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넬. -
“전 애런이에요. 제가 빨리 노예 경매장으로 가야 해서 더 이야기 나눌 수가 없네요. 부디 행복하게 살길 바랄게요.”
애런은 은화 두 닢을 손에 쥐여주고 일행과 함께 걸음을 나섰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들이 나자리아 양을 왜 단주라고 한거우?”
“저희 마을이 감자 농사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가장 큰 수입은 용병단이에요. 평소에는 신녀로서 용병으로 나간 마을 사람들의 무운을 빌지만 사안이 중요한 경우에는 제가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어요.”
애런과 뒤렉이 입을 턱 벌리고 나자리아를 보았다.
“그래서 마을 장정들이 하나같이 분위기가 범상치가 않았구만.”
누군가 뒤에서 애런의 팔을 잡았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퀴퀴한 냄새가 훅 들어왔다. 언제 따라왔는지 넬이 애런의 팔을 잡아당기며 다른 길을 가리켰다.
“저쪽은 북쪽 지구 방향인데 왜 저러는 거우?”
넬이 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 도움. -
“허허, 험한 자들의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줬으면 됐지. 뭘 자꾸 바라. 참으로 뻔뻔한 여자로구만.”
“도와드리고 싶지만 제가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어려워요.”
애런의 말에 넬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글자를 콕콕 가리킨 뒤 자신을 가리켰다.
“아, 도움을 주시겠다고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넬이 다시 글을 썼다.
“겨엉.. 매, 부.. 욱..? 북쪽 광장?”
“아까 경비병이 동쪽 광장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 여자는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갑시다.”
뒤렉이 손사래를 치며 앞장섰다. 넬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북쪽 글자를 손바닥으로 탁탁 서너번 두드리고는 가슴에 손을 턱 얹었다.
“이 여자는 북쪽이 맞는다고 확신해요.”
나자리아의 말에 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왜들 갑자기 귀가 얇아진 거우. 그 경비병이 심심풀이로 우리한테 거짓말이라도 했단 말이우? 나 참.”
애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뒤렉과 또랑또랑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넬을 번갈아 보았다. ‘뒤렉씨 말이 맞긴 한데…, 아까 그 남자들이 넬이 경매장에서 도망쳤다고 했지!’
“그럼 북쪽 광장은 어디로 가야 가장 빠른가요?”
넬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을 두드렸다.
“그럼 부탁드려요.”
“어? 어?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덥석 믿다니. 애런군은 속이 차-암 넓구려.”
뒤렉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사이 애런과 나자리아가 넬을 따라나섰다. 뒤렉은 짧은 한숨을 내뱉고 얼른 그들을 따라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북쪽 광장은 노예를 선보일 준비를 하는 상인들과 노예들로 북적였다. 각지에서 온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와스프의 검은 삼형제와 아자니도 있었다. 테루가 광장 가외에서 팔짱을 끼고 상인들이 노예들을 오와 열을 맞춰 나란히 세우는 것을 보고 말했다.
“형님, 우리도 저기에 세워야 하는 거 아니요?”
게르두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군대를 만들 노예를 뽑는 거야. 우린 이후에 열리는 경매에 내놓아야 해.”
“얼마나 받을 것 같소? 대모님이 생각하시는 가격이 있을 거 아니요?”
“5천 펜트.”
테루와 보글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아자니를 돌아봤다.
“이 여자애가 그렇게나 값이 나간다고요?”
“대모님이 바라시는 최고가가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얼마가 될지 모르는 거니까 일단 시작가는 높게 잡아야 하겠지. 저쪽에서 접수부터 하자.”
검은 삼형제는 아자니를 데리고 회랑 한쪽에서 경매 순서를 받기 위해 줄의 끝에 섰다. 아자니는 주변에 수많은 노예들을 보면서 자신도 이제 저 사람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 중에서 나처럼 아빠에게 팔려서 온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엄마 말대로 좋은 일만 하려고 노력했는데 하나뿐인 가족이 날 버리다니.’
유일한 희망은 이제 애런뿐이었다. ‘애런은 무사할까? 어쩌면 여기에서 날 찾고 있을지도 몰라.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자. 혹시라도 도망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 아자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평소라면 상인들이 각지에서 데려온 노예들의 경매가 진행됐겠지만 오늘은 다른 행사가 먼저였다. 광장 앞에 삼층으로 세운 누대에는 의자에 앉아 노예들이 정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누대 주변에 각기 다른 복장의 병사들이 서있었다.
“크레이그 단장님, 저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검붉은 옷에 금발 머리를 어깨까지 걸친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삼십 대에 갸름한 얼굴의 미남형이었지만 눈매가 가늘고 매서웠다.
“글쎄요. 대공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은 없겠지만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훈련을 통해 쓸만한 병사로 만들 테니까요.”
크레이그라고 불린 남자는 검은 피부에 오십 대로 보이는 얼굴로 왼쪽 눈에 검은 가죽 안대를 하고 있었다. 하관이 두텁고 생김새가 억실해서 옆에 앉은 대공과는 대조적이었다.
“오! 어서오십시요, 거미님.”
하얀 옷에 검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가면을 쓰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하얀 바탕에 절반은 검은색으로 거미의 반쪽 형상이 칠해진 가면은 눈매가 살짝 올라가게 뚫린 눈구멍이 웃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이분은 발라스의 라스테온 애드리건 대공이십니다.”
크레이그의 정중한 예를 받고 자리에 앉은 여자는 대공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라스테온도 짧은 목례로 화답했다. ‘토레스가 실패했군. 정예 검사를 둘이나 붙여줬는데도 이 여자를 죽이지 못했단 말인가.’ 라스테온은 고개를 돌렸지만 시선은 그대로 거미에게 두었다.
“아니, 명문가의 대공께서 노예 용병 따위에 관심을 가지시다니요. 제국의 최정예 병력으로 이름난 발라스 군이 예전 같지 않은가 봅니다. 이거 하늘에 계신 선친께서 몹시 섭섭해하실 일이군요.”
화려한 복장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장년 남자가 양옆에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나타나 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대공을 보며 비스듬히 올리는 입꼬리를 따라 콧수염이 기울어졌다.
“오랜만이군요. 카스노아 경. 야만족들 상대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이렇게 멀리까지 오셔도 되는지요.”
“공의 선친 덕에 얻은 귀중한 영지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시간이 나서 바람도 쐴 겸 괜찮은 신붓감을 찾아 나왔을 뿐입니다.”
카스노아가 씩 웃으며 양쪽에 서 있는 여자들의 손을 잡았다. 오른쪽에 검은 피부의 여자와 왼쪽에 붉은 머리색의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라스테온 공은 아직도 혼자이신가요? 정실에 후궁까지 부인을 여럿은 두셔야 할 나이에 아직도 혼자라니. 혹시 여자가 싫으신 건 아닌지요?”
‘주인의 목을 문 개 따위가 감히 내 일을 들먹거려? 언젠가 버릇 없는 그 혓바닥을 뽑아주마.’ 라스테온은 한순간 입술을 실룩였다가 반달눈을 하고 말했다.
“일이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공께서는 여인을 보는 안목이 높으시니 좋은 신붓감이 있으면 한번 추천해주시죠.”
“하하, 취향만 맞으면 창부든 노예든 가리지 않는 미천한 놈이 지체 높은 애드리건 가문에 감히 누를 끼칠 수 있습니까.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저분은 어떠실까요?”
카스노아가 맞은편에 앉은 거미를 가리켰다.
“스스로 미천한 줄 안다면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가면 속에서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소문대로 매섭기가 서리 어린 칼바람 같군요. 거미님. 아니 여제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카스노아가 씨익 웃으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가 내려 보였다.
“거미님 손안에 있는 도시만 따져도 충분히 여제라고 칭할만하고 여기 계신 라스테온 대공은 제국 때부터 이어져온 명문가 중에 명문가의 적자이시니 서로에게 이보다 더 잘 맞는 배필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면 속의 시선이 라스테온에게 향했다. ‘제국의 마지막 충신 베르시온의 아들이 왜 추잡하게 노예 군대 따위를 가지려는 것이지?’ 라스테온이 반달눈을 하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지배하지도 않으면서 왜 계속 도시들을 손에 넣는 것이지?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해.’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보았다. ‘흐음, 분위기가 제법 서늘한데? 당분간 서로 손을 잡을 일은 없겠군.’ 카스노아는 라스테온과 거미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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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엘더사가 - 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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