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망.”
“네, 폐하.”
아르망은 맑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안도와 평온이 깃든 그 눈빛. 연분홍빛 애정이 담뿍 담긴, 문자 그대로 소녀의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미안했어.”
“미안한 줄은 아시나 보네요?”
“알기만 하겠니. 아주 뼈저리게 느꼈지.”
“…….”
아르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노려봤지만 그 이상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무릎 위에 올린 내 손을 가만가만 쓰다듬다가 어쩔 수 없다는 양 한숨 한번 푹 쉴 뿐이었다.
“흥, 정말 마지막 순간에만 감이 좋으시다니까.”
뒤이어 아르망은 그 한숨 한 번으로 모든 감정을 정리하겠다는 듯 나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하지만 용서해드릴게요. 어쨌든 폐하께서도 열심히 노력하셨으니까. 이제 용 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저도 이제부터 폐하 곁에서 보필해드리고 싶어요.”
한시름 놨다는 듯 내 손을 쓰다듬으며, 아르망은 그렇게 말했다.
나를 용서해준다고 말했다. 이제 남은 건 용이 아르망을 허락하는 일뿐.
그런데 왜일까.
아주 얇은 정적이,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이 나와 아르망 사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으로 따진다면 채 5초도 안 될 듯한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리들 주변의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비틀리고 있었다.
이제 문제는 다 해결이 된 것처럼 보였다. 용은 내게 다시 마음을 열어줬고, 아르망은 그런 용만 허락해준다면 내 곁에 있겠다고 했다. 문제가 될 건 하나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게 바로 문제였다.
나는 아르망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우리들의 문제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직 여기서 끝내선 안 됐다.
“아르망.”
“네?”
“미안해.”
아까와 똑같은 사과의 말. 아르망은 그 말을 듣고선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디 머리라도 세게 부딪혔나, 꼭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기, 용서해드린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니 그게, 혹시 너무 건방졌나요? 죄송해요, 폐하. 분위기를 타서 그만…….”
“…미안해.”
아니.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다.
아르망은 아직 날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아르망의 모습은 가면이었고, 연기였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용서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참고 있는 것일 뿐, 아르망이 날 용서했을 리가 없었다. 방금의 행동도 아르망에게 있어서는 배신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용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행동, 그 자체가 이미 아르망에겐 절망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내가 잘못했어.”
“…….”
그러니 사과해야 한다.
그게 비록 아르망이 가장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해도, 나는 그 상처를 헤집어야 했다. 넘어갈 수 없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아르망이 넘어가자고 해서 그냥 넘어가 버린다면 편하겠지. 하지만 그런 비열한 녀석이 되긴 싫었다. 아르망의 사랑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난 널 두 번째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르망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용의 허락을 받는 거랑은 별개야. 물론 용에게 우리들의 관계를 인정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널 용의 대체품 정도로 본다는 말은 결단코 아냐. 절대로.”
어쩌면 다 꺼진 불에 다시 기름을 들이붓는 말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용은 반대쪽에서 내 손을 가만히 어루만져 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용에 대한 마음만큼이나 아르망을 아낀다는, 그런 내 마음이 전해진 걸까? 그건 모르겠다. 다만 그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고 그저 마음속으로 바랐다.
“폐하, 용 님과 화해하신 지 지금 채 3분도 안 지났어요. 그런데 또 그런 못된 말만 골라서 하시게요?”
“지금 이 자리가 우리들의 문제를 그냥 편하게 넘어가자는 자리는 아니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난 요령 있게 잘 말하는 방법 모르고, 그래 봤자 너희들 손바닥 안이야. 그러니까 뭐가 되든 내 진심만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그러고 싶어. 그러니까 아르망, 다시 한번 말할게. 넌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네에, 네. 저도 폐하가 제일 소중해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시고 제가 제일 사랑하는 분이세요. 이제 됐죠?”
아르망은 건성인 양, 아니면 내 입을 빠르게 막으려는 양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그냥 넘어가 달라는 것만 같이 들렸다.
그냥 넘어가라고, 더는 괴롭기 싫다고, 이 지긋지긋한 시간을 끝내고 싶다고.
“아르망, 네가 내 첫 번째야.”
그런데도 나는 아르망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정말 나는 이럴 때도……. 이럴 때조차도 빌어먹을 정도로 요령 없는 놈이었다.
“너도, 용도 내겐 전부 첫 번째야. 둘 다 내겐 너무 소중해.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난 안 돼. 그러니…….”
“그만.”
서슬 퍼런 목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아르망이었다. 그녀는 미소조차도 짓고 있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애정 듬뿍 담긴 시선도, 곤란한 표정도, 그리고 어이없다는 표정도 모조리 없었다. 거기 남은 건 냉기가 훅 끼칠 것만 같은 차갑디 차가운 무표정뿐이었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속아드릴 테니까, 그 이상 말하지 마세요.”
차갑게 내뱉은 그 한마디는 아르망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조금 전과 다른 부분이라면, 이번에는 그 말을 하면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짓말 아냐.”
“아뇨, 거짓말이에요.”
나는 아르망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내겐 그 시선을 피할 자격 따윈 없었으니까. 하지만 각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망의 눈빛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의 냉기를 뿜고 있었다.
차갑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 미동도 없이 나를 향해 똑바로 고정된 눈동자.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아르망은, 그때 이후로 계속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넌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폐하는 거짓말쟁이에요. 지독하고 비열한 거짓말쟁이.”
연기라는 이름의, 배우라는 이름의 가면을 벗은 아르망은 내게 소름 끼칠 정도의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독하고 비열하다고 할 때는 그 한 글자 한 글자를 마치 씹어 뱉듯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어떤 말을 하시든 다 믿을게요. 지금 여기서, 제게 하는 모든 말을 다 진실이라고 믿을게요. 그러니 제발 그냥 이 시간을 끝내요. 저, 어떤 일이 있어도 폐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이제 제발 그만 절 괴롭히세요.”
“…….”
아르망이 왜 이러는지 안다.
이미 아르망은, 내가 용에게 먼저 말을 건 때부터 좌절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은 영원한 두 번째밖에 안 된다고 좌절했을 테고, 그런 와중에 자기는 내 두 번째가 아니란 말은 그야말로 지독한 위선으로밖에 안 들렸겠지.
…마음이 약해진다.
나를 바라보는 아르망의 시선 속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하자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 아르망이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아르망을 괴롭히는 게 바로 나라는 사실이, 정말 구역질이 날 만큼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으득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이를 짓씹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핏내가 입안을 타고 목구멍으로 흘러내렸다. 난 그럴 수 없었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르망.”
“…넘어가 드리려고 하잖아요.”
으직, 하고 손등이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고통이 찾아왔다. 내 손을 얼마나 세게 잡고 있는지, 아르망의 손톱은 내 손등을 깊이 찌르고 있었다. 그것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르망은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넌 내 두 번째가 아냐.”
“…그만하세요.”
“아니, 언제까지고 말할 수 있어. 넌 두 번째 따위가 아냐. 절대로.”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아르망은 울부짖었다.
“그만, 그만, 그만! 그딴 동정 따위 지긋지긋해! 나, 다른 누가 뒤에서 욕을 하건 침을 뱉건 아무런 상관도 없어! 맞는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폐하께서, 당신에게만큼은 동정받고 싶지 않아! 그것만큼은 죽는 것보다도 싫단 말이야!”
차갑고도 차가운 분노. 눈물마저 나오지 않는, 타다 못해 까맣게 메말라버린 마음. 입술을 짓씹으며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내려는 아르망의 몸을 가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흑, 끄흑, 아흑…….”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동정 따위가 아니라고, 지금 이 순간을 넘어가려고 하는 빈말 따위가 아니라고, 온전한 내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진심을 전하기에는 우리 사이에 펼쳐진 황야가 너무나도 넓었다. 지금, 이렇게 손을 마주 잡고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음에도 나와 아르망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다.
“폐하께선 절 사랑하세요?”
“…그래.”
“그럼 제게 말씀해주세요. 넌 두 번째라고. 그럼 저, 기쁘게 믿을게요. 절대 폐하와 용 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가끔씩 절 돌아봐 주시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정말, 저는 그것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충분해요. 그러니 제발, 그 한마디만 해주세요. 절 이제 그만 편하게 해주세요.”
“…….”
하지만 걸어가야 했다. 그 황야가 아무리 춥고 외롭다고 할지라도.
아르망은 분명, 내게 있어 그 이상 가는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그럴 수 없어.”
“흑, 제발, 아아, 제발, 제발……!”
차가운 눈동자에 습기가 어렸고, 그럴수록 아르망의 손톱은 내 손등을 깊이 파고들었다.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팠다. 하지만 아프다는 말 따윌 꺼낼 자격 같은 건 나한텐 없었다. 지금 아르망이 느끼고 있을 아픔과 절망은 고작 손등의 생채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닐 테니까. 내 눈앞의 이 여린 소녀가, 피 끓는 듯한 서러움을 속으로 애써 삭이려다 끝내 터뜨리고 있었다.
나 때문에, 슬퍼하고 있었다.
“…….”
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자신과 말할 때 아르망이 아무 말도 끼어들지 않았던 것처럼, 용도 나와 아르망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아니, 끼지 못했다. 내가 용서받기 전까진 우리는 결코 우리라 할 수 없었다. 용과 나, 그리고 아르망이 있거나……. 아르망과 나, 그리고 용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경계를 허물 수 있는 건 오로지 내게 달려 있었다.
“아르망, 정말 내가 그렇게 말해주면 네가 편해질 것 같아?”
“…네에, 폐하. 전 기쁘게 받아들일 거예요.”
아르망은 절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어둠 속에서 빛을 본 안도의 표정이 아니라,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허무함 그 자체였다.
“그런 식으로 넘어가서,”
내 목소리가 드물게 높아졌다. 차마 화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아르망의 그런 말은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행복해하는 척을 하면 내가 기뻐할 거라 생각해? 정말 그게 우리들의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해?”
“잘 해낼 자신 있어요. 저 잘 해낼게요. 저 아르망이에요, 폐하. 덴세츠에서 제일 가는 배우. 불세출의 악역. 천의 얼굴을 가진 모사꾼. 그게 저라고요.”
“아르망!”
“제가 지금 제일 고통스러운 게 뭔지 아세요?”
아르망은 맥없이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손톱자국이 난 손등을 훑으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날 밤을 후회하고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네, 그날 밤. 제가 폐하께 고백하고, 몸을 섞었던 바로 그날 밤 말이에요. 폐하께 안기던 감촉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러면서도, 그 한순간의 자제력이 없어서 이런 미래를 맞이했다는 게, 이런 미래를 예지하지 못했다는 게 견딜 수 없이 후회스러워요. 그 그립고도 사랑스러운 기억이 후회스럽단 말이에요.”
“네가 그날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난 계속해서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을 거야. 미안해, 아르망. 다시 네 사랑에 기대고 말았어. 난……. 구제 불능의 얼간이야.”
“폐하가 미워요.”
아르망은 흐느끼며 탄식했다.
“폐하가 미워요. 정말 너무너무 미워요. 세상에서 제일 미워요.”
“미안해.”
“그렇게 금방 사과하는 것도 미워요.”
“…….”
“그냥 마음 편하게 폐하를 사랑하고 싶었어요. 차라리 제가 부관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저 멀리서 폐하를 가끔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모르겠어요, 폐하. 이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어떤 행동 때문에 이런 미래가 다가온 건지 연산조차 되지 않아요. 이제 싫어요, 너무 힘들어요…….”
흐느끼는 아르망의 얼굴을 조심스레 만졌다. 아르망은 흐느꼈지만 내 손길을 뿌리치진 않았다.
“나는 그 폐허 속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두 번 구원받은 적이 있어.
“…….”
“한 번은 너였고, 그다음은 용이었어. 그러니까 난 너희 둘을 포기할 수 없어. 너희들을 포기한다는 건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을 부정한다는 거니까. 그것만큼은, 나도 물러설 수 없어.”
나는 계속해서 아르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첫 번째나 두 번째 따위가 아냐. 너도 내 반쪽이고, 용도 내 반쪽이야. 오른손과 왼손에 순서가 없는 것처럼, 너희 둘 모두가 내 소중한 사람들이야. 난 너에 대한 사랑이 용에 대한 사랑보다 낮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널 용의 대체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넌 날 구원해줬으니까. 내가 가장 힘들 때 내 앞에서 날 이끌어줬으니까.”
“또 그 테마파크 때요?”
“그래. 그 테마파크 때야.”
“고작 제가 폐하의 앞을 가로막은 적이 있단 것 때문에요?”
“나한텐, 고작이 아니었어.”
내 앞을 막아서던 아르망의 모습. 그 모습은 지금도 내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단단히 새겨져 있었다.
[안 돼요, 폐하!]
내 앞을 가로막던 작은 소녀.
[들어가셔선 안 돼요. 제발, 제발 물러나 주세요.]
아무리 내가 용인해줬다고는 하나, 내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이었겠지.
[입력받았던 페하의 데이터, 성품, 그리고 제가 보고 느낀 폐하의 모습. 폐하께선 저 안에 들어가시면 안 돼요. 분명, 분명히 상처 입으실 거예요.]
눈동자는 초점이 안 맞고, 팔다리는 가여울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르망은 내 앞을 막아섰다.
[폐하께서 저 원죄를 짊어지실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요. 조금만 눈길을 돌리시면 돼요. 기록으로 남겨뒀다가, 언젠가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보시면 돼요. 굳이 이렇게, 잔인하게 자신을 채찍질할 필요는 없어요, 폐하!]
자신을 채찍질하며 내 앞을 막아서는 소녀에게, 나 자신을 함부로 굴리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녀는 안다. 그 어둠을, 그 너머에 있는 어둠이 얼마나 깊은지 안다.
도망칠 수 있었다. 사실 도망치려면 수십 번도 더 도망칠 수 있었다. 아무도 내게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일인가.
이 작은 소녀도, 있는 힘껏 나를 위해 자신의 본능까지 거스르며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들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주제에 마지막 인류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배려심 뒤에 숨으면 될 일인가? 아니,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부끄러운 인간이 되기 싫었어. 적어도 네 앞에서는.”
“왜요?”
“아마, 그때부터 널 사랑했으니까.”
“…….”
“첫눈에 반했었어. 지금 와서 말하는 거라 믿어줄진 모르겠지만.”
너무 내 대답이 직설적이었던 모양인지, 아르망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실 죽을 만큼 부끄럽고 옆에 있는 용이 신경도 쓰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르망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난 그때 너에게 구원받았어.”
“그럼 폐하는, 폐하가 힘들 때 그저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면 누구라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계기는 될 수 있겠지.”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랑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내가 오르카의 모든 부대원들에게 느끼는 사랑과, 너와 용에게 느끼는 사랑이 다른 것처럼.”
“…그럼 저를, 왜 그때부터 사랑하셨는데요?”
“어둠 속에서 널 생각했어. 그래서 견딜 수 있었어.”
과거 인간들이 저질렀던 죄악. 그 흔적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심연.
한쪽은 웃음과 희망이 가득한 축제의 장, 다른 한쪽은 절망과 고통이 가득한 악의의 끄트머리.
심지어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봤던 곳은 겨우 빙산의 일각조차도 안 되는 곳. 멸망 전 인류의 죄악은 ‘한낱’ 이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그 모든 것이 어둠이 되어 내 목을 졸랐다.
그 속에서 난 나올 수 없었다. 난 그 속에서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있었다.
날 막아서는 그녀가 있었다. 날 막아섰다가, 날 믿고 길을 비켜 준 그녀가 있었다. 내가 돌아오리라 믿었고, 내가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 소녀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움직였다.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낼 듯한 죄악감도, 눈을 돌리고 싶은 두려움도 참고 그 모든 것을 내 두 눈과 머릿속에 똑똑히 새겼다. 그리고 그 어둠 속을 나와 다시 돌아왔을 땐…….
[오셨군요, 폐하.]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 네가 있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등지고, 여명으로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 맺힌 눈으로 날 보면서도, 반드시 내가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는 듯 두 손을 꼭 모으고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세상에 천사나 신이 있다면, 그런 모습일 거라 생각했어.”
아직도 뇌리에 또렷하게 박혀 있는 그때의 기억. 나를 막아섰고, 내가 그 테마파크의 구렁텅이 속에서 나올 때 가장 먼저 날 맞이해줬던 소녀. 새벽녘의 햇살로 빛나는 금발, 나를 바라보며 안심한 듯 살짝 눈물 맺힌 눈으로 미소 짓던 그 소녀의 모습.
“그 어둠 속에서 처음 나왔을 때 네가 기다리고 있었어. 햇살 속에서 기다리는 네 모습이 보였어. 아름다웠어. 그냥, 그냥…….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 나를 기다려주는 네 모습이, 그저 아름다워서, 그렇게 언제까지라도 보고 싶었어.”
아르망. 내 구원자.
“아침 햇살이…그 여명의 빛이, 마치 등불처럼 네 등 뒤에서부터 밝아오고 있었어. 그 속에서 네가 내게 손을 내밀어주고 있었어. 너의 모습, 너의 미소……. 그건 내게 있어선 구원이었어. 꼴사납게 기어 나온 내 모습에 비하면…….”
“폐하는 꼴사납지 않으셨어요.”
아르망은 단호한 표정으로 내 말을 잘랐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참, 그랬지. 아르망은 누가 나를 욕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그게 설령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역경과 어둠을 마주할 때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어요. 구태여 손 댈 필요가 없는 죄악에서 눈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페하께선,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으셨어요. 자신의 의지로 역경과 어둠을 마주하셨고, 그 속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으셨고, 그리고 당당히 귀환하셨어요.”
아르망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그 손길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어라, 눈물? 하지만 지금 울고 있는 건 아르망인데…….
“아…….”
“폐하는 기어 나오지 않으셨어요. 당당히, 어둠과 역경을 극복한 기사처럼 걸어 나오셨어요. 제가 폐하의 구원자라고요? 아니, 아니에요. 폐하야말로 제 구원자셨어요. 저야말로 그때, 구원받았단 말이에요!”
아아, 그렇구나.
울고 있던 건 아르망뿐만이 아니었던 거구나.
“스스로 상처를 짊어지시고, 그 상처를 견디며 나아가겠다는 그런 분을 모실 수 있다는 게 제겐 영광이었어요. 이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어느 날 끝이 온다면 제 목숨을 살라서라도 이분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르망은 울먹이면서도 계속해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손끝에서, 그녀의 감정이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하나 남은 손을 들어 아르망의 얼굴을 만졌다.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내 거친 손바닥의 감촉을 음미하듯, 내 손에 더욱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은, 살고 싶어요. 페하의 옆에서 내일의 빛을 보고 싶어요. 폐하의 앞길을 비춰 드리고 싶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서, 그렇게 살아남아서 폐하의 곁에 있고 싶어요.”
“아르망…….”
“사랑해요, 폐하.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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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조절 대실패로 약 3~4화 정도 더 추가 예정입니다....
이러다 100장 채우것네
이제 다 왔습니다
으아 이제 다 왔다!
정말 이제 다 왔다!
아 여담으로...회상 씬에서 아르망이 사령관을 가로막을 때의 포즈는
대충 뭐 이렇다고 생각해주심 됩니다. 사실 중간에 넣으려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소전 콜라보 스킨 나오면 뻘쭘할 거 같아서 뒤로 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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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지금 아르망과 용의 감정선이 납득이 가게끔 쓴다고 쓰고 있긴 한데 이게 다른 분들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네요. 괜찮나요? | 22.05.20 13: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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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되고 공감합니다. 늘 재밌게 읽고 있어요. 군인으로서의 무용과 여자로서의 무용간에 갈등, 상대적으로 어린 신체나이 컴플렉스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아르망 둘 다 인상깊게 보고있습니다. 무용과 아르망 둘 다 잘 극복할수있을거라 생각하고요. | 22.05.20 14: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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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지는 만큼 꼬일 가능성이 높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아무튼 둘 다 잘 극복할 겁니다. | 22.05.20 14: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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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 이야기 진지하게보다가 마지막 가로막는 포즈가 상상하니 너무 귀여워서 피식했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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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선 가장 처절한 장면 중 하나지만요 ㅜ | 22.05.21 20: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