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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하면…”
눈앞에 쌓여있는 서류 더미를 신들린 것처럼 빠르게 해치워 나간다. 허가, 승인, 반려, 승인, 승인, 전달…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이 허공에 휘날렸다.
“끝났다아아아아아아!!!”
밋밋한 불빛이 비추는 심야의 샬레에, 젊은 성인 남성의 요란한 외침이 울려 퍼진다. 이 압도적인 양의 서류들을 처리했다는 기분 좋은 만족감이 내 마음을 상쾌하게 채운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마침 날짜가 바뀌는 타이밍이었다.
“좋았어! 이제 드~디어 잘 수 있어!”
얼마나 못 잤냐고? …그대는 지금까지 사용했던 AP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 하지만 이제껏 잠을 거의 잘 수 없었던 건 사실이다. 흥분이 채 식기도 전에 나는 아로나를 부른다.
“아로나, 아로나!”
‘으, 으음… 뭐예요, 선생님…’
“내일 이 시간이 되면 깨워줘! 그때까지 잘 거야! 계속 잘 거야!”
‘엥… 근데 그렇게 하시면 업무가 제대로 안 돌아가지 않을까요?’
“괜찮아! 그것도 다 생각해서 일을 끝냈으니까!”
‘그런가요… 흐아암. 그럼 아로나는 졸려서요. 일단 지금은 안녕히 주무세여…’
“최대한 활기차게 부탁할게!”
아로나 쨩에게 알람 설정을 한 뒤에 나는 목욕탕으로 향하기로 했다. 간만에 훌륭한 수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우선은 몸을 깨끗이 씻는 게 도리일 것이다.
의자에 달라붙은 듯한 허리를 떼어내고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사건은 그때 일어났다.
“끄으으… (뿌득) 악.”
…망했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의 한심한 비명소리는 고요한 심야의 샬레에 널리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다. 나의 지옥 같은 24시간이.
“세리나… 세리나…”
아까 전부터 의욕을 잃은 민달팽이 같은 자세로 세리나를 부르고 있지만 세리나의 ‘그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모모톡 화면을 열었더니 이게 웬걸~. 세리나의 프로필 문구에 ‘감기에 걸렸어요…’ 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니겠어요~.
“심각 … 하다고…”
이미 통증은 등 전체로 퍼져나갔고, 내 자세는 이제 의욕 없는 민달팽이에서 한심한 물벼룩으로 등급이 상승하려 하고 있다.
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한밤중에 하나에를 깨우기도 좀 그렇고, 미네가 오면 등 말고 다른 곳까지 ‘구호’할 것 같다는 생각에 통증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세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레이너! 괜찮으신가요!”
“오 세나, 살았… 트레이너?”
바닥에 널부러진 한심한 물벼룩(나)이 힘겹게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스미레였다.
“어, 스미… 응? 왜지??”
“네? 트레이너가 연락하셨잖아요. 허리를 다쳤으니까 치료 좀 부탁한다고.”
…아무래도 나는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다. 아니, 그야 세나랑 스미레는 연락처에서 가깝기는 한데! 그렇긴 한데… 이런 실수를 지금 하면 어떡하냐고!!
하지만 변명을 하기도 전에 스미레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스미레, 이건… 혹시…”
“네! 요통 개선에 도움이 될 만한 운동 메뉴를 제가 생각해 왔습니다!”
“역시나!?”
“운동은 만병통치약이에요! 그러니 분명 트레이너의 요통도 나아질 거예요! …자, 우선은 이 메뉴부터…”
“싫어어어! 싫어어어어어!!”
그렇게 나는 밤의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트레이너. 이제 좀 나아지셨을 것 같은데, 또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그럼 가 볼게요.”
“드, 드디어 해방이다…”
런닝을 뛰면서 밀레니엄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린다. 스미레의 트레이닝은 효과가 있어서 나를 괴롭히던 요통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과정은 건너뛰고 샬레로 다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서 기분 좋게 아침을 만끽하던 중에 나는 비로소 원래 목적을 떠올렸다.
“이게 아냐… 자야지…”
수면을 개시하기로 예정했던 시간으로부터 벌써 7시간이나 지났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아침이다. 지금 자도 충분히 많이 잘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
‘어라, 선생님. 아직 일어나 계셨어요?’
“...그래 아로나. 이래저래 사정이 좀 있었거든. 근데 지금부터 잘 거야.”
‘아… 그게 말이죠 선생님? 실은 오늘 유독 학생들한테 요청이 많이 왔거든요…”
“...구체적으로 말해봐.”
‘으음, 밀레니엄은 엔지니어부, 트리니티는 티파티, 그리고 기타 등등…’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하기 싫네요.’
“그렇겠지. 가 볼까…”
잘 있어, 내 침대야. 다시 만나자. 이곳에서.
‘선생님! 이제 그만 침대에서 손 떼세요!’
“잠잘 수 있는 발명품 같은 건 없나.”
“갑자기요!?”
운동에다 장거리 이동까지 했더니 피로가 쌓여 졸음이 밀려오는 나는 엔지니어부에 오자마자 가까이 있던 코토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흐음, 선생님은 지금 엄청나게 자고 싶다는 거지?”
“그래 우타하. 뭐 그런 발명품 같은 거 없을까?”
“후후후. 사실 오늘 선생님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졸음에 관련된 발명품이 완성되어서야!”
“오오… 그게 뭔데?”
“그럼 소개할게. 이게 바로 엔지니어부의 새로운 발명품… 히비키 군, 부탁해.”
“...짜잔~.”
왠지 좀 나른한 히비키의 팡파르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은 가습기 같은 물건이었다.
“뭐야 이게.”
“설명해 드리죠! 이건 바로 ‘러시안 쿨쿨 군 2’입니다! 옆에 있는 이 버튼을 누르면 이 구멍에서 가스가 분사돼요! 이 가스에는 진정을 돕는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결과적으로 사용자는 그야말로 훌륭한 숙면을 취할 수 있답니다!”
“훌륭한… 세기의 발명품이네.”
히비키의 영문 모를 맞장구를 들으면서 나는 궁금했던 점을 묻기로 했다.
“저기, 코토리. 근데 왜 ‘2’야?”
“그건 말이죠. 초기 모델에서 여러 문제를 개선했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가스 비율부터 버튼을 누르는 방식, 그리고 확률까지… 읍.”
설명을 듣던 중에 갑자기 우타하가 코토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세 사람 모두 장치를 들고 있는 나에게서 멀어지더니, 우타하가 멀리서 말을 건다.
“자자, 신경쓸 거 없어 선생님. 얼른 꾹 눌러 봐.”
“음, 나도 잘 수만 있으면 뭐든지 좋으니까. 그럼 뒤에 의자 좀 갖다놓고… 됐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콰앙!!
“뭐야.”
슈우우우우…
“...터져버렸는데.”
“와, 역시 선생님이야. 설마 간지러운 가스도 끈적거리는 가스도 아니고, 가장 확률이 낮은 소폭발이 나올 줄이야.”
“응, 선생님 굉장하네.”
“선생님! 이 장치를 선생님의 보증을 받아서 밀레니엄에서 파티 용품으로 판매하려는데 괜찮으실까요!”
“...너희들.”
“흐엣.”
“...설교, 할게.”
…그 뒤 엄청나게 설교했다.
티파티가 나를 부른 이유는 그냥 수다를 떨고 싶어서였다… 솔직히 학생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선생으로서의 긍지로 어떻게든 버텨냈다.
나기사는 담담하게 지식에서 기반한 대화를 해 줘서 이야기하느라 지칠 일이 없고, 미카는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대화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세이아는 날카롭게 딴지를 거는 게 재밌어서 결과적으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문제가 일어난 시점은 내가 두 번째 홍차 잔을 리필하고 난 뒤였다.
“...그런 일이 있었어, 나기사.”
“네… 밀레니엄 분들은 참 재미있으시네요.”
“...선생님 잠깐만! 너무 나기 쨩하고만 이야기하는 거 아냐!?”
“...아, 죄송해요 미카 씨. 선생님은 아무래도 저랑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으신가 봐요. 정 그렇게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미카 씨도 뭔가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시면 되지 않나요?”
“윽. 나도 재밌는 이야기 하나둘 쯤은 있거든! 보자… 음, 감옥에서 있었던 이야기 같은 거!”
“그건 너무 무거우니까 그만두시죠… 그보다 선생님. 이것도 또 꿈 이야기인데요…”
“아니 잠깐! 왜 세이아 쨩도 멋대로 선생님이랑 대화하려는 거야!? 순서로 따지면 이제 나잖아, 안 그래 선생님?”
“아뇨, 선생님은 저랑 이야기가 하고 싶으시죠?”
“아니죠. 선생님은 분명 신기한 이야기가 듣고 싶으실 거예요. 뭐니뭐니 해도 이런 이야기는 키보토스 어디를 뒤져도 못 찾을 테니…”
“아 진짜! 세이아 쨩 또 저래! 갑자기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 하려고 하잖아! …선생님! 선생님은 누구랑 얘기하고 싶어!? 당연히 나지!?”
“아니요, 저잖아요?”
“저는 저여도 상관없어요.”
“어, 그럼 차라리 내가 얘기할까…”
…이런 식으로 대화가 벌써 3시간째 이어지고 있다. 힘들다. 이제는 수다를 떨면 말문이 막힐 만큼 할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졸리다. 자고 싶다.
그러고 보니 ‘수다를 떨면’을 줄이면 ‘수면’이 되네. 이렇게 된 이상 다음에는 그 이야기를 해 볼까…
“여러분, 긴급 상황입니다!”
“왜 그러시죠, 맥락없이. 오늘은 선생님이 오시니까 용건은 나중에 말해달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제3교사에 우라와 하나코가 나타났습니다…!”
…순간 세 사람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상황은요.”
“현재 우라와 하나코는 학교 수영복을 입고 제3교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복장을 한 군단을 이끌고 있어서 소동이 더욱 커졌습니다!”
“알겠습니다. 프로토콜: 핑크를 발령합니다. 이 이상 피해가 확대되지 않도록 티파티의 명예를 걸고… 이 키리후지 나기사가 저지하겠습니다! 가시죠, 세이아 씨, 미카 씨. 선생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천천히 하시죠.”
“미안해 선생님. 프로토콜: 핑크에는 꼭 참여하겠다고 약속했거든…”
“뭐 나중에 다시 만나요. 다음에는 악의 복숭앗빛이 없는 트리니티에서 뵙길.”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코 고마워! 다음에 같이 카마수트라 읽자!
“근데 정의실현부는 뭘 하고 있죠? 초기 대응은 그분들이 해야 할 일인데요.”
“그게… 부원들에게 확인해 보니 츠루기 부장과 하스미 부부장이 부재 중이라 초기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으음, 화내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하스미 부부장님 말씀으로는 ‘츠루기의 데이트’라고 하셨습니다.”
츠루기… 데이트… 아.
“맞다! 미안, 나 먼저 갈게!!”
“아! 선생님!?”
“바이바이~☆”
“즐거웠어요~.”
“하아, 하아, 아로나 지금 몇 시야!?”
‘선생님 대사 위에 써 있어요! 그리고 츠루기 씨와 약속했던 시간에 벌써 5분 늦으셨는데요. 어쩌면 선생님은 쓰레기인지도 모르겠네요!’
“메타 발언에다가 매운맛이네 아로나!?”
학교를 나온 나는 약속 장소를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오늘은 츠루기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원래 같았으면 잊어버리지 않았겠지만 약속한 게 3개월 전이었고, 잠을 워낙 못 자서 주의력이 흐트러진 상태였기 때문에 까먹고 있었다.
‘여자아이와 한 약속은 잘 지키셔야죠, 선생님!’
“아로나 너는 왜 안 알려줬어!?”
‘적반하장이네요 선생님!?’
“그야 아로나가 알려줬으면 이렇게 늦을 일이 없었잖아!”
‘...저기요 선생님, 오늘 하루 종일 주무시려 했잖아요? 그런데 제 탓만 하시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네요.”
“...할 말이 없네.”
‘자, 이러는 사이에 벌써 도착했어요!’
“진짜네. 어이, 츠루기 미안…”
순간 내 사고는 멈춰버린다. 그도 그럴 게 믿기지 않잖아? 약속 장소인 기념비 앞에 양 팔로 무릎을 감싸고 쪼그려 앉은 저 소녀가 트리니티의 전략병기 켄자키 츠루기라는 사실을. 그리고 웃고 있는 하스미도 있다… 왜지??
“선생님, 늦으셨네요.”
“미안 하스미. 용건이 좀 있어서…”
“용건이라뇨. 츠루기랑 데이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용건이 있으셨다, 그 말씀이신가요 선생님?”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근데 왜 하스미 네가 여기 있어?”
“...츠루기에게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같이 영화관에 가자고 했다는 이야기를요. 그것도 3개월 뒤인데 수락해 주셨다는 것도… 정말 기쁜 듯이 이야기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츠루기의 저 표정이 보이시나요 선생님! 안 보이더라도 잘 들여다 보세요. 저 길 잃은 아기 판다 같은 표정을요!”
“음, 듣고 보니 좀 닮은 것 같기도… 아닌가? 그보다는 버려진 너구리 같은 표정에 좀 더 가까워 보이긴 하는데.”
“그거야 어찌됐든. 저는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긴장된다면서 츠루기가 데려왔을 뿐이고요… 이제부터 잘 부탁드릴게요.”
“하스미도 고생이 많네.”
“선생님께서 제 시간에 와 주셨더라면 제 마음고생도 덜했을 텐데 말이에요.”
“하하하… 맞다 하스미. 지금 학원 쪽에 프로토콜: 핑크가 발령된 모양이던데. 상황이 제법 심각해.”
“...그렇군요. 이럴 때는 츠루기도 동원하고 싶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할 수 없지요. 제가 혼자 대응하겠습니다… 그럼 선생님, 즐거운 데이트 되세요.”
“야, 하스미.”
하스미가 숨을 헉 삼켰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방금 전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기세등등해 보이는 츠루기가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
“하, 하아. 그럼 저는 이만…”
떠나려는 하스미의 뒷모습을 배웅하는데 갑자기 소매를 잡혔다.
“아… 죄, 죄송합니다! 선생님을 괴롭히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요! 그게 아니라요! 어, 음, 갸아아…”
“...늦어서 미안해 츠루기. 그리고 오늘 불러줘서 고마워. 무슨 영화 볼까?”
“아, 그아아… 그, 이, 이쪽입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츠루기가 내민 티켓에는 [하트풀♡ 멍멍 냐옹 스토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 이건…”
“키에엑!? 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이제는 온몸을 떠는 츠루기의 모습을 보고 나는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걸었다.
“아니, 괜찮아. 츠루기가 열심히 고민해서 고른 영화라고 하니까 벌써 기대가 되네.”
“헷…?”
“...이크. 상영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서두르자 츠루기!”
“겍… 네!?”
머뭇거리는 츠루기의 손을 잡고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옥이었다.
우선 ‘영화관’이라는 상황 자체가 졸음에 시달리고 있는 나에게는 완벽한 수면제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몰래 잠을 좀 잘까 싶어서 옆에 있던 츠루기를 봤더니 왜인지 스크린이 아니라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잘 수 있을 리가 없다. 난 츠바키가 아니라고.
…게다가 영화 내용 자체가 어디 다른 곳에서 DVD나 보는 게 더 감동적일 만큼 허접하고, 지겹고, 더럽게 재미없었다. 뭔데 저게. 버려진 너구리랑 길 잃은 아기 팬더가 주인공이라니. ‘멍멍’도 ‘냥냥’도 한번 비틀렸잖아.
어쨌든 나는―도중에 내가 영화를 보는 건지 눈꺼풀이 내려가지 않게 버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훌륭하게 영화를 다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츠루기와 헤어져 샬레로 돌아왔다.
“돌아오면 잘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왜 그래 선생님. 자면 되잖아.”
“어디서 주무시는지가 관건이지만요… 우후후♡”
“자, 주군! 어서 쉬세요!”
…자, 상황 설명을 해 보자.
우선 낮잠용 침대 위에 시로코. 평소에 내가 자는 소파에 누워 있는 와카모. 그리고 커다란 비즈 쿠션 위에 쪼그려 앉아 있는 이즈나.
…이와 같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샬레에 들이닥치는 동물귀 학생 대표 세 분께서 자리하고 계셨던 것이다.
“너희 어디로 들어온 거야…”
“응, 천장.”
“정면으로 당당히요♡”
“이즈나는 언제나 주군 곁에 있습니다!”
“으음, 수리하기가 무섭네.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아마도 찾아올 유우카 표정이 무서워.”
“...당신? 제가 모처럼 와 있는데 다른 여자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기, 기분 탓이야 와카모… 그래서 다들 여기서 뭐 해?”
“네! 저희는 누가 주군과 동침할지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응, 하지만 논의는 교착 상태… 그러면 각자 휴식할 수 있는 위치로 흩어져서 선생님이 먼저 온 곳에 있는 사람이 동침하기. 그런 규칙을 정했어.”
“그게 공평하지요… 자 당신? 이 소파, 이 와카모가 따뜻하게 데워 두었답니다. 당신의 냄새가 듬뿍 배어 있어서 냄새를 맡고만 있어도 행복하지만, 만약 당신과 함께 잘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지요…!”
“응, 안 돼 선생님. 이런 녀석이랑 같이 자면 선생님이 위험해. 선생님은 편하게 침대에서 자고 싶지? 그럼 여기로 와. 비어 있어.”
“주군…”
크윽, 참 어려운 선택이다. 와카모라면 오늘 하루가 끝이 아니라 원하는 만큼 자게 해 줄 것 같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쌓일 서류를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니까 기각이다. 시로코는… 응, 뭔가 잘 모르겠지만 ‘시들어버릴’ 것 같다. 그리고 이즈나는 귀엽다.
“으음…”
“봐, 선생님이 고민하고 있어… 역시 직접 싸울 수밖에 없겠어.”
“우후후…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에, 엣!? 이즈나는 딱히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요!?”
“음, 그럼 이즈나 쪽으로 갈까.”
“선생님.”
“당신.”
“...라고 할 뻔. 미안 이즈나,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네.”
“그, 그럴 수가!? 주구운!?”
눈물을 글썽이는 이즈나. 미안해. 인간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압력이라는 게 있거든. 하품을 참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린다. 아무래도 이제 활동할 수 있는 한계가 다가온 것 같다.
“그럼 다들 결정되면 알려줘. 그때까지 난 좀 잘게…”
“아니 선생님, 안 재울 건데?”
“...ㅇㅖ?”
“맞아요, 당신. 이건 당신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 이른바 성전… 이 와카모의 승리를 지켜봐 주셔야 한답니다♡”
“어, 으음. 이즈나가 보기에는 빨리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그럼 이즈나는 선생님 옆에서 잘 권리가 없어.”
“에!? 그건 싫어요! 주군, 똑똑히 잘 보세요! 인법! 두들겨패기의 술! 와바바박!”
“아하하~. 나는 언제쯤 잘 수 있을까...”
“아아… 피곤해…”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싸우다 지친 셋은 거의 똑같은 타이밍에 잠들어 버렸다. 결국 잠들 수 없었던 나는 세 학생을 침대에 눕힌 뒤에 폭발물인지 뭔지 모를 물건 때문에 더러워진 방을 치우다 보니 어느새 이런 시간이 되어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수면욕이 온몸을 강타한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고, 눈꺼풀도 서로 달라붙으려 한다.
“그래도… 이제… 잘 수…”
침대는 쓸 수 없으니 평소처럼 소파에 쓰러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뭐야 이 시간에… 아코?”
…솔직히 안 좋은 예감이 들지만 그냥 끊을 수도 없으니 일단은 받아보기로 한다.
“여보세요.”
‘선생님! 내기해요! 제가 이기면…’
“미안, 졸려.”
전화를 뚝 끊고 느릿느릿 소파에 다이빙하기… 직전.
‘선생님? 못 들으신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저랑 내기를 하셔서 제가 이기면…’
“잔다니까, 응?”
다시 힘겹게 전화를 끊었더니 곧바로 핸드폰이 울렸다.
‘죄송해요 선생님… 저는 그냥 제 투정을 조금만 받아주셨으면, 해서…’
“어… 나중에 하면 안 될까.”
‘네에… 이제 진짜, 못 참겠어서요…’
통화 너머로 들리는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시끄러워
…이대로는 도저히 잘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조금만 이야기를 들어 주기로 했다.
“알았어, 그럼 조금만 들어줄게… 근데 나 진짜, 진짜 너무 졸리니까 적당히 조절해 줘.”
‘! 감사합니다! 그럼 우선 오늘 편의점 도시락부터 이야기할 건데요.’
“뭐?”
‘후우. 이제 후련해졌으니 이만 끊을게요. 선생님도 일찍 주무세요.’
“아하하, 응. 그래야지. 젠장.”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시계를 보니 세상에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안 돼,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햇! 이제 진짜 안 자면 죽는다고!!
“이렇게 된 이상… 츠바키에게서 받은 강제로 혼수상태가 되는 약을 써서 즐거운 꿈나라로 렛츠고 할 수밖에… 근데 저건 부작용이…”
아, 이제 부작용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다. 졸리다. 눈앞에 별님이 보인다. 아니, 혜성도 보인다.
응? 저 혜성이 이쪽으로 다가오잖아?
콰앙!!
“뭐야.”
슈우우우우….
“...터져버렸는데.”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샬레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 그러자 핸드폰에 알림이 1건 도착했다.
‘모모이: 선생님! 아리스가 똥겜을 구제한다면서 빛의 검을 날려버렸는데, 잘 생각해보니까 그쪽 방향에 샬레가 있잖아. 괜찮아?’
나는 “밤하늘이라는 게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라고만 답장했다.
‘선생님! 약속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약속 시간이에요! …아직 잠이 덜 깨신 것 같네요 선생님!’
“응… 그러게…”
‘그리고 나나가미 린 씨에게서 온 메시지입니다! 읽어 드릴게요. 업무를 지체하는 것도 이제 한계입니다. 더 이상 쉬고 계실 여유가 없습니다. 라고 하시네요!’
“응… 그렇겠지… 젠자아앙…”
…그렇게 나의 지옥 같은 24시간은 막을 내렸다. 과연 내가 다음에 잠드는 건 언제일까?
일단 나는 이제 폐허나 다름없는 샬레에서 요괴 MAX로 도핑을 했다.
![[블루아카,소설] 선생님과 지옥의 24 hours: 나는 언제쯤 잘 수 있을까_1.jpg](https://i1.ruliweb.com/img/25/03/01/1954fea13244df8a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