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울려퍼지는 병사들의 환호성과 더불어 눈은 끝없이 내린다.
오툰과 병사들도 멀리서 정찰 중인 감독관과 기사들에게도 그리고 말튼 성에도 눈은 멈출 기세 없이 내린다.
온 대지를 뒤덮을 것만 같은 하얀 눈, 그 순백의 이름처럼 모든 사람들의 걱정과 불안이 잠잠해질 때.
가온이 일어났다.
말튼 성에서 군대를 정비해 내보 낸지 사일 째, 가온과 감독관이 지옥 같던 랠리 숲에서 탈출한지 6일째.
쓰러진지 어연 1주일이 다 되어가는 동안 가온은 일어나기는커녕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워있는 가온 옆에서 렘 브란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짐꾼 일도 하고 하인 일도 하고 쓰레기까지 치웠는데 이젠 간호 역까지 해야 한다니.”
렘 브란트가 말튼 성을 나가는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아르실에게 보고하자마자 그녀는 볼일이 있다면서 방을 나갔다.
가온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방안에서 가온을 간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말이다.
방안에만 있으니 답답하지만, 렘 브란트는 나갈 생각은커녕 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렘 브란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온의 상태를 보는 일 뿐이었다.
처음 가온의 상태를 봤을 때 렘 브란트는 경악했다.
‘이런 꼬마가 이방인을 토벌하러 가는 토벌대에 참여했었다고?’
얼핏 봐도 아르실만큼 어린 소년이었다.
아르실이야 괴물 같은 이방인이니 나이와는 상관없지만, 아르실의 말로는 가온은 정말 평범한 소년이라고 했다.
렘 브란트가 직접 봐도 딱히 특출 난 건 없었다.
흑발과 흑안의 남자아이, 눈썹이 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장래가 기대되는 아이지만, 그게 다였다.
렘 브란트는 시선을 가온의 목으로 옮겼다.
“…….”
렘 브란트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가온의 목에 새겨진 각인이었다.
‘그냥 소년도 아니고 노예였다니.’
노예 주제에 어떻게 토벌대에 참여했는지부터 의문이지만, 렘 브란트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고요한 방안의 분위기 때문인지 숙소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유독 잘 들려왔다.
저녁이 되기 전, 해질녘 노을 검붉고 노란 빛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듦과 함께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이 목소리를 듣는 게 렘 브란트의 삶의 낙이었다.
“듣자하니, 밖에 나간 하룬가랑 자유 해방단 군대가 벌써 짐승 군대를 물리쳤다 하던데…….”
“세상에 그 쓰레기 같던 하룬가가? 얼마 전에 외곽 마을 하나를 또 불태웠다는 데 이런 일도 하다니.”
“자기네 본진이 위험하니깐 나선 거겠지, 우리 영주님이 주도하지 않았으면 도망갔을 놈들이야.”
“어쨌건 말튼 성은 안전해진거지? 정말 다행이네!”
사람들의 들려오는 말소리에 렘 브란트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소리를 냈다.
짐승 무리도 아니고 군대라니.
살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당혹스럽지만, 짐승 군대에 대한 걱정 따윈 일체 없었다.
“군대라 해봤자 짐승, 알아서 잘 토벌하겠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렘 브란트의 귀에 낯선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침대에 누워있던 가온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렘 브란트는 깜짝 놀라며 곧장 고개를 돌렸다.
가온은 얌전히 누워있었다.
렘 브란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소리가 들렸는데,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가.”
투덜거리던 렘 브란트의 귀에 또 한 번 소리가 들렸다.
다시 고개를 돌리지만, 여전히 가온은 조용히 누워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러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스르륵.
세 번째다.
이번에 렘 브란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그렇게 확신하던 렘 브란트의 목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상함을 느낀 렘 브란트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찌른다.”
감정 하나 없는 무심한 목소리가 렘 브란트의 귀를 찔렀다.
목에 닿은 차가운 감촉의 물건은 날카롭게 날이 선 단검이었다.
목에 닿은 단검처럼 살벌한 말에 렘 브란트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허, 허어억?”
“질문에 답 해, 넌 누구고 여기에 왜 있는 거지?”
“레, 렘 브란트, 가, 간호를 하려고 여, 여기에 있다.”
“나를 간호한다고?”
렘 브란트의 솔직한 대답에 목소리의 주인의 음성이 살짝 떨었다.
렘 브란트는 이상함을 느끼곤 고개를 살짝 돌렸다.
고개를 돌린 렘 브란트의 눈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목에 단검을 겨눈 가온이 있었다.
렘 브란트가 움직인 걸 본 가온은 아까보다 더 살벌하게 위협했다.
“죽고 싶나? 움직이지 말라 했을 텐데.”
“아, 아니 나, 날 왜 죽이려고 하는 거야? 내가 널 간호했다고! 아르실의 명령으로!”
“아르실?”
아르실이라는 이름 하나에 가온의 표정이 풀어졌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가온은 목에 겨눈 단검을 거둬들였다.
위험이 사라진 렘 브란트는 크게 화를 냈다.
“이 꼬맹이가! 기껏 간호 열심히 해줬는데 날 죽이려고 해?”
“시끄러.”
“뭐, 뭣?”
“일어나마자 처음 보는 사람이 있는 데 경계를 안 하면 그게 바보지, 만약 네가 아르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면 죽였을 거야.”
가온의 담담한 말에 렘 브란트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차마 더 화를 내지는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단검을 쥐고 있는 가온의 심기를 거스르게 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렘 브란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이번엔 가온이 물었다.
“아르실은?”
“다, 다른 볼일이 있다고 나갔어, 올 때가 됐는데.”
“나갔다고? 제길, 시간이 없는 데.”
가온은 눈살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일어나마자 자신의 목을 노린 꼬마가 하는 소리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렘 브란트가 한 마디 했다.
“뭐가 시간이 없다는 거야.”
“……그쪽한테는 말할 생각 없어.”
“뭐라고?”
며칠 간 열심히 간호해줬는데 하는 소리가 이거라니.
이방인 같은 괴물도 신분이 높은 인물도 아닌 고작 노예 꼬마였다.
아르실의 수발을 들면서 참아왔던 렘 브란트의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렘 브란트를 힐끗 보던 가온이 딱딱하게 말했다.
“괜한 생각은 하지도 마, 날 죽이면 댁도 죽어.”
“허, 허억? 내, 내 생각을 읽은 거냐?”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가온의 말에 렘 브란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렘 브란트는 벌벌 떨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 너도 설마 이방인이냐?”
“무슨 소리야?”
“내, 내 속마음을 읽었잖아!”
“읽기는 무슨 표정만 봐도 알겠는데 뭘.”
가온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가온은 들고 있던 단검을 집어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던 도중 가온의 몸이 작게나마 흔들렸다.
“으윽?”
“어, 야야,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일주일 가까이 누워있었다고! 함부로 움직이면…….”
“움직여야 해, 시간이 없다고.”
“그러니깐 뭐가 시간이 없다는 건데?”
렘 브란트의 계속된 질문에 가온은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여전히 말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렘 브란트는 더 묻기도 귀찮은 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 쉬어라…….”
“머뭇거리면 말튼 성은 함락 될 거야.”
“응?”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죽어.”
가온의 의미심장한 말에 렘 브란트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잠시 침묵이 있고서 렘 브란트는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눈앞에 건방진 꼬마는 이방인 하운드 토벌 단에 참여했던 사실을.
그 사실을 기억해낸 렘 브란트는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가온을 안심시켰다.
“짐승 군대를 말하는 거냐?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된다.”
“걱정 할 필요가 없다고?”
“그래, 하룬가와 자유 해방단원 그리고 말튼 성의 군대가 나섰어, 질 걸 아는지 벌써 며칠 째 짐승 군대가 오지도 않는다고.”
“며칠 째 보이지 않았다고?”
렘 브란트는 가온이 짐승 군대 때문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가온의 표정이 이상했다.
안심은커녕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었다.
입술을 더욱 강하게 깨물던 가온은 다급히 물었다.
“자, 잠깐만 며칠이 지났다고?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야?”
“랠리 숲에서 짐승 군대가 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 게 5일전이었나? 진즉에 왔어야 할 짐승 놈들이 이렇게 늦는 거 보니 우리 군대와 싸우기 무서워서 도망간 게 분명해.”
“5, 5일? 늦을 대로 늦었어! 지금쯤이라면 놈들은 분명…….”
가온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비틀거리는 몸으로 방을 빠져나가려했다.
렘 브란트에겐 일면식도 없는 노예 꼬마 따위 가든 말든 상관없지만, 아르실이 간호하라한 꼬마였다.
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 렘 브란트가 아니었다.
“이 꼬마가 어딜 가려 하는 거야!”
“아르실을 찾아야 해! 더 늦으면 말튼 성은 끝이라고!”
“내 말을 듣기는 들은 거냐? 짐승 군대는 여기 안 온다고! 설령 온다 해도 말튼 성의 전력이면 충분히 이겨 게다가 말튼 성 말고도 다른 성에서도 추가로 지원군도 온 다고!”
“아니, 말튼 성의 전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그리고 지원군은 오지 않아.”
가온의 마지막 말에 렘 브란트는 더욱 당황했다.
방금 일어난 놈이 뭘 안 다고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건가.
짜증이 날대로 난 렘 브란트는 가온의 멱살을 잡은 채 으름장을 냈다.
“닥치고 얌전히 있어! 노예 주제에 뭘 안다고!”
“다 아니깐, 이러는 거야, 지원군은 오지 않아, 아니 오지 못해.”
“진짜 정신이 나갔나, 이상한 소리를 아까부터 계속…….”
가온의 멱살을 잡은 채 연신 화를 내던 렘 브란트의 귀에 사람들의 말 소리가 들려왔다.
방안 창문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마을 사람들의 말 소리였다.
“어어? 뭐야 갑자기 군사들이 들어오는데?”
“갑옷도 그렇고 다친 사람도 있는데?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피, 피가 흐르는데? 죽은 사람도 있어!”
“분명 며칠 전에 나갔던 하룬가와 자유 해방단의 군대 아니야? 어째서 이런 꼴로.”
심상치 않은 주민들의 말소리에 렘 브란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렘 브란트의 시야는 창문 바깥너머 마을 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가장 눈에 보인 건 다친 병사들이 흘리는 피.
흘리는 피보다 더 눈에 띄는 건 패잔병보다 더 비참해 보이는 병사들의 표정이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