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있다.”
앞쪽에 또 다른 공터가 있었다. 먼젓번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광장 한가운데에 알베르트가 있었다. 그는 여러 개의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미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저건 뭐지?’
아간조가 침음했다.
“석상……!”
아간조의 말대로 알베르트와 싸우는 것들은 석상이었다.
“단순히 돌로 만들기만 하는 게 아니었군……!”
돌이 된 사람들과 싸우느라 알베르트의 온몸엔 멍이 들어 있었다. 지치기까지 했는지 동작이 굼떴다. 미카는 아간조에게 알베르트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려 했으나, 아간조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미카의 몸이 아간조와 함께 붕 날았다.
“헉!”
미카는 아간조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어찌나 높게 뛰었는지 그 넓은 공터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그새 대검을 꼬나든 아간조는 공터 가장자리를 향해 떨어지며 대검을 내리쳤다.
그들을 발견한 알베르트가 소리쳤다.
“안 돼!”
미카도 아간조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채고는 떨어지기 직전에 아간조의 목을 세게 졸랐다.
꽈앙
부서진 벽돌과 흙이 비산했다. 사람의 완력으로 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굉음 사이로 가냘픈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꺅!”
아간조가 이를 갈았다.
“젠장!”
땅을 깊게 파고든 아간조의 대검 바로 옆에 그때 그 미친 여자가 넘어져 있었다.
아간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검을 뽑아들고 휘두를 준비를 했으나, 미카가 그의 눈을 가려 버렸다.
휘둘러진 대검은 여자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꺄악!”
여자가 빠르게 뒤로 기었다. 베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챈 아간조가 미카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며 화를 냈다.
“방해하지 마라!”
“잠깐만요! 안 돼요!”
공터 한가운데에서 알베르트가 재차 소리쳤다.
흙을 털고 일어난 금발의 여자가 알베르트를 보며 감격했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날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알베르트 님!”
알베르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닥치고 가까이 와 봐, 이 미친 여자야!”
“싫어욧! 가까이 가면 저를…… 쓰러트리고…… 하아…… 그것도 좋지만, 아쉬움은 알베르트 님의 영혼을 석상에 가둬 나만의 것으로 만든 후에…….”
여자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 빨리 포기하시고 주무세요! 잠깐이면 충분하니까. 빨리 주무실 수 있도록 도와 드릴게요!”
여자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자 숲에서 수많은 석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알베르트가 경악했다.
“이런……!”
여자가 표독한 눈으로 아간조와 미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들에게도 줄 선물이 있지!”
그녀가 그들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모래연기를 닮은 회색의 고운 입자가 그들을 향해 뿌려졌다. 아간조는 그것을 알아본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급히 대검을 휘둘러 바람을 일으켜 정체불명의 가루를 막았다.
가루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대검에 들러붙었다. 아간조는 대검을 타고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회색 가루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젠장!”
대검을 쥔 아간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대검에서 차가운 기운이 몰아쳤다. 순식간에 검의 표면이 얼어붙었다. 표면이 얼어붙자 회색 가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간조는 그 광경을 눈을 치켜뜬 채로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석화 바이러스는 냉기에 취약한 것 같군.”
아간조가 대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렵지 않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끝이다.”
아간조가 대검을 크게 휘두르자 검풍이 일었다.
미카는 아간조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아간조가 그를 돌아보았다.
“뭐지?”
미카는 알베르트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쪽부터 도와야 할 거 아냐!”
떼거지로 몰려드는 석상을 상대하느라 알베르트는 아주 떡이 되어 있었다. 아간조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알베르트 앞의 석상들이 아간조의 칼질 한 번에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그러나 석상은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알베르트가 다급하게 말했다.
“죽이지 마요. 저 여자 얼굴을 확인해야 해요. 가까이에서. 내가 찾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 멀리선 구분이 안 가요.”
“흑요정은 눈이 좋지 않던가?”
“그 정도로 닮았어요. 그 골빈 머리까지…… 쳇.”
아간조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대검을 휘둘러 석상들을 썰어 넘기고 있었다.
“죽이지 않고는 제압할 방법이 없네. 웬만한 마법사에겐 냉기가 통하지 않아. 다른 몬스터들처럼 얼리면 끝나는 상대가 아니라네.”
“하지만……!”
“그리고 어떻게 가까이 가겠다는 건가? 이 검의 냉기가 없으면 저 여자가 뿌리는 석화 바이러스에 당할 텐데? 나는 이 검이 없으면 이 석상들을 잘 상대하지 못할 테고.”
알베르트가 침음했다.
“그래도…….”
미카가 말했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뭐?”
알베르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간조가 미카를 보았다.
“뭔가 방도가 있나?”
“내가 주변을 차갑게 만들 수 있어.”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키려면 어느 정도의 냉기가……,”
미카는 대답 대신 눈을 감고 집중했다. 알베르트가 움찔했다.
미카의 몸에서 차디찬 기운이 흘러나왔다. 뼛속까지 닿는 냉기에 알베르트는 몸을 떨었다.
아간조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확신이 든 알베르트는 미카를 받아 업었다. 알베르트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그는 금발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그녀가 당황해하며 뒤돌아서 숲 속으로 도망쳤다. 알베르트는 그녀를 쫓아 뛰려다가 아간조를 돌아보았다.
아간조는 단 한 방에 석상을 베어넘기고 있었는데도 석상들은 끝이 없었다. 아간조 주변에 작은 돌산이 생겨날 정도였다. 미카는 그 광경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저게 전부 지금까지 석화마법에 희생당한 사람들…….’
아간조가 외쳤다.
“가게! 대체 어떻게 그 여자를 잡을지 모르겠지만 좋을 대로 해보라고.”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들은 대도시의 도로였던 흔적이 남은 넓은 길 위에 멈춰 섰다.
금발 여자가 숨이 가쁜지 허리를 숙이고 헐떡거렸다. 그녀가 알베르트를 향해 한쪽 눈을 깜빡였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알베르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미카를 업은 두 팔은 보랏빛 멍이 빈틈없이 들어 있었다. 숨은 거칠었고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녀를 향해 걸어가던 알베르트가 돌연 발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너. 누구야?”
“제 이름을 모르셨나요?”
그녀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클라라라고 해요. 성은…… 없어요.”
“로리안이 아니야?”
“그건 누구죠? 아니에요. 전 클라라예요.”
알베르트가 발을 떼어 다시 걸었다. 팔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클라라에게 다가간 그가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클라라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미카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지은 미소는 무린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알베르트가 중얼거렸다.
“너무…… 닮았어.”
클라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반짝이며 알베르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아니야. 넌 로리안이 아냐.”
“맞아요, 아니에요.”
알베르트는 그녀의 손을 보고 있었다. 미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녀의 손에서 작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알베르트는 그 손을 잡았다.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히던 클라라였으나, 알베르트가 말없이 손을 지켜보자 그 얼굴엔 두려움이 스쳐지나갔다. 알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난 솜씨 좋은 흑요정 인형장이를 알고 있어.”
그 말을 들은 클라라의 얼굴이 굳었다.
“그 사람이 그랬어. 아무리 인형을 사람과 똑같게 만들어도 손만은 작고 복잡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알베르트의 손 위에 얹어진 하얗고 가녀린 손은 비정상적으로 매끈했고 사람의 손에는 없는 금이 나 있었다.
잘 보니 눈에 띄지 않을 뿐 손목과 무릎 등 다른 관절에도 금이 보였다. 클라라는 손을 빼려 했으나 알베르트는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알베르트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하는 순간, 클라라가 알베르트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졸지에 미카는 바닥에 쓰러지고 알베르트의 등에 깔리게 되었다.
알베르트가 황급히 일어나 미카를 살폈다.
“미카!”
“인형이면 뭐 어때서요?”
클라라가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말했다.
“인형이면 안 되는 건가요?”
클라라의 몸에서 심상찮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 흑마법을 배우고, 사람들의 몸도, 영혼도 빼앗아 가두고 얻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녀가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두 눈엔 있을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음만은 얻을 수 없는 건가요……?”
알베르트는 미카를 안아들고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클라라의 눈이 독기를 품었다.
“아까부터 거슬리는데…… 그 여자앤 누구죠?”
“엥?”
알베르트가 입을 뻐끔거렸다.
“날 보러 온 것 아니었나요? 그 여자앤 누구에요? 애인인가요?”
“아니, 얜 남자고 애인도 아닌데…….”
“거짓말 하지 말아요! 내가 인형이라고 무시하는 건가요?”
“아니, 이해해. 확실히 여자같이 보이긴 할 거야…….”
미카에겐 적잖이 상처가 되는 말들이 오고갔다.
클라라가 올렸던 손을 세차게 내렸다. 동시에 다른 쪽 손으로 딱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숲 속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뭐지?”
알베르트가 당황해했다.
미카는 숲 속에서 빛나는 투명한 초록색 바위들을 보았다. 오면서 보았던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아간조가 석화마법의 매개체라고 추측만 했을 뿐,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쾅
무언가가 그들의 바로 옆에 떨어졌다. 알베르트와 미카는 깜짝 놀랐다.
“헉!”
말머리 석상이었다.
알베르트가 싸우던 실제 사람의 모습을 한 석상과는 달리, 미카가 오면서 간간이 보았던 조악한 석상들과 모습이 같았다.
클라라가 분노에 찬 눈으로 미카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재차 손을 올렸다.
허공에 반투명한 거대한 손들이 생겨났다. 손에는 말머리 석상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클라라가 손을 내리자 손들이 그들을 향해 덮쳐왔다.
“젠장!”
알베르트는 필사적으로 손들을 피했다. 말머리 석상들이 땅을 내리치며 땅에 구멍을 만들었다.
그는 이리저리 피하다가 클라라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곤 클라라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그녀의 눈이 샐쭉해졌다.
클라라도 발차기로 맞받아쳤다. 놀랍게도 손해를 본 쪽은 알베르트였다. 땅바닥에 넘어졌다가 떨어지는 석상들을 피해 미카를 안고 구르던 알베르트는 결국 무릎에 석상을 맞고 말았다.
콰직
“크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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