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슈토베*의 민들레
팔작지붕에 회벽을 두른
기와집 마당에
순한 얼굴의
민들레 두송이가 피어 있다
꽃 곁에 쭈그리고 앉아
꽃의 이마와 볼 눈썹에 눈 맞추는데
꽃이 나를 와락 끌어안는 느낌이 있었다
찰나 속을 흐르는
영원의 강
한 노인이 다가와
가만히 내 등을 끌어안았다
거친 주름살이 내 뺨을 스치는 동안
민들레꽃 냄새가 났다
내 이름은 세르게이 김
김해 김씨인데 조선 이름은 잊었다
남원에서 태어났지만 남원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당신은 남원을 아는가?
아버지는 제사를 지낼 때 무릎을 꿇고 절하셨다
죽은 사람에게 절할 때 두번 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그가 내 손을 붙들고
끝없이 이야기하는 동안
더듬거리는 전라도 사투리 속으로
배추흰나비 한마리 팔랑팔랑 날아올랐다
그의 손녀 나타샤는 스물두살
비슈케크대학 한국어학과 4학년이라 한다
눈빛 소처럼 맑고
웃음소리 월등 복숭아꽃 냄새만큼 달았다
소비에트가 붕괴된 후
유대인들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간다고
고국에 돌아가면 집도 직장도 다 준다고 했다
한국은 언제 우릴 부르는가? 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부엌 앞에 나무절구가 놓여 있다
1937년 강제 이주 열차를 탈 때
조선에서 할머니가 가져온 것이라고 나타샤가 말했다
두부된장국 끓이던 할머니가 이야기했다
조선 사람은 어디에 살든 이팝을 먹지
그래 불술기**에 절구를 싣고 왔지
잘하셨어요 어르신,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하얀 옷을 입고
두부된장국을 먹고
팔작지붕 기와집에 박 넝쿨이 자라는 동안
우리가 고려 사람이라는 것 잊은 적 없어요
한국 사람들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오천년 역사가 이곳에 숨 쉬고 있어요
1937년 그날
왜 우리가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버려졌는지
단 한번 묻지 않은 조국이여,
당신은 부끄럽겠지만
우리는 부끄럽지 않다
나타샤의 하얀 볼우물이 내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열차를 타고 온 조선인들이 중앙아
시아의 사막지대에 세운 최초의 조선인 마을.
** 증기기관차.
꽃으로 엮은 방패
곽재구, 창비시선 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