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메인 스토리 누설이 있습니다.
이곳, 림사 로민사에서는 속이 새카만 놈일수록 하얗게 있다. 그것이 가장 거리에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너는 태어날 때부터 악당이란 거다 ──
아직 천진난만함이 남아있는 어린 산크레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남자는 토해내듯이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혈연이 아니다.
철이 들기 전에 부모에게 버려져 길가에서 자란 소년과, 이를 헐값에 고용해 나쁜 짓에 써먹는 상인... 그뿐인 관계다.
시대는 아직 멜위브의 해적 금지령이 선포되기 전.
강한 것이 사는 방식인 바다도시에서 상인을 노려보며 말없이 참는 소년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악랄한 고용주가 있다면, 약간 나은 고용주도 있다. 간단한 일로 좋아하다가 나중엔 호된 꼴을 보기도 했다.
아무튼 일이 끝나면 아무 관계도 아니다... 그런 관계를 쌓으면서 산크레드는 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월등한 솜씨와 가벼운 몸놀림, 재치도 잘 이용해 어느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그중에서도 해적조차 두려워하는 '규정'의 파수꾼인 도둑 길드와 잘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도와주기도 했지만 몸을 담진 않았다.
그들 속에서 조용히 불타오르는, 긍지와 같은 것을 산크레드와 나누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표류에 가까운 생활은 갑작스럽게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산크레드는 그날, 해양 항로선의 입항으로 흥청거리는 부두에서 한몫하려고 했다.
요컨대 절도다.
그리고 잘 사는 듯한 노인의 화물을 손에 넣...으려고 했지만, 도리어 당했다.
마법으로 손발의 자유를 빼앗겨 하얀 돌바닥에 넘어지면서 관청에 넘겨질 것을 각오하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노인은 사람을 부르기는커녕 모이기 시작한 구경꾼들을 해산시키고는 매우 다정하게 말을 건 것이 아닌가.
[내 이름은 루이수아 르베유르. 지식도시 샬레이안에서 연구를 위해 여기에 왔다네. 네 이름은 뭔가?]
[...산크레드.]
[성은? 가족은 어쨌나.]
[없어... 몰라...]
루이수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밝혀낸 것처럼 침착하면서도 진지한 모습으로 산크레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천성적인 가벼운 몸놀림과 재능을 자기가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써라 ──
그것이야말로 언젠가 산크레드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산크레드는 조용히 있었지만, 그 찌푸린 얼굴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란 곤혹감이 엿보였다.
루이수아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놀라운 제안을 했다.
샬레이안으로 가서 재능을,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배우자고 ──
이렇게 산크레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루이수아는 그에게 '워터스'란 성을 붙였다. 강과 지식을 관장하는 다리악을 수호신으로 하는 샬레이안은 물을 지식의 상징으로 본다.
산크레드가 여기서 많은 배움을 얻길 바란다는, 루이수아다운 배려일 것이다.
동시에 그는 산크레드를 첩보활동의 명수에게 맡겼다.
끝없는 지식 습득이 이어지는 샬레이안 본국에서는 첩보 기술 또한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이 길이라면 산크레드의 재능을 살릴 수 있을 것이 분명할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산크레드는 빠르게 자신의 입장과 해야할 것을 살피고 열심히 배웠다.
은밀 행동을 위한 몸놀림은 물론, 어떤 환경에서도 잠입할 수 있도록 행동이나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데로 익혔다.
그에게서 바다도시의 길거리에 살던 소년의 그림자가 지워지고 어디든지 잠입할 수 있는 유랑 청년이 될 때까지 그렇게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 목 부근에는 탁월한 기능을 인정받은 '현자'가 되었다는 증거로 문신이 새겨졌다.
오랜만에 만난 루이수아는 이를 매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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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실리아'라고 불렀던 소녀와 만났던 것이 마침 그때였다.
루이수아가 결성한 '구세시맹'에 가입한 산크레드는 에오르제아의 스며들어온 전란의 전조를 알고 밀명으로 울다하에 갔다.
표면상으로 검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온 것이지만, 실제로는 야만신에 대한 지식을 교섭 재료로 하여 나라의 중추에 다가가,
급속도로 국력을 강화하는 갈레말 제국에 대한 대책을 묻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때에 일어난 비참한 '사고'로 인해, 산크레드의 눈 앞에서 그 소녀는 천애고아의 몸이 되어버렸다.
그때 ── 아버지의 유해에 매달리며 필사적으로 소리치는 아실리아를 봤을 때의 기분을 간결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한때의 자신과 닮은 환경에 떨어져 버린 소녀가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형용할 수 없는 그 기분은, 하나의 말이 되어 쏟아졌다.
'지킬 수 없었다'란 원통함이었다.
하지만 아실리아는 다행히도 프 라민이라는 보호자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외부자인 산크레드가 지켜볼 이유는 없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제국군의 이중 스파이였던 사실이
발각되어 조금 더 상태를 보기로 했다 ── 적어도 당시의 산크레드는 그렇게 이유를 댔다.
물론 우선해야 할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지만, 울다하에 있을 때는 시간을 내어 만나거나 그녀가 뒤숭숭한 사건에 연루되지 않도록
미리 '곤란한 녀석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게 거리의 양아치 정도라면 다행이지만, 부친에게서 이어진 인연인지 제국의 스파이가
그녀의 주변에서 보일 때는 식은땀이 흘렀다. 산크레드는 아실리아에게 지금은 가명을 써서 살아가자고 제안했다.
이제부터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 그녀의 머리색과 같은 밝은 내일을 향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는 게 좋다.
아실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납득했는지 [...어떤 이름이 좋을까?]라며 산크레드에게 물었다.
산크레드는 잠시 입을 다물다 '민필리아'라는 하이랜더로서는 평범하지만 그렇게 뻔하지는 않은 이름을 댔다.
루이수아가 준 성처럼 기분 좋은 의미가 담기지는 않았지만, 사시사철 곁에는 있지 않을 자신을 대신해 그녀를 지켜주길 바란다는 소원을 담았다.
아실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 이름을 받았다.
어느 새벽, 정보 수집 겸 주점으로 향하려던 산크레드는 어두워지는 울다하의 거리를 걷는 민필리아를 발견했다.
곡괭이를 등에 맨 걸 보아 채굴 작업을 하고 돌아온 것이겠지.
[무슨 일이야, 민필리아. 평소라면 좀 더 빨리 마쳤을 텐데.]
[어머, 산크레드. 오늘은 약간 문제가 있어서... 늦어버렸네.]
어깨를 움츠리는 민필리아에게 [데려다 줄게]라고 말하고는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민필리아와 프 라민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은 그렇게 멀지 않아,
오늘 일어난 문제 등의 전말을 듣거나 최근 들은 하찮은 소문으로 웃는 동안 벌써 도착해버렸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이제 마시러 갈 거지? 너무 취하면 안 돼. 바로 여자한테 손을 대니까...]
[네 네... 가슴에 분명하게 새기도록 할게.]
산크레드의 대충 던진 대답에 민필리아는 [정말!]이라 말하며 삐치고는 집의 문을 열었다.
집 안의 따뜻한 등불의 빛이 퍼져 산크레드와 어두운 길을 밝혔다.
민필리아는 손을 흔들면서 그 빛 속으로 녹아들어 ── 찰나의 광경을 찢듯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곧 문 너머 목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어!] [어머, 다녀왔니.]
어둠이 돌아온 길에서 산크레드는 조용히 숨을 쉬었다.
그 모습의 반은 어둠에 녹아 표정을 엿볼 수 없다.
다만 그는 우물쭈물하며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문의 저편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역할은 제대로 그녀를 집으로 보내는 것이다.
자그마한 억지 같은 ── 그렇지만 깰 수 없는 그의 긍지였다.
그 나날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다.
산크레드는 지금, 사정이 있어 제1세계에 와 환락도시 율모어의 지하실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이 땅에 유폐되었다고 하는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이 도시의 건물은 하얀 암초를 쓴 것으로, 다르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지만 림사 로민사를 방불케 한다.
그래서일까... 그 언젠가 자신을 고용한 악덕 상인에게 들은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 거리에서는 속이 새카만 놈일수록 하얗게 있다 ──]
산크레드는 변장을 위해 입은 율모어 병사의 갑옷을 벗고 자신의 새하얀 코트를 입으면서 질렸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강화섬유로 만들어진 코트는 다양한 공격에서 몸을 지켜주는 우수한 것으로,
쌍검을 건블레이드로 바꿔 방패 역할을 하려는 그에게 필수불가결한 장비였다.
한편 하얀색을 고른 것은 빛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보호색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고상한 기사였다면, 굳이 칠흑을 둘러 정면에서 이 도시와 대치하는 것도 생각했지만 단번에 생각을 바꿨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결과다. '그녀'를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율모어를 형성하고 있는 거대한 암초는 물론 바다 밑에도 이어져 있다.
여기에 구멍을 뚫어 만든 넓은 지하공간은 어떤 시대에서는 비축창고로, 또 어떤 때는 죄먹이에게서 사람들을 지키는 셸터로 썼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바우스리가 지도자를 맡게 된 후에는 감옥과 메오르와 같은 식량의 저장고로 쓰고 있다.
가장 안쪽에, 목적지가 있다는 것은 사전에 면밀한 조사로 명확했다.
산크레드는 파수꾼의 눈을 피하면서 통로에서 방해가 되는 자는 혼절시켜 당분간 움직이지 못하도록 구속했다.
솔직히 아무리 율모어의 경비가 두텁다고 해도 그 혼자라면 출입은 쉽다. 하지만 누군가를 데려간다면...
게다가 그게 전투 경험이 없을 소녀라고 한다면 어려움은 크게 뛴다. 그가 제1세계에 온 후 작전을 결행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건블레이드의 수련도 겸한 '두 명이서' 탈출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산크레드는 몇 번이고 파수병의 처리를 끝내고 겨우 그 방의 앞에 섰다.
그 안에 있는 소녀는 제1세계의 사람들에게 '빛의 무녀 민필리아'라 불렸는데, 산크레드가 아는 그녀 자체는 아닐 것이라고 수정공에게 들었다.
그렇지만 단 하나라도 관계가 있다면,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면 ── 그는 반드시 달려간다.
산크레드는 작게 숨을 내뱉고 재빠르게 잠긴 문을 열었다.
그 방은 정말 평범했지만 그 모습이 되레 이상했다.
간소하지만 푹신한 침대와 작은 수납장. 책상과 의자가 있고, 공부라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종이와 펜이 놓여 있다.
가장 큰 것은 책장이다. 칸마다 빈틈없이 책이 꽂혀있다.
── 그렇기에 알았다. 여기는 겨우 붙잡은 '빛의 무녀'에게 절망도 희망도 주지 않고 다만 종말의 순간까지 키우기 위한 장소란 것을.
그 중앙에 소녀가 한 명 있다. 갑작스러운 낯선 방문자를, 수정빛의 눈동자가 쳐다보고 있다.
[당신, 은...]
겁내면서 낸 목소리는 산크레드가 알고 있는 민필리아의 것도, 어린 아실리아의 것과는 달랐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애써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게 했다.
[여길 나가자... 민필리아]
그 이름에 담긴 소원을 떠올려라.
그날, 분명히 자신의 눈앞에서 있었던 소녀의 미소를 떠올려라.
이다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잊지 않겠다고 혼신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에 새기자.
그렇게 내민 손을 소녀의 작은 손이 망설이며 잡았다.
──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인연에는 아직 이름은 없다.
원문 : https://jp.finalfantasyxiv.com/lodestone/special/tales_from_the_shadows/sidestory_01/#sidestory_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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