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나타나기만 해봐라. 뼈와 살을 분리해서 살은 식육점에 팔고 뼈는 사골을 우려내 몸보신을 하고 말테다. 녀석들을 씹을 먹을 기세로 이를 갈고 있기를 한참. 놈들은 좀 채 모습을 드려내지 않았다. 뭐야? 쫄았냐? 그렇게나 기세등등해 놓고 쫀거야?!
하긴, 내가 비웃음을 당할 만큼 약해졌긴 했지만, 그렇다고 개나 소나 비빌 정도인 건 아니니까. 그 여장변태도 자기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른 건지 후회하고 있겠지. 머리끝까지 올라갔던 피가 조금 내려가고, 긴장이 살짝 풀어질 때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어떻게 괴롭혀줄까 고민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그 여장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10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한 짐승이 서있었다. 생긴 건 보자. 호랑이를 베이스로 매의 날개에 뱀머리가 달린 꼬리가 있고, 어깨 쪽엔 사나워 보이는 원숭이와 들개의 머리가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은 설화상에 전해지는 누에요괴. 동양의 만티코어라 불리는 메이저한 녀석이네. 흉악한 외양으로 기선을 제압하려 한 모양이지만, 이 몸은 천 년 이상을 산 대요괴. 산전수전 다 겪은 빠요엔이란 말이지. 저 정도로는 조금도 무섭지 않다고.
"겁주려는 의도였다면 실패야. 점수를 매기자면 100점 만점에 2점. 낙제네. 나정도 되는 요괴를 상대로 겉모습으로 위협하는 건 어리숙한 초보나 저지를 실수야. 누에정도 되는 요괴가 그것도 몰라? 1000살이나 먹었으면서."
가벼운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자, 녀석이 으르릉 소리를 내며 화를 냈다.
"단순히 겁주려고 이러는 줄 알아?"
그리고 나를 향해 커다란 앞발을 휘둘려왔다. 덩치가 큰 만큼 동작도 커서 피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힘을 봉인 당하기 전 만큼 가속할 수는 없지만, 저 정도쯤은 충분히 느려 보인다. 몸을 틀어 가볍게 피해주자, 이번엔 꼬리로 달린 뱀이 공격해 왔다.
샤아악, 하고 입을 한계까지 벌린 뱀이 빈틈을 노려 뻗어온다. 정확히 내 시야의 사각에서 오는 공격이라 이대로 속절없이 그 독니에 목덜미를 허락해야 겠지만.
"어머, 아쉽네."
나는 뱀의 머리를 보지도 않고 여유롭게 부채로 쳐내버렸다. 어떻게 보지도 않고 알아챘냐고? 그에 대한 대답은 Z건담의 아무로의 명대사로 대신하마.
'뒤에도 눈을 달아라!' 물리적인 눈은 아니지만, 시야에만 의지하지 않고 사각에의 적의 위치나 공격을 항상 염두해 두라는 말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재주겠지만, 뉴타입이나 나정도 대요괴가 된다면 가능하다는 거지.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약해진 상태여도 나는 결코 약하지 만은 않다고!
이어서 연속으로 휘둘려 오는 앞발과 계속 틈을 노려 쏘아오는 뱀의 독니를 이리저리 피하고 쳐내는 동안 등 뒤로부터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엔 틀리지 않았겠지? 나는 내 직감을 믿고 뒤를 향해 부채를 휘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상당한 충격이 부채를 통해 손으로 전해져왔다.
"쳇, 안 통하나."
내 배후를 노렸던 녀석이 구겨진 인상으로 짧게 혀를 차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내 신경이 온통 전방의 누에에게 가 있는 틈을 노려 공격 했겠지만, 보기 좋게 막혀버렸으니 어지간히도 속상하겠지. 아까부터 복붙하듯 이어지는 누에의 파상공격도 그걸 위한 밑밥이었을 테고.
정직하게 머리를 내리 찍으려던 거대한 닻을 힘을 주어 튕겨내자, 성별사기의 자세가 무너졌다. 나는 뒤로 휘청거리는 녀석의 품에 파고들어 그대로 하복부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컥, 폐 속의 바람이 단숨에 빠져나가는 소리를 내뱉은 성별사기가 복부를 부여잡고 주저앉는다. 그가 놓친 닻이 쿵, 소리를 내며 지면에 박혔다. 나는 그걸 잡아들어 무저항이 된 녀석을 향해 힘껏 휘둘렸다. 닻이 녀석의 머리를 산산조각 내기 직전, 돌연 구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주먹이 닻 함께 내 몸을 날려버린다.
충격으로 몇 번인가 바닥에 튕겨지면서 전신이 비명을 지른다. 전혀 예측하지 못 한 두 번째 기습에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3대 1. 아니, 4대 1인가?"
방금 날 날려버렸던 구름은 비구니가 사역하는 뉴도인가. 중후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젊은 비구니에게 사역되는 모습은 상당히 매니악하네. 그보다 수적으로 완전히 열세다. 약화된 상태여도 저 정도의 요괴들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네. 이건 완전히 나의 계산 미스였다.
일단, 여장변태가 누에라는 나름 메이저한 요괴였다는 것이 첫 번째 미스. 그리고 비구니가 저런 구름 할아버지를 사역하고 있었다는 것이 두 번째 미스다. 내 힘이 딱 1할 정도만 돌아왔어도 싸울만한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 자신이 없다.
"너희들 설마, 치사하게 떼로 덤벼들진 않겠지?"
"응. 그럴 생각이야."
복부 통증에서 벗어난 성별사기가 아주 보라는 듯한 미소로 그리 대답했다. 저 치사빵꾸들 이제부터 단체로 구타하겠다 이거지? 이렇게 연약한 여자를 인정사정도 없이!
"누가 땡중들 아니랄까봐. 절간에서 배우는 게 여자나 때려 패는 것밖에 없지? 응? 너네 주지가 그리 가르치던? 응? 막 여자를 패서 ㅁㅁ이나 하는 양아치짓 말이야!"
녀석들의 비겁함에 나는 악을 쓰며 외쳐댔다. 아무리 땡중이라지만, 부처의 가르침을 받는 승려가 여자를 상대로 다구리를 까려고 한다니. 세상이 말세로다. 이것이 정법이 멸한 말법이란 말인가! 이젠 법마저 멸한 법멸의 시대가 오고 모든 존재의 종말이 다가오겠구나.
도의를 찾아 볼 수 없는 세상에 절망하며 한탄하는 나에게 누에가 여장한 모습으로 변해서 다가오더니,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삼지창을 겨눴다.
"자, 현자님. 이제 어쩔 건데? 싹싹 빌어도 안 봐줄 테니까, 각오해."
이것 봐라. 여장이나 즐기는 변태주제에 잘난 척 거들먹거리고 있네. 결국, 혼자는 어쩌지 못하고 다구리나 까면서 뭐가 잘났다고.
존나 잘났습니다!
이렇게 두 손 싹싹 빌 테니까, 그 흉기 좀 치워주면 안 되겠니?
"말이 좀 심했지? 나 같은 초미녀를 보면 하반신이 뇌를 지배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남자의 생리에 무지했던 점 사죄할게."
그래. 마음이 태평양 같이 넓은 내가 이해해야지. 여장까지 할 정도로 성욕이 넘치는 변태가 나 같은 미녀를 봤으니까, 어쩌겠어? 흑심을 품고 다가올 수밖에. 이게 다 내가 너무 예쁜 탓이지.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내 나름의 사죄를 표하는데도 여장변태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날 싸늘하게 쳐다본다. 이어서 성별사기가 비웃었다.
"뭐야? 불리하다 싶으니까, 저자세냐고? 웃기지도 않는 현자님이네."
"솔직하게 사과하는데, 뭐가 웃기다는 거니?"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기껏해야 에도시대에 죽은 귀신이 시비를 걸고 말이야. 말투도 꼭 금발양아치 같아서 더 건방지게 보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면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감격해야 할 것을 성별사기는 되러 화를 냈다.
"이봐, 현자님. 세간에서는 그런 걸 사과라고 하지 않는다고. 진짜 잘못을 비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그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아."
여장변태가 말을 이어 받으면서 질책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야? 결국, 그거야? 몸으로 사죄하라는 흐름이라는 거지? 역시, 변태다운 발상이다. 여장을 하거나 성별을 속이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건가.
나는 이런 대책 없는 변태를 낳아버린 이 세상에 다시 한 번 절망했다.
"이 짐승들! 내 몸을 더럽힐 생각이구나!"
"아니야!"
두 변태가 동시에 소리를 질렸다. 변태라서 그런지 호흡이 척척 맞구나. 무섭도다 변태의 싱크로율. 두 변태의 입에서 '역시,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어!', '피해망상이 얼마나 심한 거야.' 등등의 매도가 이어졌지만, 나는 M이 아닌 관계로 전혀 요만큼도 기분 좋아지지 않았다. 벌써부터 조교라니, 너무 성급한 거 아니니? 무턱대고 상대를 M이라 단정 짓는 건 하수인데. 흑발양아치도 겨우 그 정도 수준인 모양이었다.
그런 둘을 무시하고 나는 아까부터 말없이 날 응시하고 있는 비구니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비구니! 나한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소?"
애원하듯 묻는 나에게 비구니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는데,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어."
그녀는 자신의 말을 전언철회하며 나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현자님이 우릴 뭐라고 욕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히지리님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으니까!"
비구니의 몸 전체가 분노로 타오르는 환영이 보였다. 저건 진짜 빡친 거 같은데, 내가 뭐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이제 이대로 엉망진창으로 범해질 일만 남은 건가. 이 환상향에는 신도 부처도 없구나.
천천히 접근해 오는 비구니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도와줘~! 헬프 미, 란!!
그 간절함이 공간을 넘어 닿았던 걸까. 별안간 허공에 틈새가 열리더니 나를 위기에서 구해줄 구세주가 등장했다.
"란! 잘 왔어. 어서 날 구해주지 않겠니?"
틈새너머로 상체를 내민 란이 주변을 살피고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유카리님의 현재 상황을 주변에 알리지 말라고 그렇게나 당부했건만. 아무래도 제가 입 아프게 얘기해봤자, 귀담아 듣지 않는 모양이니. 이 참에 벌이라 생각하고 혼쭐 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말이야. 나도 모르겠다니까! 그 사실이 언제 새어나가게 된 건지. 어쩌면 우리집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건지도 몰라. 집에 돌아가면 한 번 확인해 보자니까. 도청 장치가 있는 지 없는 지."
"입단속 못한 걸 엉뚱한 걸로 회피하지 마시죠. 보나마나 망령의 공주님에게 있는데로 떠벌렸을 게 뻔한데, 뭘 모르겠다는 겁니까?"
그랬었나?
란의 지적이 정확한 거 같아서 뭐라 항변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렇다 해도 말이지.
"그래. 맞아. 내가 유유코에게 말했다고 치자. 그런데 어떻게 하루도 안 되서 동네방네 퍼진 거야?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하루도 안 되서. 그것도 인간마을의 저 땡중패거리한테 까지 알려진 것은 설명되지 않았다. 환상향이 아무리 좁은 동네라고 해도 그렇지, 전파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 소문이란 게 그렇게 빨리 확산되는 거야?
봐봐. 란도 설명하지 못하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네. 나는 어디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란을 응시했다.
그때, 땡중패거리 중에 성별사기가 끼어들었다.
"그건 아마, 봉인을 건 신님 탓 일거야."
"뭐라?"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설마 했던 신님이 소문내고 다녔다는 충격적인 고백. 결국, 내가 입단속을 잘 못했던 게 아니라 신님이 못 했던 거구만. 내 결백이 밝혀지자, 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걸 꼬투리잡아 날 마구 야단칠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내 잘못이 아니라니. 란, 너 주인을 너무 못 믿는 거 아니니?
란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의심해서 죄송합니다."하고 사죄했다.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하면 좋을 텐데. 란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게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신님.
내 힘을 봉인한 신님이 한 둘이 아니니까, 그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신님을 특정해야 했다. 누군지는 모르나 밝혀지면 내 불평을 잔뜩 늘어놓을 거야.
"그 신님이 누구야?"
아무나 말 해!
따지듯 묻는 나에게 시원하게 대답한 것은 여장변태였다.
"산 정상에 사는 개구리 신이야. 오늘 아침에 그 개구리 신이 히지리랑 대화하던 걸 엿들었거든. 현자님이 약해져 있다는 사실은 그때 알게 된 거야."
오호라. 그렇게 된 것이었군. 케로로새끼, 신났다고 함부로 얘기하고 다녔을 테지. 신이면서 누가 엿듣는 것도 눈치 못 채고. 하여튼 문제 많은 양서류다. 그런 개구리에게 팬티 핥짝핥짝 벌을 줘야겠다.
내가 그 케로로 TS로리 버전을 어떻게 혼을 낼까 고심하고 있는 사이에 란이 무어라 한 마디 남기고서는 틈새 닫고 사라져 버렸다. 어이, 구하려 온 거 아니었냐고.
란이 사라지자마자, 땡중패거리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제 방해물도 없으니, 사정 봐줄 필요 없다 이거지.
"음.. 결국, 그 개구리 신이 문제니까. 우리 다 같이 손잡고 개구리 신을 혼내러 가지 않을래?"
그렇게 가장 현실적인 타협안을 제안했지만, 이미 나에 대한 성욕만 남은 녀석들에겐 소귀에 경 읽기였다. 스키마를 열고 달아나려고 해도 어째서인지 잘 되지 않는다. 제길, 권한이 낮아지니까 이런 이상한 공간도 탈출 못 하네.
"나 사실, 별로 안 색시해. 원나잇 한 남자에게도 참치 소리를 종종 듣는 다니까? 범해봤자, 재미 없을 거야."
나 엄청 맛 없어요를 어필했는데도 소용없었다. 상대를 고르는 건 아직 이성이 존재했을 경우지, 녀석들처럼 성욕의 망자에겐 추녀여도 상관없다는 듯 점점 녀석들은 나의 페르몬에 이끌리듯 다가왔다.
그렇구나. 절간에서 생활하다보니 치마만 봐도 서는 그런 상태인 거구나. 군바리들이 여자 아이돌에게 환장하는 것처럼.
나는 변태인 것도 싫은데, 짬내까지 풍기는 녀석들에게 범해진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분하고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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