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9월 14일 대구 소재 매일신문 본사에 괴청년 20여 명이 난입해 기자들을 폭행하고 인쇄기를 때려부수고 도망간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학생들을 강제동원한 관제 시위에서 비롯됐다. 1950년대 정부는 각종 관제 행사에 국민들, 특히 중고등학생들을 자주 동원했다. 특히 55년 8월부터 정부 주도로 UN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철수를 요구하는 관제 시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됐는데, 역시 수많은 학생들이 이에 동원됐다. 9월 초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임병직 주미대사의 대구 방문을 환영한다며 자유당과 관변단체 국민회의 주도로 다시 한 번 대규모로 학생들이 동원됐다.
이에 55년 9월 13일 자 매일신문은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이를 비판했는데, 다음날 정치깡패들이 매일신문사에 난입, 인쇄시설을 부수고 사원들을 폭행했다. 사실 신문사 측에선 사전에 습격 정보를 입수하고 남대구경찰서에 경호를 부탁했으나, 경찰은 형사 2명만 보냈을 뿐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에 대해 경북도경 경찰 간부는 "백주대낮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역사에 길이 남은 망언을 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필 최석채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해 재판에 넘겼으나, 56년 6월 8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사족) UN 중립국감시위원회 철수를 왜 요구했냐면, 정전 이후 협정 준수를 감시하기 위해 UN은 중립국감시위원회를 조직하고, UN과 북한에서 각각 지정한 나라에서 감독관들이 파견됐다.
여기에 북한이 당시 공산권 국가였던 동유럽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골랐고 이게 받아들여져서 문제가 됐다. UN의 결의로 일어난 일이라 항의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중립국에 공산 국가가 웬 말이냐"며 이를 규탄하는 여론을 대대적으로 알리겠다는 명분 하에 학생들을 동원한 관제 시위를 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