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맹목적으로 뭔가에 매달리는 인간들은 이용해먹기 참 좋아. 자기 눈 앞의 것에 매달리느라 주변에 눈이 가질 않거든."
죽은 여동생에 매달리느라 반쯤 미쳐버린 상태로 자신과 손을 잡은 닝기르수의 혼을 슬쩍 보며 그를 살며시 비웃던 알레이스터는 이내 잡념들을 비우고서 몰래 현세에서 추방당한 어둠의 신과 교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악을 초월해 어떤 굴레에도 얽매이지 않고서 자신만의 길을 걷는 알레이스터를 마음에 들어했던 어둠의 신은 마카리아를 시켜 그의 뒤를 봐주게끔 했었다. 비록 뜻밖의 변수가 생겨 어둠의 신이 현세에서 추방당하고, 그 와중에 애프터라이프 측에서 배신자까지 발생해 알레이스터의 계획이 다소 엉망이 되었지만 아직 자신은 이렇게 멀쩡히 있기에 아무래도 좋았다.
"진실된 자여, 미천한 몸이 그대를 부르나이다."
"거창한 미사여구는 필요없다. 그래서, 네 계획은 잘 되어가느냐?"
자신이 기거하던 육신에서도 쫓겨나고, 그로 인해 현세에서 추방되어 존재만이 남아있음에도 어둠의 신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애초에 그는 어둠 그 자체였기에 당연할지도 몰랐다.
"뭐, 당신의 눈 중 두 개가 당신을 배신하는 바람에 일이 좀 엉망이 되었지만, 상관없습니다. 저는 아직 멀쩡히 살아있으니까요."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어줍잖은 개념들에 묶이지 않고서 다만 네 자신을 등불삼아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래서, 혹시 네게 다른 계획은 있느냐?"
알레이스터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어둠의 신에게 답했다.
"당신이 부숴버린 수많은 세상들 중 한 곳의 생존자가 자기 여동생을 살리겠답시고 저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것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의 맹목적인 집착이 느껴진다. 너라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지 잘 알겠지."
그 말에 알레이스터는 특별히 준비해둔 육신들 중 하나를 떠올리고서, 어떤 계획을 머릿속에서 척척 구상해가고 있었다. 성공한다면 그의 절망감은 배가 될 것이고, 시큐리티 포스에게도 잊지 못 할 악몽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강림한 정령들에게 크나큰 절망을 안겨주는 것은 덤이었다. 설령 일이 잘못되어 실패한다고 해도 알레이스터에겐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다.
"맡겨주시지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
타락한 자의 모습은 정말이지 안타깝기 그지없군. 한때는 찬란하게 빛나던 마카리아라는 듀얼리스트가, 지금은 이런 꼴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니.
모든 것이 극과 극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나 부모에게 받는 아낌없는 사랑과 충고와 함께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올라가며 부족함없이 자라온 스트를 보며, 몰락해버린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술기운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자신을 통해 몰락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쓰레기같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시달리다 사고로 세상을 뜬 어머니, 그리고 그런 자신의 뒤에 숨어 벌벌 떨던 세 자매들을 뒤로 한 채 악착같이 프로의 세계로 진출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장수는 자신과 맞붙은 호적수를 쉽게 잊지 않는다. 그런데 저 여자에게선 장수의 기백이 보이지 않는군.
8강전의 그 날, 4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있음에도, 그래서 긴장이 안 될 리가 없었음에도 기품과 여유가 넘치는 스트를 보며 마카리아는 이것이 바로 자신보다 한 참은 앞선 출발선에 서서 햇볕 아래에서 순탄한 여정을 보낸 인간의 모습인가라는 생각에 질투와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격과 실력의 차이를 느끼며 무너지던 그 때, 자신은 마치 겨울 폭풍과도 같은 삶을 보내며 악착같이 버텨왔는데도 그런 자신이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는 스트에게 졌다는 사실에 무력감과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가엾은 자로군. 장수는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해도, 그 패배를 교훈 삼아 다시 싸울 의지를 다져야 하거늘. 그대는 어째서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 하고 그런 암흑의 길로 들어선 것인가?
배부른 소리들이었다. 인생의 겨울 바람을 맞아가며 겨우겨우 잡은 중요한 기회에서 자신의 눈에는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는 스트에게 패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나락으로 가는 편도 티켓이나 다름없었다. 프로 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길목에서 발목이 잡힌 이후로 자신의 삶은 엉망이 되었다. 폭력은 격해지고, 그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나락의 밑바닥을 해매며 살 길을 찾아나서던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자매들이 이유모를 병이나 사고,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죽어갈 때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애프터라이프는 길을 보여줬다. 자신의 발목이나 붙들던 아버지를 눈에 걸맞는 인재를 찾던 오르쿠스가 손수 "처리"해주고, 자신을 애프터라이프의 높은 자리에 추천해주었다.
어둠은 자비로우니라.
그리고 자신이 섬기게 된 어둠의 신은 사는 목적도, 의미도 없던 자신의 삶에 목적과 의미를 주었다. 그렇기에 마카리아는 애프터라이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넘기다시피 들어간 애프터라이프마저 무너진다면, 자신에게는 정말로 갈 곳도 없고 앞날도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주변의 배부른 소리들이야 어떻든 마카리아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었다.
사마드 LP 4000
브릿(마카리아) LP 4000
코인토스의 결과에 따라 선공을 잡았음에도 자기 눈 앞에 있는 상대인 브릿, 즉 마카리아가 내뿜는 살기 앞에서 사마드는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패는 나쁘지 않았다.
"일단 패에서 [파슬 다이너 파키세팔로]를 공격 표시로 소환."
공룡 화석이 공룡의 형태로서 재조립된 형태의 모습을 가진 몬스터가 사마드의 필드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덱은 특수 소환같은 상대의 여러 행동을 봉쇄하고서 상대를 서서히 말려죽이는 형태의 덱이었다. 재미는 없을지언정 이 또한 승리의 한 방법이었다.
"이어서 장착 마법, [월경의 방패]를 [파키세팔로]에 장착하고서 카드 2장을 세트한 후에 턴 엔드."
패의 카드는 일반 소환권이 겹쳐 소환하지 않은 [호우의 결계상]이었고, 세트한 카드는 [신의 통고]와 [무한포영]이었다. 사마드는 이 정도면 상대의 움직임을 상당히 봉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살기어린 상대의 드로우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있었다.
"네 어줍잖은 전개 따위, 이번 턴에 부숴주겠어...! 마법 카드, [해피의 깃털]을 발동! 이걸로 네 필드의 마법, 함정 카드를 전부 파괴한다!"
"이런...!"
그리고 마카리아가 품은 마음 속 칼날은 살기가 되고,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살기는 거대한 바람이 되어 사마드의 마법, 함정 카드를 모조리 파괴하고 있었다. 그녀가 파괴한 [월경의 방패]의 회수 효과는 라이프가 있는 한 반드시 발동해야하기에 사마드는 점점 더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마드 LP 4000 → 3500
"[월경의 방패]의 효과로 500 라이프를 지불하고 덱의 맨 위로 놓는다..."
"설마 내가 다음 턴을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패에서 [무한포영]을 발동해, [파키세팔로]의 효과를 턴 종료시까지 무효로 한다!"
"이런...!"
그리고 그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공격력 1200의 허약한 몬스터가 효과마저 무효가 되어 위태롭게 버티는 상황이었기에 사마드는 자칫하면 이번 턴에 그대로 끝장이 날 상황이었다.
"이어서 속공 마법, [낙인개막]을 발동! 패의 [비극의 데스피아안]을 버리고, 덱에서 [데스피아의 도화 알베르]를 수비 표시로 특수 소환한다!"
브릿이 소환한 [데스피아의 도화 알베르]를 본 순간, 사마드는 온 몸에 오한을 느끼고 있었다.
"[비극의 데스피아안]의 효과를 체인 1에, [알베르]의 효과를 체인 2에 두고서 체인 적용. [알베르]의 효과로 덱에서 [낙인융합]을 패에 넣고, [비극의 데스피아안]의 효과로 덱에서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를 패에 넣는다. 그리고 마법 카드, [낙인융합]을 발동!"
64강전에서는 빠른 진행을 위해 라이프 포인트를 4000으로 조정한 상태로 진행되었기에 이번 전개로 단숨에 듀얼을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카리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덱의 [알버스의 낙윤]과 패의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를 융합! 융합 소환! 나와라, 낙인찍힌 성녀들의 말로! [데스피아안 쿠에리티스]!"
자기 눈 앞의 상대를 스트로 생각하며 듀얼을 끝낼 준비를 하는 마카리아는 자신이 패배한 그 날을 다시 떠올리며 지금 이 순간처럼 그녀에게 자신의 증오와 분노를 때려박을 수 있는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용한 융합 소재들을 본 사마드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듀얼의 승패는 이제 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는 패나 필드에서 융합 소재가 되면 스스로 되살아나는 효과가 있지. 되살아나라, 흉도를 지배하는 대도극신이여!"
그 다음은 말이 필요없었다. [데스피아안 쿠에리티스]의 대검이 애처롭게 서있던 [파슬 다이너 파키세팔로]를 일도양단하며 무너트리고 있었고,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의 보랏빛 에너지가 사마드를 휩쓸어버리며 단숨에 듀얼을 끝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휩쓸어버리는 그 순간, 마카리아는 어둠의 신을 향해 사마드의 영혼 조각 일부를 바치고 있었다. 마음같아선 영혼 전체를 바치고 싶었지만 시큐리티 포스가 곳곳에 있고 자신을 보는 눈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아쉬운대로 이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었다.
"이까짓 승리로는 성에 안 차."
첫 상대인 사마드를 처절하게 박살내버린 마카리아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스트나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브레이크, 둘 중 한 명 이상을 만나 자신의 손으로 손수 박살낼 수 있길 바라고 있었다.
*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빌리 더 키드가 두 여성 듀얼리스트의 선전으로 일찌감찌 탈락하는 대이변이 일어나며 제 7회 SEM 컵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오늘 치러졌던 C조에서는 다크니스와 아우스가 선두 경쟁을 벌이고, 3위에 놓인 샬롯과 4위에 놓인 마이크가 그 뒤를 추격하는 구도로 가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에 치러진 D조에서는 브릿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1위를 달리고 있었고, 남은 3명이 2위 싸움을 벌이는 구도였다.
"다음에 또 만난다면 그 때는 어떤 싸움이 될지 모르겠네."
그리고 그런 브릿을 알아본 스트는 내일 있을 E조 경기를 준비하며 자신이 4강 진출을 확정짓던 그 날, 증오에 가득찬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마카리아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그녀와는 가능하면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힘내라, 힘.
고마워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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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비극이 이 땅에서 일어나게 두지는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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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화가 되어가는 릴레이 팬픽이라 광광 우러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