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아마추어 번역하다가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여기에 올려봄. 반응 좋으면 가끔씩 다른 글도 올려볼 예정.
사전 정보
Infinity the Game (나무위키 링크): 서반아에서 제작된 SF 사이버펑크풍 미니어처 게임. 전쟁망치(워해머 40K)로 유명한 노팅엄 촌놈들만큼은 아니어도 세계적으로 꽤나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랜차이즈다. 국내 커뮤니티에서는 인피 혹은 잉피로 통칭. 처음에는 번역만 올리고 말까 했는데 미니어처 게임이 그렇듯 인피니티도 워낙 마이너한 게임이라 장문의 설명글을 덛붙이게 됐다. 인피니티가 뭔지 대충 아는 사람들은 맨 아래로 가서 번역부터 보면 된다.
배경설정
인피니티의 배경은 22세기 후반에서 23세기 초반의 미래. 인류가 자원 고갈과 기후 변화로 박살난 지구에서 탈출해 (두 번째) 우주 개척에 성공한 세계다. 전반적인 디자인이나 용어는 공각기동대로 대표되는 일본계 애니메이션과 사이버펑크 장르의 영향을 받았지만, 범우주 국제기구인 O-12의 힘이 꽤 빵빵하고 민주주의와 복지 체계가 보편화된 덕분에 다른 일반적인 사이버펑크 장르와는 달리 판오세아니아(남아메리카+유럽+호주+동남아시아 군도 연합) & 유징(한국 포함 동아시아 대륙 전체+인도차이나 반도) & 하퀴슬람(이슬람판 종교개혁 탈지구 국가)처럼 힘도 세고 땅(행성)도 넓고 돈도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면 나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옛날에 한창 난리였던 보코하람이나 IS 같은 놈들이 깽판치면 O-12 직속 군경 부대인 이지스국이 우주전함을 몰고 와서 대갈통을 깨버린다. 물론 20~30년 전에 세계대전급 전쟁도 한 번 벌어졌고 지금은 미치광이 외계인 군대가 국제기구가 소재한 행성 코앞까지 침략해왔다가 간신히 휴전 협정을 맺은 상황이지만,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디스토피아나 아포칼립스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다. (외계인 점령지 제외)
하지만 현실의 지구가 그렇듯이 힘겹고 빡빡하게 살아가는 동네도 넘쳐난다. 인피니티 세계관에서 그런 빡빡한 동네의 대표 주자가 바로 유랑자 공동체(Nomad Nation)의 일원인 코레히도르다. 인피니티 세계관에서 유랑자 공동체(링크)란 마피아, 용병, 아나키스트, 이교도 수녀단, 무소속 해커, 매드사이언티스트 같이 세상 사람들이 질색하는 부적응자들이 코레히도르, 퉁구스카, 바쿠닌이라는 세 척의 초거대 우주선에 나눠타고 우주를 돌아다니면서 지들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떠돌이 무정부 연합체다. (물론 그와 동시에 국제 기구에서 안전보장이사회에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목소리 큰 거물이기도 하다. 그게 뭔 미친 소리냐고? 미친 소리 맞다.)
유랑자 모선들 중 하나인 코레히도르는 본래 우주를 쏘다니는 초거대 감옥선이었다. 어쩌다 이런 물건이 생겼는고 하니, 21세기 중초반 즈음에 ㅁㅇ 카르텔들이 서로 총질하다가 급기야 높으신 분들의 아이들로 가득한 버스에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 있었다. 이에 눈이 뒤집힌 부모들은 인권이고 뭐고 다 씹어버리면서 목숨만 붙여두는 아우슈비츠 수준의 우주 감옥선을 만들고 거물 범죄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넣었다. 헌데 처음 감옥선을 만들 때는 좋았는데, 앞에서 설명한 자원 고갈이랑 기후 위기, 실패로 돌아간 첫 번째 우주 개척 시도로 인한 미국+러시아+유럽의 몰락과 주식시장 붕괴로 세계가 개판이 되자 코레히도르를 만든 국가들도 제 앞가림 하기 바쁜 처지가 됐다.
그렇게 텅장 신세가 된 국가들은 지들 딴에는 아주 기똥찬 해결책을 내놓았다. 주식시장 붕괴의 충격이 조금이나마 극복되고 나름대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기 시작할 즈음에 지구 전체를 둘러싸는 궤도 엘리베이터망 건설이 시작됐다. 헌데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이민자의 유입과 건설 업체들끼리 용병 고용해가며 벌인 멱살잡이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질 적도 부근에 위치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대량의 난민이 발생했다. 코레히도르 후원 재단은 재소자들을 적당히 사면시키고 거주 모듈도 확장하고 수경재배농장도 마련하면서 감옥선을 그나마 사람사는 곳으로 바꿔놨다. 그런 다음에 재단은 적도에서 발생한 수많은 난민들을 감옥선에 꾸역꾸역 쑤셔넣어서 난민 캠프로 만든 다음... "민영화"를 통보했다. 그렇다. 감옥선을 만든 국가들은 배 안에 수많은 범죄자와 간수들, 난민들을 채워넣고는 그대로 우주에 투기한 거다.
다른 프랜차이즈였다면 이 초거대 쓰레기통은 아마 월-E 절망판처럼 지구 귀향 블록버스터를 찍을 완벽한 장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레히도르는 우주에 남았고, 결국 살아남았다. 처음에 코레히도르는 냉동 수면실에 처박힌 거물급 죄수들을 경쟁 조직에 팔아넘겼다. 덕분에 지구에서는 누가 그 죄수들을 차지하냐를 두고 존윅 저리가라 할 마피아 전쟁이 터졌지만 알 빠인가? 어차피 그 지구에서 버려졌는데. 그렇게 사람을 팔아가며 얻어낸 돈으로 전직 감옥선 겸 난민 캠프는 첫 고비를 넘기고 생존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당분간 굶어죽거나 질식사할 걱정이 없어지자 거주민들은 외부에 그나마 정상적인 서비스를 팔 생각을 했다. 전직 교도관들은 감방에 남은 카르텔 똘마니와 반군 빨갱이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용병 사업을 벌였고, 우주에서 생활하면서 무중력 작업에 도가 튼 난민들은 온갖 기업에서 러브콜을 받는 심우주 건설업자가 됐다. 난민 거주 구역에서는 갱단이 창궐하고 용역 사업 도중 돈을 떼먹은 고용주 머리에 총구를 들이미는 등 갖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코레히도르는 결국 불편하게나마 몸을 누일 자리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출신이 출신인 만큼 인류계(Human Sphere)에서 코레히도르인이라 하면 종잡을 수 없는 또.라이나 파업이나 일삼는 깡패들로 취급한다. 하지만 코레히도르는 이런 바깥의 시선에 눈도 꿈쩍 안 한다. 열강들끼리 치고받는 게 일상인 인류계에서 용병 시장은 언제나 호황이고, 궤도 정거장이나 소행성 광산은 코레히도르 노동자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곳이 수두룩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코레히도르인들은 자기들을 버린 바깥 세상을 절대 잊지 않았다. 이들은 누군가가 뒷담화를 하면 중지를 날리고, 손을 올리려 하면 아랫도리를 물어뜯는다. 이들은 머릿속이 폭력과 ㅅㅅ로 꽉 들어찬 짐승들이지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옥으로 뛰어내려 염라대왕의 코털이라도 뽑아올 순정남들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코레히도르인들은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엷은 공기를 마시고 녹슨 대갈못을 씹어먹으면서 땀 대신 산성액을 흘리는 우주 최강의 개.자식들이다. 그럼 이제 대충 코레히도르가 뭐하는 곳이고 어떤 인간들이 사는지 알았을 테니 원하는 사람은 아래에 있는 코레히도르 사람들 본인의 이야기(통번역)를 읽어보자.
“바닥에 드러누운 채 뱃속에서 게워낸 걸로 목이 막힐 때 너희들은 무슨 생각을 하나? 그렇게 맛이 간 상태로 누워있는데 너흴 때려눕힌 새끼들이 네 몸을 밟아대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지?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승리한다. 포기하는 자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 이게 앞으로 너희가 해야 할 생각이다. 우리 유랑자 싸움꾼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비뚤어진 미소를 보여주고, 누운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놈들의 아랫도리를 빠르고 호되게 후려갈기는 거지! 그렇게 싸우는 게 너희가 이곳에서 배울 것들이다. 너희가 배울 건 단순히 청소하고 땜질하는 법 뿐만이 아니다. 바로 이곳, 이 자리에서, 너희들은 진정한 코레히도르 정신을 배우게 될 거다.”
안토니오 롬바르도, 그린 유지보수팀의 교육 담당자. 초기 예비 교육 과정. 코레히도르.
호흡세
코레히도르에서는 그 무엇도, 숨쉬는 것조차도 공짜가 아닙니다. 독립 당시 엄청난 고난을 겪은 코레히도르는 모선 거주민들에게 경제적 희소성에 대한 개념을 주입시켰고, 이 철학은 이후 유랑자 우주인들이 품은 거친 생존 정신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우주에서는 모든 것에 가격표가 따라붙습니다. 행성에서 산소와 같은 일부 물질은 너무 흔해서 당연한 것처럼 무료로 마음껏 마시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주선 안에서는 그 모든 물질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닙니다. 우주에서 산다는 것은 곧 매 순간마다 호흡할 공기를 소비한다는 뜻입니다. 모선을 항해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코레히도르의 모든 거주민들은 반드시 돈이나 노동으로 호흡할 공기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 법을 어긴 사람은 체포되어 밀린 세금을 갚을 때까지 강제로 유지보수 업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호흡세에는 어린이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6세 이상의 어린이들은 모두 그린 유지보수팀에서 매주 정해진 시간만큼의 노동을 해야 합니다. 유지보수팀에 들어간 아이들은 기본적인 청소 및 유지보수 기술과 비상사태 대응절차, 무중력 환경에서 움직이는 법들을 배웁니다. 그린 팀에서는 아이들에게 근면성실함을 강조하며, 코레히도르의 승무원이 가져야 할 마땅한 덕목을 익히도록 가르칩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우주처럼 혹독한 환경에서는 어떠한 준비도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 체계를 통해 코레히도르는 모선의 시민들에게 우주에서의 생활을 준비시키고 유사시 함선에 투입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시민은 용납되지 않으며, 성실한 노동을 거부한다면 남은 선택지는 우주복 없이 우주유영을 하는 것 뿐입니다. 코레히도르의 법은 우주선 바깥의 진공만큼이나 무자비합니다. 모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코레히도르, 너무나 가깝고도 먼 곳’의 방영분. 무역 협력국과의 관계 증진을 목적으로 유랑자 공동체가 제작한 교육용 쇼 프로그램 시리즈.
“지구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반기지 않았어. 그래서 그 치들은 우리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이곳에 보냈지. 이곳에 보내진 사람들이 범죄자였는지 추방자였는지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어. 이 배는 우리를 위한 종착역 겸 무덤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대신 코레히도르는 우리가 다시 일어서서 놈들과 맞서 싸울 장소가 됐지. 바로 이곳에서 바깥의 어둠을 이겨내려는 끊임없는 싸움이 시작된 거야. 이곳에서 우리는 태양 방사선으로 검게 달궈졌고, 이곳에서 우리는 불과 피로 자유를 쟁취했어. 이게 바로 우리에게 코레히도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야.”
레베카 아라켈랸, 그린 유지보수팀의 교육 담당자. 초기 예비 교육 과정. 코레히도르.
성중립 화장실
코레히도르에서의 삶에 대해 사람들이 황당해하거나 때로는 기겁하게 만드는 일 중 하나는 선내의 공중화장실이 모두 남녀공용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이 유랑자 모선의 변소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옆에 있는 운석머리 중 한 명에게 코레히도르에서 성별 구분 화장실이 언제, 그리고 왜 없어졌는지 물어볼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듣게 될 대답은 십중팔구 과거 코레히도르가 우주를 떠다니는 교도소였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도시 전설입니다. 일명 “바랑키야의 여왕”이라 불렸던 그리셀다 카마르고 휘하의 카리브 카르텔이 해체되고 프라에시디오에 새로 여성 수감자 모듈이 생겼을 때의 이야기지요. 여왕은 다른 위험한 여성 범죄자들과 엄선된 인재들로 구성된 여성 교도부대와 함께 이송됐습니다. 아마 새로 온 직장 동료들에게 위기감을 느꼈는지, 일부 프라에시디오 교도관들이 장난으로 모든 선내 화장실에 “개쩌는 씹새끼용”(BAMFs, BadAss MotherFucker)과 “계집애용”(Pussies)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은 사건이 있었죠.
신입들은 장난에 조금도 재미있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들은 근무 내내 수많은 갱단 전쟁과 감옥 폭동을 겪어온 노련한 베테랑들이었고, 개쩌는 건 물론이요 완벽한 씹새끼들이었죠. 그래서 대원들은 남자 동료들과 같은 화장실을 쓰는 걸로 응수했습니다. ‘계집애용’ 화장실은 완전히 쓸모없는 상태로 남겨졌고요. 화장실 줄이 너무 길어지고 ‘개쩌는 씹새끼’들이 요실금 증세를 보일 지경까지 되자, 장난을 친 장본인들은 결국 항복 선언과 함께 개쩌는 씹새끼용 팻발을 새로 인쇄해야 했죠. 바로 그 순간부터 남녀 공용 화장실은 코레히도르에서 일상적인 풍경이 됐습니다. 배 안에 가득한 성별 불문 개쩌는 씹새끼들에게 화장실 팻말은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도시 전설: 코레히도르’, 스플래시! 제공 쇼 프로그램. 스플래시!, 배짱있고 대담하게!
"손자 씨는 너무 점잖은 사람이라 솔직하게 속내를 말하길 꺼려하는 거요, 부인. 그처럼 저명한 전략가가 이곳에 – 그러니까 이만큼 중요한 위치에 – 유랑자 분견대를 배치하길 원한다는 건 우리를 믿기 때문이오. 일이 엿되기 시작할 때 소방수 역할을 해달라는 거지. 내 설명하리다. 우리 같은 코레히도르인들은 문제가 생길 때면 언제나 문제가 되는 놈들이 사라질 때까지 쳐죽여서 지옥문 구경을 시켜준다오. 못 믿겠다면 당신네들의 사랑스러운 알레프한테 가서 물어보시오...”
후안 사르미엔토, ‘멕시코 장군’. 파라디소 통합사령부에서 진행된 초기 회의에서. 모선 O-12S ‘불굴의 의지’의 지도실. 파라디소 성계. 1차 공세.
- - -
용어 설명
손자: 손자병법을 쓴 바로 그 손자. 주요 열강 중 하나인 유징 제국에서 참모 역할을 시키기 위해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손자의 인격 복제품, 일종의 군용 인조인간으로, 현대전에 맞춰진 지식과 전술 능력을 모두 갖춘 세계관 최고의 전략가 중 하나.
알레프: 인피니티 세계관에서 중요한 국가행정과 치안유지 업무를 보조하는 인류계에서 유일하게 자아를 가진 강인공지능. 위의 손자를 만들어낸 것도 알레프이며, 국제 협정인 단일 AI 법안에 따라 불법 AI 개발 등을 단속하고 처벌하기 위해 특수상황부서라는 자체적인 군경 집단(일단은 국제기구 소속)을 보유하고 있음. 유랑자 공동체, 특히 바쿠닌이 현대판 빅브라더&적그리스도라며 질색팔색하는 대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