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4
한동안 소리도 감각도 멀어진 채, 나오토는 이리저리 깨져 당장이라도 구멍이 뚫릴 듯한 콘크리트의 크레이터 중심에서 허억 허억 온몸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혈관이 파열되어 피가 뿜어져 나온 착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땀이 흘러 뺨과 등을 적셨다. 여기저기선 확실히 피도 흘렸지만, 이제 어디까지가 땀이고 어디부터가 피인지 모르겠다.
귀 안쪽에서 새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호흡에 맞춰 희미하게 위아래로 움직일 뿐이었던 멍한 시야가 서서히 선명함을 되찾는다.
주변은 밤이었다. 하늘에는 둥근 달이 은인지 금인지 모를 빛을 두르고 떠 있었으며, 그 부드러운 빛이 어두운 옥상을 약하게 비춘다.
온갖 방향으로 몰아치는 바람은 차가워 이미 한계에 가까운 몸엔 굉장히 기분 좋게 시원했다.
“맞, 다…”
뺨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에서 발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오토는 이제야 느릿느릿 사고를 다시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어깨너머로 뒤쪽을 돌아본다.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크레이터 가장자리 근처에서 라켈이 주저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무릎엔 소녀의 얼굴이 얹혀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눈을 감고 힘없이 늘어진 사야의 연분홍빛 기모노가 완전히 지저분해져있었다.
저거 제법 비쌀 텐데, 아깝게스리. 상황에 맞지 않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오토는 어색한 발놀림으로 크레이터에서 빠져나온다.
“고마워, 라켈.”
옆까지 가서 나오토는 피식 쓴웃음 지었다.
사야가 살아있다는 건 나오토의 눈엔 일목요연했다. 보통 인간에 비하면 상당히 낮지만, 잠든 사야의 머리 위엔 충분한 생명력 수치가 떠올라있었다.
사야도 나오토와 마찬가지로 라켈이 지켜준 것이리라. 빤히 이쪽을 올려다보는 커다란 금빛 눈동자에 나오토는 몸둘 바를 몰랐다.
“아―, 그 뭐냐…, 너는 괜찮냐?”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라켈 쪽이다. 나오토는 입가를 비틀며 묻는다.
라켈의 머리 위에 떠있는 숫자는 상당히 줄어있었다. 아무래도 소울 이터에 의한 생명력 흡수는 멈춘 모양인지 숫자의 감소도 정지했다. 하지만 8천만은 되던 수치는 이미 1천만대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것이 흡혈귀에게 있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 건지 나오토는 모른다. 하지만 한 번에 그렇게 줄어들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리도 없다.
실제로 라켈은 벌레와의 전투 중 상당히 괴로워 보였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 쉬려고 할까. 그런 나오토의 생각을 배반하듯 라켈은 슥 하고 사야를 콘크리트 바닥에 눕히고 태연하게 일어섰다.
“괜찮아. 그보다 나오토. 이 아이를.”
“어, 어어.”
말하고, 라켈은 나오토의 옆을 지나치듯 걷기 시작한다.
어쩔 셈인가. 맡기는 듯한 어조에 이끌려 사야의 옆에 서서 나오토는 걷는 라켈의 동향을 살핀다.
라켈이 향한 것은 건설 중인 빌딩 옥상에 내던져진 거대한 벌레의 시체다.
힘을 잃고 이미 꼼짝도 않는 시체 아래엔, 인간의 상반신이 있었다. 나오토가 던진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깔린 스피너였다.
가볍게 뛰어 크레이터를 넘고 라켈은 엎드린 자세의 스피너 옆에 내려선다.
나오토가 있는 곳에서 라켈과 스피너가 있는 곳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크레이터를 끼고 20미터 전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광경은 나오토에겐 어딘가 경계선 저편 같이 느껴졌다.
“당신의 패배야. 스피너 스페리올.”
배부터 그 아래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에 짓눌린 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스피너를 향해, 라켈은 조용히 고했다.
나오토는 완전히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다. 라켈은 스피너에게 노려지고 있었지만, 라켈 본인도 스피너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목적은 스피너가 가진 아오에 관한 다양한 정보.
라켈은 그것을 그 남자에게서 캐낼 생각인 듯하다.
내팽개쳐진 스피너의 손이 아슬아슬 닿지 않는 위치에 선 라켈을 스피너는 쓰러진 자세 그대로 목만 뻗어 가까스로 올려다보았다.
“아니요…”
호흡조차 압박당하고 있을 텐데도 스피너는 마치 고통스럽지도 않다는 듯 유연하게 대답했다. 그 입가엔 얕은 웃음마저 떠있다.
진 걸 분해하는 표정이 아니다. 라켈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좁혔다.
그 모습이 눈부시기라도 하다는 듯 스피너는 가느다란 눈을 가늘게 뜬다.
“아니요, 라켈 알카드. 당신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저는 당신을 이길 생각 따위 없습니다. 그런 당찮은 생각이 있을 리가 없지요. 너무나도 송구스럽군요.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혹은 잊어버리신 건가요…. 저는…”
부드럽게 들려주는 듯한 말투에 갑자기 번쩍이는 듯한 불온함이 섞였다.
공기가 흔들린다. 스피너는 웃음을 더욱 짙게 하고, 어딘가 황홀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손에 넣겠다, 고 했습니다.”
스피너가 입술을 움직인 순간, 갑자기 회색이었던 콘크리트 바닥에 스피너의 그림자가 크게 펴졌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라켈의 발치까지 침식한다.
당연하지만 하늘의 달이 그린 그림자가 아니다.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꿀렁 솟아올랐다.
“라켈!!”
뭔가 위험한 것이 있다. 직감의 경고에 튕기듯 나오토는 날카롭게 외쳤다.
라켈도 마찬가지로 이변을 눈치 챘다. 발치까지 뻗어온 기분 나쁜 그림자에게서 도망치려 발을 뗀다.
하지만 그 발을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무수한 다리가 휘감아 붙잡았다.
“앗…!”
경악하는 라켈의 목소리를 짓누르듯 그림자가 점점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예를 들자면 거미다.
아까 그 거대한 이형의 벌레보다 질량은 다소 부족하지만, 휘감은 꺼림칙한 분위기는 오히려 이쪽이 더했다.
시커먼 몸은 그림자와의 경계선이 애매해 정확한 윤곽이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웅덩이에서 뻗어 나와 콘크리트 바닥을 기어오르려 하는 여덟 개의 다리는 새하얘 잘 보니 살이 없이 드러난 뼈 형태였다.
그 다리가 잘도 꿈틀거리며 라켈을 붙잡아 자신의 안쪽으로 집어넣는다. 뻥 뚫린 그림자 속으로 삼켜버리려 하고 있었다.
“으, 큭…, 뭐야, 이 힘은…!”
뼈다리에 짓눌린 라켈이 빠져나오기 위해 버둥거린다. 하지만 그 발밑이 풍덩 하고 늪 한중간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다.
“라켈! 도망쳐! 빨리!”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오토는 머리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서둘러 달려 나갔다. 여기저기 깨져 불안정한 바닥을 지나 똑바로 라켈에게 향한다.
부상당한 다리가 족쇄라도 된 것 같았다. 상처가 낫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성가신 것이었다니. 어느새 완전히 반쯤 사람이 아니게 된 몸에 익숙해져있던 모양이다.
푹 고꾸라져 넘어질 뻔하면서 반쯤 구르듯 나오토는 힘껏 팔을 뻗었다.
그에 라켈도 감옥 같은 뼈다리 사이로 나오토에게 가느다란 팔을 뻗었다.
“나오…”
처음 듣는, 도움을 요청하는 애절한 목소리.
하지만 그것을 중간에 끊고 거미는 여덟 개의 다리를 식충식물의 입처럼 닫아… 그림자 속으로 라켈의 모습을 완전히 삼켜 버렸다.
꿀꺽, 하고 삼키는 소리라도 들릴 것 같았다.
붙잡으려던 대상을 잃어 나오토는 크게 몸을 내민 자세로 바닥에 쓰러진다. 뻗은 손은 공허하게 그림자 가장자리를 긁고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돼…”
지금, 눈앞에서 일어난 사태에 머리가 따라가질 못한다. 나오토는 아연히 눈을 뜬 채 꿈틀거리는 거미 괴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라켈의 모습은 없었다. 금색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
대신하듯 여덟 개의 뼈가 다시 기괴한 움직임으로 입을 열어 그 모습을 거미의 다리로 되돌리자… 라켈을 삼켜버린 그림자가 천천히 거미 위로 기어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는 꿈틀거리다 남자의 형상을 취했다. 스피너다.
이제 보니 거대한 벌레 시체 아래에 스피너의 모습이 없다.
거미의 몸에서 상반신이 자라난 스피너는 꿈틀대는 어둠 속에서 가늘고 긴 팔을 빼내 역시 가늘고 긴 양손의 손가락을 가득 펼쳐 그 손바닥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손에… 넣었다…. 아아, 드디어 내 비원이, 오래도록 바라던 것이…”
한숨과 함께 토해진 말은 단편적이라 마치 오열 사이로 말하는 것 같았다.
감격에 전율하듯 앙상한 손가락을 격렬히 떨며 스피너는 펼친 양손을 가슴에 안는다. 참을 수 없는 유열을 곱씹으며 어깨는 광적으로 움츠러들어있었다.
그 모습은 인간이라 하기 힘든 조형이었다.
상반신은 스피너 스페리올이란 남자의 모습 그대로지만, 하반신이 인간의 모습을 잃고 그림자에서 기어 나온 뼈다리 거미와 동화되어있다.
어중간하게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며 어중간하게 괴물의 모습을 얻는다. 신화 속에라도 등장할 듯한 그 모습은, 나오토에게 혐오감이란 감정의 장절한 차가움을 가르쳐주었다.
“야… 너…, 대체 무슨…, 라켈한테 무슨 짓 한 거야?!”
휘청거리며 일어나 나오토는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혐오감을 떨쳐내며 거친 목소리를 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때 나오토의 의문에 답해주는 건 언제나 라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라켈이 없다. 대신이라는 듯 그녀를 삼킨 기분 나쁜 남자가 나오토의 의문에 대답한다.
“본 그대로다. 라켈 알카드를, 아오에 이르는 열쇠를 거둬들였다. 그녀의 영혼은 내 안에서 천천히 녹아 나와 섞여들어 이윽고 완전히 하나의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과 뒤섞여, 이윽고 미지의 신비에 이르겠지…”
굉장히 멋지고 감미로운 것이라는 듯 스피너는 노래한다. 실제로 그는 마음 깊이 그리 생각하고 있으리라.
“아아, 설마 이렇게 빨리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것도 전부 소울 이터 덕…. 덕분에 라켈 알카드를 붙잡아 집어삼키기 위한 특별한 벌레를 완성할 수 있었으니까요.”
“특별한 벌레…? 윽, 그래, 네놈이 노리던 건 그 덩치가 아니라…”
어떠한 경위로든 접근한 라켈을 바로 집어삼켜 자신과 융합시키기 위한 벌레야말로 스피너가 나오토 일행 상대로 전투 중에도 소중히 기르고 있던 『특별한 벌레』였다.
나오토를 쓰러뜨리는 것 따위 스피너에게 있어선 전혀 중요하지 않은, 여흥 같은 것이었겠지.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발버둥치는 나오토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남자는 생각했을 것이다. 빨리 이쪽으로 와라, 라켈 알카드…, 라고. 입맛이라도 다시면서.
스피너는 크게 양팔을 벌려 하늘을 우러렀다.
“그래…, 내게도 들린다, 내게도 느껴진다…. 문이 보인다. 뒤틀림이여, 지금이야말로 그 입을 열고 나를 인도하라….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는 혼돈스런 공허…, 『경계』로!”
마치 그곳에 고고한 누군가가 있다는 듯 그는 소리 높여 호소한다.
목소리와 말이 힘을 띠고 거미 다리 아래에서 검붉은 마법진을 출현시켰다.
마법진은 둔한 빛을 두르고, 그 빛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의 고동처럼 천천히 명멸한다.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 스피너의 주변을 새카만 안개 같은 것이 얕게 감싸고 있다. 그것들은 점점 스피너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해 허공에서 소용돌이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소용돌이는 서서히 커져간다.
그 광경에 나오토는 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정말 좋지 못한 일이 시작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것이 라켈을 삼킴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라니…, 도저히, 도저히, 타버릴 것처럼, 용서할 수 없었다.
“이 새끼…, 라켈을…, 멋대로 이상한 짓에 쓰지 말란 말야!”
거친 목소리는 자신을 북돋기 위한 것이었다. 고통 따위, 공포 따위 잊어버리라고 움츠러든 자신을 질타해 나오토는 스피너를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다행이 아까 그 감각은 아직 남아있다. 크게 휘두른 주먹은 순식간에 붉게, 라켈의 핏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새빨갛게 물든 나오토의 오른팔은, 표적에 닿기 전에 갑자기 소실되었다.
“…어?”
투둑 투둑, 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아까까진 팔이었던 것이 핏덩이로 변해 나오토의 발치로 떨어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픔도 없이 어깨 앞쪽을 잃은 나오토의 오른팔은 살도 뼈도 없이 새카맣고 요철도 없는 단면을 내비치고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 남은 도움닫기를 멈추고 멀뚱히 서버린 나오토의 복부에 스피너가 재빠르게 팔을 뻗어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다음 순간, 그 손에서 힘이 폭발한다.
“헉…!”
어설픈 펀치 같은 것보다 훨씬 강렬한 충격이 나오토의 복부를 도려내듯 두들겼다. 아래쪽에서 비스듬히 위로 찔러 올리는 듯한 일격은 나오토의 호흡을 1초 동안 완전히 빼앗고 모여 있는 내장을 격렬히 뒤흔들었다.
“콜록, 컥… 우웩, 그헉”
폐인지 위장인지의 경련에 힘이 빠져 나오토는 심하게 숨막혀하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겨우 한 방 맞았을 뿐이다. 그런데 뇌까지 저려 눈물이 고였다.
“놀랄 것 없다, 당연한 것이니.”
배를 움켜쥐고 구토하는 나오토를, 원래부터 키가 컸는데 이형으로 변화한 만큼 그보다도 높아진 장소에서 스피너가 내려다보았다.
주변에 서린 어둠이 좀 더 짙어진다.
“그 오른팔은 라켈 알카드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겠지? 허나 라켈 알카드는 내게 삼켜지며 네놈과의 연결이 약해졌다. 따라서 그녀의 피의 은혜도 힘을 잃었다. 단지 그뿐…”
“큭…, 그렇다면!”
한 번 입술을 깨물고 나오토는 다시 일어섰다. 팔이 없어진 오른편을 축으로 몸을 돌려, 뼈다리를 차 부숴버리려고 다리를 옆으로 휘두른다.
하지만 그 축이 된 다리를 나오토의 발치에서 튀어나온 기괴한 생물이 물어뜯었다.
너무나 갑자기 벌어졌기에 벌레였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저 흘러넘칠 것 같은 둥그런 눈알 하나와, 오싹할 정도로 예쁘게 늘어선 새하얀 이빨만 보였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무언가는 인간의 것과 꼭 닮은 아름다운 치열로… 나오토의 축이 된 다리를 덜컥 물었다.
“윽…”
갑자기 풀썩 하고 무릎에 힘이 빠진 것처럼 나오토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머리는 이해한다.
무인단지에서 팔을 빼앗겼을 때를 떠올렸다.
무겁고 먼 고통이 상실의 충격 너머로 욱신욱신 존재를 주장한다.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나오토는 팔을 잃은 오른쪽 어깨 너머로 자신의 하반신을 보았다.
오른다리의 무릎 아래쪽이 한입에 뜯겨나가 사라져있었다. 한 박자 늦게 잊고 있었다는 듯 걸쭉한 피가 흘러나온다.
내려다보는 스피너의 눈이 비웃고 있었다.
“아까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으시려나? 라켈 알카드와 네놈의 연결은 약해졌다…. 서서히 그녀라는 존재는 나와 동화하려고 하고 있지. …후후, 그녀에게서 받은 은혜는 겨우 오른팔뿐만이 아니란 거다, 우매한 쓰레기여.”
과장스런 억양으로 떨리는 목소리가 비웃음 속에서 자아낸 것은, 진실이었다.
나오토는 라켈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죽은 목숨이었다. 라켈이 구해준 덕분에, 그녀의 피로 된 팔과… 재생능력을 가진 불사자의 몸을 손에 넣었다.
그 연결이 없어졌다면, 나오토의 몸은 더 이상 불사자가 아니다.
낫지 않는 상처는, 잃어버린 다리는, 곧 라켈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있었다.
“웃기지…마.”
엎드려있던 나오토는 무기질 바닥에 손을 대고 강제로라도 일어나려고 했다.
라켈과의 연결이 옅어졌다고 해도, 아니, 옅어졌으니 더욱, 이렇게 자빠져있을 순 없다.
라켈에게서 받은 게 잔뜩 있다. 오른팔이 그렇다. 튼튼한 몸이 그렇다. 하지만 그보다도, 다른 것들보다도, 목숨을 받았다.
나오토가 여기 존재하는 한, 나오토와 라켈의 연결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나오토는 아직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다할 때까진 몸부림치는 게, 목숨 같은 엄청난 걸 공유해주신 『주인님』에게 『하인』된 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은혜 갚기가 아니겠는가.
이런저런 귀찮은 조건까지 붙어서 솔직히 바가지 썼다 싶은 목숨이지만, 그래도 라켈이 있어줬기에 나오토는 오늘도 어제도 『쿠로가네 나오토』로 있을 수 있었다.
이어져있는 한, 더듬어 찾을 수도 있을 터다.
“우오오오오오오오!”
망가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나오토는 바닥에 발을 디뎠다. 무거운 몸을 왼팔 하나로 밀어 올린다.
그 팔을 새카만 턱이 날카로운 이빨로 채갔다.
아, 하고 생각한 순간엔 이미 늦어 나오토는 자신의 피웅덩이에 철퍽 엎어진다.
비릿한 피 냄새에 토할 것 같았다.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을 지탱할 팔은 없었다. 오른쪽은 어깨 아래가, 왼쪽은 팔꿈치 아래가, 다 사라져버려 나오토의 의사에 부응해주지 못한다.
붉은 물웅덩이 속에서 팔도 없이 버르적대는 나오토는, 육지에 던져진 물고기 같았다.
“흠. 제법 봐줄만한 모습이 되었군. 죽어가는 애벌레 같다.”
그다지 재미도 없다는 듯 스피너가 토해냈다. 발치에선 뼈다리가 꼰 다리를 바꿔 꼬듯 메마른 소리를 내며 꿈틀거린다.
나오토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짝 몰린 거친 호흡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이 맛보고 있는 감각 중 어느 것이 아픔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급속히 쇠약해져가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살아있다.
“라켈, 을… 돌려줘…!”
이빨을 악물어 몽롱해진 의식을 되돌리며 나오토는 더욱 피 속에서 버둥거렸다.
그것을 스피너는 차갑게 내려다본다.
“꼴사납군…. 이것이 라켈 알카드가 내게 제시한 조건의 상대라니. 그 몸으로 이해해라. 네놈은 나의 발밑에서 그렇게 뒹구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폐기를 기다릴 뿐인 살아있는 쓰레기란 걸.”
오물을 보듯 스피너는 눈썹을 좁히고 문신의 문양이 닿은 입가에 주름을 만들었다.
땅바닥을 따닥따닥 하고 찌르는 거미 다리 아래에서 진흙 같은 그림자가 뻗어와 남은 나오토의 왼쪽 발목에 감겨든다. 매다는 듯한 자비심 없는 힘으로 구속하고, 말 그대로 쓰레기를 주워 올리듯 나오토의 몸을 거꾸로 공중에 늘어뜨렸다.
“죄 많은 천한 것아, 이것은 벌이다.”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치는 위치까지 높이 들어 올려 스피너는 피로 얼룩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나오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네놈 같은 쓰레기가, 아오에 선택받은 처녀에게 입을 열고, 손을 댔다는 것…”
그림자가 조금씩 붙잡은 나오토의 발목에 힘을 더한다. 뿌득, 하고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1분, 1초. 들이쉬고 내쉰 공기의 무게. 라켈 알카드와 얽힌 네놈의 삶 그 자체가 오점이며 죄다. …편하게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네놈의 더러운 눈은 끝까지 지켜보는 거다…. 아오의 영지에 이르는 내 비원의 성취와, 무력함 속에서 천천히 무너져가는 자신을.”
질척하게 흘러나오는 스피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뼈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붙잡힌 나오토의 몸이 크게 휘둘러졌다. 위에서, 아래로. 죽이기보다 그저 갖고 놀듯 고통을 주는 정도로 힘을 조절해 딱딱한 바닥에 후려쳐진다.
웅덩이가 되어있던 피가 화려하게 튀어 나오토의 얼굴을 새빨갛게 더럽혔다.
다시 들어 올리자 피를 머금어 무거워진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방울이 방울져 떨어진다.
이번엔 가로로 휘둘러져 쇠파이프로 짜인 공사용 발판에 격돌했다. 충격에 무너진 쇠파이프가 등과 머리를 강타했지만, 그다지 아프단 생각은 안 들었다.
머릿속이 감전된 것처럼 멍해진다. 시야가 이리저리 돌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상상도 파악도 할 수 없다.
‘뭐가, 끝까지 지켜봐라…야.’
왔다 갔다 하는 의식 속에서 나오토는 힘없이 욕을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스피너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는 새카만 무언가의 입구 같은 것이 어느새 꽤나 커져있었다. 저게 스피너가 말하는 『비원』인 것일까.
이대로 계속 당하고 있어선 저게 준비 완료될 때까지 살아있을 자신이 없다.
안 된다. 이대론 안 된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어떻게든 해서, 라켈을 구해내야 한다.
‘구해…줘야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의식은 빨려들듯 무겁게 어두워졌다.
――――.
목소리다.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려 하는 의식 속에서, 나오토는 어디선가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다. 여동생을 죽일 셈이냐고, 어디 사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쓸데없는 참견을 한 남자의 목소리.
이번엔 뭐야, 하고 나오토는 생각했다. 한심하다든지 칠칠치 못하다든지, 그런 잔소리를 하러 온 건가 싶었다.
진짜 그렇다. 이게 무슨 꼴인가. 감각도 없는 의식의 늪에 가라앉으며 나오토는 자조한다.
자신은 약했다. 압도적으로. 자신을 도와준 소녀 하나 구하지 못하고 몸속이 헤집어져 죽어간다.
이렇게 끝나는 건 싫은데…, 투덜거리듯 그렇게 생각했다.
――――.
목소리가 무언가 묻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식 속에서마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 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들리지 않는다.
근데, 그렇지. 나오토는 끊어진 실 같은 사고로 생각한다.
도와주겠다면…, 다시 한 번 일어서게 해주겠다면. 덤으로 그 짜증나는 벌레남을 때려눕혀버릴 수 있을만한 힘을 주겠다면, 목소리의 주인이 뭐하는 녀석이던 기꺼이 손을 잡으리라.
이대로 끝이라니, 절대 싫다.
말로 한 것은 아니지만, 어둠 저편을 향해 외쳐주고 싶단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의식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이쪽이 끌어당겨지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하지만 아니다.
육박해오는 누군가의 기척이 바로 근처까지 다가오고, 자신의 모습마저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까만, 새카만 팔이 뻗어와 나오토의 가슴을 툭 하고 강하게 두드렸다.
그 순간, 눈이 뜨였다.
움찔 하고 나오토의 몸이 크게 튀어 떨린다.
축 힘을 잃었을 터인 나오토를 지금 막 바닥에 내리치려던 스피너는 무슨 일인가 하고 제재의 손길을 멈췄다.
이변은 바로 시작되었다. 물어뜯긴 나오토의 왼팔과 오른다리에서 끝없이 방울져 떨어지던 혈액이 멈췄다. 뒤이어, 거기서 시커먼 것이 흘러넘친다.
거친, 까만 안개의 집합체 같은 그것은 마치 정해진 틀에 물을 흘려 넣는 것처럼 매끄럽고 망설임 없이 형태를 만들어 나간다.
시커먼 것은, 잠시 후 팔이 되었다.
계속해서 잃은 다리가 완성된다.
“무슨…”
곤혹의 목소리가 스피너의 입에서 흘렀다.
그 목소리가 들린 것인지, 팟 하고 나오토의 눈이 열린다. 하지만 그 눈은 날 때부터 나오토가 가지고 있던 희미하게 갈색이 섞인 검은색이 아니다.
눈은 붉게… 넘친 핏방울이 깃들기라도 한 듯 붉게 변해있었다.
스며들듯 피투성이였던 검은 머리칼이 하얗게 물든다.
몸이 움직인다. 변모한 나오토는 팅 하고 실이 튕기듯 상황을 이해하고 허공에 매달린 상태로 몸을 구부려 일으켰다.
발목을 붙잡은 질척한 그림자를 되찾은 팔로 붙잡아 강제로 당긴다. 그러자 뚝 하고 찰흙이라도 잡아 뜯는 듯한 감촉으로 그림자는 떨어져나갔다.
강제로 자신을 해방시킨 나오토는 바닥까지의 짧은 거리 사이에서 몸을 뒤집어 고양이처럼 손을 짚어 착지해냈다.
착지를 노리고 스피너의 그림자에서 까만 벌레가 튀어나온다. 되찾은 새 팔을 빼앗으려 벌레는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댄다.
하지만 그 벌레를 나오토는 용수철처럼 움직인 주먹 하나로 분쇄했다. 그 손을 대고 튕기듯 일어나 망설임 없이 간격을 좁힌다.
높이 차올린 나오토의 다리가 스피너의 어깨에 발꿈치를 떨어뜨렸다.
도끼로 내려치기라도 하는 듯한 기세의 그것을 스피너는 되받아치려 했으나 채 막아내지 못하고 무겁게 몇 걸음 거미의 뼈다리로 물러났다.
아주 약간 벌어진 거리를 끼고 나오토는 팔을 크게 휘둘러 뒤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확 펼친 손바닥에 검붉은 것이 모인다. 질척한 질감은 아까까지 나오토의 어깨가, 허벅지가 토해내던 피와 굉장히 비슷했다.
진동하는 붉음은 가느다란 자루를 만들고, 그 끝에 커다란 날을 달았다.
거대한 낫이 생겨났다.
그 자루를, 나오토의 새카맣게 물든 팔이 틀어쥐었다.
“블러드엣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 스피너의 입이 경악한 음색으로 내뱉었다.
흘러나온 그 이름대로, 나오토가 손에 든 그것은 틀림없이 피의 칼날.
피로 물든 칼날.
다음 순간, 눈 깜박임보다도 빠르게 나오토의 낫이 번뜩였다. 호를 그리며 허공을 가른 낫은 깊게 스피너의 몸에 파고들어 그 살과 뼈를 단숨에 베어낸다.
숨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검은 남자의 가슴에서 튀었다. 축축한 소리를 끌며 낫은 기세 좋게 검게 삭은 혈액을 주변에 흩뿌린다.
다시 일격. 일격. 일격. 일격. 찢어발기듯 낫은 참격을 반복해 스피너를, 스피너였던 것을 일말의 자비도 없이 잘게 다졌다.
몇 번째인가의 참격에 떠밀려 스피너의 몸은 크게 휘청거리며 후퇴했다. 몇 번이나 낫에 당한 건지, 펼쳐지듯 몸을 받치던 8개의 뼈다리는 3개만을 남기고 원형을 잃은 뒤였다.
“커…억”
물러난 스피너는 다리를 끌며 더욱 물러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베인 상처가 몇 개나 교차해있는 건지 모르겠는, 아직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불가사의할 정도로 맹공에 썰린 몸은 엄청난 양의 피를 뿜어내 그의 하얀 손을 물들이고 있었다.
스피너의 피는 시커멓다. 먹을 섞은 듯한 피는 이형의 하반신으로 흘러 떨어져 깨진 뼈다리를 적신다.
벌레를 쏘아내는 것도 그림자를 조작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인간에게 가능한 움직임을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단 말을 체현해내는 듯한 기세의 맹공은 스피너에게 어떠한 저항도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이 이 무력한 소년을 바꾼 것인가, 스피너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다. 아직도 자신의 몸에 내려진 무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한 스피너의 눈앞에 가볍게 뛰어 단숨에 거리를 좁힌 나오토가 엄습한다.
새카만 팔에 새카만 다리, 하얀 머리에 붉은 눈동자.
“…어둠에, 먹혀라…”
살짝 열린 입술이 툭 내뱉는다. 그 중얼거림에 이끌렸다는 듯 그때까진 무언가에 씌인 것처럼 무표정했던 나오토에게 감정의 열이 떠올랐다.
“이… 벌레 새끼야아!!”
분노에 눈을 치켜뜨고 짐승 같은 살의를 담아 울부짖는다.
한층 더 크게 휘둘러진 낫이 붉게 붉게 밤을 베어 가른다. 아래에서 비스듬히 위로. 피의 칼날은 깊이 육체에 파고들어 검은 남자를 찢고 헤집었다.
“끄흑, 컥, 아아아아아, 아아아아!”
스피너의 입에서 일그러진 비명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도, 왈칵 넘쳐 자신에게 쏟아지는 검은 피에도, 나오토는 의식을 향하지 않았다.
나오토는 손에 든 피의 낫을 내던지고 눈앞에 비스듬히 난 스피너의 베인 상처에 팔을 찔러 넣는다.
거기 있는 건 생물적인 근육이나 뼈가 아니라, 시커먼, 그저 시커멀 뿐인 어둠이었다. 그래서 더욱 나오토는 바로, 단순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안에 라켈이 있다―고.
처음 한 순간은 살 같은 감촉이 있었지만, 곧바로 팔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스피너의 몸 두께보다도 명백히 깊은 어둠 속을 나오토는 신경 쓰지 않고 휘저어 목적한 것을 찾는다.
목을 뒤로 젖히며 신음하는 스피너의 온몸에서 그림자 팔이 뻗어나와 나오토의 팔과 어깨를 붙잡았다. 떼어내려는 게 아니라 삼켜버리려고 무수한 팔은 나오토를 균열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그 필사적인 힘에 저항하며 더욱 안쪽으로 팔을 집어넣자.
나오토의 손끝에 매끈한 피부의 감촉이 스쳤다.
‘찾았다―’
겨우 한 순간의 촉감. 하지만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나오토는 깊이, 어깨까지 스피너의 몸속으로 가라앉혀 열심히 팔을 뻗어 찾은 것을 끌어안았다. 잘 아는 질감의 가늘고 화사한 허리. 들러붙는 진흙 같은 어둠 속에서 나오토는 그것을 확실히 가슴에 안는다.
“라켈…, 이리 나와, 라켈!”
강하게 뒤흔들듯 외친다. 머리든 옷이든 팔이든 미친 듯이 잡아당기는 그림자 팔을 반대로 뜯어낼 기세로 꽉 힘껏 몸을 당기고….
“너 같은 놈한테…, 넘길 것 같냐아아아!”
맨몸으로 남아있는 왼다리로, 나오토는 있는 힘을 다해 스피너를 걷어찼다.
5
―라켈은, 보고 있었다.
듣고 있었다. 느끼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전부, 그 오감을 동원해 잡아내고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힘을, 자신을 안은 팔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꽉 닫힌 어둠 속에서 자기인식마저 애매해져있던 『라켈 알카드』는, 강인한 힘에 끌려나와 다시금 자신의 눈으로 하늘의 달을 보았다.
예쁜 보름달이다.
그때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은 틀림없이 『그』를 고른 것이라고―.
…한 순간,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고 나오토가 눈치 챈 것은 바보 같이 요란스런 자신의 숨소리에 자기 자신이 흠칫했기 때문이다.
“읏, 하아, 하아… 씁, 하… 허어, 헉… 하, 하, 하아, 하…!”
이런 엉망인 페이스로 호흡해봤자 숨이 진정될 리가 없다. 묘하게 냉정한 사고완 반대로 몸은 어깨가 크게 오르내리며 필사적으로 산소를 마시려고 했다.
나오토는 바닥에 거의 쓰러져, 하지만 상체를 약간 들어 올려 웅크리고 앉는 듯한 자세로 있었다.
몸은 무겁고 감각도 둔하고, 온몸이 풀어져나가 뿔뿔이 흩어진 것처럼 엄청난 피로감에 짓눌려 있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사실만은 명확하게 알았다. 이렇게 숨 막히는 죽음이 있겠는가.
서서히 몸이 정상적인 호흡법을 떠올린다. 꽉 메여 긴장되어있던 근육이 천천히 이완되자… 나오토는 팔 안에 금색 머리칼의 소녀가 있는 것을 눈치 챘다.
라켈이다.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이 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숫자가 보인다. 1천만대라는, 평소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낮은 숫자지만 분명히 살아있다.
“…처참한 몰골이네.”
나오토의 팔 속에서 작게 꿈틀거리고 라켈이 조용히 눈을 떴다. 커다란 금색 눈동자로 올려다보고, 한 번 깜박. 인형처럼 긴 속눈썹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잘 보였다.
기껏 구해줬더니 처음 하는 말이 이렇다니. 나오토는 터뜨리듯 쓴웃음 지었다.
“남 말할 처지 아니지 않냐.”
라켈은 나오토의 피와 스피너의 피와 벌레의 체액 등등으로 더렵혀져 그야말로 참담한 꼴이었다. 너덜너덜한 리본은 아직 그녀의 머리칼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지만 말끔히 정리돼있다고는 하기 힘들다. 하얀 뺨엔 핏자국인지 뭔지 검댕이 묻어 있었다.
라켈은 질렸단 듯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나오토의 가슴을 살짝 밀고 휘청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켜 아까까지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몸을 내려다본다.
“처지 맞아. 적어도 당신보다는 훨씬 멀쩡한걸.”
“…아―”
그 말을 듣고 다시 스스로 자신을 내려다본 뒤 나오토는 신음하듯 목소리를 흘렸다.
확실히 처참한 몰골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겨우 눈치 챘다. 팔과 다리가 없다. 아까까지 새카만 무언가로 메워져있던 왼팔과 오른다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다.
그 대신이라도 된다는 듯 라켈의 피로 만들어진 오른팔만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오른팔이… 돌아왔네.”
“당연하지. 당신 오른팔이 사라진 건 내가 스피너에게 삼켜진 탓이었지. 당신이 거기서 날 다시 빼냈으니 원래대로 돌아온 거야.”
동시에 나오토에겐 재생능력도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라켈이 스피너에게 삼켜진 동안 입은 부상은 재생능력을 가지고도 고쳐지지 않는다. 라켈과의 연결이 끊어져있던 나오토는 그 때 『그냥 인간』이었다.
인간이었을 때 입은 상처는 재생되지 않는다. 가장 처음 나오토가 스피너의 사도와 조우했을 때 빼앗긴 오른팔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맞다, 스피너!”
라켈이 입에 올린 이름에 나오토가 튕기듯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을 떠받치려던 오른팔은 나오토의 체중을 견디는 게 고작인지, 상체를 일으킨 것만으로 경련하며 떨려와 그 이상 몸을 밀어 일으킬 수 없었다.
나오토 대신 라켈이 휘청거리며 뒤돌아본다.
나오토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그녀 너머로 몸을 웅크린 검은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뭐…야?”
순간 나오토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거기 있는 자를… 아니, 있는 것을, 스피너 스페리올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거미 모습을 한 하반신은 너무 익힌 고기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주저앉듯 바닥에 들러붙어있다. 그 중심에서 검은 옷차림의 남자가 등을 구부려 자신을 끌어안듯 하고 있었다.
앙상한 가느다란 어깨에 가늘고 긴 팔, 기분 나쁠 정도로 허연 피부, 지금은 흐트러져있지만 쓸어 붙여두었던 회색 머리카락. 용모의 특징은 스피너 그대로다.
하지만 그 몸 여기저기가, 마치 안쪽에서 무수한 벌레가 날뛰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팔도 가슴도 등도 상관없다. 관절이나 장기의 위치를 무시하고 누글누글 형태가 일그러지는 그의 몸은, 이미 살도 뼈도 없는 점착질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끄, 오…오오오오오오호오오오어어어억!”
사람의 목에서 나는 소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 원령 같은 포효가 울려 퍼진다.
그것은 괴로운 비명이었다.
스피너의 몸이 작게 떨린다. 그의 몸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메마른 모래 산이 바람에 쓸려 조금씩 깎여나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무너진 그의 몸은 검은 먼지가루가 되어 뒤쪽에 아직 남아있던 그 검은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폭주하고 있는 거야.”
동정과 멸시의 딱 중간인 목소리로 라켈은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가 열려고 하던 것은 『경계』라 불리는, 다른 시공으로 이어지는 문이야. 하지만 그건, 그가 나를 삼킨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일…. 당신이 스피너에게서 강제로 나를 떼어놓은 바람에 그는 열리려는 문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존재 째로 삼켜지려 하는 거야.”
저렇게 되고도 살아남을 자는 없을 것이다. 라켈의 말을 전부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은 나오토에게 무엇보다도 강렬히 남은 인상은 그런 부분이었다.
이쪽 대화가 들린 모양이다. 목을 쭉 뻗듯이 하여 스피너가 고개를 들었다.
나오토의 호흡이 희미하게 움츠러든다.
들려 올라온 건 틀림없이 스피너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몸은 이미 옷과 육체의 경계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물들었는데 얼굴만 이상하리만치 하얗게 보여 마치 까만 부정형 몸에 하얀 얼굴만 달아놓은 것 같았다.
얼굴과 같이 검게 물들지 않고 허옇게 남은 손목 앞쪽이 가늘고 긴 것을 더욱 가늘고 길게 잡아 늘인 듯한 팔을 끌며 이쪽으로 뻗어온다.
주욱 하고 크게 앞으로 나섰다. 그를 걷게 하는 건 사람의 발도 아닐뿐더러 거미 다리도 아니다. 부글부글 꿈틀거리는 부풀어오른 그림자 덩어리다.
“아오를… 돌려줘”
아까 그 비명처럼 저주스럽게 노래하는 그 목소리는 원래 스피너의 목소리와 달리 뒤틀리고, 탁해지고, 꼬여 있었다.
“돌려줘… 돌려줘, 돌려줘, 그건 내 거다, 내 아오다…!”
『아오』라고 부르며 스피너는 탁한 눈으로 라켈을 응시한다.
거리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라켈은 다가오는 스피너에게서 반쯤 반사적으로 몸을 멀리했다.
하지만 그 작은 손이 일어나지 못하는 나오토에게 닿자, 한 순간 돌아보곤 결심을 굳힌 듯한 얼굴로 이형의 남자를 다시 향했다. 뛰어오르듯 일어선다.
몸을 지지하는 발밑은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휘청이고 있었다.
나오토와 달리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쇠약해져있을 터다. 하지만 그 몸을 방패삼듯 라켈은 나오토를 등 뒤로 감싼다.
“윽, 바보냐! 됐으니까 도망쳐!”
애초에 노려지는 건 라켈이 아닌가.
대체 뭐 하는 거냐고 질타하는 나오토를 돌아보지 않고 라켈은 강한 표정을 지어 흥 하고 코를 울린다.
“얕보지 마…. 자기인식도 잃어버린 마술사 하나쯤, 아무 문제도 안 돼.”
“거짓말! 너 웃기지 말고 빨랑 튀어 도망이나…”
그러지 않는 건,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으니까. 알고 있으면서도 나오토는 거칠게 외쳤다.
스피너의 몸이 격하게 떨린다. 발치에서 몸 천체로 퍼진 떨림에 재촉받기라도 한 듯 놈의 몸이 크게 펼쳐졌다. 두께를 짐작하기 힘든 몸 안쪽에서 흙탕물을 튀기듯 갈비뼈 같은 것이 튀어나와 벌어진다.
펼쳐진 팔인가, 크게 열린 아가리인가. 튀어나온 뼈는 예리한 끝부분을 먹이를 포식할 기대에 떨었다.
“먹는다, 먹는다먹는다먹는다먹는다먹는다먹는다먹는다! 아오에 이르는 열쇠다 내 열쇠다 숭고한 지식의 심연으로 이끄는 고결한 그 손을 만지지 마라 천한 피가 아오를 더럽 내 손에야말로 아오는 어울린다 내 아오다 아오 아오다아 다 오, 아오, 아오… 반복되 윤회의 끝 에 창조 는 진 을 이 눈에 는 거다!”
기묘하게 끊기기 시작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스피너는 라켈과 나오토를 덮치듯 달러든다.
라켈은 양손을 내밀고 자세를 잡았다. 바람을 부른다. 모이는 건 미약한 바람뿐이다.
아담한 바람의 저항을 뿌리치고 스피너는 튀어나온 갈비뼈의 이빨을 내밀어….
그 포식을, 어디선가에서 날아든 무수한 검이 제지했다.
“가아 아아아아악!”
하얀 윤광을 띤 검은 사방팔방에서 스피너에게 쏟아져 내려 원형을 잃어가는 시커먼 몸을 잿빛 바닥에 꿰매버렸다.
무겁고 축축한 소리가 지저분하게 퍼지고, 그것과 몹시 비슷한 비명이 스피너의 옥죄인 입에서 흘러 퍼진다. 거의 뼈처럼 가늘어진 손가락을 분노로 떨며 스피너는 목에 무수한 힘줄을 드러내고 하늘을 우러렀다.
“네… 이년, 모자이크…”
부글부글 하고 입가에서 시커먼 피로 거품을 내며 스피너가 신음한다.
그 목소리에 이끌려 나오토와 라켈도 똑같이 하늘로 얼굴을 향했다.
둥근 달이 둥실 떠있는 밝은 밤하늘에 긴 금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히카가미 키이로가 서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나오토 일행이 기억하는 그녀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언제나 움직이기 편하게 모아 올린 머리카락은 뒤로 흘려 넘기고, 지적임보다도 요염함을 연출하던 가느다란 안경은 벗고 있다. 트임이 깊은 타이트스커트가 눈을 끌던 섹시한 양복 차림은 여기에 없고, 대신에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온몸에 꼭 맞는 흰색과 노란을 기조로 한 바디 슈트였다.
마치 갑옷 같은 금속 부품이 몇 개씩이나 달라붙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건 팔과 다리에 붙은 커다란 부품이었다. 지금 막 스피너를 향해 쏘아내던 검과 꼭 닮은 형태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상했다.
목 위에 붙어있는 것이 키이로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무슨 SF영화에서 튀어나온 로봇 같은 것인 줄 알았으리라.
나오토나 스피너의 머리보다도 높은 위치에서 키이로는 적자색 눈동자에 명확한 살의를 품고 스피너를 내려다보았다.
“그 이상 더러운 손으로 나오토 군을 건드리는 건 용서할 수 없어.”
내찌르듯 차갑게 말한다.
직접 들은 게 아닌데도 몸이 떨려오는 음색이었다. 그리고 음색 이상으로, 거기 담긴 살의는 생명을 위협받는다는 공포를 일으킨다.
하지만 스피너는 키이로의 찌르는 듯한 눈빛도 냉혹한 목소리도 전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가슴팍을 쥐어뜯으며 탁한 신음으로 목을 울렸다.
그 표정은, 아까까지의 기어오는 듯한 불쾌함으로 가득한 신사의 모습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성이라 부를 것이 이 검게 삭은 덩어리가 된 스피너에게 얼마나 남아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스피너는 흐려진 목소리를 드높이며 하늘에 떠있는 키이로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높이 뻗어지려던 그 몸을 향해, 키이로는 혐오감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검 같은 부품이 달린 팔을 내민다.
그녀 주변의 공간이 수면처럼 무수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 속에서 하얀 빛을 띤 검이 나타난다. 빛의 검은 방금과 같이, 하지만 그 수를 곱절 이상으로 늘려 일제히 스피너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몇 겹이나 겹쳐진 참격음이 무겁고 축축한 소리를 흩뿌리며 스피너의 단말마마저도 지워버린다.
온몸에 검을 맞고 스피너는 한동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저항할 순 없었던 모양인지 그 몸은 강하게 강하게, 뒤쪽으로 밀려난다.
스피너가 만들어낸 검은 소용돌이가― 『경계』로 이어질 터였던 문이, 힘의 폭주에 잡아먹힌 마술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 아, 아아… 가, 아아아아하아아…!”
의미를 갖지 않는 목소리로 삐걱거리며 스피너는 스스로 뚫은 뒤틀림 속으로 빨려들어 사라졌다.
그대로 문은 서서히 수축되어 이윽고 소리도 없이 소멸한다.
이리저리 흩뿌려진 시커먼 피만이 스피너가 불탄 자리처럼 남고, 주변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하…”
어느 샌가 숨이 멎어 있어 나오토는 풀썩 어깨를 떨어뜨리며 가슴에 고여 있던 숨을 토해냈다.
갑자기 힘이 빠져 열심히 몸을 받치고 있던 오른팔이 항복한다. 주륵 하고 머리를 콘크리트에 문지르며 나오토는 그 자리에서 하늘을 보며 쓰러졌다.
“아―…. 이, 이제, 됐지…?”
실없이 스스로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말이 새었다.
하늘을 향한 시선 끝에서 나오토는 기묘한 모습의 키이로를 발견한다. 눈이 마주치자 키이로는 굉장히 괴롭다는 듯이 눈썹을 좁히며 미끄러지듯 나오토 옆으로 내려왔다.
“나오토 군…!”
주저앉듯 무릎을 대고 몸을 내밀어 바디 슈트로 감싸인 양손으로 나오토의 얼굴을 붙잡는다.
“미안해, 늦어서…. 아아,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되다니, 내가 좀 더 빨리 왔으면, 이렇게… 이렇게 다치게 두지 않았을 텐데!”
지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하고 키이로는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감정적으로 목소리를 떨었다. 그리고 결국엔 감격한 듯이 나오토의 머리를 꽉 가슴에 안았다.
바디 슈트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유방의 감촉에 놀란 나오토는 무심코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키이로의 몸을 밀어냈다.
“아 좀 놔봐, 진정하라고…. 와준 거야 고맙긴 한데 그런 건 나중에…”
“아니. 나중에 못 해.”
달래는 듯한 나오토의 부탁을 키이로는 그때까지의 태도를 잘라버리듯 똑바로 거절했다. 가로로 저은 고개는 라켈을 향해 멈춘다.
빤히 바라보는 눈빛은 책임을 묻는 듯 격렬함으로 가득하다.
“라켈 알카드…”
확 낮아진 위협하는 듯한 목소리에 그때까지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던 라켈이 움찔 하고 어깨를 경직시켰다. 도망치듯 시선을 발밑으로 향한다.
움츠러드는 라켈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노려보며 일어나 키이로는 팔에 달린 검 같은 부품 끝을 똑바로 들이댔다. 겉보기 이상으로 날카로운 날 끝은 라켈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다.
“이 이상은 간과할 수 없어. 넌 나오토 군을 불행하게 만들어…. 괴롭히고, 상처 입혀.”
“윽…”
날 끝만큼이나 날카롭게 찌르는 키이로의 말에 라켈은 작게 숨을 삼켰다. 한 번 도망친 시선을 들어 올려 키이로를 바라본다.
그녀가 하려는 말을 그 눈빛과 목소리에서, 무엇보다도 조금도 숨기지 않는 살의에서 눈치 챘다.
“넌 나오토 군을 지킬 수 없어. 그렇다면 내가… 나오토 군을 지키겠어. 너를 죽이고, 나오토 군을 내 것으로 만들겠어!”
“뭐… 뭘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너! 그딴…”
나오토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오토의 제지 따위 신경 쓰지도 않고 키이로는 팔을 내민 채 자기 주변에 무수한 검을 소환했다. 바로 전 스피너를 잘게 다진 것과 같이.
“야, 기다려! 멈춰!”
“큭…”
“쿠로가네 나오토는 안 넘겨줘!”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 노력하는 나오토의 시선 끝에서 라켈이 떨면서도 자세를 잡는다. 막아낼 힘도 피할 힘도 남아있지 않으면서.
키이로의 목소리에 반응해 검이 일제히 쏘아졌다. 몇 개나 되는 칼날이 차가운 공기를 가른다.
나오토의 등골에도 오한이 달린다.
…그 순간, 부드럽게 흔들린 밤공기가 키이로와 라켈 사이에 끼어들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건 길고 찰랑찰랑한 검은 머리칼에 하얀 달빛을 띄운 붉은 눈동자의 사내였다. 라켈에게 쏘아진 검 전부를 슥 내민 손 하나로 허공에서 정지시키고 입가엔 희미한 웃음마저 띠고 있다.
그 용모를 보고, 키이로가 경악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등장은 만에 하나로도 예상하지 않은 모양이다. 날카롭게 삼킨 숨이 떨리는 목소리가 되어 키이로의 살짝 열린 입술에서 흘렀다.
“클라비스… 알카드…?!”
그것은 키이로가 소속된 미츠루기 기관이 오래도록 목숨을 노려온 괴물 중의 괴물의 이름이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도 꼬리를 잡지 못하고, 겨우 며칠 전 고액을 지불해 고용한 용병 두 명이 접촉했다 싶었더니 결국은 이렇다 할 정보도 없이 놓쳐버린 인물.
그것이 당당하게도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데다,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자신의 드라이브를 막아낸 것이다. 놀라움은 키이로를 동요시켰고, 동요는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거기까지 해두도록, 히카가미 키이로.”
시시한 어린애 장난이라도 받아주는 것처럼 클라비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라켈과 키이로, 성질은 달라도 이의 없이 미려한 용모를 가진 여성 둘 사이에 끼어있으면서도 돋보이는 미모와 거역하기 힘든 마성의 위압감은 그저 그 한 마디로 클라비스를 이 자리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클라비스는 날아드는 검을 막고 있던 손을 휙, 하고 가볍게 털었다. 별 뜻 없어 보이는 행동 하나에 키이로의 드라이브가 불러낸 검은 모조리 자그마한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이 이상은 쿠로가네 나오토가 슬퍼할 거야.”
“…, 퍽 여유롭네. 자기 입장을 알고나 있는 거야? 클라비스 알카드!”
우아하게, 하지만 호흡하듯 사람을 죽여 버릴 것만 같은 위험함을 풍기며 말하는 클라비스에게 키이로는 뿌리치듯 강한 말로 대답했다. 약간 바닥에서 떠있는 발끝을 미끄러뜨리며 물러나 양팔에 있는 검을 바로 휘두를 수 있도록 자세를 잡는다.
“당신은 우리 미츠루기 기관의 섬멸 대상이야. 여기서 놓아줄 수는 없어!”
그것이 키이로와, 그녀가 소속된 미츠루기 기관의 사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자신에게 향해진 날카로운 검을 그다지 흥미도 없다는 듯 한 번 보고, 어딘가 빈정거리듯 입가를 비틀어 날카롭게 눈을 좁혔다.
“놓아주는 건 자네가 아니라 내 쪽 아닐까?”
실로 부드럽게, 달빛 아래에 군림하는 흡혈귀는 키이로를 협박한다.
“개죽음이 소원이라면 이뤄줘도 상관없지만, 나라고 딸애를 돌봐주는 인간 앞에서 그 지인에게 손을 대는 건 내키지 않거든. 사라지라곤 하지 않겠다. 무기를 거두게.”
그 말을 듣고, 키이로의 시선이 망설이듯 헤맸다. 그러다 나오토에 이르더니 꿋꿋해 보이는 눈썹을 좁힌다.
“…알았어. 하지만 당신 말에 따르는 건 오늘 뿐이야.”
결국 불만스레 그리 말하고 키이로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걸 신호로 키이로의 팔과 다리에 붙어 있던 금속제 무장이 해제된다.
키이로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부품들은 그녀의 등 뒤에 당겨지듯 모여 거기서 한 자루의 거대한 검으로 변형했다. 그것이 키이로의 무장의, 말하자면 대기상태였다.
지금 당장은 전투 의사는 없다.
그것을 내비치자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고 있던 라켈의 무릎이 풀썩 구부러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키이로의 등장에 클라비스의 난입, 아무래도 계속해서 일어난 사태에 머리가 못 따라가는 모양이다. 약간 망연자실한 커다란 금색 눈동자가 나오토를 바라본다.
그걸 마주보며 나오토는 힘없는 쓴웃음을 돌려주었다.
이놈도 저놈도 정말이지 제멋대로다. 하지만 그 멋대로 덕분에 아무래도 간신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여러 가지로 한계다.
나오토는 길게, 몸속에서 토해내듯 한숨을 쉬고 줄곧 팽팽해져있던 의식의 실을 놓았다.
시야가 어둠 속으로 잠겨들기 직전, 나오토는 분명하게, 이쪽을 향해 돌아온 라켈의 요령 없는 쓴웃음을 보았다.
* * *
길다...
지난번에 이어 마무리 부분입니다.
초장부터 팔다리 잘리고 시작하는 오늘의 주인공... 그런데 잘린 부위가 누구 같네요. 오른팔은 어깨 아래에서, 왼팔은 팔꿈치 아래에서, 오른다리는
? 오른다리?
뢰그너찡 아직 다리는 못 잘려봤지?
것보다 블러드엣지도 되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네요.
누군가의 의식이 급격히 밀려들어 이후 메챠쿠챠 블랙 온슬럿했다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나오토가 블러드엣지를 쓰는 동안 나오토 시점에서 서술된 부분이 없습니다. 소설 전체에. 그래봤자 3번 정도지만.
애초에 저번 챕터에서도 죽빵만 꽂을 생각 하지 칼 꺼낼 생각은 안 했음 이 죽빵충
근데 스피너도 참 어이없게 끝장났습니다. 블러드 사이즈 꺼냈다고 가드 한 번 못 해보고 아스트랄 피니쉬 이후 레거시 엣지에 디스토션 피니쉬라뇨.
본편쪽과의 전투력 차이가 드러나는 건지 어떤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제 이 ㅂㅅ 다 된 주인공이 본편에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해지네요.
아 사족으로 이번 나오토의 대사 중 "어둠에 먹혀라"는 라그나의 214214D 디스토션 이름입니다. 한글판에선 어둠의 탐식이라고 번역되어 나오죠. 모르시는 분 있을까봐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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