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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여자와 나오토의 고동이, 동기되어 있었다고?”
나오토가 라켈에게 이야기한 건 키이로와 자신의 고동이 완전히 동기되어 있었다는 대목 뿐이었다. 그 후 피가 빨려든 사실과 키이로가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쓸데없다고 생각해 덮어 두었다.
애초에 그 직후 라켈은 호텔 앞에서 나오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의 나오토의 상태는, 오히려 나오토보다도 객관적으로 알고 있으리라.
“어. 이유는 모르겠는데… 기분 나쁠 정도로 똑같았어.”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좁혀 확인하듯 묻는 라켈에게 나오토는 아직도 납득이 안 된다는 곤혹과 함께 긍정을 돌려주었다.
“있잖아,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랑 그녀석이…”
“…어떻게 된 거지? 그럼 히카가미 키이로는, 그래도 설마 그런…”
나오토의 물음은 라켈이 중얼중얼 시작한 혼잣말에 튕겨나가 어딘가로 굴러가버렸다. 가볍게 쥔 손을 입가에 대고 진지한 눈빛으로 궁리하는 라켈의 옆얼굴에, 나오토는 이런 이런 하고 얕은 한숨을 쉰다.
아무래도 라켈도 모르는 듯하다. 새어 들려오는 말의 단편으로 보자니 전혀 감도 안 잡히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그녀의 생각이 정리되기 전엔 제대로 된 설명이 가능할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어쨌든 키이로랑 한 얘긴 이 정도야. 것보다 슬슬 안 돌아갈 거냐? 점심시간 끝날라.”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전화로 시각을 확인하고, 나오토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오후 수업은 국어다. 잘 못하는 과목은 아니지만, 담당교사의 말투가 너무나도 잠기운을 불러일으키는 탓에 배부른 상태로 견뎌내는 건 난이도가 높다.
“다음은 방과 후에 하자고.”
“그래. 좋아, 돌아가자.”
라켈이 『학교』라는 장소에 반발적이 아닌 건 다행이었다. 나오토의 간청에 순순히 응해, 라켈은 마법진 같은 건 흔적도 없는 안뜰의 공터에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나란히 걷는 나오토와 라켈이 본교사와 특별교실동 사이에 있는 통로로 나섰을 때였다. 갑자기 특별교실동에서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어머. 쿠로가네 군, 알카드 양.”
늠름하고 똑 부러진 목소리에, 늘씬하고 키가 큰 체형, 등을 덮듯 흘러내린 곧은 흑발. 말을 걸어온 건 신카와하마 제 1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인 키리시마 카나다.
무심코 나오토는 고꾸라지듯 발을 멈춘다.
카나는 고등학생답지 않은 당당한 태도와 침착한 눈빛이 인상적인, 거역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는 인물이었다. 인품은 몰라도 그 위엄 있는 풍채에 이끌려 학생회 임원 선거에서 그녀에게 표를 넣은 사람은 적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나오토도 그랬다.
그런 그녀가 바로 며칠 전까지 스피너의 사도였던 이사에게 협박을 받아 시키는 말을 듣고 있었단 걸 아는 자는, 이 학교에 나오토와 라켈 이외엔 없다.
물론 그 때의 단정한 얼굴을 눈물로 적신 모습을 목격한 것도, 나오토와 라켈 뿐이었다.
“오늘도 둘이서 같이 점심 먹은 거야? 사이좋네. 하루카가 질투하겠어.”
가슴에 아무래도 서류뭉치 같은 걸 안고, 카나는 늘씬하고 긴 몸매에서 유연하게 미소를 자아냈다. 말투엔 살짝 놀리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몸을 경직시킨 채 움직이지 않게 된 라켈이, 어색하게 얼굴 째로 시선을 돌리며 나오토 뒤로 슬그머니 숨는다.
왠지 카나와 라켈 사이에 서는 모양새가 된 나오토는 어깨를 들어 올리며 입가를 비틀었다.
“왜 하루카가 거기서 나와요.”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만약 그럼 죄 많은 사람이네, 너란 남자는.”
“그러지 마세요…. 저랑 하루카는 그냥 소꿉친구라고요.”
“그래? 그렇구나. 너한텐.”
꿍꿍이가 있다, 고 듣는 상대가 충분히 느낄 만큼 꿍꿍이를 담아 카나가 말한다. 상대가 카나가 아니라 같은 학년 누군가였다면, 가벼운 욕지거리를 입으로 뱉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오토는 쓰게 신음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키리시마 선배.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은가요?”
“나한테? 그래, 얼마든지.”
“이사, 기억나세요?”
나오토의 질문에 카나는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건지, 깜박 하고 한 번 눈을 깜박였다.
“이사라면… 지학 담당 이사 선생님 말하는 거니? 기억나고 자시고, 지난주까지 이 학교에서 수업하셨잖아, 잊었을 리가 없지. …몸이 안 좋아서 퇴직하셨다며? 유감이야.”
교사 이름을 막 부르는 나오토의 무례를 꾸짖는 듯한 얼굴을 하곤, 카나는 한 번 뜸을 들여 표정을 흐렸다. 그것은 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 교사에 대한 약간의 동정심에 의한 것이었으며, 도저히 자신을 협박하던 상대를 향한 감정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갑자기 죄송합니다, 알고 계시다면 됐어요.”
허둥지둥 얼버무리듯 대답하고, 나오토는 간살부리듯 입가를 올렸다.
카나는 수상하단 눈으로 나오토를 보고, 약간 고개를 기울인다.
“그래? 이상한 걸 다 묻네.”
“아니, 깊은 의미는…”
“아, 있다 있다, 키리시마 선배―!”
핑계를 생각해두지 않은 탓에 갑자기 당황하는 나오토의 해명을 툭 끊으며, 이번엔 아는 남자 목소리가 날아든다.
목소리의 주인은 카나 옆까지 탁탁 하고 시끄럽게 다가와 숨을 참으며 고개를 들어 「오」하고 놀란 목소리를 낸다.
“나오토랑 라켈이잖아. 뭐야 뭐야, 둘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몰래 데이트냐? 이벤트 플래그는 놓치지 말라고, 나오토.”
활짝 하고 숨김없는 미소를 향해온 건 나오토의 반 친구이자 절친이기도 한 후쿠다 신노스케였다.
“넌 잘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딴 말을 지껄이네.”
뭐가 플래그람. 신노스케의 평소와 다름없는 입방정에 나오토도 자연스레 쓴웃음과 욕을 흘렸다.
카나의 위압적인 분위기도 신노스케가 가진 무해 그 자체인 오오라에 어느 정도 완화된다.
이 남자의 등장에 도움을 받은 건 약간 속이 쓰렸지만, 그래도 이사에 대한 질문을 얼버무릴 수 있어 살았다.
잘 보니 신노스케의 팔에도 카나 것의 배는 되어 보이는 짐이 안겨 있었다. 이쪽은 종이뭉치가 아니라 파일 뭉치다.
“뭐냐 그 뭉치들은?”
“작년까지의 문화제 기록이야. 나 도서위원이잖아. 관리하는 게 우리 쪽이거든.”
신노스케는 영차, 하고 보란 듯이 목소릴 내며 파일 뭉치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선 곧바로 당황한 듯 다시 카나를 향했다.
“아아, 죄송함다, 시간 없었죠. 부탁하신 거 전부 있더라고요. 학생회실로 옮길까요?”
“그래, 부탁할게. 나도 가려던 참이니 같이 가자.”
“네!”
“그럼, 먼저 실례할게.”
신노스케를 부하처럼 끌고서 카나가 가볍게 인사한다.
“나 간다―, 나중에 보자.”
걷기 시작한 카나를 쫓아 신노스케도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고 본교사로 들어갔다.
“문화제라….”
멀어지는 카나와 신노스케를 무심코 배웅하며, 나오토는 툭 중얼거렸다. 하지만 머릿속에 있는 건,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기억 못 하네.”
나오토의 등 뒤에서 스윽 하고 나와, 라켈이 개운한 얼굴로 말한다. 카나의 등장에 겁을 먹어 말을 잃고 그림자처럼 조용히 숨을 삼키고 있었단 사실 따위 존재하지 않는단 것처럼.
이쯤 되니 라켈의 이 반응에도 익숙해졌다. 카나가 없어진 순간 바로 평소 태도로 얄팍한 가슴을 펴는 라켈을 흘겨보며, 나오토는 쓴웃음을 지은 채 슬쩍 끄덕였다.
“그래.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다만.”
카나는 이사와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협박받은 것도, 자신과 이사 사이에 어떠한 행위가 행해졌는가도.
나오토는 수단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카나가 잊어버렸단 사실을 단순히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런 걸 기억해봤자 좋은 일 하나 없을 테니.
신경 쓰이는 건 카나의 기억에 관한 부분을 처리한 미츠루기 기관의 기분 나쁜 존재감이었다.
“평소엔 별로 의식 안 하는데, 지금도 지켜보고 있으려나.”
전에, 키이로는 미츠루기 기관이 라켈과 나오토를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생활에 간섭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단 상황은 기분이 좋진 않다.
라켈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재미없다는 듯 작게 코를 울렸다.
“미츠루기 기관… 그들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움직이고 있을 거야. 이쪽도 그저 단서가 나타날 때까지 태평하게 있을 수만은 없겠어.”
키이로나 그 기분 나쁜 조직이 언제 어떤 방해를 해올지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스피너와 결착을 짓고, 아오에 다가가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어쩔 생각인데? 여기저기서 그 마법진 써서 아무렇게나 찾아다녀?”
“그것도 나쁘진 않아.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중요한 게 있어.”
점심시간 끝나기까지 앞으로 5분도 안 남았다. 재촉하듯 걷기 시작한 나오토 옆에 서서 라켈은 정면을 바라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중요한 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머리카락에 손을 꽂으며 고개를 기울이는 나오토를, 라켈은 어딘가 득의양양하게 올려다보았다.
“달리 뭐 있어? 강적에 맞서기 위해… 우선, 수행이야.”
나오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말하는 건가 하고 의문스레 생각해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없이 라켈에게 묻는다. 라켈은 당연하다고 깊이 끄덕였다. 마치 감독역을 자처했다는 듯 자신에 찬 얼굴로.
복도를 걸으며 나오토는 천천히 머리를 얼싸안았다.
…어디서 배운 거야 그딴 지식은, 하고.
5
하늘에는 하얀 달이 걸려 있었다.
반달보다는 약간 더 부푼 그것은 밤하늘에 뻐끔 뚫린 창문 같아 거기로 누군가가 들여다보는 듯한 공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낮에 미츠루기 기관의 감시에 대해 떠올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겉보기엔 고요해 보이는 밤에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려 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오토는 맨션의 빛에서 밤하늘의 어둠 아래로 나와 풀리려 하던 운동화 끈을 다시 묶었다.
“꾸물거리지 말아줄래.”
“알았다니까.”
몇 걸음 앞에서 걸려온 지겹다는 듯한 목소리에, 나오토는 고개를 들어 건성으로 답했다.
10월이라곤 해도 지금처럼 심야가 되면 공기도 차갑다.
밤의 어둠속에서 라켈은 그 화사한 몸을 자기 물건인 새카만 망토로 감싸고 있었다. 확 하고 겉모습에만 주목하면, 그 모습은 마치 처음 만난 그 밤의 광경 같다. 하지만 그 때완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지금의 라켈은, 망토 아래에 똑바로 블라우스와 스커트라는 의복을 갖춰 입고 있는 것이다.
끈을 꽉 묶은 신발 끝으로 땅을 가볍게 두드리고, 종종걸음으로 라켈의 곁까지 간다. 그 때, 갑자기 앞쪽에서 하이힐을 신고 걷는 발소리가 다가온다.
“어라? 둘 다 이런 시간에 나가려고?”
순간 키이로를 경계했지만, 아니었다. 유키다. 하루카의 모친이자, 나오토의 아주머니.
밝은 색 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밀크티색 판탈롱 슈트를 입은 그 모습은, 보아하니 업무용 차림새였다. 저녁때는 지났고 오후 9시도 넘었다. 퇴근길이겠지만, 유키의 귀가시간 치곤 좀 빠르다.
“유키 씨야말로. 오늘은 빨리 오셨네요.”
놀라면서도 대답하는 나오토의 시야 구석에서, 라켈이 움찔 하고 어깨를 튕겨 올렸다. 몸을 움츠리듯 굳은 채로 라켈은 한 걸음 나오토 쪽으로 도망쳐 온다.
그 반응에 유키는 쾌활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매일매일 죽어라 야근해서 살겠냐구. 가끔은 정상적인 시간에 딸내미가 한 요리라도 먹고 싶은 거야.”
“뭐어, 정상적인 시간 치고는 좀 늦었지만요.”
“사소한 건 됐어―. 그것보다 어디 가는 거야? 밤늦게 부녀자와 단둘이 돌아다닌다니… 수상한데?”
손톱에 옅게 펄을 칠한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유키는 씨익 하고 의미 깊게 웃는다. 흘깃 라켈을 쳐다보는 눈은 마치 소녀 같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매일 늦게까지 일하고 아침 일찍 나가면서, 피곤하지 않을 리도 없는데. 기운 넘치는 사람이다.
나오토는 입가를 비틀며 머리를 긁는다.
“별로 수상할 거 없거든요. 역 앞 서점 가는 거예요. 거기, 10시까지 하니까.”
“서점? 나오토가?”
“아니 제가 아니라. 얘요.”
나오토는 조각상처럼 되어버린 라켈을 가리킨다.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라켈이 몇 번 작게 끄덕였다.
거짓말이다. 막힘없이 둘러댈 수 있었던 건, 바로 몇 분 전에 하루카에게도 같은 거짓말을 한 덕분이었다.
“흐응.”
감흥 없는 대답에 담겨 곰곰이 생각 중이라는 목소리가 유키에게서 새어나온다.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나오토는 내심 심하게 긴장 중이었다. 유키는 날카롭다. 거짓말 따위 몇 번이고 간파당해 왔다. 유키만 분간할 수 있는, 나오토가 거짓말을 하는 냄새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너무 하루카 걱정시키지 말고.”
“네? 아, 아아… 네.”
유키는 시원하게 나오토의 거짓말을 믿고, 어깨에 걸쳐 둔 업무용 숄더백을 반대편 어깨로 옮겨 걸쳤다.
안 들킨 건지 아니면 봐준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물었다간 거짓말을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 될 것이다.
탁, 하고 나오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유키는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맨션 입구로 들어간다.
밝은 오렌지색 조명 속으로 빨려드는 모습을 도중까지 배웅하며, 나오토는 시선을 피하듯 등 뒤의 어둠을 향했다.
“가자.”
아까 유키가 한 것처럼, 이번엔 나오토가 라켈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러자, 현실에서 격리되어 있었는지, 움찔 하고 전기라도 통한 듯 몸을 떨며 라켈이 제정신을 차린다.
“핫?! 어… 으, 으응, 그렇지. 가자. 빨리. 꾸물거리지 말고.”
“그거 아까도 말했거든.”
그리고 지금 이 경우,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 너라고. 라곤 입에 담지 않고, 나오토는 머리카락에 손을 찔러 넣으며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신카와하마 역 주변. 하지만 서점이 아니라, 더 음침하며 그림자가 짙은 곳이 되리라.
지금부터 시작되는 건… 수행, 이었다.
좁은 골목을 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가로등에서 멀리 떨어진 그림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역 앞의 빛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도 무섭진 않다.
날짜가 바뀌어, 현재는 심야 1시를 지났다.
헤쳐 나가는 밤공기는 딱 좋게 시원해서, 원래라면 기분 좋게 걸어 다닐 수 있었으리라. 구름은 많지만 하늘 높이 빛나는 달을 가리지 않아 새하얀 달빛이 지상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가을밤의 풍정에 눈곱만큼도 의식을 향할 여유가 없었다.
“젠, 장… 언제까지 할 건데 이 짓거리!”
차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 안쪽, 더 안쪽을 향해 달려 나가며, 나오토는 거친 숨 사이로 짜증을 토해낸다.
바로 뒤엔 비린 악취가, 줄곧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시야 바깥에서 가끔 들려오는 키리릭 하는 괴음이, 목덜미에 생리적인 혐오감과 공포를 전해준다.
나오토는 지금, 쫓기고 있었다.
어둠에도, 갑자기 나타나는 가로등의 빛에도 신경 쓰지 않고 충실할 정도로 끈질기게 따라오는 건, 나오토의 몸통 정도 되는 크기의 벌레였다.
산화된 기름 같은 더러운 갈색 껍데기에, 풍뎅이 같은 기분 나쁜 광택을 띄고, 등에는 4장의 날개가 튀어나와 불쾌한 날갯소리를 흩뿌리고 있다. 실루엣은 벌과 닮았지만, 통통한 엉덩이에 있는 건 날카로운 침이 아니라 원형 입으로, 톱날 같은 작은 이빨들 안쪽에선 콘크리트도 녹여버리는 액체가 끓고 있었다. 아까 팔에 한 방 맞아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눈물 쏙 뺀 참이다.
진짜 벌의 입이 있는 부분엔 비대하게 커진 다리가 튀어나와 있으며, 그 위에서 4개의 눈이 도망치는 나오토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도망칠 셈이야? 이건 수행이라고. 싸우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
“아, 알고 있, 는데…!”
둥실 하고 바람을 이끌며 빌딩 위에서 라켈이 가볍게 내려왔다. 그대로 바람으로 미끄러지듯 해서 필사적으로 달리는 나오토 옆으로 와 질렸다는 얼굴로 나란히 달리기 시작한다.
수행. 라켈이 당연하다는 듯 그리 말하는 오늘 밤의 이벤트는, 요약하자면 라켈의 마법으로 스피너의 사도가 있는 곳을 찾아내 그걸 토벌하는 것으로 나오토에게 전투경험을 쌓도록 하겠단 거였다.
집을 나와 역 앞에 도착한 게 10시 조금 전. 그리고 사람 눈이 없는 장소에서 라켈의 마법을 준비하고, 감지한 미약한 기척을 쫓고, 찾고. 드디어 찾았다 했더니 벌레는 이미 들러붙은 인간에게서 우화한 뒤였고, 나오토에게 공격의 의사가 있다고 판단하자 맹렬하게 덤벼든 것이다.
물론 나오토도 벌레를 퇴치할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치는 다리를 멈추고 뒤로 돌아 저 거대하고 기분 나쁜 벌 짝퉁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 가깝다. 다리를 멈추고 돌아보는 동작 사이에 벌은 나오토에게 격돌해 엉덩이에서 뿜어낸 체액으로 나오토의 전신을 태워버릴 것이다.
‘그건 진짜 두 번 다시 당하기 싫거든…!’
몇 분 전 일이었지만, 막차가 떠난 역의 플랫폼 아래, 선로 옆에 숨어 있던 벌레를 발견한 직후 당한 기습의 격통이 뇌리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건 진짜 더럽게 아팠다. 고작 3초 만에 상처는 사라졌다지만,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생물에게서 받은 심상치 않은 정신적 충격은 그리 간단하게 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히이이이이익!”
호랑이도 제 말하면 뭐시기랬나. 후방에서 질척한 소리가 튀었다고 생각했더니 나오토의 얼굴 옆을 스치며 도망치는 방향으로 벌레의 체액이 날아간다.
“쯧…!”
튄 방울이 얼굴에 묻었다. 눈가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난다. 몸에 달라붙는 듯한 고통에 시야가 새하얗게 흐려졌다.
계속 도망치며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낸다. 상처는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나오토의 다리가 뛰어넘은 벌레 체액 웅덩이는 아스팔트를 녹여 끈적끈적해진 솜사탕 같은 꼴로 만들었다.
“라, 라켈 양, 어쩌죠, 어쩌면 좋죠?!”
생각해 보니 이렇게 평소의 자신에 가까운 정신상태로 스피너의 사도와 맞선 적은 없었다. 의식적인 혼란과 상응하는 공포에, 나오토는 가볍게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칠칠치 못하네. 당신, 그러고도 봉마의 일족이야?”
“그러니까 그건 아마노호코사카 얘기고! 거기 비하면 우리 집은 덤 같은 거… 아니 애초에 내가 하던 건 그냥 연습이고 이딴 괴물과의 실전이 아니라고!”
인간을 상대로 쌓아온 대련 경험이 이럴 때 통할 리가 있겠는가.
스케이트라도 타듯 바람에 발을 올려 나오토 옆을 미끄러지며, 라켈은 이해력이 좋지 못한 어린애를 상대할 때처럼 한숨을 쉬었다.
“바보네, 그러니까 이렇게 실전 경험을 쌓게 해 주려는 거잖아.”
“날 위해서란 거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
“이대론 날 새겠어.”
“그렇게 생각하시면 좀 도와주세요!”
“정말이지… 당신 진짜 손 많이 가네.”
이런 이런, 하고 고개를 젓는 라켈은 스피드를 늦추지 않고 몸을 낮췄다. 했더니, 땅바닥을 차고 높이 뛰어오른다. 그에 이끌리듯 나오토의 몸도 돌풍에 밀려 날아올랐다.
“우오옷?!”
그대로 나뭇잎이 휘날리듯 뒤쪽으로 날려진다.
“아파라…”
곧바로 나오토는 차가운 아스팔트에 내동댕이쳐졌다. 착지라 하기엔 좀 꼴사나운 자세로 땅으로 돌아와, 엉덩이와 다리의 둔한 고통에 표정을 비틀며 고개를 든다.
그리고, 작게 숨을 삼켰다.
시선 끝에는 갑작스런 사태에 반응하지 못하고 나오토가 방금까지 있던 장소마저 지나 골목 안쪽으로 나아간 벌레의 뒷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감지능력은 높은지 바로 나오토가 있는 곳을 눈치 채곤 낮은 날갯소리를 울리며 이쪽을 돌아본다.
하지만 나오토와 벌레 사이엔 충분한 거리가 있었다. 도망치기 위한 것이 아닌, 싸우기 위한 거리다.
“나오토.”
“안다고!”
재촉하는 듯한 라켈의 속삭임에 거칠게 답하고, 나오토는 강하게 주먹을 쥐고 달려 나갔다.
시야에 잡힌 표적은 거대한 붉은 눈으로 나오토를 바라보곤, 두꺼운 다리를 꿈틀거려 기괴한 소리를 울리며 강산이 모인 하반신을 쳐들었다. 둥근 입이 총구처럼 나오토를 향한다.
솔직히 몸이 움츠러든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하고 한탄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그것들은 사고 구석으로 밀어두고 눈에 비치는 것에만 집중한다.
단단한 땅의 감촉을 힘껏 딛고 깊게 나아가며 나오토는 주먹을 쥔 팔을 강하게 당겼다. 그것을 기다렸으리라. 벌레의 부풀어 오른 배가 불쾌하게 떨리고, 이빨이 늘어선 둥근 입에서 포탄이라도 사출하듯 산성 액체 덩어리가 토해진다.
제대로 맞으면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나오토는 벌레의 반격과 거의 동시에 부자연스런 각도로 몸을 굽혀 근거리에서 발해진 산을 피했다.
‘으, 어? 피했다?’
놀란 건 나오토 본인이다. 디딘 발은 깊었고, 나오토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그런 만큼 공격에 대해선 무방비였을 터였다. 하지만 눈에 벌레의 움직임이 정보로서 날아들자 멋대로 몸이 움직였다.
벌레의 움직임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느리다. 자신의 움직임은 자각 이상으로 기민하다. 그렇기에.
“으랴아아앗!”
몸을 일으키는 기세도 주먹에 더해 기합성과 함께 그것을 벌레의 머리통에 내지른다.
저 뒤에서 곧장 질러진 주먹은 벌레의 커다란 눈을 포착해 너무 굳힌 젤리 같은 질감을 찢어 가른다.
체액이 튀어 질척하게 몸을 뒤덮는다. 불쾌한 물방울을 맞으면서도, 나오토의 팔은 벌레를 단숨에 꿰뚫었다.
“우, 웩…”
사태를 파악하자, 전투라는 스위치에 마비되어 있던 사고가 혐오감을 호소한다. 움찔움찔 하고 크게 경련하던 벌레의 몸에 발을 걸쳐 강제로 팔을 뽑아낸다. 들러붙은 감촉은 너무 생생해, 꿈이라니 환상이라니 하는 변명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그럼 홧김에 하고 뭔가를 포기하며, 나오토는 팔을 벌려 붙잡으려는 벌레에게 옆차기를 먹였다.
딱딱한 것이 부서지는 가벼운 소리를 울리며 벌레가 골목 옆 빌딩 벽에 처박힌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날개를 떨어 날아들려던 벌레를, 아까까진 도망칠 수밖에 없던 스피드에도 개의치 않고 덥석 붙잡아 반격한다.
나오토는 그것을 있는 힘껏 바닥에 내리쳐 던져 버리고, 이제 다신 움직일 수 없도록 밟아 으스러뜨렸다.
“읏, 허억, 하아… 하아, 하… 으, 냄새 진짜…”
썩은 고기 냄새랑 비슷하다. 심하게 흐트러진 호흡 속에서 나오토는 얼굴을 굳히고 무기물이라도 된 것처럼 축 처져 움직이지 않는 벌레에게서 발을 거두었다.
벌레의 배에선 무기이기도 했던 산성 액체가 흘러나와 아스팔트 바닥을 질척질척 용해시키고 있었다. 그 기분 나쁜 광경을 내려다보며, 나오토는 팔에 묻은 벌레 체액을 털고 저녁밥을 토해내려 하는 위장을 필사적으로 달랬다.
“…의외로 시원스레 쓰러뜨렸네.”
“의외는 뭐야, 임마. 이쪽은 죽자 사자였거든, 말 좀 친절하게 해주면 덧나냐.”
부드러운 바람을 드레스처럼 두르고 곁에 내려선 라켈의 냉정한 감상을, 나오토는 찡그린 얼굴로 받아친다.
벌레를 밟았을 때 튄 산… 같은 액체는 나오토의 다리를 태웠지만, 흥분한 상태였던 탓일까.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상처는 나아 지금은 점점이 구멍 난 청바지만이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입고 있던 T셔츠도 여기저기 녹아 헤져 너덜너덜하다. 어차피 처참한 몰골이 될 테니 하고 파카만이라도 라켈에게 맡겨둔 게 정답이었다.
초라한 행색이 된 나오토에게 안고 있던 회색 파카를 돌려주며, 라켈은 하인의 불평에 그거야말로 의외라는 듯 눈을 둥글게 뜨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칭찬하는 거잖아.”
칭찬하던 건가. 나오토는 반박을 말로 낼 기력도 나지 않아 입을 ㅅ자로 삐죽였다. 아무래도 자신은 지금까지 비상하게 따듯한 칭찬을 받으며 자란 모양이다.
“하지만…”
문득 중얼거리듯 라켈이 뒤이었다. 그 이상하게 진지한 목소리에 나오토는 불만스런 표정을 거두었다.
“내가 도와준 뒤의 당신은 『죽자 사자』론 보이지 않았는데?”
금색 눈동자에게 주목받아, 나오토는 목에 숨을 모은다. 더러워진 자신의 손을… 벌레 머리를 꿰뚫은 오른손을 내려다본다.
“…어.”
한숨을 쉬듯 나오토는 끄덕인다.
라켈이 하려는 말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말로 하자면 말 그대로 『의외』다.
의외일 정도로, 아니 그보다 더욱. 생각도 못 했을 정도로, 나오토의 오른손은 강인한 무기로서 작용했다. 오른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이, 참으로 가볍게 싸움에 순응한 것처럼 느껴져서.
평소보다 크게 가슴을 두드리는 자신의 고동을, 나오토는 듣고 있었다.
제 9장 ― 간섭
1
시계의 바늘은 심야 3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로부터― 심야의 뒷골목에서 스피너의 사도인 벌레를 밟아 죽이고부터, 몇 분 뒤에 검은 양복과 하얀 수술복 차림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언젠가, 밤의 학교에서도 조우한 미츠루기 기관의 인간이다.
그들은 솜씨 좋게 벌레의 시체를 회수하고, 뒷정리는 이쪽이 할 테니 하며 나오토에게 귀가를 권한 뒤, 이번엔 여기저기 튄 벌레의 체액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그 시원스런 일처리를 흘겨보며, 나오토는 약간 감개에 잠겼다. 분명 내일이나 내일모레엔 이 골목도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원래대로 수선되어 있을 테지 하고.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이유도 없었기에 귀가하기로 결심했을 때, 라켈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겠다고 나오토도 생각한다. 자신도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밤 한시 넘어서다. 그런 시간에 저렇게 재빠르게, 그것도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미츠루기 기관이 나타났다는 건, 그만큼 빈틈없이 감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오토가 어떤 식으로 도망 다니고, 라켈이 어떤 얼굴로 나오토를 도왔는지. 시시한 잡담마저 보고서에 정리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지긋지긋하다.
그래도 그 자신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사건현장을 수습해주는 것만은 고마울 따름이다.
“하아―… 졸려….”
집으로 돌아와 바로 준비한 욕탕에 어깨까지 담그고, 나오토는 증기가 피어오르는 천정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밤늦게까지 깨있는 건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밤 같은 경우는 꽤나 힘들다.
밤늦게 남모르게 이형의 괴물을 찾고, 쫓겨 다니고, 최종적으론 성분 불명의 기분 나쁜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귀가했다. 『수행』 한 번 지독하게 했다.
나오토는 탕 속에서 오른손을 끌어올려 냄새를 맡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젠 괜찮…겠지?’
지금까지 자신의 몸을 이렇게 정성들여 씻은 적은 없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씻고 또 씻었다. 이제 불쾌한 냄새도 감촉도 깨끗하게 빠져나갔다.
좋아, 좋아, 하고 따듯한 탕 속으로 되돌리고, 적당히 팔을 가볍게 주무른다.
그렇게 편안히 있으면서도,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건 오늘 밤의 광경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놈들 중에 키이로가 없었네.’
나오토의 『수행』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미츠루기 기관. 상황은 이사를 쓰러뜨렸을 때와 거의 다르지 않았지만, 거기에 그 경박한 여자의 모습은 없었다.
검은 옷들보다 지위는 높은 모양이니, 오늘밤 같은 사소한 일에 일일이 나올 정도로 한가한 것도 아닐 것이다. 어떤 사정이 있었던, 살았다, 하는 게 나오토의 내심이었다.
‘그 사람 있었으면 30분은 더 밖에 있었을 거야….’
혼자 탕 속에서 쓴웃음 짓고, 문득 나오토는 떠올린다.
호텔 라운지 바에서 만났을 때의, 키이로의 요염한 미소. 의미 깊은 말을 줄줄이 자아내는 도톰한 입술. 맞닿은 피부의 매끈매끈한 질감.
나오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지금도 키이로의 가슴 속에서 같은 리듬으로 심장이 맥동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 생각하자, 아무래도 오싹해진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심장이다. 그것이 타인과 완전히 똑같다니, 신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아… 이젠 뭐, 됐어. 오늘은 이제 아무 생각도 하기 싫…”
어.
그렇게 이어질 터였던 말꼬리를, 갑자기 열린 문소리가 지워버렸다.
“…하?!”
한 순간,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몇 초 지나도 이해는 되지 않는다.
의아해 눈썹을 좁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얼빠져 보이게 반쯤 입을 벌린 상태로, 나오토는 무슨 일이지 하고 몸을 일으켜 돌아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완전히 사고가 굳었다.
문에 손을 대고 거기 서있던 건 라켈이었다.
지금 이 집에 있는 인물을 생각하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라켈이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으로, 긴 금발을 내린 채, 그대로 욕실로 들어오려고 하는 건, 부자연 이전에 간과할 수 없는 사태였다.
“너…어…”
“어머. 아직 들어가 있었어?”
푼 머리카락을 귀에 걸며, 라켈이 젖은 욕실 바닥에 발끝을 내린다.
나오토는 곧바로 욕탕 안으로 잠수할 기세로 깊이 몸을 가라앉혔다.
“너너너너너너너어, 너, 뭐 하는 거야, 왜 들어오는 거야!”
“나오토. 이미 밤이 깊었다고, 조금은 인근 주민들에게 폐가 된다는 걸 생각해.”
“네가 지금 그 꼴로 상식을 논하지 마!”
“상식을 배우랬다가, 논하지 말랬다가. 정서불안정한 남자네.”
“누구 때문이라고 처 생각하는 건데…!”
말해봤자 소용없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도저히 반박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럼에도 설마 물끄러미 쳐다볼 수도 없어 나오토는 욕탕 안으로 작게 몸을 움츠린다.
그 모습에, 라켈은 「아아」하고 납득했다는 목소리와 질렸다는 미소를 흘렸다.
“안심해. 하인의 알몸을 봤다고 특별한 감상은 갖지 않아. 개가 옷을 입고 있는지 안 입고 있는지 수준의 차이밖에 없는걸.”
동요하는 나오토를 놀리는 듯한 목소리를 울리며, 라켈은 실로 간단히 말해버린다.
나오토는 푹 고개를 숙인다. 딱히 뭔가 느껴줬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간단히 잘라 말하면 그건 그거대로 상처받는다.
라켈은 나오토의 상처받은 마음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익숙한 동작으로 욕실 의자에 그 자그마한 엉덩이를 올렸다. 샤워기에 손을 뻗어 따듯한 물을 맞는다.
진짜로 같이 목욕할 생각이다. 믿기 힘든 라켈의 사고를 파악하고, 나오토는 얼굴이 파래지는 걸 느꼈다. 이런 상황에 더해, 라켈은 지극히 당연하단 듯 나오토에게 명령했다.
“나오토. 하인인 당신이, 주인의 머리카락을 씻는 걸 허락할게.”
말하고, 자, 하고 가슴께로 흐트러뜨렸던 금색 머리칼을 등으로 넘긴다.
재촉하는 듯한 금색 눈동자는 진짜로, 일절의 부끄러움이나 타산 따위 없이 나오토를 바라본다. 거기에 불순한 감정이 깃드는 일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을 곧바로, 그저 거기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눈으로.
오히려 어리광부려지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든다.
“언제까지 그렇게 남의 알몸을 흘긋흘긋 보고 있을 셈이야? 빨리 해, 주인을 기다리게 하다니 얼마나 교양 없는 하인이야.”
“아―, 네, 네. 알았습니다요… 나 참.”
이대로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진짜로 자기만 라켈을 여자로 의식하고 있는 것 같잖은가. 그런 건 인정 못 한다. 말도 안 된다.
나오토는 포기라는 감정을 마음속에서 반죽하듯 만들어내며, 결의를 다지고 기세 좋게 일어섰다.
‘안 본다 안 본다 안 본다…’
주문처럼 머릿속으로 외며, 의자에 걸터앉은 라켈의 등 뒤로 돌아가 샤워기를 잡는다.
욕실 거울이 흐려졌단 사실에 이렇게 감사한 적은 없다. 비치는 듯한 피부와 가느다란 어깨에 아무리 애를 써도 시선을 빼앗기면서도, 나오토는 라켈의 머리카락을 모아 올렸다.
“우와…”
무심코 목소리를 내었다. 라켈이 고개를 움직여 돌아본다.
“왜?”
“아, 아냐. 머리카락… 예쁘구나 해서.”
생각해보니 좀 부끄러운 말이었지만, 이끌리듯 나오토는 솔직하게 입에 담아 버렸다.
비단실타래 같은 걸 나오토는 만져 본 적 따위 없지만, 지금 손바닥에 있는 질감은 그것을 연상시켰다. 찰랑찰랑한 머리는 모은 것만으로 짜 올린 것 같이 부드러워, 나오토의 손바닥에서 서늘하게 미끄러진다.
(이 부분 일러스트는 스킵이다 스킵)
“그래. 예뻐?”
라켈에게서 돌아온 말은 냉담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에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건 그 짧은 한 마디만으로 알 수 있었다.
“어. 여자 머리 같은 건 잘 모르고, 거기에 금발이라니 본 적도 없지만. 난 예쁘다고 생각해.”
나오토는 쓴웃음 지으며 손에 든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정말 아름다운 머리였다. 그래서 더욱, 그 매력을 자각하기는커녕 흥미도 없어 보이는 라켈을 보고, 아깝다, 고 생각했다. 턱을 쳐들고 사람을 올려다보며 깔보기보다 이런 평범한 걸 평범하게 자랑스러워하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유치원을 다니던 때엔 같이 목욕하기도 했지만, 하루카의 머리카락을 씻겨준 적은 없었다. 사야를 생각해보니 병약했던 그녀완 같이 목욕한 기억 자체가 없다.
‘으―음, 여자 머릴 씻겨보는 건 처음이네.’
자신의 것이 아닌 머리카락은 가늘고 부드러워,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하는 걸까. 물로 헹군 금색 머리카락에, 하루카가 사온 라켈용 샴푸를 칠해 신중하게 거품을 일으킨다. 긴 머리카락은 손가락에 감기는 것 같았지만, 그 끝에서부터 스르르 풀려버린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다루는 듯한 심경이었다.
익숙하지 못한 작업이다. 손놀림은 심하게 어색해, 평소 어떻게 자신이 머리를 감아온 건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샴푸를 씻어내고, 컨디셔너를 바르고 다시 씻어내고. 젖은 머리칼이 피부에 달라붙은 라켈의 어깨나 등을 샤워기로 씻어낼 때쯤 되니 고등학생 남자에게 있어야 할 부끄러움이니 불편함이니 하는 것들도 제법 옅어져 있었다.
“자, 다 됐어.”
시선을 향하는 건 되도록 피해 나오토는 물을 잠근 샤워기를 벽에 걸었다.
라켈은 젖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쪽으로 모아 아직 듬뿍 남아 있었던 물기를 가볍게 짜내며, 후우, 하고 약간 낙담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허접하네.”
“시끄러, 해 본 적도 없다고! 잘 하길 원하는 거였으면 시키질 말던가!”
설마 하던 평가에 발끈한 나오토의 목소리가 욕실 벽에 부딪혀 메아리친다. 한 순간, 밖에까지 들린 것 아닌가 하고 당황했다.
그를 대하는 라켈은 냉정한 태도로, 분개하는 나오토를 어깨너머로 돌아보곤 커다란 눈동자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눈가가, 힘을 빼듯 풀어진다.
“그래, 그럼 됐어. 처음치곤 잘 했다고, 평가를 고쳐줄게.”
흐흥, 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표정에 나오토는 옆머리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라고라도 해야 하나?”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하는 건 이쪽이 아닌가.
불만을 넘어 피로가 느껴졌다. 부득이하게 한 임무를 마치고, 나오토는 욕실에서 나가려 허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 팔을 라켈이 젖은 손으로 붙잡아 멈춰 세웠다.
“뭐야…”
질렸다는 얼굴로 나오토가 묻는다. 그것에 라켈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냐니. 다음은 몸이야. 씻기도록 해.”
“좀 봐주세요 라켈 님!”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순발력으로, 나오토는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었다.
피로를 풀기 위해 목욕을 하려던 거였다. 하지만 목욕이란 놈은 다양한 위험을 낳을 가능성을 숨기고 있었다고, 나오토는 오늘 밤 깨달았다.
다시 덥힌 탕에 들어가, 욕조 가장자리에 팔을 올리고, 나오토는 도망칠 곳을 잃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정면에 있는 것이다. 머리를 감고,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몸을 씻은 참인 라켈이.
욕조 안에서 오도카니 무릎을 안고, 뻗으려야 뻗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굽힌 나오토의 다리 사이에 앉아 기분 좋은 듯이 일본의 목욕을 즐기고 있다.
그 모습을 어떤 심경으로 눈에 담으면 좋은 걸까. 알지 못한 채, 나오토는 욕조 가장자리에 올렸던 손으로 머리를 싸매듯 이마를 덮었다.
“어때? 몸 상태는.”
정면에서, 희미하게 메아리치는 라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오토는 대피시켜두었던 시선을 되돌렸다.
“상태라니? 그냥 평범한데. 겁나 피곤하지만.”
깊게 숨을 토해내며 나오토는 대답한다. 이사 때도 상당히 지쳤었지만, 오늘은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끈적끈적한 체액을 뒤쓰고, 정신적인 피로가 격렬하다. 육체의 상처는 금방 사라지지만, 한 번 죽은 이 신체는 정신면까진 케어해주지 않는다.
벌레의 몸을 파열시킨 오른손을 그냥저냥 바라보며, 나오토는 문득 떠올렸다.
“아아, 맞다. 물어볼 게 있었어. 아까 싸웠을 때, 쫓기는 동안엔 상대가 너무 빨라서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맞섰더니 갑자기 저쪽 움직임이 되게 느려 보이더라. 때렸을 때도 기분 나쁠 정도로 간단히 쓰러뜨렸고, 뭐랄까 몸이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고 해야 하나…”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사 때와는 자신이 명백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상정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으로 몸이 기능하고 있다. 그런 감각이다.
라켈이, 금색 눈동자를 끌어안은 무릎에 떨어뜨렸다.
“역시, 그렇구나.”
“역시?”
신경 쓰이는 말투다. 나오토는 눈썹을 좁히고 욕조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탕이 흔들린다. 그 파문을 되돌려주며, 라켈은 나오토의 오른손을 만졌다. 뜨거운 물 탓인지, 언제나 서늘하던 손끝이 지금은 따듯하다.
“당신 오른손은 내 피로 구성되어 있어. 전에 그렇게 말했지.”
확인하는 물음에 나오토가 가볍게 끄덕인다. 쳐다본 팔은 변함없이 당연하단 듯이 인간의 팔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 피와 나오토의 융합이 진행된 거야. 뱀파이어의 피가 나오토 안으로 섞여들기 시작해서, 당신의 힘을 강화시키고 있어. …원래대로라면 진행은 더 느렸을 테지만.”
“어, 야, 잠깐 있어봐. 진행이 빠르다는 건 위험한 거 아냐?”
라켈의 손이 닿아 있던 팔을 퐁당 하고 탕 속으로 가라앉히고, 나오토는 무심코 몸을 내밀었다.
갑자기 가까워진 하얀 피부에 뒤늦게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끄럽고 자시고 그런 건 뒷전이었다.
당황해 동요하는 나오토를 바라보며, 라켈의 긴 속눈썹이 한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원래는 위험해. 그만큼 나오토의 흡혈귀화가 진행됐다는 거니까.”
“뭐… 그, 그럼…!”
“진행이 가속한 건, 요전에, 아버님이 당신 팔을 다시 붙여준 탓이야. 내가 걸어 두었던 진행을 억누르는 마법을 고쳐 써버렸어.”
너무 갑작스레, 게다가 생각도 못한 장면에서 고해진 말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나오토에게, 라켈은 억제하는 듯한 냉정함을 돌려주었다. 그 차분한 말투는 혼란스러워하던 나오토의 사고에 이해력을 주었지만, 이해했더니 이번엔 불복이 찾아왔다.
그럼 뭐야. 강해진 건 좋은데 그것도 이것도 전부 클라비스 덕이고, 거기다 클라비스 탓에 예정보다 훨씬 빨리 흡혈귀화하게 된다는 건가.
‘그 아저씨… 멋대로 무슨 짓을!’
그래선 흡혈귀화하기까지 약 1년이라는 라켈의 예상도 얼마나 믿을만한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오토의 그 분노와 불만은 금세 없어진다. 라켈이 적잖이 불만스레 뒤이은 말에 의해.
“피의 융합에 의한 영향… 즉 흡혈귀화를 억누르면서, 융합에 의한 강화만은 취할 수 있도록 조정되어 있어. 그러니 피의 융합은 진행돼도 흡혈귀화는 진행되지 않고, 이대로 융합이 계속되면 나오토는 자연스레 강해지기도 한다는 거야.”
엥, 하고 나오토는 힘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까지의 분노가 빵 하고 터져 사라진다.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해. 아버님이니까.”
시원스레 내뱉은 대답은 설명다운 설명은 한 조각도 없었지만,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다. 과연 하고 나오토는 신묘한 기분으로 신음한다.
라켈은 안고 있던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표정은 평소의 담담한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삐진 어린애처럼도 보인다. 토라진 거겠지. 자신이 만든 팔을 멋대로 아버지에게 개조당해서.
라켈의 이런 구석에 호감이 생긴다.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속으로 쓴웃음 짓고, 나오토는 떠오른 말을 입에 담는다.
“그럼, 스피너랑도 의외로 제대로 뜰 수 있는 거 아냐?”
지금도 나오토의 신체는 평범한 인간이라곤 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있다. 며칠 전에 학교 복도에서 놈과 조우했을 때완 결과가 다르지 않을까.
하지만 라켈은 고개를 들어 똑똑히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야.”
지극히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공투하는 거야.”
“공투?”
농을 던질 수 없는 공기에, 나오토도 진지하게 표정을 굳혀 좁은 욕조 안에서 기분 정도로만 자세를 고쳤다.
이쪽을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에, 나오토의 곤혹스런 듯한 얼굴이 비친다.
타인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 같은 눈동자는 이쪽을 더욱 바라보며 긍정하는 대신 깜박였다.
“싸우는 건 당신만이 아니야. 나도 싸울 거야. 안 그러면… 못 이길 테니까.”
침착하면서도 날카로운 선언은, 흔들림 없는 진실의 색을 띄고 있었다.
못 이긴다.
그 단언을 부정할 수 있을 정도의 자신감과 어리석음을, 나오토는 지니고 있지 않았다. 라켈이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확실히 스피너에겐 못 이긴단 거겠지.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이후로도,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나오토.”
반향을 두르고 라켈이 속삭인다. 안고 있던 무릎을 놓고, 욕조 바닥에 손바닥을 짚어 미끄러지듯 몸을 내밀었다.
“윽…”
나오토가 멋대로 경계선을 그어 둔 욕조 중앙을 넘어, 몸을 갖다 대듯 가까워진다. 라켈은 지근거리에서 나오토를 들여다보듯 올려보며, 나오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따듯한 손.
거기에 인간과 똑같이 피가 통한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의 하얀 뺨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약속해줘. 반드시 『아오』를 손에 넣겠다고.”
가늘게 열린 입술에서 새어나오듯, 나오토의 가슴속에 직접 흘려 넣듯, 신비로운 울림을 동반해 목소리는 속삭인다. 흡혈귀라는 마성이면서도 어딘가 청렴한 목소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알지 못하기 때문인가.
가슴가의 피부를 간질이는 따듯한 공기가 라켈의 숨결인지, 욕탕의 증기인지 알 수 없었다.
“아…안다고. 안 그럼 이것저것 큰일이잖아. 손에 넣을 수밖에 없다고.”
방울져 떨어질 듯한 금색 눈동자로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되어, 빨려들 것 같았지만 간신히 버티는 기분으로 나오토는 대답했다.
왠지 평소와 상태가 다른 것 같았다. 라켈답지 않다. 이상하게 연약한, 의존하는 듯한 몸짓과 목소리다.
라켈의 손이 나오토의 가슴 위에서 미끄러진다. 인간으로서의 육체인, 왼팔에 매달리는 듯.
“당신은 내 하인. 말하자면 소유물이야. 당신은 내게 종사할 의무가 있어. 그러니까…”
이제껏 없었던 열을 띄고 말하는 모습은, 욕탕의 열기에 감싸여 촉촉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나오토는 약간 몸을 당겼다. 아주 약간 변한 각도에 균형이 무너진 것처럼, 라켈의 몸과 코끝이 또 가까워졌다.
나오토의 바로 눈앞에서, 라켈의 눈동자가 깜박인다. 반짝이는 금색은 젖어 있었다.
“나를 위해 싸우고, 나를 위해 『아오』를 손에 넣고… 그리고, 나를…”
라켈의 말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을 생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오토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건 이미 어찌되든 좋았다.
라켈은 입술을 떨며 말을 멈추고, 그대로 빨려들 듯… 욕탕 안으로 얼굴부터 쓰러졌다.
기절했다.
탕에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약간 연 창문으로 시원한 밤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밤은 이미 거의 다 지나 차라리 아침에 가까울 정도. 바깥에선 사람 목소리 따위 하나도 들려오지 않는다.
조용해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차분한 밤. 평소엔 이미 침대에 들어가 이불의 주민이 되어 있을 즈음.
나오토는 머리가 멍할 정도의 잠기운을 안고, 끝없이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여름에 역 앞 파칭코 가게에서 나눠주던 거지만, 이렇게 계절이 바뀌고야 도움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너무 강하지 않도록 신경 쓴 바람을 맞으며 일본식 방에 깔린 이불 위에 힘없이 쓰러져있는 건 라켈이다.
나오토가 어찌어찌 입힌 파자마 차림으로, 흡혈귀 주제에 뺨을 새빨갛게 상기시킨 채 현기증을 앓으며 눈썹을 좁히고, 아까부터 가느다란 목소리로 신음하고 있다.
“으~…으으, 이럴… 수가… 내가, 이런 추태를…”
그러게 말이야, 하고 나오토는 부채를 움직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오토의 눈에는, 뒹구는 라켈 머리 위에 8자리나 늘어선 심상찮은 수치가 보이고 있었다.
아마 입욕 전보다 상당히 내려간 상태일 것이다. 그저 이렇게나 수치가 크니, 낮은 쪽 자릿수는 인상에 남질 않아서 얼마나 약해진 건지 판단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할 수 있다.
그만한 생명력을 가진 인간이 아닌 자, 흡혈귀. 그게 탕 현기증이라니 웬 말인가. 이런 터무니없는 생명력을 가지고도 어지러워 쓰러지고 그런다는 건가.
감탄과 기막힘이 지금의 나오토를 움직이고 있었다.
“네, 네. 됐으니까 이만 주무셔. …제발 주무세요…”
그리고 이제 좀 자게 해줬음 한다.
시곗바늘은 4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오토는 한숨을 쉰다.
날 밝으면 학교, 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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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ㅇ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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