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영화 남한산성
부제 :17세기 초엽 부족세력 '구왈차' 세력과 '사할차'세력의 동일세력 가능성
구왈차는 16~17세기 무렵 동북아시아 호란강 인근에 세거하던 것으로 파악되는 부족민 군집이었다. 이들은 흔히 동해 여진 계통으로 분류되며, 몽골의 코르친 세력에게 복속된 상태로 종주세력인 코르친의 의지에 따라 9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누르하치의 건주와 일전을 벌였다가 대패하기도 했다. 1593년의 전쟁 이후에는 후금/청의 협력과 정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사할차는 비슷한 시기 동북아시아 제야강 인근에 세거하던 부족민 군집에 대한 지칭명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구왈차의 세거 지역보다 훨씬 북쪽인 제야강과 흑룡강이 맞닿는 지점에 세거하는 이들로 정리되었다.
이 논지에 따르면 구왈차와 사할차는 세거 지역이 꽤 먼 거리가 떨어져 있는, 구분되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구분이 후대, 즉슨 17세기 중~후반부 이후부터 생긴 구분이라고 판단하며, 건주와 누르하치가 흥기하던 시기인 16세기 말~홍타이지 시기까지는 구왈차가 곧 사할차이며, 두 이름이 모두 구왈차에 통용되었다고 본다. 즉, 17세기 초중엽까지만 해도 구왈차의 이명(異名)으로 사할차가 쓰였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보자면, 첫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근거로 1593년 누르하치가 상대한 9부 연합군을 구성한 세력들에 대한 기록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만주실록상에서 9부 연합군으로 참전한 세력은 여허, 울라, 호이파, 하다, 코르친, 시버, 주셔리, 너연, 그리고 구왈차 9개 세력으로 정립된다.1고황제실록 역시도 비슷하다.2그런데 만문노당을 살펴보자면 이와는 미세하게 다른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만문노당상에서 첫 번째로 9부 연합군에 종군한 세력들이 열거된 것은 1613년 명나라가 여허와의 공조체제를 직접적으로 구축하고 1천여명의 군병을 여허에 원조파견하는 동시에 건주에게 여허를 공격치 말라는 선유를 할 무렵이었다. 이 때 누르하치는 9부 연합군을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9개 세력으로 비정하였다.3즉슨 여기에는 구왈차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만문노당 상에서 두 번째로 9부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인 1617년 음력 1월의 기사에서는 해당 9부 연합군을 구성한 세력들이 여허, 하다, 울라, 호이파, 몽고(코르친), 시버, 그리고 '사할차'로 기록되어 있다.4 주셔리와 너연은 생략되었으니 제외하고, 구왈차 대신 사할차가 들어간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보건대 당시인 17세기 초엽 무렵에는 구왈차의 이명으로 사할차 라는 명칭이 존재했으며, 그렇기에 기록상에서 구왈차 대신에 사할차가 대신 서술되었다는 의심이 충분히 가능하다.
삽화 출처 : 칼부림
두 번째 근거로, 1618년 음력 4월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무순을 공격하려 군대를 이끌고 진격할 무렵 누르하치의 군대에 함께 종군한 사할차의 사할리얀 어푸를 예시로 들 수 있다.5 사할리얀 어푸는 후금 왕실의 어푸로서, 누르하치의 알려지지 않은 딸 혹은 왕실에 소속된 혈연의 여식, 예컨대 조카딸, 그도 아니라면 양녀와 혼인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제야강의 사할차' 세력은 위치상 지도자 혹은 지도자의 계승자가 후금의 어푸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적을 뿐더러, 후금이 어푸로 맞이할 큰 가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위치가 멀고 다수의 부족민을 규합하는 통치체계도 없었기 때문에 후금의 전쟁에 왕공 혹은 종군병력을 보낼 여유나 가망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사할리얀은 후금의 어푸로 불렸고, 누르하치가 몽골의 유력왕공인 엉거더르와 함께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일 만큼 어느 정도 탄탄한 위치에 있었으며, 동시에 군대 역시도 누르하치가 만족스러워 할 만큼 보낸 것으로 유추된다. 이로 보건대 여기서 거론된 사할리얀 어푸와 그의 세력인 '사할차'는 제야강 인근의 사할차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후금에 가까우면서도 어느 정도 군대가 양성되어 있던, 동시에 누르하치가 그 지도자 혹은 왕공을 어푸로 맞이할 가치가 있던 또 다른 세력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실록상의 '구왈차'이다.
세 번째로, 1625년 코르친이 차하르에게 공격을 받을 당시 코르친의 수장 오오바 후왕 타이지가 당해 10월중 누르하치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 그리고 이어서 누르하치에게 귀부해 온 라마승과 그가 이끌고 온 사람들을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1625년 음력 8월부터 차하르의 코르친에 대한 공격 조짐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오오바 후왕 타이지는 누르하치에게 지속적으로 구원 요청에 관한 서신을 보내며 후금의 지원을 통해 차하르의 위협을 벗어나려 했다. 음력 10월 28일 심양에 도착한 오오바의 서신 역시 구원 요청에 관한 서신이었는데, 그 서신에는 다른 여러 이야기와 더불어 다르한 타이지가 본인 관할하의 잘라이트, 시버, 사할차의 방위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도피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6
여기서 잘라이트는 코르친의 지파로, 같은 동방 3왕가의 조치 카사르 계통으로서 코르친과 가까운 관계였으며, 시버는 구왈차와 함께 코르친의 종속 세력이었다. 그런데 구왈차와 한데 묶이는 시버는 언급되었는데 정작 구왈차는 언급이 없고 뜬금없게도 사할차가 언급되어 시버와 한데 묶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되는 사할차는 상기한 제야강의 사할차가 아니라 호란강 유역에 존재하며 코르친에게 종속된 세력인 구왈차를 이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구왈차의 이명으로 사할차가 쓰였기에 사할차라고 지칭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이어 서술되어 있는 라마교 승려의 귀순 역시도 주목할 만 하다. 1625년 음력 11월 6일 본래 코르친에 귀부하였던 라마교 승려가 다시 후금에 귀순해왔는데, 그는 사할차인 132명과 함께였다.7 만약 여기서 지칭되는 사할차인이 제야강의 사할차인이라면, 코르친에 귀부했던 이가 코르친의 영향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세력의 사람 백수십명과 함께 후금에 귀순해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8 그러한 이야기 구성은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성이다. 아마도 이 역시도 호란강 유역의 구왈차인을 당시에 통용되던 이명인 사할차인으로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네 번째 근거로, 1637년 음력 12월에 있었던 옄슈와 싱너이의 동해 여진 원정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청태종실록 숭덕 2년 음력 12월 10일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옄슈와 싱너이는 구왈차를 목표로 원정을 단행하였다.9 이들은 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나서 원정을 끝마쳤는데, 원정을 끝마치기 전에 송부된 보고서한에는 '구왈차'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대신 '사할차'가 언급되고 있다.10 구할차를 목표로 출병한 군대의 보고에 사할차에 대한 전과보고가 언급,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 이런 것을 보건대 당시 구왈차가 사할차라는 이명으로도 불리고, 그렇기에 옄슈와 싱너이는 자신들의 본래 임무인 '구왈차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보고서한에는 '사할차 전과'으로 기록하여 보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외에도 다른 근거들 역시 있지만 모두 열거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이러한 근거들을 통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중엽의 '구왈차'와 '사할차'는 구분되지 않으며, 하나의 세력을 지칭한다고 판단한다. 이후 제야강 인근의 세거 민족이 청에 의해 확보되고 이주되면서'사할차'라고 지칭되기 시작하고서부터야 양자간 구분을 위하여 구왈차가 온전히 구왈차로만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사료상에서 언급되는 빈도수를 보건대 구왈차보다 사할차가 더 많으므로 오히려 사할차가 구왈차의 이명이 아니라 구왈차가 사할차의 이명에 더 가까웠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그러다가 제야강 인근에 살던 부족이 사할차로 불리게 되면서 기존의 사할차가 이명인 구왈차로 통칭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한 확답을 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필자는 그저 16세기 말~17세기 초의 후금과 청의 사료에 등장하는 사할차는 '제야강의 사할차'가 아니라 '구왈차'를 지칭한다는 주장을 이 글을 통해 제기하면서 글을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마무리에 첨언하자면, 필자뿐 아니라 구범진 교수 역시 사할차를 1593년 9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세력으로 보아 사실상 구왈차와 동일하다는 견해를 보인 바가 있으므로11, 이러한 견해는 비단 필자 개인의 무모하고도 고립된 추측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1.만주실록 계사년 음력 9월
2.청태조고황제실록 계사년 음력 9월 1일
3.만문노당 계축년 음력 9월. 정확히 말하자면 코르친은 몽골로 지칭되었고, 세력 규모가 크지 않은 주셔리와 너연은 따로 열거치 않았다. 하지만 9개 세력을 비정하였으며 거기에 구왈차를 포함한 것은 확실하다.
4.만문노당 정사년 음력 1월
5.만주실록 무오년 음력 4월 14일
6.만문노당 천명 10년 음력 10월 28일
7.만문노당 천명 10년 음력 11월 6일
8.다만 코르친의 경우 솔론에도 영향력을 두고 있었는데, 솔론의 경우 제야강의 사할차와 맞닿아 있었으므로 코르친이 제야강의 사할차에 아주 영향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9.청태종실록 숭덕 2년 음력 12월 10일
10.청태종실록 숭덕 3년 음력 4월 1일
11.구범진, 병자호란 :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2019, p.337.
사실 그냥 베스트 가고 싶어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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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도없지 작성자의 정성을 무시하는 3줄 요약을 신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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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
교익하진 않아서 다행이야 | 23.03.01 16:0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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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 그기 | 23.03.01 16:0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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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3.01 16:0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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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유익하다는 애들이 많다니까 유익하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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