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처음 아라드로 내려오고서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아.' 낯선 곳에 대뜸 도착했지만, 소년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소년은 그저 잠깐 둘러본 뒤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소년이 갑작스레 나타난 곳은 정령들이 살아가는 숲이었다. 정령들은 낯선 인물에게도 친하게 다가왔지만, 지금은 소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멀찍이서 소년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소년에게 다가가는 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흉포하게 반응하는 정령들뿐이었다.
소년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정령들을 적당히 피해가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가야 숲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걷고 또 걷던 중 소년은 빗자루로 열심히 정령들을 두드려 패는 한 소녀를 보았다. 눈빛이 흉악한 것이 사람도 쉽게 팰 듯한 그런 눈길이었다. 소년은 가만히 그 소녀를 피해서 가고자 몸을 돌리려다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빗자루를 내리치려는 동장으로 굳어 가만히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은 아까 그 눈빛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누, 누가 있는 줄은 몰랐어!"
소녀는 변명하듯 외쳤다. 그리고 더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계속 어물거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것엔 이미 관심이 떠나간 지 오래였다. 소년은 가만히 소녀의 귀를 가리켰다. 뾰족한 것이 마계에서부터 온 사람인 모양이었다. 소녀가 뭘 가리키느냐며 계속 두리번거리자 이번엔 소년은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마계에서 온 것은 소녀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소녀는 소년의 귀를 보곤 해맑게 웃었다. 같은 마계인을 만난 것이 그렇게나 기쁜 일인지 소년의 손을 잡고 방방 뛰면서 반갑다며 인사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 표독스런 표정의 소녀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변화였다.
"저기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같이 다니지 않을래?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스피넬이야. '스피-'라고 불러도 돼!"
"…프로스트."
"프로스트? 그럼 있지, 서리라고 불러도 돼? 돼? 서리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거다? 그런 거다? 헤헤."
소녀는 소년의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그 이후로 소녀는 소년과 함께 모험을 시작했다. 함께라기보단 소년이 소녀에게 끌려다니는 느낌이 더 강했지만, 소년은 불평도 없는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대화에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에 둘 사이 대부분의 대화는 소녀의 자문자답에 가깝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상관없는 건지 소녀는 소년과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자주 소년에게서 알 수 없는 한기가 뿜어져 나오곤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소녀는 소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가끔 참기 힘들 정도로 추울 때만 잭 오 랜턴을 불러내 주변을 데우는 것이 전부였다. 소년은 잭 오 랜턴을 끌어안은 소녀를 보고 의아해했다. 냉기의 정령조차 소년에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이 소녀는 소년을 떠나지 않는 것인가? 아마 별 이유 없으리라 하는 생각에 곧 그 의문은 소년의 머릿속에서 없어졌다.
소년과 소녀는 그 낯선 곳을 함께 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우며 다녔다. 물론 그 행동에 소년의 의견은 단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소년과 소녀가 돕는 대부분의 일은 대전이 이후 흉포해진 몬스터들을 잠재우거나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은 도우며 여행하던 중 소년과 소녀는 얼음이 내리는 곳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으와앗, 추워! 서리야, 여기 조금 추운 것 같아. 아, 서리 때문은 아니야! 서리랑 만날 같이 있어서 알아. 지금 이건 서리 때문 아니야. 그냥 여기가 좀 추운 곳 같아."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얼음으로 가득했다. 천장부터 저 아래 바닥까지 온갖 곳이 얼음으로 잔뜩 들어차 있었다. 얼음 안쪽에 흐릿하게 무언가가 박혀있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그게 뭔지는 잘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형체가 빼곡하게 박혀있는 것이 꼭 시체가 잔뜩 전시되어있는 듯하여 기분이 나빠질 만한 곳이었다.
소년은 얼음들에서 느낀 답답한 기분을 삼켜 넘기고 가만히 소녀의 뒤를 따랐다. 기분이 나쁘고 자시고 해도 소녀가 아간조의 일을 돕겠다며 한달음에 달려온 곳이었다. 소년의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일이 조금 밀릴지언정 완전히 관두지는 않을 것이 뻔했다. 조금 더 늦게 고통스러울 바엔 차라리 당장 고통스러운 것이 더 나았다. 소년은 늘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는 미쉘을 도우며 많은 것을 보았다. 검은 악몽의 속에 들어가 지금은 한 명을 빼고 멸종한 고블린을 잔뜩 보았고 멀쩡할 적의 하늘성도 보았다. 다른 세계의 미쳐버린 GBL교를 보았고 다 멸망한 흑요정들의 도시도 보았다. 그렇게나 많은 것을 보았지만, 미쉘과 아간조가 쫓는 검은 악몽에 대한 것을 소년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미쉘, 미쉘.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요?"
"무슨 부탁인가요?"
"다음 문은 미쉘이 의심스러운 곳에다가 열어주세요. 할 수 있어요? 미쉘은 할 수 있죠?"
"가능은 한데…이유를 물어봐도 되나요?"
소녀는 미쉘과 다음 도착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소년은 멀찍이 떨어져서 소녀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오래 있어서인지 소년은 답답하고 오싹한 이 공간에 익숙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미쉘에 의하면 이곳을 가득 메운 얼음 속에는 아간조와 브왕가가 손수 발품을 팔아 봉인한 몬스터가 잠들어있다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고 한기가 흘러나오는 소년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중 소녀가 소년의 등에 매달렸다.
"서리야! 다시 가자! 아니면 더 쉬고 싶어? 음…가는 거지? 가자, 서리야!"
소녀에게 이끌려 소년과 소녀가 도착한 곳은 설산이었다. 체념의 빙벽과는 비교도 안되는 추위가 한꺼번에 몰아쳤다. 소녀는 못 참겠다는 듯 잭 오 랜턴을 불러내 소녀의 근처에 띄워놓았다. 잭 오 랜턴의 열기에 추위는 약간 사그라졌다. 소년과 소녀는 눈이 몰아치는 설산을 돌아다녔다. 추위 속인 만큼 늘 뒤처지던 소년은 소녀의 앞에서 나아갔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중 거구의 괴물이 소년과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스쿼치는 위협적이게 울부짖으며 소년과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년은 서스쿼치의 공격을 피하며 얼음의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얼음의 화살은 서스쿼치의 가죽에 가로막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졌다. 소년은 빠르게 창을 만들어 던지려했으나 갑작스레 날아온 서스쿼치에게 붙잡혀 몇 번이고 바닥에 내리 찍혔다. 소년은 고통에 내쉬듯 신음했다. 그나마 눈이 수북이 쌓여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소녀는 서스쿼치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플로레상을 불러내 강하게 던졌다. 소년이 붙잡힌 지금은 큰 기술을 쓰기 힘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스쿼치는 소녀로 목표를 바꾼 모양이었는지 소년을 던져버리고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녀는 서스쿼치를 상대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자 했다. 던져진 소년의 도착지점이 단단하게 얼어붙은 돌이 아니었으면 말이다.
무언가가 둔탁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스쿼치의 울부짖음에 묻혔지만, 소녀는 확실히 들었다. 소년이 날아간 쪽에서 들린 것이었다. 소녀는 급하게 개조된 슈르르를 던져둔 뒤 소년을 향해 달려갔다. 소년은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며 힘없이 쓰러져있었다. 소녀가 흔들면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소녀는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계속 흔들었지만, 응답은 없었다. 슈르르의 폭발을 한껏 먹은 서스쿼치는 소녀에게 분노를 표하고 있었다.
"닥쳐, 이 구리게 생긴 짐승 놈아!"
소년과 소녀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표독스런 모습이 다시 소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여태 소년에게 보인 그 모습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서스쿼치는 소녀를 향해 팔을 휘둘렀고 소녀는 소년을 데리고 빠르게 그 공격을 피했다. 도망치며 뿌린 용암 포션은 덤이었다. 서스쿼치가 갑작스레 눈 위에 퍼진 용암지대 위에서 날뛰는 틈에 소녀는 축 늘어진 소년을 가지런히 뉘인 뒤 늘 메고 다니던 팬더 모양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곤 걷어찼다.
"일어나. 안 일어나? 당장 일어나! 일어나서 네 밥값을 하란 말야! 기껏 안 뒤지고 살아가게 만들었더만 왜 필요할 때엔 싸게싸게 안 움직이는데! 일어나! 실패한 호문클루스 주제에 사람 말 무시까지 마!"
소녀의 험한 말에 팬더 가방은 흐물거리며 일어났다. 가방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말없이 용암지대에서 벗어난 서스쿼치를 가리켰다. 그리곤 엄지로 제 목을 강하고 단호하게 그었다. 그 제스쳐를 끝으로 실패한 호문클루스가 든 팬더 가방은 서스쿼치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스쿼치는 귀찮은 건 치우려는 듯 가볍게 팬더 가방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팬더 가방은 서스쿼치의 팔에 들러붙어 물어뜯기 시작했고, 서스쿼치가 세차게 팔을 털어보아도 가방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 서스쿼치는 그 작은 가방과 싸울 수 밖에 없었다.
큰 덩치와 작은 덩치의 싸움을 뒤로하고 소녀는 소년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힘없이 축 쳐져 있던 소년은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가만히 소녀를 보고 있었다. 소녀는 당황해 하며 언제부터 깨어있었냐 물었고 소년은 가만히 서스쿼치와 분투하는 가방을 바라보았다.
"우으…."
"원래 성격?"
"무, 묻지 마아…."
"…스피넬, 무서운 성격."
"아, 아냐! 원래 그거…아, 방금 뭐라고?"
"무서운 성격."
"그거 말고오!"
가방에게 산채로 뜯어먹히는 서스쿼치를 뒤로하고 소년과 소녀는 이름을 나눈 이래 처음으로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었다.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소년을 보며 다행이라는 듯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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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험공부 하기 싫네요
그래도 던파는 접속 안했으니 다행이지..
..글은 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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