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토 "그렇구나, 아버지랑 만나기 싫나 보다?"
"나랑 같네."
이제 1화에서, 미사토가 신지를 데리러 가는 장면을 보자. 신지와 처음 대면했을 때, 미사토의 첫 대사는 ‘미안, 기다렸지?’였다. 참고로 신지와 미사토 사이의 대화엔 ‘기다림의 테마’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신지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대사 역시 같은 테마를 지닌, ‘돌아오면, 다음을 계속하자.’였다는 사실. 와중에 사키엘을 무찌르기 위한 자위대의 폭탄이 투하되고, 신지를 팔로 감싸는 미사토. 그런 그녀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에 신지는 처음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네르프로 오는 차에선, 신지가 겐도우에 대한 속내를 밝히고, 미사토는 ‘나랑 같네.’라며 동질감을 느꼈다. 나중에 초호기 앞에서 갈등하는 신지를 두고 그의 마음을 정말로 걱정했던 건 미사토 하나였다. 신지에게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말라’던 그녀는, 신지에게 이미 상당한 감정 이입이 된 상태였고,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미사토 "신지, 뭘 위해서 여기에 왔지?
도망치면 안 돼, 아버지에게서, 무엇보다, 너 자신에게서!"
"아까 그 일, 신경 쓰여?"
신지 "…네."
"그렇게 남의 얼굴만 잔뜩 걱정하고 있으니 그렇지."
이후로 미사토는 신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1화와 같이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신지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이 미사토라는 캐릭터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 중 하나가, 어린 신지를 놓고 그의 성격에 대해 상당히 비꼬는 투로 말한다는 것이다. 4화에서 가출한 신지에게 따뜻한 말 대신 ‘에바에 타기 싫네? 그런 마음으로…성가셔!’라는 대사를 기분 나쁜 어투로 날린 것도 그렇고, 12화에서 아스카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그에게 쓸 데 없이 차가운 태도로 반응하는 것도 나쁜 의미로, 유명한 부분이다.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도 신지에게서 얼핏 보이는 자기 모습에 대한 혐오감의 발현일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면,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을 살필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런 어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 미사토는 세컨드 임팩트의 지옥을 겪었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실어증도 겪었다. 다행히 이내 회복한 그녀는, 이후 대학에서 만난 동료 리츠코의 말에 의하면 ‘여태 말을 못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엄청난 수다쟁이가 되었지만. 덤으로 미사토는 공부도 꽤 했던 모양으로, 리츠코와 함께 제2도쿄 대학에 다니게 됐다. 그녀 나이 딱 스물이 되던 2005년엔 카지와 사귀어 동거를 시작, 역시 리츠코의 증언에 따르면 1주 내내 집 안에 박혀 ㅅㅅ 마라톤을 즐긴 전력도 있다. 그렇게 육체적 관계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 보완 중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싶었단다. 그랬던 그녀가 카지와 이별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카지의 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그와 만나게 된 이유도 같았겠지만.
카지 "카츠라기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야. 나한테 사과할 것 없어."
미사토 "아니, 선택한 게 아냐. 그냥, 도망쳤던 거야. 아버지에게서!"
"난 겁쟁이야. 나쁜 여자야!"
-뭐가 부끄러워? 좋아하는 남자한테 보여 주고 싶었던 거잖아? "아냐!"
-어떨까? 사실, 아버지한테 보여 주고 싶었던 거지? "아니란 말야!"
미사토는 소위 말하는 변형 일렉트라 콤플렉스(소녀가 가지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지닌 캐릭터로 많이들 해석한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애착과 갈증을, 그와 닮은 다른 남자를 통해 충족하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사토가 (특히 성적인 의미로)마음을 열었던 두 명의 남자, 카지와 신지는, 사실 그녀 아버지의 단점(워커홀릭 기질과 인간관계에 서툰 것)을 나눠 가지고 있던 만큼 미사토에겐 그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보상받으려는 욕심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사토가 카지와의 관계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스스로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은 아마 그런 자신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겠다. 사실 그녀와 카지 사이의 관계는 극에서 충분히 묘사가 되었기 때문에 다들 납득하겠지만, 다른 한 명, 신지에게 그녀가 성적인 오픈 마인드를 가졌다는 것에 대해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확실히, 미사토와 신지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보호자와 보호를 받는 자’가 아니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잠깐 뒤로 미루기로 하고, 빼면 섭섭한, 휴가 마코토에 대한 얘기도 하고 가겠다.
한 차에 타고 본부에 가는 휴가와 미사토. 원래 이랬나?
미사토 "미안해."
휴가 "괜찮아요, 당신과 함께라면."
"…고마워."
휴가는 작품 후반(특히 카지가 죽은 이후)에 미사토에게 상사가 아닌 다른 의미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가장 직접적인 대사는 ‘(자폭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괜찮아요, 당신과 함께라면.’으로, 그렇잖아도 눈에 띄게 미사토 주변에서 나대기 시작한 그의 의중을 확실히 찍고 갔다. 덕분에 이부키 마야와 함께, 오퍼레이터 3인방 중 존재감 꼴찌라는 불명예는 확실히 피한 상황. 아무튼, 그런 완곡한 대쉬에 대해 미사토 또한 알고 있었던 것 같으나, 그에 대한 확실한 반응은 나온 적 없다. 마냥 싫지는 않은 눈치. 그러나 정말 어쩌면, 딱 봐도 숫기 없는 휴가가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것, 또 미사토 역시 그 즈음엔 본인 말마따나 ‘누구라도 괜찮은’ 상태였던 만큼, 우리에게 보이지 않은 ‘뭔가’가 있었을 수도? 물론 엔드 오브 에바에서 휴가가 연출한 미사토와의 환상을 보면, 역시 총각 설정을 쭉 유지했다는 쪽이 더 납득이 간다.
미사토 "그 때도, 난 카지 군을 이용했던 거겠지."
카지 "이제 됐어, 그만!"
"난 나한테 실망했어!"
다시 카지 얘기로 가서, 그는 분명히 미사토가 처음으로 진심을 주었던 남자가 맞고, 반대로 미사토는 그에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여자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없다. 그 이유는 언급이 없으나 아마 서로의 길을 가기로 한 후, 사랑의 감정은 배제하고 ‘일’에 집중하겠다는 표현이겠다. 부끄러운 과거가 껄끄럽기도 할 테고 말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랑을 숨기지 못했다. 15화에서 아버지에 대한 얘기, 또 카지에 대한 미안함을 고백하며 드러난 치부를 자책하는 그녀에게 카지는 키스로 그것을 대신 덮어 주었다. 미사토와 카지의 마지막 동침, 그는 자신의 유지(遺志)를 담아 그녀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었다. 그의 죽음에 미사토는 많이 울었지만, 이내 털고 일어나 그가 남긴 과제를 시작한다. 그녀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맥주 광이었지만, 카지의 죽음 이후엔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캔 커피로 취향도 바꾼다. 이제 그녀 안엔 두 사람의 유지가 흐르는 것이다. 하나는 아버지의, 또 하나는 카지의.
그렇다면 남은 한 명의 남자, 신지는 어떨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사토에게 신지는 단순히 어린 소년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많다. 신지가 미사토를 처음 봤던 것은 미사토가 보낸 사진을 통해서였다. 몸매가 훤히 드러난 사진과, 가슴 부분을 주목하라는 멘트가 붙은 사진. 참고로 사진 속의 글자는 안노 감독이 직접 적은 것이고, 립스틱 자국은 가이낙스의 실제 여성 스태프의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사진만을 놓고 판단하면, 미사토는 신지에게, (상식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보호자로서가 아니라, 잠재적인 사랑의 상대, 즉 ‘이성’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려는 것 같다. 물론 미사토의 개방적이고 쾌활한(척 하는) 성격으로 보아 가벼운 장난 정도로 여기는 게 무난하겠지만, 문제는 작품 후반 미사토의 신지에 대한 행동이, 결코 무난한 쪽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당장 공식 팸플릿의 캐릭터 소개에도, 미사토를 더러 신지의 가족+동료+상사+‘애인’이란다.
미사토 "신지, 들어갈게."
"신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밖에…."
신지 "하지 마요!"
이 논제의 중심에 있는 장면은 23화에서 나온다. 2대 레이가 죽고 난 후, 절망에 빠진 신지에게 위로가 되겠답시고 미사토가 그의 옆에 앉는 장면이 있다.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 미사토가 아이의 손을 잡으려다 실패한 수준에 그치지만, 단순히 손을 잡기 위해 ‘지금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밖에 없어.’ 따위의 대사를 날릴 이유는 없다. 또 신지의 거부 반응도 필요 이상으로 강하다. 해당 부분이 만약 성인 남녀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장면이었다면, ‘ㅅㅅ’라는 단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상황 연출이다. 그래도 구체적인 표현이 없는 만큼, 이 장면을 깨끗한 채로 그냥 두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가이낙스 발행 필름 북에는 이 부분에 대한 주석에서, ‘미사토가 신지에게 그녀의 몸을 주려고 한다.’고 기술했으니, 오 마이 갓. 게다가 이 장면에는 좀 더 직접적인 상징도 있다. 미사토가 침대에 앉기 전 신지의 뒤로 비치는 의자가 ‘어떤 행위’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 물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미사토 "걱정 말어, 저런 애한테 손을 댈 리는 없잖아!"
리츠코 "당연하잖아!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너란 애는…!"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에게 ‘이성의 이미지’를 선사하는 캐릭터는 미사토와 아스카, 두 사람이다. 동년배인 아스카가 그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미사토가 신지에게 ‘이성’의 의미로 접근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더 정확히, 그러면 안 된다.) 미사토,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2화에서 리츠코에게 전화로 ‘저런 남자 아이에게 손을 댈 리가 없잖아!’라고 당당하게 말한 그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손을 대려고 했던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면 좀 더 이기적으로, 신지를 통해 카지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 물론 생각해 보면, 미사토가 유일하게 마음을 줬던 남자는 카지 하나였고, 그런 카지와 소통했던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성적인 접촉이었다. 사람과의 관계에 서툰 그녀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이 그런 것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 여기서 아까 말했던 대로, 신지 속에도 그녀의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 걸 상기하면, 이 부분 역시 그녀의 변형 일렉트라 콤플렉스 증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 여기서 잠깐,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은, 심리 과학 관련 개념,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이론을 상당히 많이 차용하고 있다. 인물의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루는 후반 에피소드 중, 18화, 19화, 20화는 연속으로 심리학 용어를 영어 부제로 썼다. 세 용어가 생소할 테니 여기서 간단히 설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먼저 18화의 부제, ‘Ambivalence’를 보자. ‘반대 감정 병존’이란 뜻으로, 개인의 마음 안에 전혀 다른 성격의 두 마음이 병존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간 마음의 근간을 이루는 리비도와 데스트루도. 블로일러가 1911년 처음 제창한 용어이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양가성’이라 칭하며 특히 사람이 겪는 ‘가학적 단계’의 중요 특징이라 밝혔다. 18화는 더미 초호기가 바르디엘을 파괴하는 에피소드였는데, 특히 더미가 지닌 데스트루도에 대한 설명으로도 부제를 이해할 수 있겠다.
19화의 영어 부제는 ‘Introjection’이었다. ‘내적 투사’라는 뜻으로, 역시 프로이트가 자주 언급하는 개념이다. 타인의 행동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무의식적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신 기제로, 보통 자아가 불안을 없애기 위해 사용한다. 대개 모든 사람들이 겪는 것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키우기 위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다. 19화는 제루엘 전을 통해 신지가 강력한 데스트루도를 발현하고, 초호기와의 400% 싱크로를 이루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내적 투사라는 부제는 넓게는 에반게리온과 파일럿 사이의 싱크로 자체를 조명하는 용어로 볼 수도 있고, 좁게는 신지와 초호기의 동화가 ‘신’이라는 ‘완전한 자립’을 이끌었다는 부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음으로 20화의 영어 부제는 ‘Oral stage’였다. 많이들 들어 알고 있겠지만 ‘구강기’라는 뜻이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리비도 발달 이론의 핵심이다. 리비도는 성적 본능의 에너지이며, 프로이트는 그 단계를 집중 부위에 따라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생식기로 나눴다. 그 중에서 구강기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시기로,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처음으로, 또 아주 강력하게 발휘하는 시기이다. 동시에 자기와 비(非)자기를 구별하는 자아 기능이 발달하는 때이기도 하다. 20화에서는 신지가 초호기 속에 흡수되어 그 안의 유이를 느낀 후, 다시 사람의 형태를 찾게 되는 과정을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 빗대어 그리고 있다. 그러기 위해 리비도의 자극이 필요했다는 것은 앞서 따로 짚은 바 있으니 이 정도로 설명하고 넘긴다.
미사토 "펜펜, 이리 온."
"그래, 외로운 건 나였네. 누구라도 좋다는 거였어."
어쩌다 무슨 심리학 수업이 된 것 같지만, 어쨌든, 이렇게 에반게리온은 심리학 개념, 그 중에서도 프로이트의 이론을 제법 구체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그의 학설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리비도나 데스트루도와 같은, 정신 본능 에너지와 그 욕망들은, 절대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발달 기간 중 그릇된 방법으로 표출 통로가 막히게 되면, 어른이 되어 부적절한 방법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사토와 같이 아버지와 가정의 부재 등으로 적절한 리비도의 발현 단계를 거치지 못했을 경우엔, 이성(理性)으로 감추었던 욕구가 결국 어떻게든 표출되기 마련이며, 미사토가 신지에게 보호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농담이 아니라 그녀 마음에 내재하던 욕망의 어긋난 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카지-이게 나의 전부야. 비밀 번호는, 우리들의 첫 추억. 그럼, 잘 지내.
미사토 "울리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초조해 하는 건 이제 그만할 거야.
-너의 마음, 받았으니까."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던 일이, 또 사랑하는 카지를 잃었던 일이, 미사토를 이 정도로 망가뜨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와중에도 자력으로 재기할 힘을 잃지는 않았다. 신지, 심지어 펜펜에게도 스킨십을 거부당한 그녀가, 카지의 음성 메시지만 계속해서 들으며 넋을 놓던 그녀가, 더는 울지 않고 카지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도 알게 된 덕분일까. 특히 레이에 대한 의문을 시작으로 카지가 남긴 데이터를 조사하며 그녀는 진실에 아주 근접한 인물이 되며, 동시에 내면의 성장도 함께 이루게 된다. 미사토와 함께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신지, 아스카와 비교할 때 미사토가 진정으로 어른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특히 엔드 오브 에바에서, 의지를 잃은 신지를 초호기로 보낸 것은 결국 미사토였다. 생각해 보면 신지를 초호기에 태운 것은 항상 미사토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4화의 감정적인 비꼼도, 12화의 어설픈 냉정도 아니다. 사도에 대한 복수는 없었다. 개인적인 증오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죽음과 바꾸어 소년에게 세상을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전하려는, ‘어른 미사토’의 조언만이 있었다. 미사토의 진심이, 비로소 신지에게 닿았던 것이다.
BGM E-13 [Short Composition] (rhythm only, modified)
"어른의 키스야."
미사토는 조용히 신지의 손에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십자가 목걸이를 쥐어 준다. 언젠가 죽음 바로 앞에 섰을 때 자기 손에 꼭 쥐고 있던 것. 아버지의 유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 비슷한 것. 그것은 아직도 십자가 목걸이 안에 온전히 남아 있었고 미사토는 신지에게 그 뜻을 전했다. 그리고 이어 어른의 키스. 카지가 자신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세상에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마음의 전달 방법. 카지가 자신에게 진실을 전한 방법. 미사토는 신지에게 그 진심도 건넸다. 동시에 미사토는 그 키스와 함께, 신지에게 서투르게 흉내만 냈던 보호자의 역할에도 그 끝을 고한다. 신지에겐 그것이 어른의 시작이 되길 바라며.
미사토 "이제부터는 너 혼자야. 전부 너 스스로 정하는 거야."
신지 "난, 안 돼. 안 돼요."
"지금 울어도 어떻게 되는 게 아냐!"
"자신이 싫은 거지. 그래서 남도 상처 입히는 거겠지.
그치만,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건 니가 직접 정한 거잖아?
가치가 있는 거야 신지야, 너 자신의 일인 거야.
얼버무리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미사토 씨도 남인 주제에!"
"남이라서, 뭐가 어떻다는 건데?
너, 여기서 관둘 셈이야?
지금 너 아무 것도 안 할 거면, 나 너 용서하지 않을 거야,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지금의 니가 전부가 아니란 말야.
나중에 잘못을 알고 후회하겠지. 나는 그 반복이었어.
하지만, 그 때 마다, 앞으로 전진했다는 기분이 들었어."
"알았니? 신지. 한 번 더 에바에 타서 결판을 내렴.
에바에 탄 자신에 대해.
뭘 위해서 여기에 왔는지,
뭘 위해서 여기에 있는 건지.
지금 너 자신의 해답을 찾아 봐."
"그리고 결론을 내거든, 반드시 돌아오는 거야.
약속이야."
카지 "너에겐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아무도 강요하지 않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해.
자신이 지금 뭘 해야 하는지를…."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스카 말대로, 카펫, 바꿔 둘 걸 그랬네. 그치, 펜펜?"
마지막 카펫 발언은 에바 팬들 사이에서 아주 흔한 논쟁의 대상인데, 그에 대한 가장 흔한 가설은, 엔드 오브 에바의 장면 중 아스카와 신지가 싸우는 중에 커피를 바닥에 흘린 것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허나, 다음에 자세히 다룰 부분이지만 그것은 보완의 장면으로 보는 것이 더 맞다. 게다가 커피를 흘린 바닥은 명백히 카펫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대사는 그 장면과 별개로 보는 게 좋다. 해석의 여지는 많지만, 개인적으로 이 발언은, 어른이 된 미사토의, 아스카라는 아이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스카에게 따뜻한 손길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말이다. 신지에겐 운 좋게, 어떻게든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 있었지만, 아스카에게는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 아스카를 감싸지 못하고 적절한 처신도 없이 자신의 아픔 속에만 박혀 살았던 것. 아스카가 원하는 집을 만들어 주지 못했던 것. 그리고 그녀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지 못했던 것. 그 모든 것에 대한 후회가, R-20 구역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중에, 불현듯 그녀 마음 한 구석에서 파도처럼 아프게 몰려왔던 것일 테다.
"카지 군…나 이걸로, 된 거지?"
지금 막 이별한 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아스카, 그리고 외로움을 견디게 해 준 펜펜에 대한 그리움에 이어, 그녀는 마지막으로 카지를 생각한다. 그의 유지를 받아 신지에게 이어 줬던 것에 대한 코멘트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가 마중이라도 나온 듯이 그녀의 시선은 하늘로 향하고 있다. 폭발 직전 그녀 곁에 선 레이는, 보완을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온 릴리스인 모양이다.
그리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장면이다. 신지와 아스카가 하늘을 보며 가만히 누워 있는 그 순간에, 미사토는 십자가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무에 걸린 하얀 십자가는 아마, 새로운 세상의 어른이 될 두 아이에 대한 미사토의 마음 그 자체였을 것이다. 미사토가 마음의 힘으로 다시 사람의 형태를 가지게 될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녀의 유지가 신지 속에 확실히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돌아오면, 다음을 계속하자."
"그만 둬요!"
"…미안해."
"사람 하나 못 살리는 게 무슨 과학이야, 신지를 돌려 줘, 돌려 달라고!"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신지, 이제 여긴 너의 집이야."
"다…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미안-! 기다렸지?"
[에반게리온] 24. 리츠코 ① 어머니와 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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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으로 엮어 책으로 출판하길 원하는 위원회 1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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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 이거 원, 세 편으로 나눠야 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오늘도 텍스트 분량 역대 최다 기록을 찍었습니다. 대신(?) 텀도 좀 길게. (ㅋㅋㅋ) 천천히 읽어 주세요. 다음 주 화요일 늦은 밤에 24편으로 뵙겠습니다. 끝까지 파이팅 넘치게 서비스,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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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가 완전히 붕괴되던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해주던 미사토의 모습만 기억에 남아서 잊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보여준 모습들은 그래도 미사토가 인생 짬밥을 허투루 먹은게 아니라는 것이군요. 카페트 대사와 아스카에 대한 연관성은 이 글을 통해 처음 보는건데 왠지 설득되고 있습니다. 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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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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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디저트님이 완성하시는 순간 출판위원회를 발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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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으로 엮어 책으로 출판하길 원하는 위원회 1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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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人 | 13.01.11 0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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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디저트님이 완성하시는 순간 출판위원회를 발족합시다. | 13.01.11 09: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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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가 완전히 붕괴되던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해주던 미사토의 모습만 기억에 남아서 잊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보여준 모습들은 그래도 미사토가 인생 짬밥을 허투루 먹은게 아니라는 것이군요. 카페트 대사와 아스카에 대한 연관성은 이 글을 통해 처음 보는건데 왠지 설득되고 있습니다. 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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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신극장판을 처음 봤을 때 미사토가 '미안, 기다렸지.' 하는 부분은 꼭 구작에서 저렇게 이별한 후 다시 만난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던 기억이 있네요. ㅎㅎㅎ | 13.01.11 01: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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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을 어린 시절에 본 사람들이라면 거의 누구나 다 그렇겠죠. 위에서도 말했지만 정말 생각해 보면 미사토는 90년대의 메텔과도 같네요. ㅎㅎ | 13.01.11 11: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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