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 中, 정명수.
병자호란과 그 이후의 조청관계에서 그 역할이 크게 부각된 청의 인물로 굴마훈이라는 존재가 있다. 굴마훈은 본시 조선 은산현의 천례 내지는 관노였으며 그 본명은 정명수였다.1정명수의 활동 시기는 병자호란 이전, 조선과 후금간 전간기 시기서부터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나 그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파악된다.2
정명수3는 조청관계, 그의 입장에서는 청조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고 자신의 입지가 상승하자 자신의 막강해진 대조선 영향력을 이용하여 조선에 존재하는 자신의 친지들에게 부귀를 나누어 주려고 하였다. 본시 조선인이었기에 조선에 남아 있는 친지들도 적잖았던 데다가, 그의 부인 중 한 명 역시도 조선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조선인 부인으로 부각되는 인물은 정주의 봉씨 여인이었는데, 정명수는 그녀를 무척이나 아꼈기에 그녀의 처가 역시도 신경을 써주었다.
정명수가 챙긴 대상으로 봉영운이라는 이가 그 존재가 유명하다. 봉영운은 부인 봉씨의 남동생이었고 본래 관노였다. 정축년(1637년) 정명수는 그에게 관직을 주도록 우의정 신경진에게 청하였고, 신경진은 이 사실을 인조에게 고했다. 인조는 이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으나 결국 정명수의 청을 받아들였다.4 단 실직을 내리지는 않고 당상 절충장군의 직첩을 내렸다.5
2년 뒤인 1639년에, 정명수는 봉영운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자신의 뜻을 올렸다. 그는 이번에는 봉영운을 실직에 제수해주기를 원하였다. 그것도 서로6의 변장으로 제수해주기를 원하였는데, 이는 봉영운의 출신이 정주로서 평안도였기 때문으로 유추된다. 이는 처남에 대한 정명수의 세심한 배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7
정명수가 1639년에 봉영운에게 실직을 제수하길 원한 것은 조선내에 존재하는 자신의 친지들에게 실제적인 힘을 부여하여 조선내에 자신의 친지들로 이루어진 기반을 다지고자 했던 것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술하겠으나 당시 봉영운이 올린 서장을 보자면 1639년 정명수가 봉영운에게 실직을 제수하기를 청한 시기가 봉영운의 모친이자 정명수의 부인인 봉씨의 모친의 상(喪)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자면 봉영운에게 실직을 제수하기를 원한 것은 장모의 죽음에 대한 정명수 본인의 나름의 성의표시였을 것으로도 사료된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 때에 정명수에게 만호, 혹은 첨사의 직임을 내렸다.8 봉영운은 이전의 절충장군직 자체는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되나, 이어진 정명수의 청으로 인한 실직 제수는 완곡히 거부의 뜻을 밝혔다. 그는 "본인은 본시 천한 노비의 몸으로서 공도 없는데다가, 현재 어머니9의 상중에 있는 와중에 정명수의 처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관인을 맡게 되었는데 실직을 받음으로서 모친의 상을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라고 하면서 직첩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누차 봉영운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봉영운을 기껍게 여긴 탓이라기보다는 그의 뒤에 있는 정명수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서 몇 차례고 다시 제수를 시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봉영운은 자신의 분수를 내세워 모두 거절하였다.10
웹툰 칼부림의 정명수. 고일권 작품.
그 뒤 정명수가 다시 봉영운에게 실직을 내려주길 청한 것은 1642년이었다. 정명수는 이번에는 봉영운에게 지방관의 벼슬을 내려주길 원하여 평안감사 구봉서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고, 구봉서는 정명수의 뜻을 다시 묘당에 보내었고 묘당은 다시 인조에게 그 사실을 전하였다. 인조는 이에 대해서 정봉수에게 지난 날 변장의 실직을 제수하였기는 하였으나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방관은 변장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하며 거부의 뜻을 내비쳤다.
이에 대하여 비국에서는 "완급과 경권은 각각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니, 때에 따라 변통하는 조처를 그만둘 수 없다."고 하며 정명수의 청을 따라 봉영운에게 지방관직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고 인조는 이를 부득이하게 수용하였다.11이에 따라 봉영운에게는 영원 군수직이 내려졌다.12
정명수의 청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영원군수는 봉영운이 부모의 제사와 분산을 지키는데에 어려움이 많으니 임지를 바꾸어 줄 것을 청하였다.13좌의정 신경진과 우의정 심기원이 이에 대하여 정명수의 청을 받아들여주는 것이 낫다고 아뢰었고, 인조는 정명수의 거듭된 요구를 다시 한 번 수용하여 봉영운을 평안도 순천의 군수로 바꾸어 제수키로 했다.14
그러나 봉영운은 이번에도 역시 자신에게 내려진 직첩을 사양하였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자신의 분수를 앞세워서 실직을 받는 것을 거절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15인조는 봉영운의 그러한 행동을 '가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봉영운의 의기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 이후 정명수가 조선 조정 측에 봉영운에게 관직을 내려달라는 요청을 한 기록은 살펴지지 않는다. 조심스러우나, 아마도 봉영운이 실직을 수여받고 임지에 부임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거절하며 겸양을 표하는 상황에서 이 이상으로 조선 조정측에 실직 제수 요청을 하더라도 큰 의미가 없을 뿐더러, 처남의 뜻이 확고하기에 그를 존중해 주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록을 살펴보자면 봉영운은 조선 조정이 정명수의 뜻에 따라 절충장군의 품계를 내리기 이전에 이미 사과(司果)를 지냈다고 한다.16 이는 봉영운이 본디 관노였다는 사실에 일부 대치된다. 더불어 정명수가 권력과 부귀에 대한 집착이 강했음을 생각해 보자면 그가 관노 봉영운의 누이인 봉씨를, 첩도 아닌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 역시도 약간 의아한 부분이다. 그러나 기록상 봉영운이 자신이 본디 천례였다고 증언한 것을 살펴보자면17 봉영운이 관노였던 전적이 있음이 틀리진 않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본래 관노였으나 정묘년 혹은 병자/정축년에 의병등으로 활동하여 면천을 받고 나아가 사과의 직첩을 받았던 것이거나, 기록상 나타나지는 않으나 정명수가 1637년 음력 11월에 청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 조정에 봉영운에 대하여 한 차례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일단 사과의 직첩을 내렸었거나, 혹은 모종의 일로 양반에서 관노로 떨어졌던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2번째 가정의 경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기록상의 인조의 반응을 보자면 정명수의 청에 따른 봉영운에 대한 관직 제수는 1637년 음력 11월이 최초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봉영운이 자신이 공이 없다고 말한 기록 탓에 정묘년은 몰라도 병자/정축년에 의병으로 활동했다는 추론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질 수 있으나, 봉영운이 겸양을 표하기 위해, 혹은 의병활동을 하긴 했으나 전투공적은 없기에 이러한 말을 했을 수도 있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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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음력 2월 3일, 동명집 제 18권 묘지 弼善贈吏曹參判鄭君墓誌
2.승정원일기 인조 9년 음력 4월 2일 기사서 이미 통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굴마훈이 기술된다. 또한 청의 기록에서도 비트허시 굴마훈의 이름이 1631년 이전부터 언급되나,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3.이하부터 굴마훈과 정명수를 혼칭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보다 익숙한 이름인 정명수로 서술한다.
4.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음력 11월 29일
5.승정원일기 동년 동월
6.여기서는 평안도를 지칭한다.
7.조선왕조실록 인조 17년 음력 6월 28일
8.조선왕조실록 인조 20년 음력 윤11월 12일
9.정명수에게는 장모가 된다.
10.조선왕조실록 인조 17년 음력 8월 6일
11.조선왕조실록 인조 20년 음력 윤11월 12일
12.승정원일기 인조 20년 음력 윤 11월 12일
13.승정원일기 인조 20년 음력 12월 17일
14.조선왕조실록 인조 20년 음력 12월 19일. 조선왕조실록 인조 21년 음력 5월 21일에는 순안군수로 임명하였다고 하나 전기록을 따른다.
15.조선왕조실록 인조 21년 음력 5월 21일
16.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음력 11월 29일
17.조선왕조실록 인조 17년 음력 8월 6일, 永雲呈狀曰, 本以賤隷, 又無功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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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성글에 추천을 아니 드릴 수 없지요. 두 번째 추천이 제가 드린 추천입니다. 영화 남한산성 좋아했는데, 관련 역사 얘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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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손자들 같은 경우 통사관, 외교쪽으로 가기보다는 청 국내에서 무관쪽으로 갔고, 또 정명수가 뭔가 자신의 역할을 누군가에게 맡기기 전에 청 국내에서 조선에서 벌인 패악질과 월권행위 등으로 인해 호부상서 바하나에게 직접 순치제에게 고발되었고 숙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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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사소한 거까지 기록으로 남긴 만큼 뒤지면 재밌는 썰이 많이 나오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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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때 거기서도 내쳐졌다고 함. 조선에 있던 친척들은 조정에서 알아서 처분했고. | 23.09.14 19:0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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