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잘 자요, 나의 기사님―
9,200자
이 글은 한섭 기준 시점으로 「최종장 완결」 이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머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나기 쨩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앗, 나기 쨩!”
“좋은 오후에요, 미카 씨.”
“응! 좋은 오후!! 날씨 참 좋지? 어쩐 일이야? 이런 시간에 이런 데서 나기 쨩을 만나다니! 아핫☆ 혹시 날 만나러 왔다거나!?”
점심때가 지난 중앙 광장의 분수대는 여느 때보다 평화롭고 한산하다. 학생 간의 기 싸움이나, 소요 대신 코끝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과 다소 뜨거운 볕, 그리고 무성한 녹빛. 세상은 그런 눈부신 것들로 흘러넘치고 있다.
보통 이 시간에는 대부분의 교실에 수업이 있고 동아리 활동도 활발하니까 인적이 드물 수밖에 없다. 조금 낯설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트리니티라고 항상 예민하게 털을 곤두세우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당연히 나기 쨩도 수업과 업무로 무척 바쁜 시간일 텐데.
“후후…. 아쉽지만 정말 우연이에요. 저는 미카 씨가 여기에 계신단 것도 알지 못했는걸요.”
“나기 쨩도 참. 이럴 땐 아니라도 그런 척해주는 게 정답이잖아!”
이 글은 한섭 기준 시점으로 「최종장 완결」 이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머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나기 쨩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앗, 나기 쨩!”
“좋은 오후에요, 미카 씨.”
“응! 좋은 오후!! 날씨 참 좋지? 어쩐 일이야? 이런 시간에 이런 데서 나기 쨩을 만나다니! 아핫☆ 혹시 날 만나러 왔다거나!?”
점심때가 지난 중앙 광장의 분수대는 여느 때보다 평화롭고 한산하다. 학생 간의 기 싸움이나, 소요 대신 코끝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과 다소 뜨거운 볕, 그리고 무성한 녹빛. 세상은 그런 눈부신 것들로 흘러넘치고 있다.
보통 이 시간에는 대부분의 교실에 수업이 있고 동아리 활동도 활발하니까 인적이 드물 수밖에 없다. 조금 낯설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트리니티라고 항상 예민하게 털을 곤두세우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당연히 나기 쨩도 수업과 업무로 무척 바쁜 시간일 텐데.
“후후…. 아쉽지만 정말 우연이에요. 저는 미카 씨가 여기에 계신단 것도 알지 못했는걸요.”
“나기 쨩도 참. 이럴 땐 아니라도 그런 척해주는 게 정답이잖아!”
여느 때처럼 건조하게 대답하길래, 나도 똑같이 빈정거리며 씩씩댔다. 이런 나기 쨩을 좋아하지만. 정말이지, 무드가 없어. 가끔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 줘도 되잖아.
“저희 사이에 비밀은 없기로 했잖아요? 후훗.”
“으, 음…. 그렇게 말하면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얍삽해!
“잠깐 보충수업부에 볼일이 있어서 나온 것뿐이랍니다.”
“혹시 히후미 쨩?”
“네?”
정곡이구나.
줄곧 수수께끼의 마이페이스였던 나기 쨩의 입가가 정답을 숨기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헤에…. 나기 쨩, 항상 사람을 부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만나러 나오기도 하는구나.”
“다, 당연하죠. 저라고 항상 티 테이블에 앉아만 있지 않아요. 때로는 티파티라는 호칭 없이 만남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아하하~ 농담인 게 뻔하잖아. 뭐야, 나기 쨩. 그렇게 당황하고! 귀여운 구석도 있잖아.”
“…놀리지 말아 주세요, 미카 씨. 그보다 미카 씨야말로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편지지에 무언가 쓰고 계셨던 거 같은데….”
아직 누구에게 보낼지 정도밖에 쓰지 못했지만, 그녀가 편지지를 볼 수 없도록 은근슬쩍 뒤로 숨겼다.
“이, 이거? 음. 뭐, 뭐라고 해야 할까나….”
“미―카― 씨―. 저희 분명 더 이상 숨기는 건 없기로 했었죠?”
나기 쨩이 무서운 표정을 짓는다.
얼굴에 활기가 없는데, 감은 눈과 입가만 웃고 있어서 무서워.
“이건 그러니까…. 음…. 자, 자장가?”
“네?”
“마, 맞아. 자장가의 노랫말을 적고 있었어.”
“흐음….”
나기 쨩은 내 말이 전혀 미덥지 않은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노려보더니 금세 시선을 거두며 싱긋 웃었다.
“그래요. 그런 걸로 해요. 후후. 아무래도 내용을 보여주실 생각은 없는 듯하니, 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을게요.”
“어? 저, 정말?”
“물론이죠. 저는 미카 씨를 믿으니까요.”
“고마워, 나기 쨩….”
“그럼.”
“응, 나중에 또 봐.”
예상과는 달리 너무 싱겁게 포기하길래, 조금 당황하는 동안 인사를 마친 나기 쨩이 멀어져 간다.
나는 나를 믿는다는 말이 기뻐서 실없이 웃었다. 나기 쨩도 많이 변했지. 분명 예전의 나기 쨩이라면 좀 더 귀찮게 굴었을 텐데.
자장가.
얼떨결에 그리 말하긴 했어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더 이상 무언가를 숨기는 건 싫으니까. 단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기엔 조금 부끄러웠을 뿐.
쓰다 만 편지지를 들여다본다.
「선생님에게、
몇 시간이나 분수대에 앉아 쓸 내용을 고민하고 있지만 지금은 이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혹시 누군가에게 보일세라 날개를 파닥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절대 찔려서 그러는 건 아니다.
정말이니까! 결단코 러브레터 같은 걸 쓰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지적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님이 일에 관련되면 나도 모르게 허둥대고 만다.
무슨 말을 쓰면 좋을까.
선생님이라면 무슨 말을 써도 좋아해 주겠지.
선생님.
처음 선생님과 만났던 날이 떠올라.
선생님은 갑작스러운 티파티의 요청에도 선뜻 트리니티를 찾아주었지.
솔직히 말해서 ‘선생님’이라는 ‘어른’에게 처음부터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어. 오히려 묘한 거부감, 약간의 편견, 그런 것들이 뒤섞여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나도 모르게 사람을 재단하려는 눈을 뜨고 있었어.
트리니티의 교직원은 하나 같이 책임지는 것을 싫어했고,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는 데 급급해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을 두려워했지. 마치 학생 등 뒤에 숨은 그림자 같았어.
모든 일에 소극적이고, 예민하고, 자기 일이 끝나면 학생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딱 거기서 끝. 더 이상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려버리지. 학생이 괴롭힘을 당하든, 아파하든, 울고 있든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아.
「헤에~ 선생님이란 건 이렇게 생겼구나. 별로 우리랑 다르지도 않은데?」
하지만 선생님은 어딘가 달라 보였어. 방금 처음 만났을 뿐인 나와 나기 쨩을 보고 선생님은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었어. 만나서 반갑다는 듯, 포근하고 따스하게.
그런 선생님의 모습은 어른인데도 학생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어. 나이를 좀 더 먹었을 뿐인 학생? 응. 딱 그런 느낌.
「어느 쪽이냐면, 나는 좋다고 생각해!! 나기 쨩은? 어때?」
하지만 이상하지. 그 미소는 내가 알고 있는 어른의 모습, 차갑고 삭막한 그 모습들 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보였어.
내가 선생님을 수영장으로 불러냈을 때, 나는 물었어.
「그러면 선생님은 누구의 편이야? 트리니티의 편이 아니라면…, 게헨나? 총학생회? 아니면 그 누구의 편도 아닌….」
「나는 그냥 학생들의 편이야.」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던 그 대답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지극히 선생님다운 대답. 역시 첫눈에 이 사람은 어딘가 다르다고 느꼈던 걸 보면…, 응.
나, 역시 사람 보는 눈은 꽤 좋을지도☆
「저, 저기…. 그렇…, 다는 건…. 선생님은…, 내 편이기도 하다는 뜻…, 도 될까? 저기, 나도…, 이래 봬도 학생이고…. 응.」
「필요하다면 미카의 편이 되어 줄게.」
선생님.
세상에는 정말 많은 별이 있어. 크든, 작든, 이쁘든, 투박하든. 정말, 정말, 많이 있어. 그러니 그 별들이 모두 환하게 빛나려면 정말정말 크고 넓은 밤하늘이 있어야 해. 색이 강하지 않고 모두를 빛나게 해주는, 그런. 그러니까, 바로 선생님처럼 말이야.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생각해 봤어. 분명…, 응. 그러네. 어쩌면 나는 그런 선생님이 품어주는 학생이, 환하게 빛나는 별이 되는 걸 동경했는지도 몰라.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때의 난 제 발로 탑에 들어가 갇힌 바보 같은 여자였으니까.
「선생님…. 미안해…. 난 늘 이런 식이지…. 나 같은 문제아는…, 선생님의 마음을 몇 번이고 아프게 한 아이는…. 선생님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치만, 그치만…. 난….돌아갈 곳이 없어…. 트리니티에도…, 어디에도…. 나는 트리니티의 배신자에다가 공공의 적이고…, 몇 번이고 세이아 쨩을 다치게 하는 마녀라서….」
미안해.
「그런데 너희들은…, 어째서!! 나는 소중한 걸 다 잃어버렸는데! 전부 빼앗겨 버렸는데!! 그런데 어째서 너희들은!」
미안해….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어…. 나도 너처럼…, 선생님을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랬더라면…, 내 잘못을 돌이킬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었어….」
미안해…, 선생님….
그날의 일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아려 와.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으로.
정말 바보 같지, 뻔뻔하고.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며 독단적이고, 충동적이고. 그렇게 스스로 들어간 탑에서 비련의 소녀라도 된 양 굴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런다는 게.
만약 선생님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넌 마녀가 아니야. 넌 그냥 말 안 듣고 사고를 치는 불량 학생이지. 그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너희를 위해 기도할게. 내가 용서받길 갈망했던 것만큼…, 그러니까 너희를 용서할게. 응. 그러니까…. 너희는 마침내 행복해지기를….」
정말로 난 영원히 탑에 갇혀 끔찍하게도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녀가 되었을지도 몰라. 으응, 분명 그렇게 되고 말았을 거야. 세이아 쨩도, 나기 쨩도, 사오리도, 스쿼드도…. 전부….
「선생님, 그러지 마! 나는 구할 가치가 있는 아이가 아냐…. 지금이라도 도망쳐…!!」
하지만 선생님이 날 그 탑에서 꺼내 주었어. 추악하고 미련한 마녀였던 나를 동경하던 밤하늘의 별로, 말을 탄 기사님이 구해주는 이야기 속의 공주님으로 만들어 주었어.
「미카. 너는 문제아가 맞아. 하지만 아무리 문제투성이 불량 학생이라고 해도…. 위험에 처한 학생을 외면하는 선생은 어디에도 없어! 감히, 감히…. 내…. 감히 내 소중한 공주님에게 무슨 짓이냐아아아―!!」
정말.
정말 기뻤어.
아직도 난 선생님에게 폐만 끼치는 나쁜 학생이지만, 응…. 내가 마녀가 아닌 평범한 학생으로 친구들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건 선생님 덕분이야.
고마워―
그래서 더욱, 나는 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탈출 시퀸스. 준비 완료! 선생님! 지시를 부탁합니다!」
―편지를 써 내려가던 손이 멈춘다.
그때를 떠올리자, 손끝을 타고 떨림이 파도처럼 몰려 와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선생님! 남은 건 미카 씨뿐이에요! 얼른 탈출 지시를!」
“…잠깐, 아로나. 조금만 기다려 줘.”
아트라하시스의 방주가 무너진다.
“끝…, 난 거야?”
구멍이 난 외벽을 통해 사방에서 상공의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고, 거친 화마가 박살이 난 구조물들을 타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위협해 왔다.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바닥이 흔들려서 총구를 겨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
그때, 우트나피쉬팀의 주포로 완전히 무력화된 줄 알았던 프레나파테스가 삐걱삐걱 움직이며 서서히 다가왔다.
깜짝 놀라서 총구를 내리고 뒤돌아보니, 선생님은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나의 행동을, 프레나파테스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프레나파테스가 다가온다.
시로코를 닮은 학생을 등지고 학생들의 공격과 주포를 모두 받아냈던 커다란 몸은, 더 이상 지탱하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곳곳에 균열이 일고 부서진 도자기가 무너지듯,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 뭐야?”
그것이 붕대를 돌돌 감은 기다란 손을 나를 향해 뻗었다. 기름칠이 되지 않아 관절이 뻑뻑한 인형처럼 그 단순한 행동조차 고통스럽고 필사적으로 보였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뒷걸음질 치려고 했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그러지 못했다.
「미…, 카….」
“에…?”
극심한 목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물에 잠긴 듯한 목소리였다.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괴리감이 있는, 분명 처음 듣는 게 당연해야 할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나도 모르게 곧장 뒤를 돌아 선생님을 보았지만, 그 목소리는 선생님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마녀가…, 되지 않았구나….」
“….”
오래된 고목나무 가지처럼 차갑고 딱딱한 손가락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다행이야….」
그 목소리는 분명 선생님과 닮아있었다.
비록 찢어지고 뭉개져 버린, 무너진 밤하늘과 같은 것이었지만, 내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목소리. 자상하고 포근한 목소리.
“그, 그럴 리가 없어…. 당신은….”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껏 부정했다. 나의 선생님이 이런 모습일 리가 없어. 선생님은 바로 내 뒤에 서 있잖아.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은 이런 무섭고 흉측한 모습이 아니라, 좀 더 멋지고 어른스러우면서 장난기 어린…. 응. 맞아. 분명, 분명 그랬을 텐데….
「힘…, 냈구나….」
“….”
「미카…. 장하다….」
나는 바보지만,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었다. 선생님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나기 쨩과 세이아 쨩에게 허락과 응원을 받고 우트나피쉬팀의 배에 탑승해 지금에 이른 일련의 과정.
아비도스 대책위원회 학생들에게 생긴 일과, 시로코를 닮은 저 학생의 일, 그리고 선생님의 반응과 거동을 보면 어렴풋이 여기서 생긴 일이 어떤 일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선생님은…, 내 뒤에….”
숨이 서서히 가빠 온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프레나파테스는, 그는 내가 싫어하는 차갑고 삭막한 어른의 표정을 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에 의해 씌워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였다. 그렇게 다정한 말을 한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다.
「미…, 카….」
“….”
애써 부정하려고 했다. 이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라고.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머릿속으로, 내 가슴속으로 무언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미카의 집이 불탔다고 들었어. 이건 너무 심하잖아!’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미카가 세이아에게 제대로 사과할 수 있도록 할 테니까.’
‘미안해. 미카!! 너와 마주보고 제대로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나와 같이 트리니티로 돌아가자. 내가 도울게!! 나는 미카가 어떤 아이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넌 마녀가 아니야, 미카.’
‘이걸로 결제해 주세요. 자, 이제 돌아가자. 걱정 마, 이 정도는 얼마든지 사줄 수 있으니까. 대신 수업 열심히 듣는 거다?’
‘나, 참. 어른을 속이다니, 이 불량 학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중에 당번으로 샬레에 오게 되면 각오해.’
‘고마워!! 미카의 수제 케이크를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한 방 먹었는걸. 맛있게 먹을게.’
‘안 돼. 오지 마. 오면 안 돼, 미카. 그런 몸으로 이쪽으로 와선 안 돼. 난 괜찮으니까, 부탁이야. 다른 학생들이랑 함께 도망쳐 줘. 제발….’
“아아아….”
기억들이었다.
내가 겪었던 일들과.
내가 겪지 않았던 일들.
그 차이가 미묘하게 뒤섞인 일까지.
그 기억들이 서서히 나를 파고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아아….”
손끝이 떨려 온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뜨겁게 달궈져 가는 눈시울은 더 이상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와의 애틋했던 추억이, 간절했던 그날이, 나를 부르던 그 다정했던 목소리가 하나씩 하나씩 사무칠 때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내가 아는.
“아아아아아―!!”
그러니까,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느끼게 된다.
「잘…, 지내야 한다….」
그 말을 끝으로 뺨을 어루만지던 프레나파테스의, 아니. 선생님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어린아이처럼 꺽꺽댔다. 가슴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내…, 내가…, 내가 선생님을 지키지 못해서…!! 내가아아아―!! 내가 약해서…. 선생님…, 선생님이…. 아아아아아….”
뒤죽박죽된 감정이 용솟음치며 벅차올랐다. 숨을 한 번 한 번 내쉴 때마다 심장을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내가 겪었던 일도 아닌데, 붉게 충혈된 두 눈은 그와 함께 지냈던 나날들의 그리움과 후회를 왈칵 토해냈다.
무너지는 방주의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가 툭 하고 떨어진 그의 가면 조각. 지금 그의 얼굴은 그때 그날의, 항상 나를 보고 지어주던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응. 그러네. 어느 세계에서도 선생님은 선생님이었구나.
그 역시 나의 선생님, 나의 기사님이었다.
“미카, 돌아가자.”
“으, 으흐윽…. 안 돼. 안 돼, 안돼안돼안돼안돼…. 선생님…. 선생님―!! 안 돼―!!”
등 뒤에서 들려온 그의 말에 나는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그에게 매달리려 했다. 그는 나 말고도 또 한 명의 ‘시로코’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남은 탈출 시퀸스는 2번뿐. 곧바로 나를 탈출 시퀸스로 돌려보내려 하는 그는 또 한 명의 ‘선생님’과 완전히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 번 죽음을 각오했던 내가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선생님’을 이렇게 만든 다른 세계의 내가 미웠다. 만날 수 있다면 붙잡고 어째서 지키지 못한 거냐고 질책하고 싶었다. 이렇게 후회할 거면서 왜 그러지 못 했냐고 몇 번이나 따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선생님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선생님에게 부탁했다. 탈출 시퀸스를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두 번이나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고. 구할 방법 같은 건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애절하게 떼를 썼다.
하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선생님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나는 학생이었으니까.
뻗은 손이 무색하게도 새하얗고 따스한 빛이 나를 감쌌다.
그날 나는 비록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두 명의 선생님을 모두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지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참이나 영겁과 같은 고통을 지새웠다.
가슴속에 못을 박고 힘껏 긁어대는 듯한 숨 막히는 고통.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력함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선생님은 무사히 우리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이 기적은 어쩌면 또 한 명의 ‘선생님’이 분발해 준 덕분일지도 모른다.
눈을 감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몸으로 여러 세계를 전전했던 ‘선생님’은 아트라하시스의 방주와 함께 폭발해 이제는 정말로 안식을 찾아 먼 곳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 편지는 그런 그에게 들려주는 자장가.
내 노래, 들려주기로 했었는데.
비록 목소리로는 전할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다시 펜을 잡는다.
선생님.
마지막에, 잘 지내야 한다고 말했었지.
응. 덕분에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기 쨩이랑도, 세이아 쨩이랑도 이젠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선생님 덕분에 내게 부족한 게 무엇이었는지,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아, 맞다.
선생님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게 됐지만, 거기서 ‘나’를 만나면 예전처럼 꾸짖어 줄래? 롤케이크라도 먹으면서 말이야. ‘나’도 참. 이렇게―
“어라…?”
편지지 위에 눈/꽃 같은 ‘나’의 사랑이 한 방울, 한 방울 번져 나간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뚝뚝 흐르는 그것들을 케이프에 문질러 닦아내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이렇게 슬퍼할 거면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잖아. 정말이지.
나도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네.
고마워, 선생님.
찾아와 줘서.
이 세계에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잊혀 버린다니, 너무 외롭고 쓸쓸하지 않아?
응. 그러니까.
이젠 잘 자요, ‘나’의 기사님.
당신을 정~말 좋아했던 공주 올림、」
“다 됐다!”
편지지의 글자가 조금 번져서 아쉽기도 했지만, 고이 접어 편지 봉투에 넣었다.
하고 싶은 말을 만족스럽게 썼냐고 하면 글쎄, 잘 모르겠다. 단지 이 이상 붙잡고 있었다가는 참을 수 없게 돼 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선생님’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닐 테니까.
이건 다음 샬레의 당번 때 선생님이 방주에서 가지고 온 너덜너덜한 ‘종이학’ 밑에 깔아둘 생각이었다.
“그럼 세이아 쨩이나 놀리러 가볼까나~”
분명 그가 어디에 있던 우리들의 인연이 우편배달부가 되어 전해 줄 거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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