇게 설계되는 법이다. 철충도 다르지 않다. 온 몸에 힘이 없어서 이렇게 전투모듈에 저장된 부질없는 군사지식이나 떠올리며 레프리콘은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레프리콘은 바닥에서 뭔가 반짝이는 자그마한 금속성 물체를 발견했다. 라이터였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마크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샌드걸의 것임이 분명했다. 토터스에게 맞아 나가떨어지면서 흘린 모양이다.
‘그러보고니 담배 피우고 싶어하셨지’
래프리콘은 샌드걸이 담배를 피우면서 죽고 싶다고 한 말, 그리고 그녀가 지하 창고에서 담배를 찾아다녔던 사실을 기억했다. 유감입니다, 중위님. 결국 마지막까지 못 피우시겠네요.
그 한 켠에서, 놈이 무심히 지나치고 간, 그녀들이 톰에게 운반해주기 위해 연료통과 축전지들을 싣고 온 급조한 수레가 보였다. 추운 와중에 아까웠다. 저 연료 조금 덜어내서 라이터로 불붙이면 잘 탈 텐데.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따뜻했으면....
그 때, 레프리콘의 뇌리에 뭔가가 떠올랐다.
...
아니, 안 돼. 레프리콘. 도박에 가까운 짓이야.
이 지하에서 그런 짓이라니, 워울프라도 안 할 위험한 짓거리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토터스 주먹에 박살난 브라우니쯤 아니면 아무도 동참 안 할 미친 짓이라니까...아, 마침 저기 하나 있긴 하지만.
하지만, 그게 통하기만 한다면.
"으으으윽"
그녀는 온 힘을 쥐어짜 겨우겨우 일어났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크게 말할 힘도 없었다.
“브라우니...살아 있나요”
어둠 속에서 브라우니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둘 다 흙먼지와 찢어진 전투복, 여기저기 뒹굴고 부딫히느라 까진 상처와 멍투성이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안, 죽었군요, 브라우니.”
“헤헤, 콜록, 원래 브라우니는 튼튼하게 만들어졌지 말임다. 체력 하나는 자신있슴다”
그렇다. 원래 브라우니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게 브라우니다. 이 지하에 떨어져서 샌드걸과 논쟁하던 게 생각나 레프리콘은 웃었다.
“에, 상병님, 왜 웃으심까? 혹시 미치신 검까?”
이 생각 없이 말 찍찍 내뱉는 정신머리까지 브라우니 그대로다. 그래도 이번엔 레프리콘은 그녀의 분대원의 등짝을 때리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물었다.
“브라우니, 포기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저한테서 그거 빼면 남는 거 없슴다”
“바보짓이라도 할 준비 되었나요?”
“헤, 그게 스틸라인 아님까?”
“진짜, 진짜 바보짓이에요. 위험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그냥 미친 짓이에요”
“? 언제는 우리가 그런 거 신경 쓰고 굴렀슴까?”
레프리콘은 더 크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그게 스틸라인이다. 브라우니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듯이, 스틸라인도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바보들인 집단이다. 그녀 자신도 포함해서.
“좋습니다, 브라우니 418번. 그럼...”
그녀는 땅에 떨어진 자신의 경기관총을 주워들었다.
“...우리, 서서 죽으러 가볼까요.”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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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죽는다! Erecting Death! 어...브라우니, 그거 아니거든요? | 20.10.18 19:0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