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청송로(歲月靑松老)*
1
민병산 선생*은 회갑 바로 전날 세상을 떴으니
세상에 만 예순해를 머문 셈이다.
가족이 없는 그를 위해 친구와 후배들이
잔치를 열어준다는 걸 극구 마다했을 때
그의 뜻대로 했더라면 그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준비했던 잔치 음식은 장례 음식이 되고
회갑 옷은 그대로 수의가 되었다.
그날을 위해 축시를 준비했다가
몇자 고쳐 조시로 읽은 나는
그가 산 세월을 훌쩍 넘겨 스무해나 더 살았다.
내가 그의 결기 있는 죽음을 부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살아남아서 무슨 일이고
조금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을 터지만.
그가 다니던 인사동과 관철동의 까페와 전시장을 드나
들며
나는 늘 허망했다. 그보다 더 오래 살면서
내가 한 일이 무엇인가.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일을 겪었을 뿐.
그뿐, 오직 그뿐이니.
2
어느날 보니 인사동 좁은 골목 한 까페에
그가 남긴 글씨 한폭이 걸려 있다.
歲月靑松老
그만하면 꽤 버텼다고?
歲月靑松老
이제 뭘 더 바라느냐고?
세상에 만 예순해를 살다 간 그의 글씨 한폭이
아니, 삐딱하게 모자를 쓴 그가
그뒤로도 스무해나 더 살고 있는 나를
위로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면서 걸려 있다.
바보로 사는 게 더 어려웠다는 걸
아직도 모르냐면서.
* 세월 앞에는 푸른 솔도 견디지 못한다는 뜻.
* 민병산(閔炳山): 재야 철학자(1928~88).『똘스또이』『철학의 즐
거움』등의 저서가 있음.
사진관집 이층
신경림, 창비시선 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