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린 후드 안에서 갈색 피부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루를 보았다.
“어? 그.. 그 계집이 아니네?”
테루의 말에 모두가 여자를 돌아봤다. 갈색 피부 여자는 자신에게 여러 남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본 게르두는 눈에 익은 후드가 광장에 몰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잡아!’
검은 삼형제는 군중을 향해 와락 달려들었지만 테루 말고는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보글러가 힘으로 사람들을 밀칠 때마다 욕설과 고성이 났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알리스터를 보고 카스노아가 빙긋 웃었다.
“흐음, 이거 점점 재미있어지는걸.”
애런은 광장 중앙 부근에 이르자 여자가 누군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나비처럼 우아하게 몸을 놀리는 여자는 그동안 들었던 거미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미와 싸우는 사람은 수염이 많긴 하지만 행색이며 실력이 스승님인 것 같은데? 거미를 찾으시더니 여기까지 오신 건가?’
남자가 짧은 기합과 함께 팔을 뻗었다. 하나의 검이 셋으로 나눠져 동시에 세 방향에서 찔러들어갔다. 거미도 팔을 흔들자 세 마리 뱀처럼 나눠진 채찍이 각각의 검을 맞받아쳤다. 퍽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과 채찍이 맞부딪치고 사라졌다.
“우와! 세상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노예며 상인이며 할 것 없이 저마다 손뼉을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애런도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싸움을 보고 있었다. ‘프라나를 검처럼 만든 건가? 거미도 밀리는 기색이 전혀 없어. 갤런드 말대로 상당한 고수야. 두 사람 모두 정말 대단해!’
애런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냐. 틀림없이 와스프도 이 사람들 속에 있을 거야. 다들 여기 정신이 팔려있을 때 아자니를 찾아야 해’ 애런은 군중 사이를 헤집으며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거미의 기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건너편에서 사람들을 비집고 나오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있는 데다 후드까지 써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몸선이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여자는 뒤를 힐끗 돌아보며 사람들이 만든 원을 따라 잰걸음 쳤다. 조금 뒤 여자가 나온 근처에서 짧은 머리의 마른 남자가 튀어나왔다.
‘저건 테루잖아! 그럼 아까 그 여자가?’ 애런은 테루가 두리번거리다 여자가 간 방향으로 쫓아가는 것을 보고 얼른 앞으로 나오려 했지만 사람들에게 뒤엉켜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애런이 용을 쓰면서 조금씩 나가는 사이 뒤를 살피는 여자를 테루가 알아봤다.
놀라 뛰어가는 아자니를 보고 테루가 속도를 내려는 순간 그의 앞으로 창과 방패를 든 경비병들이 불쑥 나왔다. 줄지어 나오는 경비병들에 가로막힌 테루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아자니에게 지켜보고 있다는 손짓을 했다.
“아자니!”
애런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지 아자니는 다급하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경비병들이 사람들 앞을 따라 빙 둘러서는 바람에 아자니는 물론 테루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줄지어 서서 벽을 세운 경비병들은 방패로 몸을 감싸고 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을 향해 일제히 창을 겨눴다.
“나는 북쪽 광장 경비대장 파크맨이다. 당장 싸움을 멈춰라!”
경비대장의 호령이 광장에 울렸지만 거미와 남자는 아랑곳 않고 싸움을 이어갔다.
“경비병들을 물리시는 것이 어떨까요?”
라스테온이 크레이그에게 말했다.
“거미는 저의 귀빈으로 왔으니 마땅히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싸움 때문에 경매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경매장에서의 난동은 처벌 대상입니다. 반드시 저자를 잡아야 합니다.”
“저 두 사람의 싸움에서 피해를 입는 건 한 사람일 뿐이고 단장님에게는 아무 손해도 없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이 개입하면 누구의 손해가 제일 클까요?”
크레이그는 잠시동안 말없이 광장을 내려다봤다. ‘일단 포위하고 신호하면 일제히 저 남자에게 방진을 펼쳐라.’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광장의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령에 맞춰 경비대원들이 창을 거두고 뒤돌아 사람들을 방패로 세걸음정도 밀어내는 사이 애런이 틈을 비집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들어서자 거미와 남자의 무기가 일으키는 바람과 울림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채찍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몸에 닿을 때마다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뒤에서 보던 것보다 채찍의 범위가 더 크네. 몇 걸음만 잘못 디뎌도 공격에 휘말리겠어.’
나름 채찍의 범위를 가늠하고 서둘러 아자니가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렸다. 광장의 절반을 지나는데 갑자기 옆에서 쉬익 하는 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달려들었다. 검을 뽑을 여유도 없어 황급히 검집째로 들어 막았다. 순간 거센 물맷돌에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양손에서 터지며 몸이 뒤로 튕겨 나뒹굴었다.
광장의 사람들이 동시에 내뱉은 단말마가 신호라도 된 듯 채찍과 검이 움직임을 멈췄다. 경비병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애런은 손에서 어깨까지 저리고 욱신거렸다.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지만 달궈진 쇠막대기를 쥔 것처럼 양손이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손바닥이 터져서 흘러나온 피가 검집 가죽을 적셨다.
거미와 남자가 애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거기 혹시 애런인 게냐?”
“네! 스승…님.”
애런은 사람들이 들을까 조그맣게 말끝을 흐리고 클라우드 근처로 뛰어갔다. 감정을 알 수 없는 가면이 갑자기 끼어든 애런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클라우드는 고개를 쑥 내밀고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니? 네가 여기 왜? 아가씨랑 함께 도망친 곳이 여기더냐?”
“아자니가 노예가 되기 전에 구하려고 왔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설명해 드릴 여유가 없어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애런은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바삐 걸음을 나섰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애런의 등을 향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클라우드가 검을 가볍게 떨치자 애런의 등에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자루 터지는 소리와 함께 튕겨난 채찍이 거미의 손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소리에 놀란 애런이 뒤를 돌아봤다.
“어서 가거라. 얼른 저년을 처리하고 너를 찾으마.”
거미에게 달려드는 클라우드에게 애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경비병들 사이로 들어갔다. 입을 벌린 채 놀란 얼굴로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들었다.
“방금 뭐야! 굉장하다!”
“검에서 뭐가 튀어나간 거야? 바람이야, 뭐야?”
그동안 싸움을 지켜보며 무표정했던 크레이그가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라스테온이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검기를 처음 보십니까?”
“아닙니다, 테세이아에서 검기를 쓰는 자를 몇 번 상대했습니다만 저렇게 빠르고 정교하게 쓰는 건 처음 봅니다. 세바고스에 저런 실력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싸움은 거미의 패배가 확실하군요.”
“글쎄요, 거미가 프라나를 쓸 줄 모른다면 그렇겠죠.”
‘방금 저 남자의 공격. 검에 프라나가 맺히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어. 게다가 검기의 강도도 채찍에 맞춰 딱 알맞은 정도였어. 마치 생각하는 그대로 프라나를 쓰는 것 같아. 그렇다면 저자도 쥬논님과 같은 네프림이란 말인가?’
라스테온은 남자와 짧게 마추치고 사람들 사이로 들어간 소년을 주시했다. ‘저 소년이 맞은 공격은 거미도 의도한 것이 아니었어. 채찍의 경로 안에 갑자기 소년이 들어왔을 뿐이야. 소년도 미리 대비할 수 없었을 텐데 제대로 받아냈어. 허술해 보이지만 절대 평범한 녀석이 아니야. 거미와 저 남자도 그렇고 오늘은 꽤나 재미있는 날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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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엘더사가 - 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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