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거쳐서 슬픈 고을로 가는 것
- 지옥의 문의 글귀, 신곡(최민순 신부 역본) -
애프터라이프와의 사투는 비록 많은 상흔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시큐리티 포스로 하여금 세상 너머의 세상도 엄연히 실존함을 증명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령계'였고, 그 정령계 내에서도 다시 수많은 가능성과 경우의 수가 갈라지고 분화되며 수많은 세상이 존재하거나 존재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 사람으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이 존재했다.
"으아아! 이거 놔! 왜 내가 이런 더럽고 추저분한 곳에 처박혀야하냐고!"
그 중 한 곳이 바로 '지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물론 죄라고 하는 개념이 온 세상, 온 차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무엇을 죄로 볼 것이며 무엇을 죄가 아니라고 볼 것인가는 각 세계선마다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각각의 세계선에서 여러 이유로 '죄'로서 규정한 행위를 '고의적으로' 행한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지옥 뿐이었다. 암흑 날개의 장로들도 그랬고, 시큐리티 포스의 말레우스 파벌도 마찬가지였으며, 한사코 지옥으로 가지 않겠다고 발악하는 리스도 그 중 하나였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군지나 알고서 이러냐고!!"
지옥의 권속들에게 힘없이 끌려가는 와중에도 리스는 마지막까지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생전에도 정령들의 방해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지옥의 권속들을 떨쳐낼 힘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시큐리티 포스의 손에 단죄당한 죄인들은 지옥의 문을 넘어 황량한 벌판에 들어섰고, 기회주의자들이 온갖 해충들의 공격에 시달린 채 황야를 내달리는 모습을 뒤로 한 채 갤리온의 형태를 한 유령선에 짐짝처럼 실리고 있었다. 원래대로면 '보엘리'라는 인물도 이 자리에 있어야 했으나 지옥 내에서도 엄중히 취급되는 어둠의 신을 위해 준비한 육신을 매개로 현세로 부르려했다는 불경한 행위의 대가로 어둠의 신과 동급의 처벌을 받게 되어 다른 지옥 차원으로 끌려가버렸기에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죄인들이 모두 실리자 '카론'이라는 이름의 유령선이 지옥의 강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잠시 후 가장 먼저 바르타 여장로가 짐짝처럼 지옥의 권속들에게 끌려갔고, 이윽고 그녀는 폭풍이 몰아치는 지옥의 영역에 던져지는 것을 끝으로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으읍...!! 으으읍!!"
시끄럽다는 이유로 지옥의 권속들에 의해 철사로 입이 꿰메인 리스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 수 없어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무력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그렇게 지옥의 강을 항해하는 유령선은 비가 몰아치는 땅을 지나 쇳소리가 나는 온갖 짐덩어리들이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황야에 도착했고, 이번엔 르보리스 장로와 말레우스 파벌 중 일부가 그 짐덩어리와 함께 황야에 내던져지고선 지옥의 권속들에게 쫓기며 그 몸으로 짐덩이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로 한 채 유령선은 다시 항해를 시작했고, 분노에 눈이 먼 죄인들을 밀어내가며 검붉은색으로 물든 혼탁한 강을 지나 끔찍할 정도로 들끓어오르는 공동묘지 비슷한 곳에 도착한 유령선에서 대장로가 제발로 그 묘지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올 것이 왔군."
샤키르 나셸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악랄하게 들끓어오르는 대지에 놓인 수많은 관들 중에서도 가장 깊고 뜨거운 곳으로 스스로 자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유령선은 다음 장소로 떠나고 있었고, 피가 끓어오르는 강에 도착한 유령선은 펠라니스 형제와 자바트 장로를 그 강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그 후에도 유령선의 항해는 이어지고, 이윽고 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일당들이 열 겹의 구덩이가 위치한 지옥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 중 말레우스 파벌의 나머지 일당들은 오물이 들어찬 구덩이에 내던져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시큐리티 포스에 내분을 일으키던 말레우스 3인방은 끓어오르는 역청 속으로 내던져지고, 언론들을 이용해 암흑 날개의 입맛대로 여론을 조작하는데 일조하던 아즈라 여장로는 구역에 배치된 악마들에 의해 구덩이 속을 끝없이 내달리며 찢고 죽임을 영원토록 반복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서 리스 이외의 죄인들이 자신들의 행적에 걸맞는 처우와 함께 유령선에서 쫓겨나고, 유령선은 마지막 장소로 향해 항해를 개시했다. 유령선 곳곳에 성에가 얼어붙기 시작하고, 배 곳곳마다 한기가 들어차는 차가운 영역에 도달하자 그 한기의 중심인 얼음 호수의 거인이 유령선에서 리스를 집어들었고, 그 거인은 곧 리스를 얼음 호수의 2번째 영역 '안테노라'에 처박아넣은 후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입이 꿰메인채 리스는 생전 처음으로 겪어보는 지독한 추위가 자신의 온 몸을 온갖 날붙이로 도륙하는 것같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이미 목까지 얼음으로 뒤덮힌 리스의 몸으로는 이 혹한의 영역에서 벗어날 방법따위는 없었다.
"오, 리스, 리스, 리스. 제 고향을 버리고 어둠의 신에게 빌붙은 마녀야."
그런 리스에게 한 악마가 찾아와서는 그런 그녀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어둠의 신의 힘과 권능에 취해 네가 지켜야할 것을 저버리고, 네가 지닌 재능을 헛되이 낭비하며 끝내는 스스로 어둠의 신이 되려했던 어리석은 영혼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들고 왔지."
그러면서 악마가 보여준 것은 하나의 홀로그램 영상이었다. 하림과 청월의 결혼식. 수많은 하객들이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는 모습이 보이고, 둘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예정에 없던 키스까지 선보이고 있었다. 리스는 이런 거짓 영상 따위에 굴복할 것 같냐며 애써 스스로에게 자기 암시를 걸고 있었지만 악마는 이미 그녀의 속내를 읽고 있었는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아나? 때론 수많은 거짓보다 하나의 진실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한다는 거."
그 말에 리스는 악마가 보여준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고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재차 발버둥치기 시작했지만 악마는 오히려 즐거워하며 리스를 조롱하고 있었다.
"리스, 리스, 리스. 그래, 그렇게 말 못하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거라. 네 불행은 저들의 행복이니 말이야."
악마의 조롱에 리스는 이런 현실은 있을 수 없다며 자신의 살갗과 마음을 찢어발기는 혹한 속에서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는 홀로그램만이라도 부수겠다며 발악하고 있었지만 악마는 리스의 부질없는 발악을 재밌게 구경할 뿐이었다.
난 이제부터 영원까지 오직 그대만을 사랑할 거야
이젠 그대와 나 어느 누구라도 갈라놓을 수는 없어
- '이제부터 영원까지'(홍세봉)의 가사 중 -
하림과 청월의 결혼식으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스물일곱의 루시우스는 5년전부터 이유야 뭐가 되었던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었던 둘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자신에게도 그런 운명적인 인연이 나타날까하며 홀로 떠올려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없는 것같아 저절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설령 있다고 한들 세쌍둥이가 사회에 정착할 때까지는 허락될 리 없었다.
"암흑 날개에 있을 적에도 없었던 운명적인 인연이 이제와서 있을 리가 없지. 있다고 쳐도 무리."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우스는 어렵게 구한 90년대 가요가 담긴 CD를 틀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암흑 날개의 장로로서 큰 죄를 지었던 루시우스의 입장에선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것만으로도 족한 일이었고, 하림과 청월같은 운명적인 인연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아, 벌써 하교 시간인가...?"
그렇게 음악과 함께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루시우스는 문득 황혼 중학교의 하교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고선 가볍게 몸을 푼 후 자신의 세단으로 황혼 중학교까지 이동했다. 카이, 니엔, 리나의 세쌍둥이가 보이고, 루시우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셋을 태우고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뭔데요."
루시우스의 궁금증에 니엔이 평소대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희 셋,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 너희들 인기 좋잖아."
"어... 그런 걸 생각한 적 없어서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어지는 루시우스의 질문에 니엔은 순간 얼굴을 붉히면서 '생각한 적 없'다는 모순적인 답을 던지고 있었다.
"정말? 그럼 루시 언니를 볼 때마다 작은 오빠가 엄청 반기던 건 뭐야?"
"그, 그건 어디까지나... 그..."
그 모순적인 답의 해답은 리나가 내놓고 있었고, 루시 이야기가 나온 시점에서 니엔은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며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지만 루시우스는 뭐가 뭔지 대강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루시는 이미 임자를 만났거든."
"그, 그럴 수가아..."
루시우스의 말은 니엔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제대로 털어놓지도 못 하고 그대로 물건너간 니엔의 첫 사랑이었다.
"이런 일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나아.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끄응..."
시무룩해진 니엔을 뒤로 한 채, 루시우스는 카이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카이는 어때? 넌 여친 사귀는 건 일도 아닐텐데."
"그럴 리가요... 전 아직 연애할 준비가 안 되었는걸요."
카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여자친구의 존재를 부정했고, 인기가 많은 것과 이성에게 매력적인 것은 별개인가 싶어 루시우스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그럼 여태까지 받은 고백 편지들은 뭐였어?"
"내가 사귀자고 한 건 아니잖아. 무엇보다도 말 한 번 잘못했다간 분명 터무니없이 피곤할테고."
하지만 니엔의 폭로로 카이가 '못' 사귀는게 아니라 '안' 사귀는 것이란 걸 알게 된 루시우스는 카이답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고 있었다.
"그럼 리나는 어때? 남학생들이 사귀자고 아우성이었을텐데."
"그랬어요. 저하고 사귀자는 남자애들이 많아서 니엔 오빠가 죄다 물러가라고 했는걸요."
"니엔이 고생하네."
"별 말을요."
그리고 리나의 이야기를 들은 루시우스는 역시나 싶어 살며시 웃고 있었다. 미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리나에게 꼬리치는 남학생들을 죄다 몰아내는 건 니엔의 몫이었다.
"그럼... 리나의 이상형은 어때?"
"이상형이요? 제 눈 앞에 있는 걸요."
"네 눈 앞에?"
그러나 이상형에 대한 질문에 대한 리나의 답에서 묘한 공기가 흐르는 것을 느낀 루시우스는 이 이상 말을 잘못했다간 자신이 역적이 될 것 같아 서둘러 수습하기로 했다.
"어... 음... 뭐, 그래, 이상형이란게 고정된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질 수도 있는 거..."
"말 돌리지 마세요. 제가 무슨 말하는지 다 알잖아요."
그 묘한 공기는 정답이었고, 그 말에 루시우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리, 리나...?"
"아니, 그거 진심이야? 나이 차이가 몇 살이나 나는지는 알고서 하는 말이지?"
"알아. 그래도 상관없어."
쌍둥이 오빠들의 당황한 표정에도 리나는 당당히 대답했고, 그 대답에 루시우스는 더더욱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너... 큰일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구나..."
"상관없어요. 저는..."
"아니, 내가 상관이 있거든... 12세 차이는 엄청난 차이라고.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날 도둑놈으로 만들 셈이니...?"
아직 15세밖에 안 된 리나가 27세의 루시우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모습은 쌍둥이 오빠들 입장에선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루시우스는 소위 말하는 '역으로 키워서 잡아먹는'다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싶어 리나에게 무서움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럼 3, 4년 정도만 기다려요. 그 땐 정식으로 결혼해달라고..."
"멈춰!"
리나의 당돌한 결혼 선언에 제대로 당황한 쌍둥이 오빠들은 일제히 멈추라고 손짓가지 곁들이며 말리고 있었지만 그런 것으로는 리나의 마음을 꺾을 순 없었다.
"아, 이거야, 원..."
운전을 하면서도 루시우스는 리나의 결혼 선언에 머리가 뒤숭숭해졌다. 지난 5년간 세쌍둥이의 학업을 책임진 것은 자신이 저질러온 잘못에 대한 속죄를 위함이었는데, 그 세쌍둥이의 막내가 자신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당혹감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 생텍쥐페리
청월과 하림. 하림과 청월.
예상치 못 한 첫 만남, 주변의 질투, 암흑 날개, 사투, 5년의 시간.
그리고 결실.
그 앞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른다.
다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뿐.
그것이면 족했다.
==========
원래대로라면 좀 더 신경을 써서 만들어야했지만 일주일 넘게 병원 신세를 지는 중이라 급조하다시피 완결편인 X15를 만들었습니다
글쓰는 감각이 떨어지기 전에 그나마 남은 감각으로라도 졸속으로 써내려갔지만 역시 병실 신세를 진 와중에 모바일 환경으로 글을 쓰려니 영 불편합니다
아무튼 이걸로 Xtra Story도 완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IP보기클릭)1.238.***.***
(IP보기클릭)61.41.***.***
감사합니다 별 거 없는 글이었지만 나름 즐겁게 써내려간 글이었던지라 끝나고나니 다소 아쉽기도 하군요 저도 얼른 건강을 되찾고 싶습니다 ㅠ | 23.05.31 07:41 | |
(IP보기클릭)220.83.***.***
(IP보기클릭)61.41.***.***
기대 많이 하겠읍니다(?) | 23.05.31 07:41 | |
(IP보기클릭)39.7.***.***
(IP보기클릭)110.70.***.***
그렇길 바랄 뿐입니다 | 23.05.31 15:06 | |
(IP보기클릭)39.7.***.***
지금은 좀 나아지셨나요. | 23.05.31 15: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