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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가세요, 당신 거잖아요?"
갑작스런 청년과의 만남.
유진의 기억에 있는 듯 없는 듯 한 인상의 그가 뒤이어 등장하자, 유진은 듀얼의 피로조차 잊고 다시 경계하기 시작한다.
"…내 거라니?"
"왜 저것만 바닥에 남았겠어요? 당신의 승리를 상징하는 전리품인 겁니다. 이미 에너지를 가져가셨으니 껍데기 뿐이긴 해도, 에너지가 담겼다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죠. 알아볼 사람은 알아보거든요."
"그치만……"
"괜찮아요. 제 지인들은 거진 그러니까. 뭐, 버리든 나중에 남한테 선물로 주든 상관없구요. 그나저나, 나머지 전리품은 전 주인하고 운명을 함께 한 모양이네요. 아까워라."
분명 비슷한 말을 바로 전에 들은 것도 같다. 그만큼 이 바닥에서는 상식이라는 말일까.
유진은 마지못해 헤어핀을 집어들며 일어선다. 세 번 정도의 듀얼을 하면서 처음으로 챙긴 전리품이었다.
그리고 방금 새로 생긴 또다른 의문을 바로 알아내기 위해, 유진은 청년 쪽을 향해 질문한다.
"근데 누구…?"
"아, 참. 이렇게 다시 뵙게 되네요. '위저드'라고 합니다. 닉네임 따로 있으세요?"
"아니."
"그러시군요."
뭐 하러 왔을지는 예측하기 쉽다. 그렇기에 유진은 긴장을 놓지 않는다.
저렇게 예의를 갖춘다 해도, 어둠의 듀얼에 익숙한 태도를 보이는 이상 무언가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방금 모습을 보건대 여기에 익숙하신 분은 아닌 것 같고."
"……."
이 자는 분명 아까까지 있었던 일을 다 지켜본 모양이다. 그러니 마냥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솔직히 대답하지 않는다. 자칫하면 만만한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바로 연전을 치루게 될 수도 있기에.
"그런데도 그걸 걱정할 필요 없을 만큼 강인한 분이시고."
이건 칭찬인 것일까. 어쩌면 그런 사람인 만큼 상대로서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무슨 말을 하든 불안감을 피할 수가 없다. 지금의 유진은 그래야만 했다.
그런 긴장 가득한 반응을 보면서 위저드는 뜻밖의 제안을 꺼내든다.
"괜찮으시다면 정보 공유 시간 좀 가질 수 있을꺄요?"
"뭐?"
"서로 돕고 살아야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두고볼 만큼 저도 삭막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께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수상하다. 적어도 일방적인 친절일리는 절대로 없다.
"일단 먼저 물어보세요."
"여기에 대해서 아는 거라던가?"
"어드밴스드 배틀 시티랬었죠, 아마?"
"아니, 그게 아니라.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고 왜 사람을 끌어들였는지, 같은."
"재버워키랬던가요. 본인 발언을 듣자하니, 도미노 배틀 시티에 못 나간 울분을 풀고자 이런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소꿉놀이를 벌이는 모양이더군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 뿐이라 별다른 소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본인 질문이 잘못 된 건가 하는 생각에 유진은 차근차근 알고 싶은 것을 물어나가기로 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데?"
"그건 저도 알고 싶네요. 어떻게 50명 되는 인원이 거뜬히 돌아다니고도 남는 세계를 구현했을까. 카드에 그려진 풍경을 구현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쳐도 이 현상은 정말 상상을 뛰어넘어요. 단순히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동원했다는 정도밖에 추측이 안 되네요."
"에너지?"
"이 디젠이라는 것에 깃든 미지의 힘 말이죠. 제가 알기로는 생명 에너지를 연료삼아 발휘되는 거거든요. 하지만 사람 한 명의 생명 에너지로 이만한 풍경을 그려내는 건 저조차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어둠의 듀얼 같은 수단으로 다른 분의 에너지를 갈취해서 축적하는 수밖에 없을 텐데…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이 동원되었을지. 그걸 또 어디서 구해왔을지."
"…………."
"차라리 전부 사기고, 그냥 저희한테 VR 기기를 씌웠을 뿐인 거라 믿고 싶을 지경이에요."
그가 늘어놓는 추론에 소름이 끼쳐왔다.
이 장소만이 무덤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말하자면 뼈로 쌓아올린 무덤인 셈 아닌가.
"그게 사실이면 대체 왜? 뭐하러 이런 데를 만들고 이런 짓을 시키는 건데?"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겠어요? 이런 뜻일 수도 있죠. 듀얼리스트들에게 하나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이벤트조차 본인에겐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 자신은 더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유치하지만 정황상 매우 그럴 듯한 발상이다. 이 이벤트 자체가 배틀 시티, 그리고 듀얼리스트라는 개념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으니까.
"자기 능력을 과시한다, 그런 거?"
"뭐, 그런 능력이 정말로 있다면 자랑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겠죠. 정말로 사람이 맞는지는 둘째치고."
역시 그것부터 의심할 단계인 것일까.
"물론 가정에 불과합니다. 그 분이 사람이라면, 아니, 사람처럼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분이라면 어떤 행동원리를 보일까 하는 추측을 통해서요."
"그 말은,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이 할 짓은 아니지 않나요?"
"그건 그런데."
유진 역시 동의하고도 남는 말이다. 개최자라는 작자가 사람의 몸뚱아리를 하고 있더라도, 이런 판을 벌리는 것부터가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다.
그런 말이 게임의 참가자, 그것도 딱히 곤란에 빠진 것 같지는 않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다소 꺼림칙해지지만.
정말로 뭐 하는 사람일까, 유진은 필연적인 의문을 갖는다.
태연히 사람의 목숨을 거둘 준비가 되어있는 한 명의 참가자인 것일까. 아니면 어쩌다 보니 이기고 살아남으면서 여유를 되찾은 것 뿐일까.
그런 의문을 입밖으로 꺼내보려 하기도 전에 또다시 저쪽에서 질문이 날아온다.
"그럼 제 쪽에서 질문해볼까요. 그 분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죠?"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날 이런 데로 이끌었다는 걸 빼면…"
"그래요. 다른 분들하고 크게 다를 것 없어보이는데."
유진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여전히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자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없으니 이런 곳에서 무언가를 알아낼 도리가 없다. 그저 초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에 전력을 쏟아붓는 광인이라는 사실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진은 그 질문을 되돌려준다.
"당신은 알아요? 얼마나?"
"저도 알고 싶으니까 여쭤본 거 아니겠나요."
실망스럽지만 타당한 말이었기에 딱히 뭐라 할 요소는 없다. 대신 유진은 다른 걸 질문해보기로 했다.
"왜 알고 싶은 건데요?"
"제가 원하는 진실의 실마리가 되어줄 분이니까. 그런 분께서 자그마한 게임을 준비하고 계시다길래, 좋은 기회다 싶었습니다."
"진실?"
"언제부턴가 사람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퍼진 이 어둠의 게임,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하는 수상한 공간. 대체 누가 어떤 힘으로 구현해냈을까. 그 목적은 또 뭐가 되는 걸까. 솔직히 당신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유진도 그에 관해서는 의문 투성이었기에 굳이 따지자면 알고 싶은 쪽이었다.
"그걸 알려고 여기에?"
"네. 그것도 알아서 판을 깔아주신 거잖아요. 어떻게든 참가하고 싶어서 연락을 취해보니 흔쾌히 허락이 떨어졌더군요. 거기다 다른 중요한 분까지 오게 되셨다는 소식까지 전해들었지 뭐에요. 그래서 게임에 필요한 인원 수도 보태드릴 겸 지인들 몇 분도 데리고 찾아왔죠."
역시 이상하다. 왜 이렇게 가벼울까. 이 게임이 어떤 꼴인지 충분히 알게 된 유진으로서는 동호회에 참여하는 듯한 그 태도가 영 탐탁치 않다.
미스터리 동호회 사람들도 이 꼴을 봤다면 기겁했으리라.
"지인?"
"네. 직장 동료든,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든, 연이 있는 분들 중 연락이 닿는 대로 어떻게든 데리고 왔죠. 다같이 모인 순간엔 동료들과 함께였고, 다른 몇몇 분들도 직접 만나뵈고 오는 길이고."
마치 방금 전까지 목숨과 정신을 위협받는 싸움을 치뤄온 자신이 애들 장난에 놀아난 것만 같은 불쾌감.
유진은 그 위화감의 정체를 서서히 추려나간다.
"여기가 어딘지, 뭐하는 데인지 알고 있으면서 데려왔다구요? 그리고, 이런 걸 함께 하는 동료가 있었다고?"
"네. 특히 그 때 같이 계신 분들은 주기적으로 만나서 얘기를 주고받는 그런 사이였어요. 그 중 하나가, 방금 당신이 상대한 트릭스 씨죠."
대답을 들은 즉시 유진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이 자도 한 패다, 그 사실을 알아듣자마자 유진은 바로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것이 태도에서부터 내비춰지면서 위저드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뇨, 당신더러 책임을 물으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칭찬해드려야죠. 좋은 듀얼을 구경했으니까. 그 점에서 트릭스 씨는 제 역할을 훌륭히 해주신 거에요. 더 뵐 수 없게 된 건 아쉽지만, 덕분에 잘 된 일이죠."
눈꼬리와 입가에 까지 번진 미소는 영업용인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비상식의 편린을 맛보면서 유진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잘 된 일이라니?"
"단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으니까요. 이곳 'ABC'를 클리어하고, 더 나아가 재버워키 씨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갈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
"정말이야?"
진심인지 아닌지는 판가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반응은 해볼 수밖에 없다.
"뭐, 아직은 가정일 뿐입니다만. 제가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영 순탄치가 않았어요. 재버워키라… 그 분께서는 워낙 부끄러움이 많은 분이셔서요. 만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보니, 저도 불손하지만 갖은 수를 써서라도 그 분의 흔적을 캐고다닐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
딱히 대답할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빈 말로라도 고생이 많았다는 멘트를 꺼낸다면 신경을 자극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게임을 거절하시는 분은 아닙니다만, 그런 용건이 없으면 상대할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더라구요. 그래서 좋은 게임 상대가 되어드리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었죠. 좋은 승부가 될 뻔도 했는데 판이 엎어진 적도 있습니다. 뭐, 덕분에 저도 이렇게 멀쩡히 있는 거겠지만요."
스토킹은 보통 환영받지 못하는 행위다. 아무래도 재버워키의 입장으로 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가진 디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시죠?"
"그건 왜…?"
"그 때 느꼈던 재버워키 씨의 기척이, 지금 당신의 디젠에서도 느껴지고 있거든요."
위저드의 시선은 여전히 평온하다. 멀리 떨어져서 가끔 연락이나 하는 정도의 가족한테 안부를 물어보는 것만 같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내가, 재버워키라고?"
"글쎄요. 아니면 아닌 거겠죠. 감만으로 단언할 수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디젠을 가진 자가 저마다 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것들이라고 연관성이 없는 것도 아니겠죠. 그런데 당신 것은 조금 다르거든요."
"다르다고?"
"뭐랄까. 비유하자면 남들은 피처폰이나 초기형 스마트폰을 쓰는데 당신은 따끈따끈한 신형 D-패드를 쓰는 느낌이랄까. 똑같이 전화기라고 불릴 수는 있겠지만 궤가 다르잖아요."
방금 전에 트릭스에게서 들었던 말과 비슷하다.
"하지만 당신께선 그런 자기 물건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죠. 어째서일까요. 그 분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당신께 그걸 넘겼을까."
"……."
그렇다. 이건 그야말로 트릭스가 중얼거린 의문의 연장선상이 아닌가.
같은 동료들간에 정보 공유가 되어 있다면, 지금 이 상황도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일까.
"뭐, 그 분의 성격을 고려하면 단순히 재미있을지 모르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위저드는 당돌한 가정을 제시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그 물건이 원래 당신 것이었을 가능성."
"무슨 말을…?"
"원래 본인 것인데도 그걸 본인만 기억을 못하는 겁니다.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철저히 정체를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마저 바꿔버린 거죠."
"뭐?"
그리고는 당황하는 유진의 반응을 본체만체 하듯 자기 의견을 밀어붙였다.
"더 나아가서, 지금의 당신이 사실은 원래 당신이 아닐 가능성마저 있구요."
그럴싸한 이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다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유진 입장으로서는 결코 맞장구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어디서 생사람을…"
"당신,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이상해서 이해가 안 가지 않나요? 왜 내가 이런 걸 하고 있을까?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질리 없는 평범한 자신이 어쩌다 억지로 끌려오게 되었을까? 그런 자신이 어떻게 버티고 살아있을까."
이겼으니까, 라고 대답하면 된다.
이겨야만 살아남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싸움을 어떻게 이길지 궁리할 수가 있다.
트릭스가 남긴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먼저 깨달은 자로서 남긴 나름대로의 조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진은 그 대답을 바로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입만 연 채 다음 말이 오기를 기다릴 뿐.
"그런 당신이, 아무한테도 조종당하지 않고 제정신인 상태라 단언하실 수 있나요?"
역시 단언할 수가 없다.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오히려 자기 자신이야말로 이 말에 넘어가버릴 것만 같다.
극복하겠다는 의지마저 누군가에게 주입당한 것이라면, 그걸 자신이 방금 깨달아버린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어디까지나 가정이에요. 당신의 그 반응은 과연 연기인지, 아니면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조작돼있는 건지. 저로서는 의심으로밖에 유추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그걸 망상으로 치부하고 싶겠죠. 서로의 의견을 증명할 수단이 필요합니다."
긴 말을 늘어놓으며 위저드가 한발짝 앞으로 움직이는 사이, 유진은 절로 뒷걸음친다.
"그러고 보니 재버워키 씨가 제시한 클리어 조건, 그게 자기 자신을 찾아내달라는 거였죠? 그럼, 매우 비슷한 냄새를 가진 당신과 게임을 치룬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생명의 위협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하는 유진에게 긴장이 떠날 생각을 않는다.
'역시 이렇게 되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듯이 그는 뒷걸음질을 멈췄다.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에 유진은 무심코 자신에게 있던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겨누었다.
"어이쿠야."
손바닥만한 권총은 명중률은 보장할 수 없어도, 맞출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기에 위협이 안 될 수가 없는 무기가 된다. 무엇보다 근거리라 명중률은 더 올라간다.
그 위협에 위저드는 양손을 들어올리는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비아냥거리듯 여유로운 태도를 놓지 않았다.
"듀얼리스트의 무기는 덱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아까까지 듀얼 중이던 당신도 잘 알고 계셨을 텐데."
"그런 듀얼, 다시는 하기 싫어."
"그러시군요. 그러고 보니 트릭스 씨가 총 같은 무기를 정말 싫어하셨죠. 뭔 수를 써서든 적어도 상대가 들고 설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는데. 그런 상대를 앞두고 살아남은 권총이라니 별일이네요."
"……."
"어쨌든 좋은 방법이에요. 마음 편히 쏴버리면 끝이니까. 그래서, 몇 발 남았죠?"
아무래도 소용없는 모양이다. 유진은 그렇게 깨닫는다.
그 말대로 총알 없는 권총이라면 실총이든 모델 건이든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총알이 정말로 없다는 것을 모르게 하는 것 역시 위협으로서는 기능할 터.
그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아직 손에서 놓지는 못한다.
"트릭스 씨께 살아남은 당신이라면, 그런 무기 따윈 필요 없을 겁니다. 운이든 뭐든 당신은 일정 이상의 가치를 이미 증명하셨어요. 그런 게 없어도 당신을 얕잡아 볼 생각은 없으니 염려 마시죠."
위저드의 흐뭇한 표정은 그걸 다 꿰어보고 있는 반응으로 보인다.
이미 방금 전까지 몇 발짝 물러난 자신의 꼴을 지적할 새도 없이, 유진의 두 눈은 적의를 담아 위저드를 노려보았다.
그가 발을 멈추면서 위저드 역시 멈춰선다. 서로 두 세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그가 꺼낸말은 느닷없는 칭찬이었다.
"즐기지도 않을 게임을 위해 여기로 와서, 지금까지 꿋꿋이 버티고 계시잖아요. 당신은 충분히 용감한 분입니다. 그 용기를 힘으로 증명할 수 있는 분이기도 하죠. 경의를 표합니다."
팔 한쪽을 어깨에 대며 신사답게 인사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는 앨범으로 보이는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오기 전에 당신같은 용기가 있던 분을 좀 상대한 참이거든요."
앨범에서 꺼낸 것은 한 장의 카드. 듀얼몬스터즈에 사용되는 규격의 카드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진 덕에 확인이 가능해진 일러스트가 심상치 않았다.
그려진 것은 사람의 얼굴. 사진으로 찍은 듯한,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의 모습이 있다. 듀얼몬스터즈 카드처럼 만든 명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명함을 뭐하러 이런 상황에서 보여주는 것일까.
그 의문이 추측을 통해 풀려나가자,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분노한다.
"이 자식……!"
경악과 분노가 뒤섞인 반응을 즐기듯 그는 여전히 싱긋 미소짓는다.
"새삼스럽게. 이미 그 디젠 무더기를 구경하지 않으셨던가요? 그건 일종의 훈장입니다. 적을 해치웠다는 증표를 모음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자신은 순순히 포식당하는 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 저도 그런 일을 한 것 뿐이거든요."
"걔한테 그러라고 시킨 게 너야?"
"아뇨. 알아서 깨우치신 거죠. 저희는 동료로서 서로를 격려할 뿐이지 상명하복하는 관계가 아니라구요. 그게 통할 사람들도 아니고."
"그럼 단체로 미친 놈들 아냐."
"미쳤다니요? 그건 세상에 통하지 않는 상식을 끝까지 주장하려는 사람한테 할 말이죠. 그리고, 우리가 지금 있는 세상은 서문유진씨가 알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고요. 미친 건 어느 쪽이 될까요?"
대답하면서 여전히 그 기분나쁜 미소를 잠시 내보이는가 싶더니,
"트릭스 씨가 말씀하셨을 텐데요. 이기는 쪽의 말이 맞다고. 제 말을 부정하고 싶으시다면 이겨서 옳다는 걸 증명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트릭스 씨가 당신을 이기지 못하셨으니, 동료인 제가 뜻을 이어받으면 되겠네요. 당신이 토우키 씨 다음으로 나섰던 것처럼."
겨우 이겨낸 자신더러 또 싸우라고 한다.
싸우는 상황 자체를 노리고 있다. 그걸 거부할 수 없게 만들려 한다.
정신적인 피로가 닥쳐온다.
이 도시는 미친 곳이 틀림없다. 이런 곳으로 데려다 준 재버워키 역시 미친 놈이다.
분명, 이런 미친 곳에서 사람들이 미쳐가는 것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보고 있을까. 정말로 참가자들 사이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중일까.
애초에 거짓말이고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 사람의 말마따나 정말로 자신이 기억을 지운 채로 게임을 즐기고 있던 것일까.
미친 결론이다. 그러나 그걸 확실히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있다.
과연 미쳐있는 것은 어느 쪽일까.
지금의 유진은 결론을 낼 수가 없다. 낸다고 한들 당장 이로운 결과가 되어주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런 건 둘째치고 유진은 맞설 필요를 느꼈다. 적어도 지금은 이 자가 꺼낸 말처럼, 그리고 트릭스가 남긴 말처럼 승부를 이겨서 그런 미친 소리를 부정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유진의 의식은 혼미해져가고 있었다.
이전의 듀얼로 쌓인 피로에 그만 한계가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저쪽에서 무슨 저주라도 걸었을까.
"…유진 씨?"
그런 답을 정리해보기도 전에, 그의 의식은 한 순간 어둠으로 뒤덮였다.
◇
"…"
또다시 의식이 꺼졌음을 깨닫는다.
낯선 사람이 다가왔다고 벌벌 떨다 못해 결국 기절하는 꼴이라니, 본인 생각에도 꼴사납구나 하며 유진은 자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결론을 차마 내릴 수 없는 의문 끝에 생각을 관두기를 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
"…정신체, 임시 공간으로의 진입을 확인. 의식 전환을 확인."
어찌 되었든 의식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시점부터, 이미 눈꺼풀은 뜨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망설임이 이를 가로막는다.
여기서 눈을 뜬다면 또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뭘 마주해야 되는 것일까.
"현 시간부로 계약 예정자의 호출이 완료되었음을 최종적으로 확인."
"…!!"
그런 유진의 눈을 이번에도 이내 뜨게 만든 것은 하나의 목소리.
귀가 아닌 머리를 통해 직접 날아드는 듯한 목소리에 유진은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을 떴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어차피 이것도 꿈일 것이다. 보다시피 유진의 눈 앞의 세계는 또다시 허공이 자리잡고 있었으니까.
당황하기엔 슬슬 익숙해져버린 현상.
오히려 또 이 짓거리인가 싶어 유진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오려 한다.
"이번엔 또 뭔……"
"이제야 만나는구나."
그런 그의 말을 가로막는 목소리은 어딘지 유진의 귀에 낯익게 들려왔다.
성별, 연령을 구분할 수 없이 그저 메시지만을 전하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아니다.
어딘가 기억에 남아있는, 더 나아가 그리워지는 목소리.
'…아빠?'
그에 대답하듯, 유진의 바로 코앞에 강렬한 빛이 나타난다.
갑작스런 빛줄기에 유진이 눈을 찡그리는 동안, 빛은 사람처럼 팔다리와 머리로 구분되는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이 빛을 온몸에 휘감고 있는 듯한, 혹은 빛들이 모여 사람의 형태로서 움직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누구…?"
"실례. 상호 접촉이 이뤄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상호 뭐?"
"너의 교신을 위한 절차가 이뤄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주위로 또다른 빛이 나타난다. 붉은 빛, 푸른 빛, 노란 빛, 녹색 빛이 새하얀 빛의 양옆에서 나타나더니 사람 실루엣으로 바뀌어갔다.
여전히 그들을 뚜렷하게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 정체를 유진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순간에 그에게 인사하러 올 만한 존재는 누가 있을까. 형형색색의 존재. 자신이 이유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불러내려 했던 카드들.
"ET레인저…?"
"그렇다. 우리는 이방인(étranger). 이 세계의 위기를 감지하고 영역 너머에서 건너온 감시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솔리드 비전이나 다른 프로그램조차 없이 카드가 말을 걸어온다니. 듀얼리스트라면 한 번쯤 해봤을 법한 망상이 아닌가.
그것도 추억 속의 그리던 목소리라니. 이 현상은 그야말로 망상의 결정체다.
차라리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솔리드 비전으로 장난치고 있다고 보는게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른다.
얼마 전까지라면 유진은 그렇게 넘기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강렬한 비일상, 그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불길한 징조들로 인해 이미 그의 정신은 불안감과 피로감으로 서서히 너덜너덜해져갔다. 방금 전까지의 혈전만 해도 정신이 망가지기에는 부족함이 없을지도 모른다.
현실과 허구를 단정해낼 자신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그 자신이 부정하더라도 어쩌면 이들은 아랑곳않고 자신의 존재를 호소할지도 모르는데다, 적어도 자신을 적대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유진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에도 뭔가 걸리는 점은 있었다. 유진이 갖고 있던 'ET레인저'는 4장. 그리고 각각 네 가지의 대응되는 색깔을 가진 멤버들이 눈앞에 서있다.
그렇다면 한 명이 남게 된다. 지금 서로 대화 중인 이 자는 누구인가.
"나머지는 그렇다 치고, 그럼 넌…?"
"나 또한 우주의 질서를 관망하는 자. 동시에 나머지 동료를 통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장? 지휘관? 그런 카드라면…"
굳이 대장격이라 하면 전대물에서 으레 대장 자리를 차지하는 '레드' 쪽일 것이라고 유진은 생각해왔다. 정열과 불꽃을 상징하는 빨강이 아니던가. 그 빨간색의 실루엣으로 유진은 잠시 시선을 옮긴다.
"그 동안 내 의식은 여태까지 형태로 남길 수 있을 만큼 뚜렷하지 못했다. 먼저 찾아간 동료들이 모두 깨어나, 이 영역의 관측을 완료해준 덕분에 나 또한 부름에 응할 수 있었지."
그래, 그렇다고 치자. 유진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새로운 카드, 그것도 레어 카드가 늘어난다는 것은 듀얼리스트로서 나쁠 것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게임에서 퍼즐을 클리어했을 경우 지어지는 일종의 보상. 유진은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다 또 하나의 의문을 떠올린다. 이들이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의지를 가진 존재란 것을 확인한 이상 유진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데…, 왜 하필 나야?"
그 동안 이상한 집착을 갖게 만든 원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한다.
"사람 정신 이상하게 만들어놔서 듀얼이든 뭐든 제대로 되는 일 없게 만들어놓고, 결국 이 지경까지 끌어들이게 해놓고.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유진도 알고는 있었다. 이들에게만 떠넘길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하지만 짧은 순간에 자신에게 닥쳐왔던 부조리들을, 이렇게라도밖에 풀어놓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뭔가 시덥잖은 이유라도 돌아왔다간, 만에 하나 '그냥'이라는 말 따위가 돌아왔다간 무언가가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너에게 가도록 부탁한 자가 있었다. 먼저 우리를 일깨운 자가."
대답을 듣자 하니 적어도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을까.
하지만 누구일까. 그 의문을 직접 입밖으로 꺼내려는 찰나 유진은 답을 떠올렸다.
실마리는 이미 이 자가 전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아빠?"
"혈연 관계라는 개념은 아직 익숙치 않다만, 너와 유사한 관측 결과를 토대로 삼으면 맞다고 볼 수 있겠군."
혼란스럽다.
왜 아버지가 자신을 결과적으로 이런 사지까지 몰리게 만들었는가.
어떻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란 말인가.
"왜 네가 아빠 목소리를 내는데?"
"최초로 교신한 자의 정보를 토대로, 우리는 이곳 세계에 맞춰 정보체를 구축해나갔다. 그 흔적일 것이다."
요컨대 처음 들은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아버지 목소리이기에 이를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유진은 그렇게 이해했다.
"그럼, 왜 아빠가 나한테…?"
"그 자가 전하더군. 너를 찾아가면 답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 협력하며 너를 비호해 달라고."
"협력?"
"우리는 여태껏 너와의 소통을 시도해왔다. 네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부름에 답한 덕분에, 대원들은 차례차례로 이 영역을 관측할 수가 있었다."
"그럼 내가 억지로 너네를 꺼내려다 큰일날 뻔했던 것도, 다 그것 때문이라고?"
"그렇게 되겠군. 그 과정에서 너를 위험에 빠뜨린 건 진심으로 사과하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화내야 될 상황인지 아닌지조차 혼란스럽다.
무기질적인 말투로 덤덤히 말을 꺼내고 있을 뿐이기에 사과라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조차 없다.
"…그래. 관측이라고 했었지. 그럼 여태까지 뭘 알아냈는데?"
"관측 결과, 이 세계의 성질과는 명백히 이질적인 영역이 침투해있다는 정보를 도출했다."
"이질적인 영역?"
"하나의 우주를 부의 에너지로 뒤덮는 개념이, 존재가, 차원의 틈새에서 표류하고 있다. 그것은 차원을 구성하는 세계에 몰래 접근하여 그 특성을 해석하고, 끝내는 우주를 무(無)로 만들고자 침범하는 만행을 지속해왔다."
사용하는 단어가 쓸데없이 복잡하다. 사전에서 접하는 간결하고 짧은 단어를 조합해 가까스로 뜻이 통하는 문장을 만들어 전하려 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알아듣기에는 더욱 복잡해져버렸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주 질서의 수호. 그러니 필요 이상의 붕괴를 초래하는 침략자의 만행을 저지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공간을 만들어낸 녀석이 너네 적이라는 거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기왕이면 그냥 '그렇다'고 시원하게 답해줬으면 한다.
아무래도 유진은 우주 스케일의 영웅담에 본의 아니게 휘말린 모양이었다.
헌데 따지고 보면 다른 우주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 또한 '침략자'가 아닌가.
"문제는, 그것은 일방적으로 세계를 무로 만들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그 세계에 있는 사념체의 방식을 따른다. 우리는 일종의 기생 본능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슨 뜻이야?"
"그 세계의 생물로서 행동하며 그 세계의 파멸을 꾸민다는 것이다."
진작에 이렇게 말해주면 좋잖아, 라고 유진은 속으로 딴지를 건다.
"생물로서 행동한다고?"
"명확히 해명된 바는 아니다. 존재가, 그것도 의지를 가진 객체가 성질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그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 결과에 이르느냐다. 지성체의 사고가 활발할 수록 그 행동양식을 특정하기가 어렵다. 교신자의 단서를 통해 어느 정도 양식을 파악해내는 것까지 성공했지만, 동시에 의문의 결과를 검출했지."
"뭔데?"
"그 부의 에너지가 네게서 다량으로 검출되고 있는 것이다."
유진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위저드의 의혹이 사실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설마, 내가 그 침략자라는 거야?"
"아니. 너 자신은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무슨 뜻이야?"
"대원들이 처음 너를 접촉했을 때에는 그런 에너지 반응이 없었으니까. 전적으로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적 요인……."
짐작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유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스트랩을 뜯어버릴 기세로 디젠을 낚아채올렸다.
"역시 이것 때문이잖아. 아니, 애초에 그 놈이 이딴 걸 주니까……"
"하지만, 그 에너지 반응이 있었기에 이 만남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
"뭐?"
"이 접촉이 성사될 수 있었던 환경은 그 자가 마련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그 인과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우연의 결과인가. 아니면, 침략자는 우리의 접근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이미 이들의 대책도 되어있을지 모른다는 뜻일 터.
늦었다. 너무나도 늦었다.
이들도 자신처럼 꼭두각시 마냥 농락당하는 신세일 가능성을 제쳐둘 수가 없다. 그럼 기껏 찾아온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얼마나 무능하기 짝이 없는 집단인가.
"보아하니, 너는 우리조차 모르던 사이에 침략자의 의도에 휘말려 시련 한가운데에 처해있는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 포함해서 말이지. 너무 늦어버렸군. 다시 한 번, 너를 위기에 빠뜨린 것에 사과하는 바이다."
"……."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사과를 연발해대는가. 벌써 몇 번째인가.
왜 사과가 필요할 짓 따위를 하는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그 사과를 아버지의 목소리로 하고 있단 말인가.
따지고 싶은 말이 조목조목 떠오르고 있음에도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그래. 그러니까, 너네 적이, 어쩄든 지금 벌어지는 웃기지도 않은 게임을 시키는 범인이라는 거지?"
"현 상황에서는 그렇게 해석된다."
"그게 내가 아닌 딴 사람 몸뚱아리를 차지하는 거고. 그 새끼를 찾으면 이 게임이 끝나는 거고."
"그렇게 해석된다."
유진은 떨리는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구겨진 미간을 펼치듯 잠시 이마를 짚으며 쓸어올렸다.
"그래, 협력할게."
바닷물로 갈증을 해소하려는 것처럼, 당장 분노를 터뜨려봤자 더 큰 분노를 표출하려는 충동에 휩싸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무의미해질 뿐인 감정 소모에 몰두한 나머지 지금 이 순간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간, 정말로 자신의 앞길을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밖에.
"같이 찾아보자. 왜 나한테 지랄인지, 뭔 생각으로 너네들 만나는 자리까지 챙겨줬는지. 무슨 생각인 건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머리가 터지겠거든. 그리고 너네가 지켜준댔으니까, 서로 잘 좀 해보자."
이들간의 만남이 지체되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조금 더 머리를 싸매서 이들을 빠르게 불러낼 수 있었더라면, 이들도 빠르게 자신을 돕고 해결해줄 길을 찾아나갔을 것이다. 적어도 이들마저 꼭두각시 놀음을 당하고 있다는 의혹이 필요없었으리라.
그런 반성의 시간이 앞으로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유진은 문득 떠올렸다.
"너의 말대로, 또한 그 자의 부탁대로, 너와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한다. 이 자리에 계약은 완수되었음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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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업로드분은 역시 듀얼로그 없는 노잼 파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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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틀린 것도 아닌... | 23.02.13 14:0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