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주인을 잘못 만난 인물 중 하나로 꼽는 고순.
고순은 여포의 부장으로 그에 관련된 기록은 후한서 여포전과 삼국지 여포전 및 양쪽 책에서 주석을 모은 영웅기, 구주춘추 등에 산재되어 있습니다.
1. 활약상
건안 원년(196년)6월 여포가 하비를 유비에게서 빼앗은 지 얼마 안 돼 여포의 부장 학맹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 도독 고순은 자신의 병영에 여포을 데려와 보호하고 재빨리 학맹의 부대에 화살로 일제사격을 퍼부어 반란을 진압합니다.
건안 2년(197년) 개양에 주둔 중인 장패가 낭사국 상 소건을 공격해 격파하고 거를 점령하자, 그 시기에 이미 소건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던 여포는 분노하여 장패를 공격합니다. 사실 장패는 여포의 부하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 세력의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이에 고순은 "장군께서 몸소 동탁을 주살하시어 이적들에게 위세를 떨쳤으니 앉아서 기다리시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항복할 것입니다."라고 여포에게 진언했으나, 여포는 이를 듣지 않고 장패를 공격하지만 그의 견고한 성과 저항에 부딪쳐 병력만 소모한 채 하비로 돌아옵니다. 결국 얼마 후에 여포와 장패는 화해.
건안 3년(198년)9월에는 중랑장으로서 장료를 데리고 유비가 지키고 있던 패성을 공략해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는 유비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조조의 부장 하후돈과 싸워서 그도 격파합니다.
-건안 3년, 여포가 다시 모반하여 원술 편에 서고 고순을 보내 패에서 유비를 공격해 격파했다. 태조(조조)는 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
2. 인물상
다음 기록은 위나라의 문신 왕찬이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웅기의 기록입니다.
-고순의 인물됨은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으며, 과묵하여 일절 술을 마시지 않고, 어떤 선물이나 뇌물도 받지 않았다. 부하는 700명 정도였으나 용감하기에 1,000명이라고 칭했고, 갑옷과 투구는 언제나 정제, 정련시켰고, 매번 공격할 때마다 격파하지 못함이 없으니 "함진영"이라 불렸다.
-고순이 여포에게 간언하길, "집안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충신이나 밝고 지혜로운 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쓰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군께서 거동하실 때 치밀하게 생각하시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여포는 그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능히 쓰지는 못했다. 여포는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시 고순을 소원하게 대하고 위속이 안팎의 친척이라 하여 고순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다. 그러다 싸움이 있게 되자 영을 내려 위속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고순이 이끌게 했는데, 고순은 끝내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고순은 이렇게 조조군에게 여러 번 쓴잔을 마시게 만들었습니다. 여포에게 한 간언을 보면 식견도 좋은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저런 대우에도 불구하고 원망 하나 하지 않은 대인배. 위의 기록처럼 영웅기에서도 고순의 무용과 인격에 대해 칭찬하고 있지요.
3. 최후
고순은 진궁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순뿐 아니라 여포의 제장 상당수가 진궁과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학맹이 원술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학맹 밑에 있다가 반기를 들어서 학맹을 토벌하는 거에 기여한 조성이란 장수가 함께 반란을 모의한 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진궁이 공모했습니다"라고 대답한 게 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진궁의 얼굴이 빨갛게 물듭니다. 그러나 여포는 진궁이 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불문에 붙입니다.
하비성이 조조군에게 포위되자, 여포는 진궁, 고순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직접 나서서 조조군의 보급로를 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의 처가 "장군께서 직접 조조의 보급로를 끊는 것은 옳은 계책입니다. 그러나 진궁과 고순은 평소 서로 불화하니 장군께서 나가시면 이 둘은 필시 합심해서 함께 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일에 차질이 생기면 장군은 어디서 자립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여포는 결국 출격을 단념합니다.
결국 하비성 싸움에서 여포, 진궁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조조의 귀순 권고도 거부하고 처형당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정말로 진궁과 함께 여포에게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지요.
덤으로 장료는 저 당시 그저 그런 부장 정도였습니다. 장료가 유명해진 건 합비전투 이후죠.
고순은 여포의 부장으로 그에 관련된 기록은 후한서 여포전과 삼국지 여포전 및 양쪽 책에서 주석을 모은 영웅기, 구주춘추 등에 산재되어 있습니다.
1. 활약상
건안 원년(196년)6월 여포가 하비를 유비에게서 빼앗은 지 얼마 안 돼 여포의 부장 학맹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 도독 고순은 자신의 병영에 여포을 데려와 보호하고 재빨리 학맹의 부대에 화살로 일제사격을 퍼부어 반란을 진압합니다.
건안 2년(197년) 개양에 주둔 중인 장패가 낭사국 상 소건을 공격해 격파하고 거를 점령하자, 그 시기에 이미 소건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던 여포는 분노하여 장패를 공격합니다. 사실 장패는 여포의 부하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 세력의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이에 고순은 "장군께서 몸소 동탁을 주살하시어 이적들에게 위세를 떨쳤으니 앉아서 기다리시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항복할 것입니다."라고 여포에게 진언했으나, 여포는 이를 듣지 않고 장패를 공격하지만 그의 견고한 성과 저항에 부딪쳐 병력만 소모한 채 하비로 돌아옵니다. 결국 얼마 후에 여포와 장패는 화해.
건안 3년(198년)9월에는 중랑장으로서 장료를 데리고 유비가 지키고 있던 패성을 공략해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는 유비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조조의 부장 하후돈과 싸워서 그도 격파합니다.
-건안 3년, 여포가 다시 모반하여 원술 편에 서고 고순을 보내 패에서 유비를 공격해 격파했다. 태조(조조)는 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
2. 인물상
다음 기록은 위나라의 문신 왕찬이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웅기의 기록입니다.
-고순의 인물됨은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으며, 과묵하여 일절 술을 마시지 않고, 어떤 선물이나 뇌물도 받지 않았다. 부하는 700명 정도였으나 용감하기에 1,000명이라고 칭했고, 갑옷과 투구는 언제나 정제, 정련시켰고, 매번 공격할 때마다 격파하지 못함이 없으니 "함진영"이라 불렸다.
-고순이 여포에게 간언하길, "집안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충신이나 밝고 지혜로운 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쓰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군께서 거동하실 때 치밀하게 생각하시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여포는 그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능히 쓰지는 못했다. 여포는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시 고순을 소원하게 대하고 위속이 안팎의 친척이라 하여 고순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다. 그러다 싸움이 있게 되자 영을 내려 위속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고순이 이끌게 했는데, 고순은 끝내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고순은 이렇게 조조군에게 여러 번 쓴잔을 마시게 만들었습니다. 여포에게 한 간언을 보면 식견도 좋은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저런 대우에도 불구하고 원망 하나 하지 않은 대인배. 위의 기록처럼 영웅기에서도 고순의 무용과 인격에 대해 칭찬하고 있지요.
3. 최후
고순은 진궁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순뿐 아니라 여포의 제장 상당수가 진궁과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학맹이 원술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학맹 밑에 있다가 반기를 들어서 학맹을 토벌하는 거에 기여한 조성이란 장수가 함께 반란을 모의한 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진궁이 공모했습니다"라고 대답한 게 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진궁의 얼굴이 빨갛게 물듭니다. 그러나 여포는 진궁이 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불문에 붙입니다.
하비성이 조조군에게 포위되자, 여포는 진궁, 고순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직접 나서서 조조군의 보급로를 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의 처가 "장군께서 직접 조조의 보급로를 끊는 것은 옳은 계책입니다. 그러나 진궁과 고순은 평소 서로 불화하니 장군께서 나가시면 이 둘은 필시 합심해서 함께 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일에 차질이 생기면 장군은 어디서 자립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여포는 결국 출격을 단념합니다.
결국 하비성 싸움에서 여포, 진궁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조조의 귀순 권고도 거부하고 처형당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정말로 진궁과 함께 여포에게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지요.
덤으로 장료는 저 당시 그저 그런 부장 정도였습니다. 장료가 유명해진 건 합비전투 이후죠.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