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작은 인연-
똑...똑....똑......
맑고 낮게 울려 퍼지는 물방울 소리로 가늠해보아 이곳은 지하의 동혈이 분명했다.
동혈은 깊고 길게 이어졌으며 가장 아랫부분은 돔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동혈의 바닥은 짙은 습기와 한기로 인해 생명체가 살 수 없을 듯 보였으나 바닥 곳곳엔 커다란 소라 껍질이나 고동 껍질들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가 살고는 있는 듯한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산개한 소라 껍질들이 조금씩 움찔거리더니 바닥에 파묻혀 있던
소형 몬스터인 자자미들이 일어나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스슥-
자자미들의 이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한 그림자는 동혈의 벽면에 발생한 돌출 부위를 이용해 유유히 전진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혈의 낮은 천정에 매달린 채로 동혈
의 바닥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얼마간 습한 지면을 살피던 중 한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곳엔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되 사람의 형태가 죽은 듯 널부러져 있었고 그 앞으로는 소형
몬스터인 자자미의 껍질과 비슷하되 그 크기가 족히 수십배는 됨직한 대형 몬스터의 해골이 놓여있었다. 자자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형 몬스터인 쇼군 기자미나 다이묘 자자미가 있
을 가능성이 컸다.
그림자가 죽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람 쪽을 응시하자 어슴프레한 어둠속에서 눈동자인 듯한 빛이 반짝 스쳐감을 눈치챘고 널부러진 그 사람도 그림자의 출현을 알고 있는 듯 그쪽 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그림자의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의 본래 목적은
동혈의 탐색과 더불어 중형 몬스터가 수집해 놓은 비룡종이나 고룡종의 뼈나 비늘을 입수하
기 위한 것이었으니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또한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해 있으리라고는 상상
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자자미나 기자미가 사람을 잡아 먹는다
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기에 더욱 황당할 따름이었다.
허나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은 너무도 간절한 그것이라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던 듯 그는 벽면을 조심스레 타고 내려와 사뿐히 그 사람 옆으로 내려앉았다.
“으으...”
뭔가 말을 하려는 듯 하자 그가 먼저 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할 것을 강요했다. 엄연히 이곳
은 지하동혈이며 떡하니 눈앞에 중형 몬스터가 잠들어 있는 상태였으니 작은 소리라도 울리
는 날에는 두 사람이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다가온 그는 느릿한 행동으로 허리를 숙여 그 사람의 귀에 대고는 속삭이듯 뜻을 전했다.
‘한동안은 그냥 그대로 죽은 듯이 누워있어. 그리고 내가 신호하면 이걸 마시고 무조건 입
구를 향해 뛰어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 알았나? 알아들었으면 눈을 두 번 깜빡여라.‘
상황으로 보아 누워있는 자는 필시 상처를 입은 듯 했으나 그는 그 사람에게 붉은빛이 영롱
하게 맴도는 작은 포션 하나를 쥐어주며 속삭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포션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누워있는 사람 역시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으되 중형 몬스터
관심거리라도 되는 날에는 정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죽은 듯 누워있었
던 것 뿐이었고 낮은 온도와 습기로 인해 점차 몸이 굳어가고 있다는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후 그는 낮은 자세로 구부리고 있던 몸을 천천히 곧추 세우고는 허리춤에서 세 개의 하얀구슬을 꺼내 들었다. 잠시금의 뜸을 들인 그는 누워있는 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포션을 마시는 것을 확인한 직후 바로 세 개의 구슬을 공중으로 분산시켜 던졌다.
펑~
폭발이 목적이 아닌 시야 방해와 감각 저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연기 폭탄은 분산되며 사
방에서 터졌고 모락모락 피어오른 연기는 싸~한 냄새를 풍기며 퍼져나갔다. 연기폭탄의 소
리와 함께 바닥에 고이 모셔져 있던 대형 몬스터의 해골이 들썩거리며 습한 지면을 박차올
라 푸른빛의 중형 몬스터 쇼군 기자미가 솟아올랐다.
퀘에에에~
괴성을 내지른 쇼군 기자미는 갑각류 몬스터인만큼 길게 뻗은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여 타
겟을 열심히 찾았으나 연기의 방해로 공격 반경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쇼군 기자미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을 무렵 한 그림자가 쏜살같이 다가와 기
자미의 왼쪽 다리를 공격했다.
카강-
갑각류 중형 몬스터답게 쇼군 기자미의 갑각은 단단하기 이를데 없었고 공격한 자는 되려
튀어나온 반탄력에 영향을 받아 휘청거리고는 다시금 연기처럼 사라졌다. 공격을 느낀 기자
미는 그쪽을 향해 돌아서서 날카로운 낫형태의 앞발을 휘둘렀으나 공격은 허공을 가를 뿐이
었다.
기자미는 다시금 더듬이를 바쁘게 움직여대며 사방위의 목표물을 찾기 시작했고, 안타깝게 도 기자미의 공격반경에 걸린 목표물은 상처를 입은 채 도주하던 자의 그것이었다.
헉..헉...
포션은 그가 알기론 귀인포션이라는 것이었다. 붉은빛이 영롱하게 감도는 이 포션은 마시는
즉시 몸속의 활동량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며 단시간동안 신체의 활동 리듬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귀인상태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상처를 입고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상태였
으나 포션의 도움으로 일어나자마자 동혈의 입구를 향해 뛰어가고 있던 그는 채 빠져나가기
도 전에 기자미의 공격반경에 포착되고 만 것이었다.
쇼군 기자미는 은관급에 달한 듯 그 크기가 상당했고 지면 보행보다 땅속으로 이동하는 것
이 더 빠른 몬스터인만큼 포착을 하자마자 사냥을 위해 재빠르게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그는 전력질주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너무도 저하된 체력조
건과 이미 효력을 잃어가는 귀인포션의 힘을 느끼며 점점 절망속에 빠져갈 때 쯤....
쉬리릭- 쩌엉~!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쇼군 기자미가 이동한 경로의 앞지점을 강타한 그것은 소리폭탄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지하로 빠르게 이동하는 몬스터의 위치 지점에 강한 폭발력을
이용한 굉음으로 지면을 때려줌으로써 일시적으로 몬스터를 공황상태에 이르게 하는 폭탄이
이었다.
소리폭탄이 던져진 지점은 정확하게 쇼군 기자미의 이동경로였고, 두개골에 심한 압박을 느
끼며 튀어나온 쇼군 기자미는 공황상태로 인해 반쯤 몸이 파묻힌 상태로 허우적 거리고 있
었다.
그리고...
꿈결처럼....
마치 봄날의 미풍처럼 사뿐히 그가 내려앉으며 쇼군 기자미의 앞을 막아섰고, 등뒤에 교차로 장착되어 있던 섬뜩한 붉은날을 가진 쌍검을 뽑아드는 동시에 기이한 현상을
보게 되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현상이었으되 처음으로 보는 그 광경에 그는 넋을
잃고 쇼군 기자미를 막아선 자의 뒷모습에 심취하고 있었다.
귀인무-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귀인무를 행하는 귀무자가 되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베어낼 수 있다고 한다. 양손에 한자루씩의 작고 빠른 두 개의 소검을 들고 공격하는 만
큼 공격력이 약하고 또한 상대적으로 검의 예리도가 낮아 몬스터의 육질에 잘 박히지 않
는 것이 쌍검이다. 허나 ‘귀인무’를 익혀 귀무자가 되면 그 어떠한 무기보다 강력하고 빠르
며 치명적인 공격을 펼쳐낼 수 있는 것이 쌍검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성에 의해 쌍검은 상
대적으로 등한시 되기도 했었으며, 귀인무를 익히는 자가 헌터 중 100에 한명을 보기조차
힘들어지기도 했었다.
도망을 가던 자는 중급의 헌터였으며 그의 헌터 경험에서 귀인무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고
이토록 아름다운 검무가 전설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극강의 무공이라는 것에 대해 신비감
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귀무자는 몸을 타고 흐르는 붉은색 기류를 섬뜩한 살기로 화해 내뿜으며 광적인 검격을 쇼
군 기자미의 몸통에 퍼부었다. 쇼군 기자미는 반쯤 몸이 파묻힌 상태로 대책 없이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한번의 짧은 난무가 끝나자 귀무자는 즉시 깃털처럼 날아올라 쇼
군 기자미의 머리와 등껍질 사이의 연한 육질 부위에 올라 앉아 그대로 난무를 쏟아냈고
쇼군 기자미는 고통이 심한 듯 괴성을 내지르더니 이내 공황상태에서 깨어나며 땅속으로 들
어가 버렸다.
쇼군 기자미의 습성으로 보아 짧은 시간이었으되 치명적 공격을 약점 부위에 얻어맞은 만큼
후퇴하는 것이 당연했다. 쇼군 기자미가 도망친 것을 확신한 귀무자는 쌍검을 다시 등 뒤로 장착했고 천천히 돌아섰다.
“헛..”
천천히 돌아서는 귀무자의 모습은 마치 지옥나찰의 그것과 비슷했다. 눈동자는 섬뜩하게 붉
은 색으로 물들었으며 아직도 가시지 않은 귀인무의 기류가 기하학적인 곡선을 이루며 뿜어
져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빨리 빠져나가는게 좋겠군. 자초지종은 나중에 묻기로 하지.”
“아..네..”
온몸을 검붉은 빛의 경화갑옷으로 빈틈없이 둘러싼 귀무자는 서둘러 쇼군 기자미의 둥지를 빠져 나갈 것을 권유했고 다가와 그의 어깨를 들쳐 매고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자자
미 떼가 돌아올 시간이 멀었는지라 두 사람은 동혈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기리릭- 기리릭--
낮게 울려퍼지는 벌레소리가 정겹기까지 한 산들한 저녁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채로 극한 상황에서 만나 동행을 하게 된 두사람은 바닷가의 낮은 언덕 아래에 모닥불을 피우고 케루비 고기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전...헌터연맹 카라얀 클랜의 율랑이라 합니다.”
“......”
머쓱하게 내미는 소개말에도 귀무자는 아무런 대답조차 하질 않았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체온이 낮아져 몸을 컨트롤하기가 힘들었습
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시니 헌터의 명예를 걸고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목숨을 바쳐!“
“훗...헌터의 명예?”
순간 율랑은 자신의 귀를 약간은 의심했다. 체구가 작고 늘씬하게 빠졌긴 했으되 분명 그
는 귀무자의 반열에 든 고수임이 분명한데...
“배우고 들은건 실전에서 별 쓸모가 없지. 네가 알고 있던 쇼군 기자미의 습성을 그대로 행
하지 않았기에 그런 상황에 처한 것 아닌가?“
“클랜에서 바리발마르 해안 근처에 출몰하는 은관급 쇼군 기자미 헌팅 계획을 잡았고, 우린
해머헌터단을 구성해서 헌팅을 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녀석....마치 클랜을 운영하듯 자자미떼
를 이끌고 함정으로 유인을 해서 분산시킨 뒤 뒤를 잡아채고 공격해 오더군요. 속수무책이
었습니다...젠장...“
“크크...클랜이면 마스터나 상승자도 있었을텐데?”
연맹을 손바닥 훑어보듯 상황을 간파하고 있는 그였다.
“우물 안 개구리에,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군. 곱게 자라 곱게 배우고 떼거지로 몰려 다니면
헌팅은 그냥 되는 줄 아나보지?“
“흠... 이론 교육을 받고 실전에 나가면 클랜 상승자들의 리드를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귀무자의 까칠한 말투로 인해 본전을 찾기는 커녕 오히려 분위기 감소 효과를 덤으로 받은
율랑이었다. 사람 자체가 암울한 것인지 연맹에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귀무자
는 그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더 분위기가 싸해지고 고기만을 씹어먹고 있던 터였다.
“저기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서 남서쪽 티사나르 산맥으로 올라가면 반나절 안에 폿케에 도
착할 수 있습니다. 행선지가 정해지시지 않았다면 폿케로 가서 머무르시겠습니까?“
“훗...폿케라....4년만인가...”
“네?”
“..........”
머라고 중얼거리는 듯 했으나 율랑의 물음에 대답 없이 먹던 고기를 휙 던져 버리고는 모로 누우며 잠을 청하는 귀무자였다. 율랑은 귀무자가 건네준 활력포션과 저녁 식사로 준비된 케루비 고기를 먹고 나자 몸이 어느 정도 온기를 되찾았고 다쳤던 부위들도 다행히 치유가 진행되고 있는 터라 한결 가뿐해진 상태였다. 이대로 수면을 취하고 나면 내일은 여정이 가
능할 정도가 될거라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다 타고 남은 모닥불의 흔적이 어슴프레 귀무자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고, 잠을 청하던 율랑
역시 귀무자의 모로 누운 뒷모습을 살며시 쫓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율랑의 눈앞에서 보인 귀무자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헌터에게 있어 경외심을 불러 일으
킬 정도의 능력이었다. 허나 모로 누워 잠을 청하는 그의 뒷모습은 왠지 모를 쓸쓸함이 베
어있었다. 필연이든 악연이든 그와 맺어진 관계는 왠지 이곳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걸 직감
했던 것인지 율랑은 그에게 폿케로 동행할 것을 원했고 대답은 하지 않았으되 그가 역시
자신과 동행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와의 동행이 왠지 모르게 설레어버린 율랑이었다.
그것이 인연이라면....
-작은 인연-
똑...똑....똑......
맑고 낮게 울려 퍼지는 물방울 소리로 가늠해보아 이곳은 지하의 동혈이 분명했다.
동혈은 깊고 길게 이어졌으며 가장 아랫부분은 돔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동혈의 바닥은 짙은 습기와 한기로 인해 생명체가 살 수 없을 듯 보였으나 바닥 곳곳엔 커다란 소라 껍질이나 고동 껍질들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가 살고는 있는 듯한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산개한 소라 껍질들이 조금씩 움찔거리더니 바닥에 파묻혀 있던
소형 몬스터인 자자미들이 일어나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스슥-
자자미들의 이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한 그림자는 동혈의 벽면에 발생한 돌출 부위를 이용해 유유히 전진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혈의 낮은 천정에 매달린 채로 동혈
의 바닥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얼마간 습한 지면을 살피던 중 한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곳엔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되 사람의 형태가 죽은 듯 널부러져 있었고 그 앞으로는 소형
몬스터인 자자미의 껍질과 비슷하되 그 크기가 족히 수십배는 됨직한 대형 몬스터의 해골이 놓여있었다. 자자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형 몬스터인 쇼군 기자미나 다이묘 자자미가 있
을 가능성이 컸다.
그림자가 죽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람 쪽을 응시하자 어슴프레한 어둠속에서 눈동자인 듯한 빛이 반짝 스쳐감을 눈치챘고 널부러진 그 사람도 그림자의 출현을 알고 있는 듯 그쪽 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그림자의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의 본래 목적은
동혈의 탐색과 더불어 중형 몬스터가 수집해 놓은 비룡종이나 고룡종의 뼈나 비늘을 입수하
기 위한 것이었으니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또한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해 있으리라고는 상상
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자자미나 기자미가 사람을 잡아 먹는다
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기에 더욱 황당할 따름이었다.
허나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은 너무도 간절한 그것이라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던 듯 그는 벽면을 조심스레 타고 내려와 사뿐히 그 사람 옆으로 내려앉았다.
“으으...”
뭔가 말을 하려는 듯 하자 그가 먼저 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할 것을 강요했다. 엄연히 이곳
은 지하동혈이며 떡하니 눈앞에 중형 몬스터가 잠들어 있는 상태였으니 작은 소리라도 울리
는 날에는 두 사람이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다가온 그는 느릿한 행동으로 허리를 숙여 그 사람의 귀에 대고는 속삭이듯 뜻을 전했다.
‘한동안은 그냥 그대로 죽은 듯이 누워있어. 그리고 내가 신호하면 이걸 마시고 무조건 입
구를 향해 뛰어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 알았나? 알아들었으면 눈을 두 번 깜빡여라.‘
상황으로 보아 누워있는 자는 필시 상처를 입은 듯 했으나 그는 그 사람에게 붉은빛이 영롱
하게 맴도는 작은 포션 하나를 쥐어주며 속삭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포션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누워있는 사람 역시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으되 중형 몬스터
관심거리라도 되는 날에는 정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죽은 듯 누워있었
던 것 뿐이었고 낮은 온도와 습기로 인해 점차 몸이 굳어가고 있다는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후 그는 낮은 자세로 구부리고 있던 몸을 천천히 곧추 세우고는 허리춤에서 세 개의 하얀구슬을 꺼내 들었다. 잠시금의 뜸을 들인 그는 누워있는 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포션을 마시는 것을 확인한 직후 바로 세 개의 구슬을 공중으로 분산시켜 던졌다.
펑~
폭발이 목적이 아닌 시야 방해와 감각 저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연기 폭탄은 분산되며 사
방에서 터졌고 모락모락 피어오른 연기는 싸~한 냄새를 풍기며 퍼져나갔다. 연기폭탄의 소
리와 함께 바닥에 고이 모셔져 있던 대형 몬스터의 해골이 들썩거리며 습한 지면을 박차올
라 푸른빛의 중형 몬스터 쇼군 기자미가 솟아올랐다.
퀘에에에~
괴성을 내지른 쇼군 기자미는 갑각류 몬스터인만큼 길게 뻗은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여 타
겟을 열심히 찾았으나 연기의 방해로 공격 반경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쇼군 기자미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을 무렵 한 그림자가 쏜살같이 다가와 기
자미의 왼쪽 다리를 공격했다.
카강-
갑각류 중형 몬스터답게 쇼군 기자미의 갑각은 단단하기 이를데 없었고 공격한 자는 되려
튀어나온 반탄력에 영향을 받아 휘청거리고는 다시금 연기처럼 사라졌다. 공격을 느낀 기자
미는 그쪽을 향해 돌아서서 날카로운 낫형태의 앞발을 휘둘렀으나 공격은 허공을 가를 뿐이
었다.
기자미는 다시금 더듬이를 바쁘게 움직여대며 사방위의 목표물을 찾기 시작했고, 안타깝게 도 기자미의 공격반경에 걸린 목표물은 상처를 입은 채 도주하던 자의 그것이었다.
헉..헉...
포션은 그가 알기론 귀인포션이라는 것이었다. 붉은빛이 영롱하게 감도는 이 포션은 마시는
즉시 몸속의 활동량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며 단시간동안 신체의 활동 리듬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귀인상태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상처를 입고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상태였
으나 포션의 도움으로 일어나자마자 동혈의 입구를 향해 뛰어가고 있던 그는 채 빠져나가기
도 전에 기자미의 공격반경에 포착되고 만 것이었다.
쇼군 기자미는 은관급에 달한 듯 그 크기가 상당했고 지면 보행보다 땅속으로 이동하는 것
이 더 빠른 몬스터인만큼 포착을 하자마자 사냥을 위해 재빠르게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그는 전력질주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너무도 저하된 체력조
건과 이미 효력을 잃어가는 귀인포션의 힘을 느끼며 점점 절망속에 빠져갈 때 쯤....
쉬리릭- 쩌엉~!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쇼군 기자미가 이동한 경로의 앞지점을 강타한 그것은 소리폭탄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지하로 빠르게 이동하는 몬스터의 위치 지점에 강한 폭발력을
이용한 굉음으로 지면을 때려줌으로써 일시적으로 몬스터를 공황상태에 이르게 하는 폭탄이
이었다.
소리폭탄이 던져진 지점은 정확하게 쇼군 기자미의 이동경로였고, 두개골에 심한 압박을 느
끼며 튀어나온 쇼군 기자미는 공황상태로 인해 반쯤 몸이 파묻힌 상태로 허우적 거리고 있
었다.
그리고...
꿈결처럼....
마치 봄날의 미풍처럼 사뿐히 그가 내려앉으며 쇼군 기자미의 앞을 막아섰고, 등뒤에 교차로 장착되어 있던 섬뜩한 붉은날을 가진 쌍검을 뽑아드는 동시에 기이한 현상을
보게 되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현상이었으되 처음으로 보는 그 광경에 그는 넋을
잃고 쇼군 기자미를 막아선 자의 뒷모습에 심취하고 있었다.
귀인무-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귀인무를 행하는 귀무자가 되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베어낼 수 있다고 한다. 양손에 한자루씩의 작고 빠른 두 개의 소검을 들고 공격하는 만
큼 공격력이 약하고 또한 상대적으로 검의 예리도가 낮아 몬스터의 육질에 잘 박히지 않
는 것이 쌍검이다. 허나 ‘귀인무’를 익혀 귀무자가 되면 그 어떠한 무기보다 강력하고 빠르
며 치명적인 공격을 펼쳐낼 수 있는 것이 쌍검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성에 의해 쌍검은 상
대적으로 등한시 되기도 했었으며, 귀인무를 익히는 자가 헌터 중 100에 한명을 보기조차
힘들어지기도 했었다.
도망을 가던 자는 중급의 헌터였으며 그의 헌터 경험에서 귀인무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고
이토록 아름다운 검무가 전설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극강의 무공이라는 것에 대해 신비감
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귀무자는 몸을 타고 흐르는 붉은색 기류를 섬뜩한 살기로 화해 내뿜으며 광적인 검격을 쇼
군 기자미의 몸통에 퍼부었다. 쇼군 기자미는 반쯤 몸이 파묻힌 상태로 대책 없이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한번의 짧은 난무가 끝나자 귀무자는 즉시 깃털처럼 날아올라 쇼
군 기자미의 머리와 등껍질 사이의 연한 육질 부위에 올라 앉아 그대로 난무를 쏟아냈고
쇼군 기자미는 고통이 심한 듯 괴성을 내지르더니 이내 공황상태에서 깨어나며 땅속으로 들
어가 버렸다.
쇼군 기자미의 습성으로 보아 짧은 시간이었으되 치명적 공격을 약점 부위에 얻어맞은 만큼
후퇴하는 것이 당연했다. 쇼군 기자미가 도망친 것을 확신한 귀무자는 쌍검을 다시 등 뒤로 장착했고 천천히 돌아섰다.
“헛..”
천천히 돌아서는 귀무자의 모습은 마치 지옥나찰의 그것과 비슷했다. 눈동자는 섬뜩하게 붉
은 색으로 물들었으며 아직도 가시지 않은 귀인무의 기류가 기하학적인 곡선을 이루며 뿜어
져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빨리 빠져나가는게 좋겠군. 자초지종은 나중에 묻기로 하지.”
“아..네..”
온몸을 검붉은 빛의 경화갑옷으로 빈틈없이 둘러싼 귀무자는 서둘러 쇼군 기자미의 둥지를 빠져 나갈 것을 권유했고 다가와 그의 어깨를 들쳐 매고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자자
미 떼가 돌아올 시간이 멀었는지라 두 사람은 동혈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기리릭- 기리릭--
낮게 울려퍼지는 벌레소리가 정겹기까지 한 산들한 저녁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채로 극한 상황에서 만나 동행을 하게 된 두사람은 바닷가의 낮은 언덕 아래에 모닥불을 피우고 케루비 고기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전...헌터연맹 카라얀 클랜의 율랑이라 합니다.”
“......”
머쓱하게 내미는 소개말에도 귀무자는 아무런 대답조차 하질 않았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체온이 낮아져 몸을 컨트롤하기가 힘들었습
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시니 헌터의 명예를 걸고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목숨을 바쳐!“
“훗...헌터의 명예?”
순간 율랑은 자신의 귀를 약간은 의심했다. 체구가 작고 늘씬하게 빠졌긴 했으되 분명 그
는 귀무자의 반열에 든 고수임이 분명한데...
“배우고 들은건 실전에서 별 쓸모가 없지. 네가 알고 있던 쇼군 기자미의 습성을 그대로 행
하지 않았기에 그런 상황에 처한 것 아닌가?“
“클랜에서 바리발마르 해안 근처에 출몰하는 은관급 쇼군 기자미 헌팅 계획을 잡았고, 우린
해머헌터단을 구성해서 헌팅을 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녀석....마치 클랜을 운영하듯 자자미떼
를 이끌고 함정으로 유인을 해서 분산시킨 뒤 뒤를 잡아채고 공격해 오더군요. 속수무책이
었습니다...젠장...“
“크크...클랜이면 마스터나 상승자도 있었을텐데?”
연맹을 손바닥 훑어보듯 상황을 간파하고 있는 그였다.
“우물 안 개구리에,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군. 곱게 자라 곱게 배우고 떼거지로 몰려 다니면
헌팅은 그냥 되는 줄 아나보지?“
“흠... 이론 교육을 받고 실전에 나가면 클랜 상승자들의 리드를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귀무자의 까칠한 말투로 인해 본전을 찾기는 커녕 오히려 분위기 감소 효과를 덤으로 받은
율랑이었다. 사람 자체가 암울한 것인지 연맹에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귀무자
는 그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더 분위기가 싸해지고 고기만을 씹어먹고 있던 터였다.
“저기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서 남서쪽 티사나르 산맥으로 올라가면 반나절 안에 폿케에 도
착할 수 있습니다. 행선지가 정해지시지 않았다면 폿케로 가서 머무르시겠습니까?“
“훗...폿케라....4년만인가...”
“네?”
“..........”
머라고 중얼거리는 듯 했으나 율랑의 물음에 대답 없이 먹던 고기를 휙 던져 버리고는 모로 누우며 잠을 청하는 귀무자였다. 율랑은 귀무자가 건네준 활력포션과 저녁 식사로 준비된 케루비 고기를 먹고 나자 몸이 어느 정도 온기를 되찾았고 다쳤던 부위들도 다행히 치유가 진행되고 있는 터라 한결 가뿐해진 상태였다. 이대로 수면을 취하고 나면 내일은 여정이 가
능할 정도가 될거라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다 타고 남은 모닥불의 흔적이 어슴프레 귀무자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고, 잠을 청하던 율랑
역시 귀무자의 모로 누운 뒷모습을 살며시 쫓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율랑의 눈앞에서 보인 귀무자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헌터에게 있어 경외심을 불러 일으
킬 정도의 능력이었다. 허나 모로 누워 잠을 청하는 그의 뒷모습은 왠지 모를 쓸쓸함이 베
어있었다. 필연이든 악연이든 그와 맺어진 관계는 왠지 이곳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걸 직감
했던 것인지 율랑은 그에게 폿케로 동행할 것을 원했고 대답은 하지 않았으되 그가 역시
자신과 동행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와의 동행이 왠지 모르게 설레어버린 율랑이었다.
그것이 인연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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