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은 카드를 확인하고서, 한 번 심호흡.
그 반응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는 트릭스에게 유진이 말하기를.
"'탐욕의 항아리'. 발동시 체인?"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구사일생을 일으켜준 카드가 딱 이 때쯤에 나와주었다.
탐욕. 기사회생에 대한 갈망을 그렇게 부르겠다 해도 유진으로서는 딱히 상관없다.
네이토와의 승부에서도 살아나겠다는 그 집착만큼은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살아가기 위해 이기겠다는 말 만큼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버린 트릭스의 표현이라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탐욕을 위한 몸부림이 보답을 받을 수 있느냐다.
살기 위해 이길 수 있기를 원한다. 그렇게 해서 이 지옥을 빠져나올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럴 시도라도 할 수 있기를 원한다.
"없어. 운이 좋네."
"그럼 '레드레이어', '그린레이어', '화이트레이어', '알팡', 그리고 '매그너라이거'를 되돌리고 2장 드로우."
[서문유진: 패 3장]
문제는 이 다음.
눈을 가린 상태로 그저 막연히 발을 내딛는 기분이다. 과연 그 끝이 낭떠러지일지. 또다른 길이 되어줄지.
유진은 잠시 숨을 참으며 2장의 패를 뽑아들었다.
카드의 확인을 마친 유진은, 망설임 없이 하나를 필드로 꺼낸다.
"'정신조작'. 이번에도 체인 없냐?"
없어라. 제발 없어라. 그렇게 속으로 되뇌이며 여유를 가장한다.
"이번에도 없어."
그 말에 유진이 희미하게 내쉰 한숨을 눈치챘을까.
순간 '시트리스'의 미소가 사라지고 멍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리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스르르 이동하더니, 유진의 근처에 다다라서야 뒤를 돌아 원래 주인을 마주본다.
"안 됐네. 함정 효과가 아니라서. 그럼 2장째 '명추리'. 레벨 대봐."
"…5."
레벨 5의 '레드레이어'를 저격하려는 모양이다.
발동이 성사되면서 이번에도 덱에서 카드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가 사라진다.
이번엔 제외되는 일 없이 제대로 묘지로 안착해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당첨된 몬스터가 필드로 나타난다.
[증식의 G: 곤충족 / 땅 / 레벨 2 / ATK 500 / 200]
"……."
바닥으로 번져나가는 기분나쁜 검은 그림자 가운데에서 수많은 안광이 번뜩인다.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운이 좋은 게 정말로 맞는지 유진은 한 순간 고민할 뻔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친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운이 좋은 것이 맞으니까.
"어쨌든 이걸로 충분해. 묘지로 간 '초량사 레드레이어'의 ③의 효과."
"그건 안 되겠는데. '무덤 홀'을 발동할게."
[서문유진: LP 4900 → 2900]
"큭!"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충격에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세라'의 ②의 효과로, 이번엔 '카즈라의 충혹마'를 덱에서 특수 소환."
[카즈라의 충혹마: 식물족 / 땅 / 레벨 4 / ATK 300 / DEF 2000]
추가 소재를 확보하는 것에는 실패. 더구나 상대 몬스터가 하나 더 늘었다. 세트 카드 역시 1장 더 남아있다.
이 상황에서 함정 카드가 발동하면 다른 '충혹마'를 불러낼 수 있는 '카즈라'를 꺼냈다는 것은, 필시 이번 턴에 함정 카드가 틀림없을 그 세트 카드가 발동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호흡이 더 거칠어진다.
한 발짝 한 발짝 낭떠러지에 가까워져가는 기분에 피부가 더욱 곤두선다.
하지만 겁먹어서는 안 된다. 함부로 나아가다 끝장나버릴 가능성이 있더라도, 이대로 멈췄다간 반드시 끝장이 될 것이다.
그러니 유진은 이번에도 멈추지 않기로 한다. 또다시 찾아오는 고양감을 원동력 삼으며.
"간다, 소환 조건은 땅 속성 몬스터 2장. 난 '시트리스'와 '증식의 G'를 링크 마커에 세트! 링크 2 'ET레인저 지오옐로'를 링크 소환!"
[ET레인저 지오옐로: 사이킥족 / 땅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욱신.
'ET레인저'를 불러내면서 여지없이 고동이 찾아온다. 더 뚜렷해진 고동은 슬슬 고통에 더 가까운 수준이었다.
마치 온몸의 신경을 전류가 지져버리며 지나가는 듯한,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저릿하고도 짜릿한 감각.
카드를 집으려는 팔이 경련마저 일으키는 것 같다.
'또야…. 대체 뭐야, 이건?'
유진은 이쯤에서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역시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정말로 무언가가 있다.
애초부터 아버지가 유언이나 다름없는 메시지와 함께 남긴, 데이터베이스상에서도 찾아낼 수 없는 히든 카드가 절대로 평범한 카드일리는 없었다.
자신은 분명 이 카드들에 홀려있다. 디젠과 비슷한 원리로, 어쩌면 더 강렬하게 자신을 사로잡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확신했다. 이 카드들은 분명 승리의 지름길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자신이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어찌 됐든 기분나쁜 표정으로 일관하던 소녀를 드디어 제물로 삼음으로서 해치우는 데에 성공했다. 일단 고동을 억누르고서, 유진은 의도한 전개를 막힘없이 계속해나간다.
"체인 아직 없는 거지? 그럼 '지오옐로'의 ①의 효과로, 덱에서 레벨 4 이하의 땅 속성이 아닌 몬스터를 특수 소환한다. '초량사 블루레이어'!"
[초량사 블루레이어: 사이킥족 / 물 / 레벨 3 / ATK 1200 / DEF 2000]
"특수 소환한 '블루레이어'의 ②의 효과로 이번엔 '그린레이어'를 서치. 그리고 '그린레이어'를 소환. 이번에도 ①의 효과로 패의 '알팡'도 특수 소환."
[초량사 그린레이어: 마법사족 / 바람 / 레벨 4 / ATK 1600 / DEF 1400]
[초량요정 알팡: 천사족 / 빛 / 레벨 1 / ATK 0 / DEF 2000]
"다음 조건은 '초량'을 포함하는 효과 몬스터 2장 이상. '지오옐로'와 '그린레이어'를 소재로, 링크 3 '진초량기신왕 블래스터 매그너'를 링크 소환."
[진초량기신왕 블래스터 매그너: 기계족 / 빛 / LINK-3 / ATK 2500 / 링크 마커 ↙↓↘]
"……."
"계속해서 '알팡'의 효과로 자기 레벨을 '블루레이어'의 레벨 3으로 통일. '알팡'과 '블루레이어'를 오버레이, '초량기수 그랜펄스'를 엑시즈 소환."
[초량기수 그랜펄스: 기계족 / 물 / 랭크 3 / ATK 1800 / DEF 2800 / ORU 2]
"자기 링크 앞에 '초량' 엑시즈 몬스터 나왔으니까, '블래스터 매그너'의 ②의 효과로 1장 드로우. 그리고 '그랜펄스'의 오버레이 유닛을 하나 사용해서, 네가 세트한 마법이나 함정 하나를 파괴한다.'
[초량기수 그랜펄스: ORU 2 → 1]
[서문유진: 패 1장]
파괴한 카드는 '광혹의 함정 속으로'. 상대가 특수 소환에 성공한 턴에 공격력 2000 이상의 몬스터를 파괴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조건에 부합하는 '블래스터 매그너'에게는 파괴 내성 효과가 있었던 덕분에 이 효과를 맞는 일 없이 넘어간 것이다.
"배틀, '블래스터 매그너'로 '케로베로스', 그리고 '그랜펄스'로 '세라'를 공격!"
[트릭스: LP 7900 → 6000]
두 기의 로봇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적진의 몬스터들을 각개격파한다.
체급 차이가 한참 나는 적 몬스터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는 거대로봇의 광경도 훈훈하지만, 자신의 몸뚱아리를 열렬히 깨물었던 '세라'가 '그랜펄스'의 어뢰 한 방에 폭파되는 광경은 통쾌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래봤자 다음 턴이면 트릭스의 필드는 하나둘씩 다시 채워지리라. 이제 또다시 걱정할 처지가 되면서 유진은 또다시 한숨부터 나온다.
"턴 엔드야."
"그럼 내 턴."
[트릭스: 패 2장]
[서문유진: 패 1장]
"'카즈라'를 소재로 2장째 '세라'를 링크 소환."
[세라의 충혹마: 식물족 / 땅 / LINK-1 / ATK 800 / 링크 마커 ↓]
"그리고 '란카의 충혹마'를 소환."
[란카의 충혹마: 곤충족 / 땅 / 랭크 4 / ATK 1500 / DEF 1300]
"효과로 덱에 있는 2장째 '키노의 충혹마'를 패로 가져올게. '충혹마'의 효과가 발동했으니까 '세라'의 효과로 '홀'이나 '함정 속으로' 1장을 또 세트."
"그럼 '그랜펄스'의 ② 효과를 사용. 방금 뒤집은 카드를 파괴한다."
"안 돼. '키노'의 ①의 효과를 체인. '충혹마'가 필드에 있으니까 '키노'를 바로 특수 소환할게."
[초량기수 그랜펄스: ORU 1 → 0]
[키노의 충혹마: 곤충족 / 땅 / 랭크 4 / ATK 1300 / DEF 1500]
"'키노'의 ③의 효과 덕분에 내가 세트한 마법이나 함정은 1턴에 1번만 파괴를 피해갈 수 있어."
"쳇."
파란 돌고래 형상의 잠수정이 공격시와 마찬가지로 중앙에 설치된 어뢰를 발사하지만, 목표물인 세트 카드에 도달하기도 전에 정체불명의 그물이 가로막는다. 결국 어뢰가 그 자리에서 터지며 그물을 대신 갈기갈기 흐트려놓았다.
물방울 모양 비즈를 여러 개 엮어놓은 듯한 그물의 정체는, 희푸르게 차려입은 소녀 '키노'가 자신의 본체로부터 내뿜은 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우박처럼 쏟아져내리는 비즈를 개의치 않는 그녀의 음침한 미소는, 덫에서 빠져나가고자 발버둥치는 유진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럼 '란카'와 '키노'를 오버레이. 2장째 '시트리스'를 엑시즈 소환."
[시트리스의 충혹마: 식물족 / 땅 / 랭크 4 / ATK 2500 / DEF 300 / ORU 2]
그 얄미운 미소가 물러나고 다시 나타난 소녀 역시 헤벌죽 미소짓고 있다. 뺨 한쪽에 흘리는 눈물은 그대로 놔둔 채.
"또 나왔어…."
"이런 좋은 카드를 하나만 쓰는 건 아깝잖아."
유진으로서는 역시 짜증날 만큼 반박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시트리스'의 오버레이 유닛을 제거해서 ②의 효과 사용. 덱에서 2장째 '티오'를 추가. 그리고 '죽은 자의 소생'. 묘지에서 '아티푸스'를 되살릴게."
[아티푸스의 충혹마: 곤충족 / 땅 / LINK-3 / ATK 1800 → 2800 / 링크 마커 ←↓→]
[시트리스의 충혹마: ATK 2500 → 3500]
[세라의 충혹마: ATK 800 → 1800]
"'아티푸스'의 ③의 효과. 내 필드의 곤충족이나 식물족 몬스터 수까지 상대 카드의 효과를 무효로 할 수 있어."
이전 턴의 상황이 재현되어 가고 있다. 한 번 더 총공격을 맞는 순간 정말로 빈사 상태에 빠질 것이다.
막아야 한다. 유진은 유일하게 남은 패를 꺼내들었다.
"패에서 '이펙트 뵐러'의 효과 발동. '아티푸스'의 효과는 무효야."
[아티푸스의 충혹마: ATK 2800 → 1800]
[시트리스의 충혹마: ATK 3500 → 2500]
[세라의 충혹마: ATK 1800 → 800]
만에 하나 '무덤 홀'을 또 뒤집었다고 해도, 당장은 발동이 불가능하니 결론적으로 '이펙트 뵐러'의 기습을 막을 수단은 없다.
하는 수 없이 '충혹마'들의 전투력이 또다시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었다.
"그럼 배틀. '시트리스'로 '그랜펄스'를 공격."
또다시 '시트리스'가 불러낸 거대 제비꽃이 솟아나 '그랜펄스'를 집어삼킨다.
[서문유진: LP 2900 → 2200]
"'그랜펄스'가 파괴되는 순간 '블래스터 매그너'의 ③의 효과 발동! 그와 원래 속성이 같은 '초량' 몬스터를 덱에서 특수 소환한다. '그랜펄스'는 물 속성. 따라서 3장째 '블루레이어'를 수비 표시로 특수 소환!"
[초량사 블루레이어: 사이킥족 / 물 / 레벨 3 / ATK 1200 / DEF 2000]
"'블루레이어'의 효과로 이번엔 2장째 '화이트레이어'를 추가."
"용케 피해갔구나. 이번에도."
"계속 피할 거야. 얼마든지 "
트릭스는 충분히 내다볼 수 있었다. 저 당당한 척 하는 태도 너머로 채 숨기지 못한 불안과 공포를.
그러니 별다른 온도차를 느낄 수 없는 태도로 턴을 넘겨준다.
"할 수 없네. 턴 엔드야."
[시트리스의 충혹마: ATK 2500 → 3500]
[아티푸스의 충혹마: ATK 1800 → 2800]
[세라의 충혹마: ATK 800 → 1800]
"또 내 턴이네."
[서문유진: 패 2장]
[트릭스: 패 1장]
또다시 리버스 카드가 버티고 있다. 이번엔 1장이지만, 이번 턴도 역시 함정 지옥이라는 가시밭길을 건너야만 한다.
유진은 제발 이번으로 끝이 아니길 빌며 패를 주시했다.
그리고, 저번 턴의 기적이 재현되는 것을 보며 자신의 행운을 좀 더 믿어보기로 하는 것이었다.
"좋았어, 2장째 '탐욕의 항아리'다! 이번엔 '지오옐로', '레드레이어', '블루레이어', '화이트레이어', 그리고 '그랜펄스'를 되돌리고 2장 드로우."
[서문유진: 패 3장]
계속 길을 열어나가려면 거슬리는 장애물을 하나씩 치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한 패가 마련되어 주었다.
'마법 카드 '달여신의 촉(아르테미트 슬레이)'. 엑스트라 덱에서 몬스터 1장을 묘지로 보내면, 그와 같은 종류의 상대 몬스터 1마리를 덱으로 되돌릴 수가 있어. '초량기수 에어로보로스'를 묘지로 보내고, 같은 엑시즈 몬스터인 '시트리스'를 바운스!"
발동된 카드로부터 발사된 황금빛 화살은, 크기를 보자면 차라리 창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커다란 한 줄기 화살에 직격당한 '시트리스'가 이번에도 무력하게 필드에서 퇴장한다.
'아르테미트 슬레이'는 몬스터 효과로 체인이 불가능하지만 마법이나 함정 효과라면 얄짤없다. 그럼에도 체인을 걸어오지는 않았기에 트릭스가 깔아놓은 카드는 여전히 건재하다.
십중팔구 특수 소환을 하는 순간 제 입을 벌려올 가능성이 높다. 그 전에 하나라도 더 치워버릴 필요가 있다.
"속공 마법 '사이킥 싸이크론'. 세트한 카드 하나를 지정하고, 카드의 종류를 선언한 다음에 파괴한다. 그걸 맞추면 새로 1장 뽑을 수 있어. 난 함정 카드를 선언."
파괴된 카드는 또다시 '나락의 함정 속으로'. 예상대로 특수 소환 견제 카드다.
어차피 '세라'의 효과로 깔아놓는 카드는 일반 함정으로 한정되어 있으니 맞추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묘지에 있는 '초량필살 알팡볼'의 효과. 자신과 묘지의 '알팡'을 제외하고, 덱에서 필드 마법 '초량기함 매그너캐리어'를 발동한다!"
'명추리'의 효과로 덱에서 갈려나가 계속 잠들어있던 카드가 드디어 역할을 수행해낼 때가 찾아왔다.
만에 하나 '무덤 홀'이 깔려있다 해도, 그 카드가 간섭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몬스터의 효과. 마법 카드인 '알팡볼'의 효과에는 끼어들지 못할 테니 무사히 '초량'들의 기지를 불러내는 데에 성공했다.
"'매그너캐리어'의 ①의 효과. 패를 1장 버리고, 필드의 '초량사' 하나를 소재로 그와 같은 속성의 '초량기수'를 엑시즈 소환할 수 있어. '그랜펄스'를 다시 출격. 엑시즈 소환에 성공했으니까 '블래스터 매그너'의 효과로 드로우. 그리고 묘지로 간 '화이트레이어'의 효과로 묘지의 '알팡'을 회수."
[초량기수 그랜펄스: 기계족 / 물 / 랭크 3 / ATK 1800 / DEF 2800 / ORU 1]
[서문유진: 패 2장]
'그리고 '매그너캐리어'의 ②의 효과. 자신을 묘지로 보내고 새로운 몬스터를 불러낸다. 나는 묘지의 '라스터렉스', '에어로보로스', 그리고 필드의 '그랜펄스'를 슈퍼 퀀텀 디멘션!"'
'매그너캐리어'의 갑문이 열리고서 엑스트라 덱으로 귀환했던 '그랜펄스'가 재등장.
그 다음으로는 진작에 묘지로 가있었을 '초량기수'들이 한번에 뛰쳐나와 땅을 찍어버릴 기세로 강하한다. 그 중 '라스터렉스'의 형체는 미처 출발하지 못한 빨간 기체 '매그너라이거'의 것으로 모습을 바꿔나갔다.
뒤이은 출격에 발맞추며 먼저 지상에 내려온 '그랜펄스'가 이륙한다.
세 기의 '초량기수'들의 고도가 겹쳐지는 순간, 각자의 파츠가 스파크를 동반하는 변형 과정을 통해 합체를 시작한다.
그렇게 새로운 모습의 거대로봇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초량합체, '초량기신왕 그레이트 매그너스'!"
[초량기신왕 그레이트 매그너스: 기계족 / 빛 / 랭크 12 / ATK 3600 / DEF 3200 / ORU 4]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은 '초량'의 대형급 몬스터를 대회 중에 연속으로 불러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 사실에 유진은 새삼 자신의 운을 체감한다.
부디 이 행운이 승리로까지 이어지기를 빌었다.
'그레이트 매그너스'의 효과라면 전투 외의 방법으로도 카드를 치워버릴 수 있다.
하지만 오버레이 유닛을 4개 이상 소지하고 있는 '그레이트 매그너스'는 현재 '초량' 외의 다른 카드의 효과를 받지 않는 내성 능력을 얻은 상태. 차라리 전투로 직접 치워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유진은 주저없이 배틀 페이즈로 이행한다.
"배틀, 먼저 '그레이트 매그너스'로 '아티푸스'를 공격!"
거대로봇이 허공으로부터 나타난 초대형 검을 양손에 쥐고 전방으로 휘두른다. 그 자비없는 참격의 궤도에 위치한 '아티푸스'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트릭스: LP 6000 → 5200]
[세라의 충혹마: ATK 1800 → 800]
참격의 후폭풍에 주인인 트릭스마저 몇발짝 뒤로 밀려난다.
동시에 전투력을 증강해주던 몬스터가 사라지면서, 유일하게 남은 최전방의 '세라'는 더더욱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기회를 유진이 놓칠리는 없었다.
"이어서 '블래스터 매그너'로 '세라'를 공격!"
[트릭스: LP 5200 → 3500]
또다른 로봇이 이번에는 들고 있는 라이플을 통해 빔을 발사한다. 그 총격에 '세라' 역시 소멸.
"카드 1장을 세트. 턴 엔드야."
"…내 턴, 드로우."
[트릭스: 패 2장]
[서문유진: 패 1장]
눈과 귀를 비롯한 감각기관이 어지러울 정도의 충격을 거쳐간 끝에, 트릭스에게 남은 것은 비어버린 필드와 두 장의 패.
트릭스 정도의 듀얼리스트라면 딱히 모자라지만도 않은 패가 되어주겠지만, 함정으로 농락을 시도하기는 커녕, 당장 카드를 꺼내지 못한다면 방금 전까지 간접적으로 다가왔던 충격이 자신에게로 향할 것이다. 압도적인 질량의 몬스터들에게 짓밟혀 패배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 처지임에도, 유일하게 남은 카드를 바라보는 그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태연하다.
트릭스는 그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취소할게. 아까 의심했던 거."
유진은 방금 들은 것을 의심할 뻔했다.
"뭔데? 설마 너도 목숨 구걸하게?"
"아니."
트릭스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확신했거든. 역시 넌 약한 애가 아니야. 내가 이끌린 냄새는 헛것이 아니었어."
"이제 와서 뭔 말이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는데, 아까 한 말은 진심이야. 난 아직도 내가 강하다고 도저히 생각 못하겠다고."
"아니, 너 자신이 못 깨달았을 뿐인 거야. 가진 건 운 뿐인 것 같아도, 자기를 믿고 주어진 기회를 붙잡을 용기가 너한테 있어. 난 그것도 힘이라고 믿거든."
갑자기 자신을 비행기 태우는 이유를 모르겠으니 쑥쓰럽기는 커녕 불쾌해진다.
유진은 솔직한 감상을 대며 튕겼다.
"너같은 애한테 칭찬받아도 하나도 안 기쁘다고."
"기쁘라고 한 얘기 아냐."
"그럼 뭔데?"
"재확인한 것 뿐이야. 네가 그만한 에너지 덩어리를 가질 인재라는 걸. 역시 놓치면 안 될 사냥감이야."
여전히 초점을 알아보기 힘든 무표정하고 맹한 얼굴이지만, 그 눈빛은 전보다 힘이 들어가있는 것이 보인다.
그럼에도 그 깊은 호수같은 눈동자는 캄캄하다. 빛조차 함부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
"떨어뜨리려면 전력을 다해야겠지. 그 전에 한동안 어설픈 사냥감에 안주해온 걸 반성해야겠어."
이 자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 진심일지 유진은 알 수 없다.
적어도, 마음이 약하네 강하네를 따질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는 있었다.
아무래도 이 행위에 이겨오는 것을 의무감이나 신념 따위로 여기고 있는 것만 같다.
꺼림칙하다.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의 행동 양식을 배워나가고 실천하는 꼴을 보는 듯한, 그런 이질감이 들었다.
그러니 유진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리고 그 역시 그런 목숨을 건 어둠의 듀얼리스트라는 것을 확인한 시점부터 들어온 의문을.
더 나아가 그 동류라는 자들에 대한 의문 역시.
"대체…"
"응?"
"대체 뭔 일이 있어야 그렇게까지 되는 건데?"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유진은 답답하다는 듯이 재촉한다.
"진짜, 진심 이해가 안 가거든? 죽을 뻔한 일을 겪고 나면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게 사람 생각 아냐? 그걸 즐겁다고 매달린다고? 왜?"
"…이기면 살아갈 힘이 생기니까."
이전 문답에도 나왔던 발언이다. 유진은 그것에도 궁금한 요소가 있던 참이다.
"힘?"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이기기만 한다면 많은 걸 얻을 수 있어. 그걸로 삶에 조금씩 의미가 생겨나는 거야."
아무리 봐도 힘이라는 것과 거리가 있어보이는 이 아이에게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야 유진은 진작에 확인했다.
그런 힘이 다른 어딘가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그 힘에 도취되어 있다면, 더한 힘을 원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해는 납득과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걸 굳이 이런 걸로 얻어야 돼?"
"아까도 말했잖아. 나한테는 이 선택 뿐이었어."
"무슨 뜻이야?"
"이런 세계라도 알지 못했으면, 아무것도 없는 내 삶은 진작에 끝나버렸을 거야."
트릭스는 본인의 머리 장식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간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었던 나한테 기회를 준 건 결투(듀얼)야. 어쩌다 한 번 이긴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 그 한 번 한 번의 순간을 계속 얻을 수 있으니까 내가 살아있는 거야."
머리 장식을 놓은 손은 다시금 패의 카드를 나눠잡는다.
"응. 거기서 얻은 힘이야말로 지금 내 삶의 전부. 내 기쁨이 되는 거야."
"그렇게 사는 게, 진짜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대답 못하겠네. 다른 선택을 망설일 생각은 없으니까. 달콤한 결과만 생각하기로 했거든."
유진은 조금씩 이 자를 이해해나간다.
고집불통이다. 이기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구제할 수 없는 겁쟁이다.
토우키가 인정을 최대한 발휘하며 말을 건네봐도 뭘 어쩔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대체 뭣 때문에 그 지경이 됐는지를 물었음에도, 그 대답을 들었음에도 마음 속 무엇 하나 풀린 것이 없다.
쓰디쓴 것을 입에 머금은 것처럼 유진의 입이 오므려진다.
"나더러 뼛속까지 약해빠진 애라고 했었지? 인정할게. 지금의 나라면 부정하지 못하니까. 개인적으로 나도, 그 때하고 딱히 바뀐 건 없다고 생각해."
소곤소곤한 목소리가 자아내는 약한 소리는 유진에게 어떤 동정심도 안겨주지 못한다.
하지만 부글부글 끓고만 있던 머리를 더더욱 복잡하게 꼬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정할 수 있을 때까지 멈출 생각은 없어. 나만의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단 말이지."
"그런 나를 부정하고 싶으면 이겨. 아까도 말했듯이."
이번에도 문답의 결과는 원점으로. 즉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살아남고 싶다면 때려부숴야 마땅할 적이라는 결론만이 주어진다.
그런 결론을, 이 아이도 느낀 적이 있었으리라. 살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 싸우기 위해 산다는 것으로 변해버린 지금도 그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턴이었지. 특수 소환된 몬스터가 네 필드에만 있으니까 '역경의 패'를 발동. 2장 드로우. '티오'를 소환."
[티오의 충혹마: 식물족 / 땅 / 레벨 4 / ATK 1700 / DEF 1100]
[트릭스: 패 2장]
"효과로 묘지의 '트리온'을…"
"체인해서 '그레이트 매그너스'의 ①의 효과! '티오를 덱으로 되돌린다."
[초량기신왕 그레이트 매그너스: ORU 4 → 3]
주위를 공전하던 네 개의 오버레이 유닛 중 하나를 꺼지고, '그레이트 매그너스'가 양 주먹을 뻗는다. 가스레인지가 점화하듯 발생한 스파크를 시작으로 빔 한 줄기가 그 끝에서 뻗어나갔다. 곧 빔의 궤도상에 위치한 '티오'가 증발되듯이 사라진다.
소환권을 써서 전개를 시작하려는 즈음에 그 싹을 밟아준다면, 상대의 승기도 그대로 꺾일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유진은 잠깐이나마 간과한 것이다. 트릭스의 아직 패가 2장 더 남아있었음을.
"이걸로 '그레이트 매그너스'의 오버레이 유닛은 세 개."
"……!"
'그레이트 매그너스'는 엑시즈 소재를 4개 이상 지니고 있다면 '초량' 카드 이외의 효과 내성을 얻는 반 무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만, 이 순간 하나를 소진하면서 그 혜택을 잃어버렸다.
만약 이것이 노림수였다면, 하는 짐작에 유진의 긴장이 더 깊어진다.
"상대 몬스터 효과가 발동됐으니까, '삼전의 재'를 발동. 두번째 효과를 써서 2장을 드로우."
[트릭스: 패 3장]
"나도 모처럼 찾아온 운을 놓치지 않아. 아직 끝나지 않은 거야."
패에 새롭게 잡힌 카드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트릭스는, 그 중 한 장을 먼저 빼들었다.
"묘지에서 곤충족이나 식물족을 3장 제외. 그리고 '수관의 갑제 베어그램'을 특수 소환."
[수관의 갑제 베어그램: 곤충족 / 땅 / 레벨 9 / ATK 3400 / DEF 2800]
곧, 새롭게 나타난 몬스터가 등에 붙은 날개를 펼치며 거대한 몸뚱아리를 띄웠다.
얼핏 그 모습은 전신을 철갑으로 무장한 반인반마의 전사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몸 마디마디가 곤충 특유의 피막과 절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철갑이나 다름없는 반들거리고도 견고한 껍데기가 웬만한 공격으로도 뚫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세우는 듯 하다.
한 손에 들린 그 몸뚱아리만한 날붙이 무기는, 둔기로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육중해보인다. 그 몸뚱아리를 띄우기 위해 쉴새없이 떨리는 반투명한 날개는 장군의 망토처럼 그 존재감을 알렸다.
여린 소녀의 모습을 한 '충혹마'와는 명백히 느낌이 다른, 대놓고 힘을 과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베어그램'의 ②의 효과. 곤충족이나 식물족이 아닌 몬스터를 전부 파괴한다."
내성을 잃은 '그레이트 매그너스'는 저항하지 못하고 격파된다.
'그레이트 매그너스'는 본디 파괴되었다고 해도 묘지의 '초량기수' 엑시즈 몬스터를 세 종류 되살리는 효과가 있었으나, 소재 중 하나로 쓰였던 '에어로보로스'는 정규 엑시즈 소환으로 불러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생 제한 조건을 채우지 못했다.
즉, 묘지에 '딱 세 종류'가 갖춰져 있음에도 결국 세 마리 다 부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저절로 남은 자리에는 먼지만이 떠돌 뿐.
그를 대신하듯 나머지 한 기 '블래스터 매그너'가 꿋꿋이 필드를 버텼다.
"'블래스터 매그너'는 상대 효과로 파괴 못한다고."
"알아. 하지만 효과를 사용한 '베어그램'은 어차피 직접 공격을 못해. 차라리 깔끔하게 사라지는 게 나았을 텐데."
"…어쨌든 '초량' 엑시즈 몬스터가 파괴됐으니까, '블래스터 매그너'의 ③의 효과. '그레이트 매그너스'와 속성이 같은 '화이트레이어'를 덱에서 특수 소환."
[초량사 화이트레이어: 천사족 / 빛 / 레벨 7 / ATK 2400 / DEF 2400]
"배틀. '베어그램'으로 '블래스터 매그너'를 공격."
[서문유진: LP 2200 → 1300]
"전투로 파괴된 순간 속공 마법 '초량요청 알팡콜' 발동! 엑스트라 덱에서 '초량기수' 하나, 그리고 그 몬스터와 관련 있는 '초량사' 몬스터 하나를 덱에서 특수 소환한다."
[초량기수 매그너라이거: 기계족 / 화염 / 랭크 5 / ATK 2600 / DEF 2000 / ORU 0]
[초량사 레드레이어: 전사족 / 화염 / 레벨 5 / ATK 2000 / DEF 800]
"카드 1장을 세트. 그리고 패에 있는 '천옥의 왕'을 공개할게. 이 상태에서는 세트된 카드가 파괴되지 않아. 그럼 턴 엔드야."
"…내 턴이야."
[서문유진: 패 2장]
[트릭스: 패 0장]
'천옥의 왕'이 수호하는 카드는 어디까지나 세트된 카드 뿐. 트릭스의 필드에 당당히 버티고 있는 몬스터까지 책임져주지는 않는다.
"'매그너라이거'의 ③의 효과로, 필드의 '레드레이어'를 오버레이 유닛으로 변환."
[초량기수 매그너라이거: ORU 0 → 1]
"그리고 '매그너라이거'의 소재를 하나 사용해서 ②의 효과 발동."
"체인해서 함정 카드, '천룡설옥'을 발동. 네 묘지에 있는 '그레이트 매그너스'를 효과를 무효로 하고 특수 소환."
"이런…!"
하지만 그걸 해치우려는 시도마저, 이미 주둥이를 벌린 함정을 틀어막기에는 한발 늦은 모양이다.
'베어그램'에 굴복당한 '그레이트 매그너스'가 배신이라도 한 듯이 트릭스의 필드에 다시 기동한다.
"그리고 각자의 필드에서 종족이 같은 몬스터를 1장씩 제외해야 돼."
"그 말은…."
"응. 마침 양쪽 필드에 기계족 몬스터가 하나씩 있네."
그렇게 두 몬스터가 마주하는 상황을 기다린 듯, 새로운 효과를 발휘 중인 함정 카드는 필드를 향해 눈보라를 흩뿌린다.
갑작스럽게 살을 에는 추위에 유진이 잠시 팔짱을 끼며 움츠러들 동안, 희뿌옇게 변해가는 시야 속에서 여전히 두 몬스터는 미동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거대한 기체에 서서히 서리가 끼는가 싶더니, 곧 양쪽 다 흰 눈 속에 파묻히면서 작은 은령처럼 변해갔다.
뭉쳐진 눈은 점점 투명해지면서 제각기 한 당어리의 얼음으로 모습을 바꾸어나간다. 저절로 그 안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두 몬스터의 모습이 비춰진다.
이윽고 쩌적하는 둔탁하고도 불안한 소리와 함께 얼음 덩어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금이 얼음 전체를 뒤덮으면서, 곧 인력을 잃은 얼음은 빙산이 붕괴하듯 산산조각나버린다.
얼음 감옥에 갇힌 몬스터 역시 달라붙은 얼음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면서 산산히 부서져나갔다.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뽐내던 질량의 몬스터들이, 최후에는 석영처럼 번쩍이는 가루만이 남아 잠시동안 주위를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세트된 카드가 발동됐으니까, 패에 있는 '천옥의 왕'도 특수 소환."
[천옥의 왕: 암석족 / 어둠 / ATK 3000 / DEF 3000]
예고된 두번째 재앙이 눈보라를 뒤이어 나타난다.
그 충격에 한 순간 땅이 울리면서 유진조차 주저앉을 뻔했다.
정신을 다잡고 서서히 시선을 올리니 거인의 모습이 보인다. 막연히 '거인'이라 표현하기에는, 기존의 인식을 뒤흔들 정도로 남다른 스케일을 자랑했다.
'그레이트 매그너스'조차 능가할지도 모르는 그 몸집으로 발을 한 번만 옮겨도 대지를 뒤집어버릴 기세다. 그 손바닥마저 도시 하나를 가볍게 쥐어올릴 듯한 기백이었다.
그 웅장한 키, 아니, 고도를 알려주듯 상반신이 안개로 덮여있을 정도다.
이런 스케일의 몬스터를 도시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얼핏 본 것 같지만, 그 때도 경외감마저 들 지경이었지만, 그러한 것을 직접 상대해야되는 순간이 찾아오니 유진은 한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압도당했다.
이것이야말로 솔리드 비전의 진정한 위력이리라는 감상에, 유진은 잠시 마른 침을 삼킨다.
"…………"
하지만 이대로 압도당하고만 있어서는 곤란하다. 아직 자신의 턴은 시작되었을 뿐.
그러니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는 자각에 비로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공개된 상태에서 특수 소환됐으니까, 추가로 덱에 있는 함정 카드 1장을 세트해올 수 있어. '무덤 홀'을 덮어놓을게."
"…'레드레이어'가 묘지로 갔으니까 그대로 ③의 효과를 사용. '블루레이어'를 되살린다."
[초량사 블루레이어: 사이킥족 / 물 / 레벨 3 / ATK 1200 / DEF 2000]
"그 ①의 효과로 덱에서 '그린레이어'를 추가. 그리고 소환해서, ①의 효과로 패의 '알팡'도 특수 소환."
[초량사 그린레이어: 마법사족 / 바람 / 레벨 4 / ATK 1600 / DEF 1400]
[초량요정 알팡: 천사족 / 빛 / 레벨 1 / ATK 0 / DEF 2000]
"이번에도 '알팡'를 써서, 내 몬스터들의 레벨을 '화이트레이어'와 같은 7로 통일."
[초량요정 알팡: 레벨 1 → 7]
[초량사 블루레이어: 레벨 3 → 7]
[초량사 그린레이어: 레벨 4 → 7]
"나도 이대로 끝낼 생각 없어. 그러니까 이번 턴에 끝낼 거야."
"…………."
유진이 무거운 표정으로 내뱉는 K.O. 선언을 트릭스는 더이상 반박하지 않는다.
필드에 충분히 전개된 몬스터들이 설득력을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하나의 힘은 트릭스의 몬스터들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이들이 힘을 합쳐 불러낸 새로운 전력이 움직일 것이다.
"레벨 7의 '알팡'과 '블루레이어'를 오버레이, 랭크 7 '환상수기 드래고사크'를 엑시즈 소환!"
[환상수기 드래고사크: 기계족 / 바람 / 랭크 7 / ATK 2600 / DEF 2200 / ORU-2]
하늘을 활공하며 나타난 초대형 수송기가 드래곤처럼 목을 늘리고 입을 벌린다.
여전히 '베어그램'을 이길 수는 없지만 그 수를 마련할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었다.
"'드래고사크'의 오버레이 유닛을 제거하고, 내 필드에 '환상수기 토큰'을 둘 특수 소환."
[환상수기 드래고사크: ORU 2 → 1]
[환상수기 토큰: 기계족 / 바람 / 레벨 3 / ATK 0 / DEF 0]
[환상수기 토큰: 기계족 / 바람 / 레벨 3 / ATK 0 / DEF 0]
"바람 속성의 '환상수기 토큰' 둘을 링크 마커에 세트, 엑스트라 몬스터 존에 링크 2 'ET레인저 에어로그린'을 링크 소환!"
[ET레인저 에어로그린: 사이킥족 / 바람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에어로그린'의 ①의 효과로 덱에서 바람 속성이 아닌 레벨 4 이하의 몬스터를 불러낼 수 있어."
[저택 와라시: 언데드족 / 땅 / 레벨 3 / ATK 0 / DEF 1800]
"먼저 에어로그린'의 효과'! 필드의 카드 1장을 패로 되돌린다. '베어그램'을 바운스!"
[트릭스: 패 1장]
"'에어로그린'과 '저택 와라시'를 소재로, 링크 3 '트로이메어 유니콘'을 링크 소환."
[트로이메어 유니콘: 악마족 / 어둠 / LINK-3 / ATK 2200 / 링크 마커 ←→↓]
"패를 1장 버리고 '유니콘'의 효과를 사용. '천옥의 왕'을 덱으로 되돌린다."
'트로이메어 유니콘'이 하늘을 향해 뿔을 내밀자 광선 한 줄기가 뻗어나간다. 곧, 엄청난 기백으로 땅을 누비던 모습이 거짓말같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제 트릭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번 턴에 사용할 수도 없는 세트 카드 하나.
이내 유진은 방금 전까지 압도되었던 자신이 바보같았음을 깨닫는다. 실체가 없는 신기루에 겁을 먹고 있었던 것만 같다.
크기만 커다란 전력을 해치운다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응. 다 해치웠구나."
이로써 몬스터를 모두 잃은 트릭스는, 그 사실을 태평하게 얘기할 뿐이다.
이 자에게 기회는 더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만회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했음을 알고서도 그 얼굴에는 별다른 두려움이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평안해보이까지 하다.
"네가 이겼네. 역시 네가 옳았나봐."
"……."
왜 두려움에 떨지 않을까.
목숨을 버리기 싫어서 이겨왔을 텐데, 이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왔을 텐데, 왜 꼭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구는 것일까.
유진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걸 증명할 순간도 지금 뿐이야. 나한테 다음 턴이 돌아오면 바로 내 승리가 될지 모르니까. 이번 내 실수를 반성하고 더 철저하게 이겨나가는 내가 있겠지. 내가 옳다는 게 증명되는 셈이야."
그럼에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는 있었다.
이 자의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만에 하나 이런 식으로 위기에서 빠져나온 적이 있다면.
동정을 사서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면.
그러고도 이런 짓을 그만 두지 않은 것이라면.
유진으로서는 용서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설령 이것조차 함정이라 해도, 그걸 피해간다고 다음이 주어질 거라는 보장은 없다. 방금 전까지도 그랬듯이 무시하고 나아가면 된다.
방금 유진의 귀로 들은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하면 돼. 적어도, 나라면 망설이지 않아."
"…그럴 생각이야."
그러니 그 말을 듣지 않을 이유도 없다.
스스로가 강한 게 맞는지 의구심을 품을지라도 더이상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끝내버려야 한다. 토우키를 위해서라도. 하츠카를 위해서라도. 어쩌면 이 자를 위해서라도.
"배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녀린 몸뚱아리를 향해 유진의 몬스터들이 공격을 퍼붓는다.
주인의 지시를 받은 그들에게는 일말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트릭스: LP 3500 → 0]
이윽고 폭발이 트릭스를 덮친다. 쓰고있던 모자가 떨어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충격에 몸을 맡기듯 바닥을 굴렀음에도, 아픔을 호소할 정신조차 없는지 트릭스는 여전히 맹한 눈초리로 중얼거린다.
"끝이네, 이걸로……."
그 말대로다.
어찌 되었든 이걸로 듀얼이 끝났다.
이제 무슨 일이 생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유진은, 여지없이 펜던트가 빛나는 동시에 트릭스에게로 달려든다.
그리고 그 순간 트릭스의 발 밑이 갑자기 뻥 뚤리기 시작한다. 구덩이가 출현하면서 그 한가운데에 있던 몸뚱아리가 곤두박질치려 했다.
"………."
그 손을 붙잡았다. 원수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상대의 가녀린 손을.
손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무게가 팔을 타고 어깨에까지 부담을 주는 것을 느낀다. 유진은 이를 악물며 버티기 시작했다.
자신이 했던 짓을 계속 따라할 심산인가. 당황스러운 것은 트릭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런 의혹을 품은 채 매달린 채로 물어본다.
"…뭐 하는 거야?"
"잔말 말고 올라와!"
이런 녀석을 어떻게든 설득해보려던 토우키를 떠올린다.
설득이라는 것이 통할리가 없음을 이미 깨달았을 텐데 이미 손은 뻗은 뒤였다.
왠지 이대로 떨어지게 내버려둬서는 안 될 것만 같았으니까.
아직 볼 일은 끝나지 않았다. 나눠볼 얘기가 아직 남아 있다. 뭐가 사람을 그 지경으로까지 만드는 건지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따라했을 뿐이라지만 벌칙은 벌칙이야. 졌으니까 받아야지."
저쪽에서 구덩이에 발을 디뎌주는 시도라도 한다면 더 쉽게 끌고 올라올 수 있었겠지만, 팔에는 아무런 힘이 실려있지 않으니 고스란히 그 체중을 유진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구덩이를 향해 몸이 살살 끌리자 유진은 윽박지르며 재족한다.
"개소리 말고, 올라오라니까! 벌이든 뭐든 일단 올라오고 나서 얘기하자."
"개소리?"
더 올라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그 표정은 다시 정색한다.
잠시 섬칫하면서도 유진은 겨우 팔을 끌어당기며 버틴다.
"나한테는 당연한 규칙이야. 상식이고, 법이고, 질서야. 그것만 지키고 살아가기로 했는데, 그것도 못할 만큼 약하면 살 가치가 없어. 그런 나한테는 이것 뿐인 거야."
"그게 이해가 안 된다고! 못 넘어가겠다고는 했어도 이렇게 되라고 생각한 적 없어!"
"위선이라도 부리게?"
"위선? 그냥 남 죽는 꼴 또 보기 싫어! 알겠으면 제발 말 좀 들어먹으라고!"
팔이 빠져나갈 새라 버티고 있자니 주절주절 내뱉는 말을 온전히 들어줄 정신이 없다.
그럼에도 안간힘을 쥐어짜내며 뱉어내는 유진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확신할 필요조차 없다.
"……설마 지금 네가 뭘 한 건지 몰라? 자기 힘도 제대로 모르는 거야?"
"그래, 몰라! 아예 못 다룬다! 왜?"
짜증 섞인 통쾌한 즉답에 어리둥절한 반응이 돌아오는 것도 잠시, 트릭스의 눈매에는 다시금 적의가 깃들기 시작한다.
"……그럼 됐어. 무지에서 나온 실언을 더 듣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런 무지한 사람조차 못 이긴 날 더는 용납할 수가 없어."
"뭐?"
이를 악 물고 버티던 유진은 당황한다. 손에 힘이 더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트릭스는 계속해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걱정 마. 이긴 널 뭐라 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게 두려우면 다음 싸움에서도 이길 궁리나 하면 돼. 무슨 짓을 해서든."
"………어?"
트릭스의 팔 끝에 있는 가녀린 손이 굽으며 힘이 들어간 유진의 손에 닿는다.
땀이 배인 유진의 손에 꽉 쥐여있음에도, 그 온기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 듯 여전히 싸늘했다.
"──잘 봐둬. 나약한 애한테 뭐가 기다리는지. 지면 어떻게 되는지."
"어, 어!?"
그 말과 함께 트릭스는 손에 힘을 준다.
유진의 팔이 꼬집히는 듯 싶더니 살짝 꺾이는 고통이 엄습한다. 그에 반응하며 손에 힘을 푸는 순간, 동시에 바로 전까지 느껴지던 하중이 순식간에 비어버린다.
마치 잡힌 쪽에서 그의 손이 여태껏 잡고 버틸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줬던 것처럼.
그리고서 트릭스가 선보인 최후의 동작은, 무언가를 힘차게 위로 던져드는 것이었다.
자신을 쓰러뜨린 적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라도 되는 듯이. 혹은, 무언가라도 자신과 함께 떨어져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듯이.
그 무언가를 유진이 움찔하며 피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주저않는다. 그 사이, 트릭스의 모습은 몇 초만에 곤두박질치며 눈앞에서 사라져있었다.
부딪힌 충격에 아려오는 뒷꽁무늬에는 그 구멍의 허공이 체감되지 않았다. 그저 딱딱한 바닥에 부딪힌 감촉만이 있을 뿐이다.
유진은 파악할 수 있었다. 구멍은 그를 벌하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개념. 지지 않고서는 체험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퍽 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사람이 추락한 순간을 떠올린 유진이 한 순간 격하게 움츠러들었으나, 이내 서서히 눈을 뜨고서 사람 모습이 없는 것을 깨닫고서야 그나마 마음을 놓았다.
떨어진 것의 정체는 D-패드였다. 바닥에 정통으로 부딪힌 탓인지 액정이 보기좋게 깨져있다.
더이상 쓸 물건이 못 되겠지만, 내부에 수납되어 있던 덱의 카드들은 멀쩡하다. 충분히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리라.
누구의 것인지 추측할 필요는 없었다.
'왜 이걸…?'
하지만 왜 이걸 남겼는지는 추측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자신보다 덱이 소중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추가로 바닥에서 놀고있는 물건 하나가 눈이 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선물. 그것은 떨어지기 전까지 트릭스가 머리에 달고 다니던 핀 하나. 풍뎅이가 그려진 그 금속제 핀의 크기는 차라리 캔 배지에 가깝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디젠……"
패자를 구멍으로 빠뜨렸던 트릭스 본인 역시, 구멍에 빠져야 한다는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바닥에 남아있던 디젠을 유유히 주워들었던 것을 떠올린다.
왜 이것만이 주인을 떠나 남아있는 것일까. 벌칙 단계에서 그렇게 설정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둠의 에너지로조차 어쩌지를 못하는 물건이라는 뜻일까.
아직 그 이유를 유진은 알지 못한다. 트릭스가 남긴 말대로 자신은 무지하다.
그 얘기만이라도 나눠보고 싶었지만 보다시피 때는 늦었다.
이윽고, 예정대로 보상 카드 5장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렇게 자신은 한 번의 승부 끝에 무언가를 또 얻었다. 그 댓가로 사람의 목숨이 또 사라졌다.
감상은 지극히 객관적인 인식에서 끝날 뿐.
사람이 추락한 끝에 부딪히는 말로가 눈앞에 남지 않은 탓인지 그 이상의 충격은 없다.
그럼에도 전보다 빠르게 냉정을 되찾아가는 자신이 한 순간 낯설어진다.
타인의 죽음에 익숙해져가는 것 같다. 두려움이 마모되가는 것 같다.
이걸 담력이나 용기라고 치부하자니, 어딘지 형용하기 힘든 역겨움이 서서히 올라오려 했다.
그런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혼란일 것이다. 혼란스러운 나머지 다른 걸 신경쓸 처지가 아닌지도 모른다.
"이게 대체 뭐라고…."
의문들은 여전히 범람해온다. 그나마 알아낸 것들이 있다면, 역시 패배란 끝,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자신에게 패자를 살릴 방법 따윈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무언가를 알아낸다면 조금이라도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까.
자신이 자신으로 있을 수가 있을까.
"가져가세요, 당신 거잖아요?"
또다시 낯선 목소리다.
정확히는, 어쩐지 들었던 것도 같은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를 건드렸다.
책방에서 굴러나온 듯한 가녀린 인상의 청년.
그가 싱긋 미소지으며 권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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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하면 역시 추락 엔딩 아니겠습니까
원래 충혹마 로그를 미리 써둔 게 있긴 했는데 신 지원 아이들을 도저히 넘어갈 수 없어서 그냥 새로 썼습니다
홀티아쟝은 미안... 패가 모자라서 그만
암튼 몇 시간 뒤 찾아올 내년 복 많이 받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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