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티 종합학원의 밤은 언제나 기품이 배어 있다.
가로등 빛이 고즈넉이 흔들리며, 석회암 길 위로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리고 정원 깊숙한 곳, 잘 다듬어진 회양목 덤불 너머의 벤치에 그녀는 앉았다.
무릎 위에 얌전히 놓인 기타에서 손끝을 따라 은은한 선율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마치 유리잔에 담겨 흔들리는 와인처럼 섬세했고, 그녀만의 온기가 담긴 듯했다.
이치카는 문득 기타줄을 누르던 손가락을 살며서 놓았다.
끝맺는 음이 허공으로 사그라들자, 벤치 맞은편 산책로에서 선생이 박수를 보냈다.
“정말 좋은 연주였어, 이치카.”
“하하, 그렇게 좋게 봐주시니 기쁘네요. 감사함다!”
“아냐, 처음에도 훌륭했지만 지금은 정말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는걸?”
이치카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만큼은 트리니티의 온갖 규율도, 격식도 사라져 있었다.
저 멀리, 전통적인 축사의 첨탑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치카는 그 속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흐음... 선생님께선 제가 전에 했던 이야기 기억하고 계심까? 무언가를 오래도록 좋아해 본 적이 없다고요.”
“그래, 그랬었지.”
“다들 제가 뭐 익힌다면서 부러워했지만, 전 그게 하나도 좋지 않았슴다. 오히려 하나에만 쭉 집중하고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러웠슴다.”
그녀가 피식 웃는 말끝에는 평소답지 않은 씁쓸한 공허함이 배어 있었다.
“정의실현부에 들어간 뒤로는 위에 계신 분들 사정도 그렇고, 정신없이 터지는 일들을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늘 적당히, 요령껏 행동하는 쪽으로 저를 바꿔나갔슴다. 과연 그 안에 진짜 제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거기에 대한 답은 찾았어?”
선생의 질문에 이치카는 공원을 에워싼 밤공기를 깊이 들이쉬었다.
“제가 전에 샀던 기타 연습곡들, 전부 연주해 봤슴다. 솔직히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신기했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뭐임까.”
그리고 마음을 다 잡은 듯, 이내 시선을 선생에게로 가져갔다.
“그건 아마, 기타를 치는 내내 선생님이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슴다.”
차가운 바람이 선생과 이치카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때 한 번쯤은...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흔들림 없는 은회색 눈동자 속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긴 시간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터져 나온 고백.
“선생님, 좋아함다.”
그 말은 마치 기도를 닮은 고백이었다.
지극히 성스럽고 간절했으며,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깊은.
“누군가를 좋아해 보는 게 처음이라, 아직도 이게 맞는지 확신이 서진 않지만... 그래도 제 마음을 더는 억누르지 않기로 결정했슴다.”
이치카는 다시 한 번 고백했다.
이번엔 더욱 또렷하고 무게감 실린 목소리로.
“선생님, 저와 교제해 주시겠슴까?”
.
.
.
선생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뭇잎 그림자가 선생의 신발 위에서 가늘게 어른거렸다.
“이치카...”
그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했기에, 그녀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결말로 이끌리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정말 고맙고... 진심이라는 것도 느껴져.”
선생은 입술을 깨물고 갈 곳 잃은 시선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치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선생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우린 어른과 학생의 관계잖아. 나는 교사, 너는 학생.”
“그런 규칙 때문인 검까?”
이치카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규칙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너는 내게 더없이 소중해. 그런 감정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건, 오히려 너를 상처 입히게 될까 봐...”
“하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은 정말 다정하시네요. 저 같은 걸 걱정해주셔서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시고.”
“이치카, 너를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야. 그저 이성으로 볼 수는...”
“뭐, 어차피 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으니 괜찮슴다.”
이치카는 치마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에 기타를 쥐었다.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해주시겠슴까? 선생님하고는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 우리 둘만의 비밀인 걸로 하자.”
“...역시 선생님은 어른이시네요.”
우드득-
어디서 목재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그럼 어른답게 그냥 가만히 계시지 그랬슴까.”
“이치카...?”
그 순간, 금속 현이 진동하며 때늦은 선율을 흩뿌렸다.
그리고 강철성의 마찰음과 함께-
쿵.
벤치 위로 몸이 쓰러지는 충격과 기타줄이 울리는 공명이 정원을 가로질렀다.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아아... 저질러버렸네요. 근데 저에게 어리광을 부려도 된다고 하신 건 선생님이시잖슴까.”
이치카는 상기된 숨을 고르며 기타를 다시 멨다.
선생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조심스레 자신의 등에 업었다.
“까짓거 정의실현부는 그만두죠! 이제 트리니티에는 있기 힘들 것 같고... 선생님,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선생은 기절한 채 이치카의 등에서 가만히 흔들렸다.
뒤편 철길 너머로, 심야 기차의 육중한 바퀴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면 저거 타고 게헨나나 가볼까나...”
![[블루아카,소설] 어리광을 부려도 된다고 하신 건 선생님이시잖슴까_1.png](https://i2.ruliweb.com/img/25/06/09/19752b5f3464df8a5.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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