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호리호리한 몸매가 드러나는 하얀 옷에 머리칼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허리에 가볍게 걸린 금빛 장신구가 반짝였다.
‘뭐야! 도망치지 않았잖아?’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는 애런과 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지만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여자가 사슴처럼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애런은 눈동자로 화살이 쑥 날아드는 것처럼 찌릿해져서 두 눈을 실룩거렸다.
갑자기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이유도 없이 얼굴이 뜨거워져서 당황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할지도 잊은 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아자니도 예쁘지만 이 여자는 정말…, 백합이 사람이 된 것 같아.’ 체리 같은 윤기를 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정말 무례하구나, 남의 몸을 몰래 훔쳐보기나 하고.”
한겨울 얼음 밑으로 흐르는 냇물처럼 맑고 차가운 목소리에 애런은 깜짝 놀라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밀고 크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난…, 목욕하러 왔다가…, 그.. 그러니까…, 여긴…, 나만….”
소녀는 흠칫 놀라 팔로 앞가슴을 감싸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아니…, 그게 목욕을….”
짝! 애런은 볼이 후끈해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녀의 양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뺨을 맞은 건 난데 왜 자기가 얼굴이 빨개진 거지?’
“무례하게 목욕하는 날 봤다고 대놓고 말해야겠니?”
소녀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애런을 보았다. 눈두덩은 퍼렇게 부어 내려앉고 코와 입 주변은 말라붙은 피로 범벅에 오리주둥이처럼 퉁퉁 부푼 입술은 한구석이 터져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한 쪽 뺨에 벌건 손자국이 인장처럼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녀의 앙다문 입가에 잡힌 주름이 조금 풀렸다. 고개를 돌리다 애런 뒤에 쓰러진 남자를 보았다. 애런은 소녀가 끔찍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앞으로 나서며 몸으로 가리다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그녀 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소녀는 갑자기 덮쳐오는 애런에게 부딪혀 함께 넘어졌다.
애런은 쓰러지는 와중에도 소녀가 다치지 않게 감싸 안고 몸을 돌렸다. 자갈 섞인 바닥에 쿵 하고 부딪혀 등이 쑤시고 아파서 으으 하고 신음 소리를 냈지만 소녀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애런의 얼굴을 뒤덮은 소녀의 촉촉한 머리칼에서 그윽한 라일락 향기가 가득 풍겼다.
얼굴 위에 머리칼을 걷어내니 품 속에서 그녀가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고 있었다. 기겁을 하고 안고 있던 손을 풀자 소녀가 곧바로 따귀를 올려붙였다. 짝 소리와 함께 볼살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소녀는 애런을 밀치고 다람쥐처럼 곁에서 떨어졌다. 애런은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났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옷에 묻은 흙을 털던 소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건 왜 묻는 거지?”
“방금 나 때문에 다쳤을까봐….”
“괜찮아. 저 사람은 누구지?”
그녀가 손을 들어 남자를 가리켰다. 애런은 그가 몰래 지켜보다가 그녀가 물 밖으로 나오자 달려드는 것을 막으려고 한 이야기를 했다. 그전까지 목욕하는 것을 지켜본 것도 이야기하려다 또 뺨을 맞을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소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 만난 적이 있었나?”
“아니, 처음인데.”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둥글게 오므린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한 거니? 저렇게 누워있는 게 저 남자가 아니라 네가 될 수도 있었어.”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험한 일을 당하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어.”
그녀는 애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남루한 옷차림에 멍투성이지만 이목구비가 선이 뚜렷하고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맑은 빛이 담겨있었다. 애런은 또 뺨을 맞을까 싶어 무슨 말실수를 했나 생각하는데 역시나 또 소녀의 손이 뺨으로 올라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걸.’ 질끈 눈을 감았다. 화끈거리는 뺨 위에 차가운 손길이 부드럽게 닿았다. 꿈뻑 눈을 떠보니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둥글게 기울어져 있었다.
“고마워.”
소녀의 작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애런은 가슴속에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름은?”
“애런, 애런 게일.”
소녀가 들리지 않는 혼잣말로 애런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세바고스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에 혼자 있는 거야?”
“테세이아에서 왔는데 선델리아로 가다 길을 잃었어.”
“뭐? 바다 건너에서 왔다고? 이 시골까지 무슨 일로 온 거야?”
“남의 일을 함부로 캐묻다니 무례하구나.”
“아..., 미안해. 그.. 그럼 내가 길을 안내할게! 난 나무꾼이라 이 숲을 손바닥 보듯이 잘 알아.”
“그럼 선델리아가 어느 쪽이야?”
애런은 손사래를 쳤다.
“혼자서는 위험해. 산짐승들도 있는 데다 저 남자 같은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 우리 집에 있다가 날이 밝으면 그때 가. 이 근처야.”
애런은 손으로 숲 너머를 가리켰다. 소녀는 가리키는 곳은 보지 않고 그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사양할래. 네가 지금까지 한 행동을 보면 여간 무례한 게 아니어서 말이지.”
소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애런을 올려봤다. 애런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미간을 찡그렸다. 갑자기 조금 전 그녀를 안았을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느낌이 떠올랐다.
품 안에서 그녀는 작은 새처럼 여리고 부드러웠다. 팔에 감겼던 잘록한 허리의 촉감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바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개를 돌려 폭포를 보고 말했다.
“그래도….”
“사실 네 말대로 할까 생각했는데 방금 네 표정을 보니 마음이 싹 가시는구나.”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선델리아가 어느 쪽인지나 알려줘.”
“저.. 저쪽으로 가다 둘레가 사람 두세 명 만한 나무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가면 돼.”
애런은 집과 반대 방향을 가리켰고 그녀는 그곳을 눈여겨보았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 향기가 전해졌다. '아무래도 숲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함께 가는 것이 좋겠어.’ 애런이 먼저 걸음을 내디디며 앞장섰다.
“그럼….”
“같이 가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날 못 본 걸로 해줘.”
“왜?"
소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애런은 또 뺨을 맞나 싶어 움찔하는데 작은 통을 내밀었다.
“연고야, 다친데 발라.”
소녀는 돌아서다 남자의 시신을 가리켰다.
“이 사람은 어떡하지?”
“이렇게 둘 순 없어,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 줄 거야.”
소녀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넌 진짜 착한 사람이구나. 멍청할 정도로.”
“무슨 말이야. 한밤중에 이런 깊은 숲에서 혼자 목욕하는 여자가 더 이상하지.”
“그럼 대낮에 광장 분수대에서 혼자 목욕하는 여자는 안 이상해?”
애런은 말문이 막혔다.
“맞아, 착한 건 멍청한 게 아니야, 요즘 세상이 그렇지 않은 거지.”
소녀는 달을 올려봤다.
“나무꾼이라면서 왜 검을 가지고 있어?”
“할 일이 있어.”
애런은 낡은 검집을 허리춤의 고리에 걸었다.
“목숨을 걸 만큼?”
굳게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 애런을 소녀가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애런은 다시 눈으로 화살이 날아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와 간격이 좁혀질수록 점점 더 눈이 저리고 찌릿해졌다.
‘왜.. 왜 이러는 거지?’ 바짝 붙은 그녀의 가슴 끝선이 몸에 살짝 닿았다. 소녀의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꽃향기가 턱을 타고 코로 들어왔다. 그녀가 코끝에서 한 뼘 만큼 얼굴을 들이댔다.
밤을 가득 담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애런은 두 눈이 심하게 요동쳤다. 귀에서 북소리처럼 울려대는 심장소리를 소녀도 듣고 있을까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소녀는 가늘고 하얀 손을 애런의 가슴에 살포시 얹었다. 탄탄한 그의 가슴을 아기 어르듯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가 길게 내쉰 숨이 애런이 마시는 숨을 타고 들어왔다. ‘정말 느시모네인가.’ 등골이 서늘해져서 숨이라도 참아 보려는데 그녀가 뺨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럼 해봐.”
순간 심장이 터지는 충격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애런은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팔다리가 제멋대로 풀려 털썩 쓰러졌다. 땅이 옆으로 돌아간 건지 그녀가 거꾸로 선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어지러워서 뺨을 바닥에 댄 채로 뱃속의 것들을 게웠다. 침과 위액이 뺨과 머리칼을 적셨다. 시큼한 비린내가 코로 들어오고 쓰고 떫은맛이 입안에 진하게 남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르는지 분명 숨이 들고나가는데도 호흡이 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 폐에 공기를 가득 채워도 물속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손가락 한 마디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늘어진 태엽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기울어진 소녀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그녀의 말이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죽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