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누르하치는 1616년 겅기연 한에 즉위함으로서 사실상의 후금 정권과 국체를 수립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조카들 중 유력한 이들을 자신의 휘하 최고위 군주인 4대 버일러로 임명하여 정무와 군사를 감독케 하였다. 이러한 친족/분권적 통치체제의 수립은 누르하치의 장남 추영을 정권의 확실한 후계자로 지목한 결과 일어난 분란적 상황에 대한 반성 및 보완을 겸하는 동시에, 자신의 암반(대신, 귀족), 공신세력 들에게 막대한 권한이 주어졌던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자신의 친족들에게 실권을 분산하여 왕공의 우위 통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국가 정무체계를 확보하고자 했다고 보여진다.
요컨대 이러한 조치는 국제를 한-버일러-암반의 피라미드형 체계로 확고히 정비개편하여 친족, 혈족 중심의 국정 운영을 이루어 내고자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4대 버일러는 대 버일러(amba beile/암바 버일러) 다이샨(daišan, 누르하치의 차남), 자친 버일러(jacin beile) 아민(amin, 누르하치의 장조카, 슈르가치의 2남), 이라치 버일러((ilaci beile) 망굴타이(manggūltai, 누르하치의 오남), 두이치 버일러(duici beile) 홍 타이지(hong taiji, 누르하치의 팔남)이었다.
아민을 제외한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누르하치의 적자(嫡子)였다는 점이다. 다이샨은 누르하치의 첫째 정실 하하나 자칭의 소생이었고, 망굴타이는 군다이의 소생, 홍타이지는 몽고저저의 소생으로서 모두 중간에 태어난 측실 소생들에 비해 혈연 서열상 우위에 존재했다. 한편 아민의 경우에는 슈르가치 사후 그의 세력에 대한 상속자이자 통치권자로서 임명된 경우이나 죽은 아이퉁가를 제외한 장조카로서 누르하치의 조카들 중 가장 우위에 있는 인물이었다.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이들은 모두 누르하치가 믿고 업무와 집단의 지도를 맡길 만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증명, 즉슨 '전공'을 세워둔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1616년 4대 버일러에 임명되기 전부터 이미 건주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서 많게는 수 차례 이상 적을 격파하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이들의 1616년 이전까지의 참전 전투들 중 기록이 확실한 것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참고사료 :『만문노당』, 『만주실록』1
확실한 참전 기록이 남은 전투들은 이상에 불과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1607년에 있었던 호이파 침공전과 1613년에 있었던 여허 침공의 경우에도 이들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두 전투 모두 하나의 세력에 대한 건주의 총력전이었고, 그렇기에 이미 대규모 군단의 지휘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던 이상의 네 사람 전체 혹은 일부가 원정에 종군했을 가능성은 확정적이다.
다만 두 전투 모두 실록에 종군자들의 이름이 확실하게 거론되지 않은 탓에 호이파 전투에 이상의 네 명중 몇 명이 참전했는지, 여허 침공전에는 몇 명이 참전했는지 알 수 없어 기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소의 난항점이다.
한편, 여기서 다이샨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1599년에 있었던 대규모 전투인 하다 침공전에서도 역시 활약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록과 청사고를 살펴보자면 다이샨의 생년은 1583년인데, 하다 침공전의 경우에는 1599년에 있었으므로 참전 가능성이 충분하다. 물론 당시 다이샨의 나이가 지나치게 어렸다 생각할 수 있으나, 누르하치의 십오남 도도 역시도 15세에 전투에 종군, 병사를 지휘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면 다이샨이 해당 전투에 종군했을 가능성 역시도 무리하진 않다고 판단된다.2
무엇이 되었던지간에, 확실한 것은 이상의 네 명은 모두 대규모 전투에 대한 종군 경험이 존재하는 동시에 확실한 군공이 이미 갖추어진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혈통과 함께, 누르하치가 이들을 4대 버일러로 임명할 수 있는 명분으로, 병사들의 버일러들에 대한 충성심과 지지의 이유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이들의 종군 경험과 군공의 확보는 누르하치의 의도가 작용된 바도 존재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적자들이 자신의 후계자이자 세력의 통치 구심점으로서 작용하기를 바랬고, 그로서 그들을 지속적으로 대규모 원정에 종군시켜 지휘 경험을 통한 역량 신장을 이루며 병사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추게끔 하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군공을 세우게 하여 세력 내 입지를 다지게 했다고 보여진다. 그로서 자신을 정점으로 하되 기존의 이성 대신/창업 공신들이 국가 통치에 큰 역할을 하는 체제를, 자신의 혈족이 우위에 선 운영체제로 대체해 나가고자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누르하치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작용하였으나, 이들의 분봉 및 한 명의 확고한 후계자의 비선출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요컨대 이들의 4대 버일러로서의 분봉과 공치는 누르하치 치세 말기의 내부적인 암투와, 홍타이지 치세 초기의 권력 대립 구도를 불러오게 된다. 그러나 후금의 2대 한 홍타이지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냈고, 그로서 그가 다이칭 구룬의 황제로 거듭났을 무렵에, 그의 권력에 도전할 이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런 4대 버일러 외에도, 1616년 이전에 군사 경험을 쌓은 것으로 확실히 언급되는 이가 있다. 누르하치의 칠남 아바타이(abatai)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누르하치의 비적자로서 이르건기오로 서비 소생이었으나 서비 소생으로서는 드물게도 1616년 후금 건국 이전부터 군사 경험을 쌓은 이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는 신해년(1611) 우르구천과 무런 원정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로서 당시로서는 후일의 사대 버일러인 홍타이지나 망굴타이 조차 없었던 '한 원정의 최고 지휘'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3
후금 건국 이후의 그의 군사적 행적과 능력, 입지전적인 생애를 살펴 보자면, 이는 아바타이의 적자로서의 위치나 혈통과는 관계 없이 그의 군사적 역량을 눈여겨 본 누르하치에 의해 일찍부터 경험을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1.이 중 아민의 경우 1차 울라 침공전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불확실 하나 사료적 추정으로 1차 울라 침공전에 참전치 않고 허투 알라를 방위했다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2282840 참조.
2.다이샨의 나이는 『청사고』 권216 열전3 다이샨 열전, 『청세조실록』 순치 5년 10월 11일;도도의 나이는 동실록 순치 6년 3월 18일. 도도의 전투 참전에 관하여서는 『청태종실록』 천총 2년 3월 7일 참조.
3.『만주실록』 신해년 음력 7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