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만주실록
1606년 음력 6월 23일에서 24일 사이, 여진계 세력인 울라의 버일러(군주) 부잔타이가 파견한 공격군이 지금의 훈춘 지역 일부에 해당하는 피오 호톤(조선명 : 현성)을 공격했다. 당시 피오 호톤에 존재하던 번호세력 연합군은 조선의 기록을 통해 보건대 대략 375명이었다. 울라군의 수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으나 공술 기록에 대군(大軍)이라는 언급이 보이는 점1, 70여개의 사다리를 동원했다는 언급2등을 보건대 그 수효는 피오 호톤에 존재하던 번호 병사들을 압도하는 수효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동시에 피오 호톤을 결국 함락시키지 못한 점을 생각해 보건대 피오 호톤에 존재하던 군대의 4, 5배 이상의 수효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족한 생각으로 판단해 보건대 대략 1천여명이 파견된 병력의 수효였지 않을까 싶은데, 당시 울라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누르하치의 건주 세력의 군대가 동해 여진에 대한 작전에 흔히 1천 단위의 군대를 투입했던 점을 생각해 보자면 그와 비교하여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앞서 서술했듯 해당 군대는 피오 호톤의 함락에 실패하였으며 결국 퇴각하였다. 이 승리 이후 피오 호톤에 모인 반 울라 번호들 중 일부가 누르하치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는 결국 1607년의 오갈암 전투가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의 글에서는 짚고 넘어갈 만한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따로 언급치 않았지만, 부잔타이는 피오 호톤을 공격하기 전에 또 다른 번호 세력인 사을자고 역시도 공격했다. 사을자고는 조선의 기록상에서 보여지건대 피오 호톤(조선명 현성)과 더불어서 울라에 저항하던 번호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을자고는 실록상에서 1606년부터 언급되었는데 그것을 보자면 그 이전까지는 그리 대두되지 않은 번호 세력이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울라가 건퇴 전투에서 조선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과 강화협상에 들어가는 동시에 번호들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피오 호톤과 함께 울라에 대한 저항을 결의하면서 그들의 존재가 기록상으로 끄집어내진 것 같다.
부잔타이로서 사을자고는 보다 거대한 거점인 피오 호톤을 공략하기에 앞서 우선 점령할 필요가 있던 지점이었다. 피오 호톤은 방어 거점으로서 튼튼했으나 사을자고는 약했고 그렇기에 빠르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부잔타이의 손에 들어온 사을자고는 피오 호톤과 그 외의 번호 세력들을 공격하는 군대가 머물 기착지 역할과 퇴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부잔타이는 현성을 공략하기에 앞서 사을자고 세력을 공략했다. 이 공략의 시기가 정확히 언제 인지는 불확실 하지만 피오 호톤에 대한 공략이 음력 6월 23일에 시작되었던 것3, 당시 피오 호톤에 있던 여진인들이 사을자고가 부잔타이에 의해 점령된 것을 보고 뿔뿔이 흩어져 375명밖에 남지 않았던 것4을 생각해 보자면 음력 6월 중순 혹은 그 이전에 사을자고 공격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사을자고에 대한 공격은 피오 호톤에 대한 공격과 연계되어야만 했으므로 피오 호톤에 대한 공격일자인 음력 6월 23일로부터 1~5일 정도 전일, 즉슨 음력 6월 18일에서 22일 사이에 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사을자고의 세력은 피오 호톤의 결집세력보다도 약했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이들의 저항 정도 역시 훨씬 약하여 순식간에 교전이 끝난 것으로 사료된다. 사을자고는 그렇게 울라군에게 점령되었고, 사을자고의 반 울라 번호 일부는 가까스로 도주하여 유원첨사 진무성에게 몸을 의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조선 조정에서는 진무성의 사을자고 번호 맞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아마도 조선이 울라와 강화를 맺은 상황에서 섣불리 울라와 교전한 사을자고 세력을 맞이하여 자칫 유원이 울라에게 공격당할 단초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5
울라군이 피오 호톤 점령에 실패하고 패퇴한 뒤에도 사을자고 지역은 일시적으로 울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울라는 사을자고를 통해 온성의 조선군과 그 주변 번호들을 견제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사을자고 지역에 대한 울라의 영향력은 오갈암 전투에서 울라가 건주에 의해 대패함으로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된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음력 7월 7일
2.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음력 7월 11일
3.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음력 7월 11일
4.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음력 7월 8일, 7월 11일
5.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음력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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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역사글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