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피로 얼룩진 우악스러운 손이 아이의 갈색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머리털들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비명이 골 속 깊이 파고들자 그 소리는 금방 울음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말랑한 목줄기에 닿자 벼락같은 써늘함이 채찍처럼 아이의 온몸을 마구 후려쳤다.
견디지 못한 아이는 곧바로 울음을 터뜨리려 했지만 왠지 우는소리를 내면 다시는 아빠를 못 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따다딱 소리를 내는 이를 꽉 물고 간신히 울음을 목으로 끌어내렸다. 코밑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빛을 실눈을 뜨고 내려보니 시퍼렇게 번쩍이는 칼날에 비친 얼음처럼 차가운 눈과 마주쳤다.
놀란 아이의 갈색 눈동자가 꿈틀꿈틀 경련을 일으키고 심장이 마구 요동치면서 귀에서 쿵쿵 소리가 울려댔다. 겨우 참았던 울음이 목구멍에서 벌떡거리며 다시 입을 벌리고 나오려 했다. 아이는 윗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서 가까스로 삼킬 수 있었지만 칼날이 닿은 부분에서 목넘김이 걸리는 바람에 숨이 콱 막혔다.
닫힌 기침이 나올 때마다 작은 몸이 발작하듯 들썩였다. 나갈 곳을 찾지 못한 울음이 허파를 타고 아랫배까지 내려와 뱃속을 짓누르다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갑자기 화톳불 앞에 선 것 같은 온기가 가랑이 사이부터 아래로 주욱 퍼져나갔다. 주르르 바지를 적시며 다리를 타고 신발 속으로 들어간 오줌이 발밑에 고였다.
매몰차게 불어온 바람이 축축한 바지에 닿자 서리를 맞은 것처럼 다리를 덜덜 떨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바람이 불을 잡아 흔드는 소리, 남자들의 거친 욕설과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한꺼번에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는 정신이 점점 아득해지며 조금씩 위로 뒤집어지는 두 눈에서 줄줄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방울방울 칼날 위로 떨어졌다.
“멈춰라!”
머리 위에서 커다랗게 울린 쉰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아이는 물속에 머리를 박은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눈앞에서 무기를 들고 뒤엉켜 싸우는 사람들이 태엽이 다 된 인형처럼 한꺼번에 움직임을 멈췄다. 군인들이 둘러싼 곳에서 병사 하나가 힘없이 뒤로 쓰러지면서 검을 치켜든 남자가 보였다. 아이를 본 남자의 눈이 확 커지며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애러-언!”
“이야아압!”
희뿌연 검광이 그어질 때마다 어둠 속에 겹쳐 보이는 허상들이 하나씩 잘려나갔다. 쉭! 둥글게 에워싼 군인들이. 쉭!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이. 다시 쉭! 어둠만 남은 숲속을 억실 하게 큰 갈색 눈동자가 매섭게 노려봤다. 소년은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듯 기회를 보아 연신 검을 내질렀다가 재빨리 몸을 빼기도 했다.
익숙한 듯 동작과 동작의 연결이 매끄럽고 검의 궤적이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렇게 쉼 없이 검과 몸을 놀리다가 힘찬 기합과 함께 그를 움켜쥘 듯 가지를 벌린 나무에 검을 꽂았다. 나무속에서 치솟은 울림이 검을 타고 손안에서 맴돌았다.
박힌 검을 단번에 잡아 빼려 했지만 제 손이 아닌 듯이 도무지 힘을 줄 수 없었다. 소년이 무릎에 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갈색 더벅머리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잡초를 적셨다.
어느 정도 숨을 가다듬은 소년은 다시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몸에 거죽처럼 달라붙은 셔츠 아래로 근육이 꿈틀거렸다. 꼼짝 않던 검이 팍 하고 뽑히면서 소년은 뒤로 몇 걸음을 짚다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양팔을 벌리고 바닥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난 숫소가 내뱉는 것 같은 거친 숨소리에 맞춰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이 흔들렸다.
‘갤런드를 찾아간 것 너무 조급했어. 하마터면 복수도 못하고 잡힐 뻔했잖아. 기렌하고 마르코라고 했던가? 그자들만 아니었으면 성공할 것 같았는데. 군인이란 자들이 비겁하게 둘이서 한꺼번에 덤비다니.’ 소년은 주먹으로 풀밭을 쾅쾅 내리쳤다.
‘하긴 갤런드 놈 부하들이 다 그렇지. 나 혼자서 그자들을 상대할 실력이 되지 않으면 놈을 죽이는 건 불가능해. 빨리 아빠의 비기를 성공해야 돼.’ 소년은 몸을 일으켜 마지막에 검을 꽂았던 나무를 보았다.
“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를 보던 소년은 미간을 찌푸리고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한결 말끔해진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쑥 내밀어 다시 나무를 살폈다. 굵은 나무에 칼로 그어서 표시한 과녁은 껍질이 벗겨지고 찍힌 자국들이 가득했지만 정중앙이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찍힌 자국들의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칼날 모양으로 좁다란 홈인 것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엇되게 기울어 파였거나 칼끝이 껍질만 찍고 미끄러진 것들도 있었다.
그중에서 단 하나의 자국을 소년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과녁의 한가운데에는 못 미쳤지만 선명한 타원형으로 움푹 팬 자리 정가운데에 칼날이 깨끗하게 박힌 자국이었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소년은 옆에 있는 나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도 과녁이 그려져 있었는데 정가운데에 둥글게 파인 자리 안에 칼날이 박힌 자국이 있었다. 소년의 것보다 둥글고 파인 정도가 훨씬 깊고 선명했다.
소년은 벌떡 일어나 양쪽 나무를 번갈아 짚어가며 자국을 살피고는 갑자기 잠든 숲을 깨울 정도로 목청이 터져라 웃었다.
“됐어! 드디어 해냈어! 아하하하!”
소년은 검을 들고 마지막에 했던 동작을 취하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벌쭉 웃다가를 반복했다. 달빛이 길게 드리우자 동작을 멈춘 소년은 고개를 흔들어 땀방울을 털어내고 검을 챙겨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게는 몇 달 전에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곳에서 나무를 하다 우연히 발견한 연못이 있었다. 높은 바위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연못을 채우고 그 물은 다시 내를 이루어서 맑고 시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매일 검술 연습을 하고 나면 그곳을 찾아 피로를 씻는 그만의 비밀 장소였다.
그리고 한 사람 더. 메리치에서 그의 유일한 친구인 아자니도 있었다.
“옛날에 엄마한테 들었는데 숲속 깊은 곳이나 연못가에는 느시무네가 살고 있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남자한테는 예쁜 여자로, 여자한테는 멋진 남자로 나타난 다음 홀려서 잡아먹는대. 혹시 거기 느시무네가 사는 곳이 아닐까? 그래서 거길 갔던 사람은 다 잡아먹혀서 지금까지 아는 사람이 없는 거지.”
소년은 연녹색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괴는 아자니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런 것을 믿다니 가만 보면 아직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단 말이야. 그렇게 말했어도 계속 가보고 싶다고 했지만 장사 때문에 한 번도 오질 못했잖아. 조만간 날을 잡아서 함께 와야지.’
옷이 살짝 마를 때쯤 나무 사이로 폭포가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아주 잘게 부서질 때 나는 냄새가 숲 냄새에 더해졌다. 둘레가 두터운 아름드리나무를 지나 물가로 나서려다 황급히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연못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