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누르하치는 1616년 음력 5월 보지리가 동해 여진의 다른 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주변의 반대를무릅쓰고 안피양구와 후르한에게 즉각적인 원정을 지시했다. 이들은 음력 7월 출병하여 보지리 세력을 각개격파, 10월까지 도합 38개의 부락1을 함락했다. 이 이후 그들은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역시도 항복시켰다.
비록 보지리를 비롯한 일부 도주자들은 잡지 못했으나, 안피양구와 후르한은 그 시점에서 작전의 진행을 중지했다. 도주 세력 토벌은 차후 파견될 토벌 부대가 수행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에 더불어 이미 작전의 수행에 너무 오랜 시간을 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들은 작전을 중지한 뒤 작전의 진행으로 말미암아 본인들에게 항복한 암반 40여명과 함께 허투 알라로 귀환했다. 이들은 동해 음력 11월 7일 무렵 허투 알라에 도착했다.2그것으로 보지리의 난은 사실상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보지리의 난에서 미처 제압되지 못한 이들을 추포 혹은 제압하기 위해 소규모의 원정군이 추가로 파견되었으나 그것은 조금 뒤의 일이다.
후르한과 안피양구에 의해 포로로 잡혀 허투 알라에 억지로 방문한 보지리의 난 참여 세력의 암반들은 의외로 허투 알라에 완전히 억류되지 않고 그로부터 얼마 뒤 본래의 세거지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사료상의 1618년 음력 1~2월의 기록에 이전에 항복했던 40명의 암반들이 후금에 완전히 합류하기 위해 허투 알라로 온 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3이 기록을 보건대 1616년 음력 11월에 허투 알라에 끌려온 암반들은 한 차례 본인들의 세거지로 돌아갔던 것이 확실하다. 누르하치가 그들의 무엇을 믿고 방면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아마도 이전에 보지리가 후금을 위해 일할 적 보낸 후르하계 암반들에게 취한 조치처럼 가솔들과 부락민들을 인질로 붙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가솔들 전체를 인질로 붙잡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618년에 후금에 완전히 귀부할 적에 자신의 가솔들을 인솔하여 왔다4는 기록 역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솔들 중 일부, 요컨대 장남과 같이 중요한 인물들만을 인질로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가솔들을 인질로 잡아두면 그것 역시도 이제야 막 항복한 이들에게 역으로 다시 저항의식을 불지필 가능성이 농후했는데, 그것은 동해 여진인들의 진심어린 복종과 내속이 필요한 후금과 누르하치로서는 반드시 기피해야 할 상황이었으므로 그런 극단적 조치를 취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당 암반들을 일시적으로 방면하여 본래 세거지로 돌려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다만 몇 가지 추정을 할 수 있는데, 하나는 그들을 방면함으로서 동해 여진 세거지역에 남아 있는 흩어진 반역자들을 설득케 하고자 했을 가능성이다. 그와 더불어 유력한 가능성은 당시 후금의 식량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항복한 동해 여진세거 부락민들을 모두 내속시킬 수 없는 상황인지라 오히려 포로로 잡은 암반들을 본래 세거지로 돌려 보내 그들에게 본래 그들이 통솔하던 부락민들을 본래의 세거지역서 먹여살리게끔 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 후금의 식량 사정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몇 번 정도 서술했다. 이해를 위해 다시 한 번 넘겨짚고 가자면, 당시 후금의 식량 사정은 요동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해 그리 좋지 않았다. 명나라로부터 확보한 개간지도 요동총병 장승윤의 경계 재정비에 의해 명나라에 다시 뱉어낸 상황에서 후금으로서는 그러한 기근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후금수뇌부는 후금에 내속된 백성들 중 일부를 변경으로 보내면서 식량을 자구적으로 확보하게 하였다.5
그런 상황이었다보니 반란을 일으킨 동해 여진 연합 세력들을 대거 복속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암반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채워 놓고 다시 본래의 세거지로 보낸 뒤 그들이 그 곳에서 본인들의 부락민들을 먹여살리게끔 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후금이 취한 조치였던 '백성들의 변경 파견과 식량의 자구적 확보'와 대체적으로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추론제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데, 바로 그들이 1618년에 후금에 데리고 온 부락민의 수를 근거로 한 이의제기의 경우이다. 그들이 1618년 후금에 내속되기 위해 허투 알라로 왔을 무렵에 이끌고 온 부락민들의 숫자는 객관적으로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이들 40명이 1618년 후금에 완전히 귀부할 적에, 이들은 도합하여 1백여호의 세거민들을 이끌었다고 한다.6당시 후금에 복속된 여진 세력의 가호의 경우 임의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다가, 여진족의 경우 각 호의 구성원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1백여호는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다. 아무리 넉넉잡아도 1천여명 정도가 이들 40명이 이끌고 온 사람들의 숫자로 보인다.
이런 문제 때문에 당시 항복한 동해 여진계 암반들이 통솔했던 부락민의 수가 얼마 안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나아가 후금측이 식량 문제 때문에 투항 암반들을 세거 지역으로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고작 1백여호, 많아야 1천여명의 사람들을 후금의 부양책임에서 제외한다고하여 식량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리는 만무하니 식량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돌려보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1618년 음력 10월에 허투 알라를 방문하여 귀부 의사를 밝힌 후르하계 암반 나카다의 사례를 보자면 과연 이들이 통솔하던 부락민의 수가 1백여호가 전부였을지 의문이다. 나카다는 후르하계 암반으로서 다른 가샨 암반 7명과 함께 1백여호에 달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귀부했다. 그런데 그가 통솔하던 사람들은 그가 허투 알라로 데리고 온 1백여호가 끝이 아니었으며 본래 세거지역에 남기고 온 사람들도 존재했다.7이 경우를 보자면 1618년 음력 1~2월에 후금으로 들어온 암반들 역시 일정 수효의 부락민들을 세거 지역에 남기고 왔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한 가능성에 더욱 힘을 보태주는 것은 1619년 음력 1월 26일 무할리얀의 동해 여진 파견이다. 허투 알라를 떠난 무할리얀은 1천여명의 군병을 이끌고 가서 동해 여진에 '잔류하여 있는' 후르하인들을 데려왔는데, 이는 교전이 아니라 이송에 가까운 임무였다.8이 때 이들이 데리고 온 사람의 수는 도저히 나카다를 포함한 암반 8명이 통솔하고 있던 인구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므로 이전에 누르하치에게 항복한 동해 여진의 암반들이 세거 지역에 남기고 온 이들까지 합쳐진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것을 보건대 1618년 음력 1~2월에 동해 여진계 암반들이 데려온 이들은 그들이 통솔하던 부락민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러므로 이들의 숫자만으로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암반들을 본래의 세거지로 돌려보냈을 가능성이 적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정말로 당시 내속해온 40여명의 암반들이 데리고 온 백성의 수가 그들이 통솔하던 백성의 전부라고 하더라도, 당시 후금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1백여호의 사람들에게 돌아갈 식량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아끼는 것이 이득이었다. 당장 사람들이 굶어 쓰러지는 마당에 굳이 식량 부담을 늘릴 이유는 없었다. 이런 것을 보건대 당시 후금이 투항한 동해 여진계 암반들을 본래 세거지로 돌려 보내는 것에 식량 부담을 완화하려는 목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하기 어렵다고 본다.
어쨌든, 누르하치는 항복한 40여명의 암반들로부터 투항을 확답받은 뒤 그들을 다시 본래의 세거지로 돌려 보내어 부락민들을 자구적으로 먹여살리게끔 한 것으로 판단된다.9 그것으로 보지리의 난은 정리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물론 선행하여 언급했다시피 반란 주모자 보지리와 몇몇 저항자들이 여전히 잡히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이후로 더 이상 후금에 저항할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반란은 사실상 종결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보지리의 난'이 반년만에 사실상 대부분 정리되었을 무렵 명나라 월경인의 후금령 침범과 후금의 월경인 살해 문제도 정리되었다. 누르하치와 요동순무 이유한은 서로가 한 걸음씩 물러나는 타협으로 해당 문제를 봉합하였다. 누르하치는 10여명-혹은 40여명의 여허 포로들을 처형 및 명에 신병을 양도함으로서 사태의 잘못을 인정하는 제스쳐를 취했으며 이유한은 대신 후르한의 신병 양도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억류하고 있던 후금 차인들을 석방하며 시장 역시 다시 개방키로 했다. 이 봉합은 당시 한참 요동치고 있던 후금의 국외관계를 어느정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10
1616년 누르하치가 겅기연 한으로 즉위하자마자 발생한 두가지의 심대한 문제가 해결 혹은 봉합 수순에 접어듬으로서 누르하치는 가까스로 한숨을 돌렸다. 비온 뒤 땅이 굳듯 해당 문제의 처리 이후 후금은 더욱 견고해졌다.
1.만문노당의 기록을 기반으로한 계산수치. 다른 의견으로는 47개를 점령했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2.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11월 7일
3.만문노당 천명 3년 음력 1월, 만주실록 동년 동월~2월. 기록을 보건대 1월중에 이들이 온다는 소식이 후금에 전해졌고, 2월 8일에 이들이 후금에 도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4.만문노당 위와 동일, gurun i dehi amban i juse sargan, boigon gajire
5.조선왕조실록 광해군 9년 음력 2월 13일
6.청태조고황제실록 천명 3년 음력 2월, 上聞已附之使犬路諾洛路石拉忻路路長四十人率其妻子、并部眾百餘戶來歸.
7.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10월 12일. 다만 만문노당에는 기록상 일자가 조금 다르다.
8.만문노당 천명 4년 음력 1월 26일, 음력 6월 8일
9.단 이상의 추론과는 다른 추론 역시 가능성이 있다. 해당 추론은 추후 서술. 다만 해당 추론 역시 기본적으로 후금내부의 식량문제탓에 보지리의 난 당시 정복한 부락민들을 얼마간 후금 외부에서 생활케 했을 것이라는 부분은 동일하다.
10.월경인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전 편의 '1616년 음력 6월. 명-후금 경계 충돌'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