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 中. 정운
정운(鄭運)은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종군하며 조선군의 임진왜란 초기 해전의 승리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이순신과 원균(元均)의 1차 출전, 이순신과 이억기(李億祺), 원균의 2차 출전, 3차 출전, 4차 출전에서 모두 자신의 함선 및 장졸들과 함께 분투했던 그는 자신의 마지막 전투였던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자신의 종군에 마침표를 찍는다.
부산포 해전 당시 그가 조총 내지는 대조총(大鳥銃, 오오즈츠大筒)에 피격되어 전사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이견도 없으나, 이견이 발생하는 부분은 그의 피격 부위에 대한 문제이다. 기록간 상충으로 인해 정운의 전사 요인이 된 그의 탄환 피격 부위에 대한 서술이 두 갈래로 나뉘기 때문에, 그가 실제적으로 어디에 총상을 맞고 전사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먼저 머리에 총상을 맞았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전투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근거 사료가 되는 이순신의 장계를 근거로 한다. 이순신은 정운의 죽음을 두 편의 장계에 걸쳐 기술했는데 하나는 '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1이며 또 하나는 '청정운추배이대원사장'(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이다. 하나는 부산포 해전 승리 이후 보낸 그와 관련한 장계이며, 또 하나는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운을 녹도 이대원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장계이다.
여기서 후자의 장계에는 정운의 피격 부위에 대한 언급 없이 그저 철환에 맞아 전사하였다고만 서술했지만2, 전자의 장계에서는 정운의 피격 부위에 대해 '대철환에 의해 정수리가 꿰뚫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순신이 직접 '대철환'이라고 표한 만큼 정운은 일반적인 조총이 아니라 대구경의 오오즈츠(大筒) 종류에 피격 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때 이순신은 장계 내에서 일본군에 의해 발사된 대철환을 지칭할 때 그 크기가 '모과(木果)'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정운을 피격한 대철환 역시 그와 비슷한 크기였을 것으로 가늠한다면 그 구경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사료적 공신력이 높은 동시에 당시 전투 상황에 대한 실제-서술간 괴리가 적을 1차 사료인 이순신의 장계 내에서 정운이 머리에 대철환을 피격당하여 전사했다는 서술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운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을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순신의 해당 장계외의 다른 많은 기록에서 정운의 피격 부위를 '가슴' 내지는 '몸통'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영화 한산에서 묘사된 대조총, 물론 구경은 천차만별이기에 이보다 구경이 훨씬 작고 혼자서 사용이 가능한 대조총도 다수 존재했고 그것이 상대적 수효가 많았던 것 같다.)
정운의 휘하에서 종군했던 것으로 알려진 흥양인 오윤건(吳允健)의 구술과 기록을 바탕으로 안방준(安邦俊)의 제자 진사 주엽(朱燁)에 의해 기술된 『항의록(抗義錄)』 수록 「贈兵曹參判鄭公傳」에서는 정운의 피격 부위가 가슴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주엽의 해당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한 안방준의 『은봉전서』 내 「부산기사」에서도 역시 정운의 피격 부위를 가슴으로 기술하고 있다.5 여기에 더하여 『정충장공실기』의 본전에도 역시 정운의 피격 부위를 가슴으로 서술하고 있다.6
물론 위에서 정운이 가슴을 피격당했다고 기술한 사료들의 경우 정운에 대한 선양 목적이 강하게 부각되는 기록들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으며 그에 따라 정운의 장렬함을 강화하기 위해 실제 이상의 윤색을 더했을 공산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또한 해당 사료들은 2차 사료, 3차 사료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하며, 그 과정에서 사료의 기술이 1차 사료들과 차이를 보이는 문제 역시 발생했기에 사료를 읽는데에 주의가 필요하다. 7
특히 안방준의 「부산기사」의 경우에는 확실하게 「증병조참판전공전」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고 확인되므로, 두 기록의 근거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8 그리고 그 근거는 정운에 대한 선양의 의도가 강한 만큼,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상의 2차, 3차 사료들에 더불어 『선조실록』 에서도 역시 정운의 피탄 부위를 가슴으로 지목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594년 7월 선조와 비변사 유사당상간 인견 자리에서 병조참판 심충겸(沈忠謙)은 대조총의 화력 예시로 정운의 피탄과 관련한 이야기를 거론하며 정운이 방패로 몸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조총의 탄환이 참나무 방패 3개를 뚫고 쌀 2섬 마저도 관통하고서 정운의 가슴을 뚫고 탄환이 배 안으로 들어갔다고 언급했다.9
물론 이는 당시 정운이 피탄 당했을 당시의 상황과 정운을 맞춘 것으로 생각되는 대조총의 구경, 유효 사거리, 관통력, 전투 당시 발생할 수 있었던 사격 각도 등 여러 조건을 생각해 보자면 어느정도 과장이 들어간 발언이라고 생각된다.10심충겸 본인 역시도 '라고 하였습니다(云云)'이라고 표하며 자신이 직접 확인한 사실은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과장의 공산이 큰 부분은 원거리에서 피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탄환이 방패와 쌀섬들을 꿰뚫고서도 갑주를 입은 정운의 가슴을 뚫고 배 안으로 들어간' 부분이지, 정운의 가슴이 관통당했다는 부분에 대해 과장의 의도가 적용되었을 가능성은 적다.
뭣보다 해당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정운 전사 이후 불과 2년도 안된 시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에도 정운이 가슴의 피격 내지는 관통상으로 전사했다고 파악하는 의견이 존재했고, 그것이 다름아닌 병조참판의 입에서 거론되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정운의 전사 요인이 총격에 의한 두부 관통이 아닌 총격에 의한 흉부 관통일 가능성 역시도 여러 사료를 통해 주장되고 그 근거가 뒷받침되는 만큼,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순신의 장계가 전투를 지휘한 지휘관의 상부 보고이며 그렇기에 가장 실제 사건의 진실과 시공간적 거리감이 가까운 사료라 하더라도, 전투 이후의 황망함이나 착오등으로 인하여 서술에서 실수를 했을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언급했다시피 반대의 경우로 정운에 대한 선양을 위한 윤색 내지는 와전을 통해 그가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는 이야기와 기록이 퍼지고 전수되었을 가능성 역시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물론 묘소에 안치되어 있는 장군의 유해를 직접 확인하는 것일 터다. 하지만 아무리 학술적 목적이라 하더라도 정확한 사인의 확인을 위하여 함부로 묘소의 고인의 유신을 확인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적 문제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가장 중요하게는 후손분들의 의향이 이에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는 만큼, 사료를 통해서 사인과 관련해 이러한 의견들이 있다는 것 정도만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현재로서의 한계일 것이다.
1.부산파왜병장은 후대에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에 붙여진 이름이며 본래는 사도부산포승첩계본(四度釜山浦勝捷啓本)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계본이다.
2.『이충무공전서』 권2 장계1, 「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 而當其回帆。中鐵丸致死。
3. 『이충무공전서』 권2 장계1, 「釜山破倭兵狀」, 鹿島萬戶鄭運。 起變以來。激發忠義。誓欲與賊同死。三度討賊。每爲先突。釜山接戰時。亦爲冒死突進。賊之大鐵丸。貫穿頭頂而致死。
4.『抗義錄』, 「증병조참판전공전」, 賊有一大船 放中銃最猛 我必先破其船 淩 前力戰 中丸洞胸而死.
5.안방준, 국역 『은봉전서』 권7, 「부산기사」 338쪽. ; 『정충장공실기』의 『은봉전서』 발췌 「부산기사」 역시 동일 내용 수록.
7.이민웅, 2019, 「부산포해전의 경과와 의의」, 『이순신연구논총』 31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86쪽.
6.『鄭忠壯公實記』 본전; 역 : 충장공정운장군실기국역발간위원회, 『충장공정운장군실기』, 1992, 충장공종운장군숭모사업회, 51쪽.
8.조원래, 2009, 「이순신과 鄭運 - 녹도만호 정운의 활동을 중심으로 -」, 『이순신연구논총』 11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7쪽.
9.『선조실록』 50권, 선조 27년 4월 17일
10.「부산기사」등에는 정운이 돌격 중 전사했다고 서술이 되고 있으나 이순신의 장계에서는 배를 돌려 전장을 이탈하던 중 불의의 피격을 당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만력 20년 9월 11일 계본)「부산기사」등은 상기에서 언급한 이유로서 정운의 선양을 위한 윤색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은 2, 3차 사료인 만큼, 여기서는 이순신의 장계를 보다 우선하여 정론으로 살핀다. 단, 이순신 역시 선행한 장계에서는 정운이 돌격 과정에서 전사했다는 서술도 보이는데, 선행한 장계의 경우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작성한 것이기에 후일 정리된 계본이 전투의 최종 결과를 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쩌면 「부산기사」등에서 정운이 돌격 중 전사했다고 기술한 것은 이러한 선행장계의 영향을 받은 탓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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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작성. 어제 올렸던 것에 내용 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