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중초본]155권, 광해 12년 8월 18일 계해 2번째기사 1620년
원접사 이이첨이 폐고된 인재들의 출사를 청하다
접사 이이첨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응대하는 데에는 응수하는 말이 진실로 중요합니다. 해조는 지금 물력(物力)이 고갈된 것을 염려하지만, 신은 인재가 없는 것을 민망스럽게 여깁니다. 종사관 세 사람은 반드시 재주와 명망을 함께 갖추고 있어야 시문을 함께 지을 수 있으며 직무를 나누어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제술관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습니다. 유몽인(柳夢寅)은 문예(文藝)에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서 지금 한산한 직책에 있으며, 홍서봉(洪瑞鳳)·김상헌(金尙憲)·장유(張維)·조위한(趙緯韓)·임숙영(任叔英)·김세렴(金世濂) 등도 역시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로서 모두 일에 연루되어 폐고(廢錮)되어 있습니다. 유근(柳根)·이호민(李好閔) 같은 이는 모두 시문을 짓는 데 노련한 사람으로서 죄를 입어 아직 단죄되지 않은 채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폐고된 자를 출사시켜서 죄를 씻어 주어야 할 때를 당하여, 만약 특별히 죄를 용서하고 성과가 있도록 책임지우는 명이 없다면 장차 어떻게 이처럼 나라를 빛나게 하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외람되이 사신을 영접하는 직책을 띠게 되어 사직을 간절히 청하였지만 아직까지 체직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규례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일을 잘 해나갈 수 있는 방도만을 생각하여 뭇 인재를 수습하고 뭇 훌륭한 이들을 모으는 것이 참으로 시급한 일이기에 감히 이에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참람된 죄는 참으로 면하기 어렵습니다만, 단지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서 끝내 재주를 갖고도 버림을 받는 억울함이 없도록 하고자 합니다. 삼가 성상께서 행여 용납하여 살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인조실록3권, 인조 1년 윤10월 25일 신해 3번째기사 1623년
사신은 논한다. 광해군이 대북(大北)·소북(小北)을 서로 화합시키려 하자 이병(李覮)·유희발(柳希發)·이창후(李昌後) 등은 그 사이를 오가면서 넌지시 권유하였고 이이첨·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은 장원서(掌苑署)에 모여서 각기 시로 창화(唱和)하여 뜻을 드러내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다투는 것은 은총이고 탐내는 것은 권세였으니 어찌 화합하여 공도(公道)를 따를 수 있었겠는가. 그뒤 이첨은 또 남인과 조정론을 폈는데, 이때 남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이욕을 탐내는 무리로 한유상(韓惟翔)·오환(吳煥)·목장흠(睦長欽) 같은 자는 앞다투어 빌붙어서 추세(趨勢)에 급급하더니 얼마 안 되어 이첨이 패하였다.
대북파와 이이첨이 광해군 시절 내내 역모 조작하고 타당파에게 적대적인 건 매우 유명한 사실이지만
광해군 말년에 광해가 자신을 싫어하고 대북을 제외한 다른 당파 사람들이 자신을 증오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지
항상 타당파에 배타적이었던 이이첨은 ↗됨을 느끼고 광해군에게 서인과 남인 폐모론에 반대한 북인들을 등용할 것을 청하고
남인을 등용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등 서인 남인에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함
사방에서 탄핵을 하지 않나 왕의 총애가 사라지고 사방은 적이 되어버렸으니 이이첨 입장에서 위기감 느끼긴 했을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