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7년 초반기 누르하치는 동해 여진 세거 지역에 기록상 4백명으로 이루어진 군부대를 파견하는 원정을 단행했다. 해당 원정의 목적은 후금측 장수 '안피양구'와 '후르한'에 의한 보지리의 난의 진압 이후, 진압 작전으로부터 빠져나간 반란 수괴 보지리와 다른 탈출 세력 암반 및 백성들을 제압하고 포로화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때 이들이 출병한 시기에 대하여서는 다소 논의와 추가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실제로 이들이 언제 출병했는지에 관하여서 각 기록의 서술구조 및 내용이 다르기에, 견해 역시도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만주실록을 비롯한 청태조실록상에서는 이들의 출병과 작전에 관한 기사가 정사년(1617년) 음력 2월에 있었던, 몽골 칼카 5부의 바유트의 타이지 엉거더르와 슈르가치의 딸이자 누르하치의 조카딸/앙녀격 위치의 순다이간의 정혼에 관한 기사 다음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실록의 기록 서순을 신뢰한다면 동해 여진에 대한 정사년의 후금군의 출병시기가 당해 2월-그 중에서도 엉거더르의 정혼이 있은 이후인 것으로 판단된다.1
그런데 만문노당상에서는 이들의 출병일자가 달의 언급 없이 그저 18일이라고만 기술되어 있는데다가, 해당 기록이 2월에 존재한 엉거더르의 정혼 이전 순서로 기술되었기에 이들의 출병 시기가 음력 2월 18일인가 아니면 밍간이 아직까지 후금을 내방하고 있던 음력 1월 18일인가 하는 이견이 발생한다.
만문노당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밍간이 다시 허투 알라를 떠나 본인의 영토로 돌아간 기사 뒤에 후금군이 동해 여진으로 출병한 것이 기술되어 있다. 코르친의 밍간이 후금에 방문한 것은 음력 1월 10일, 그가 허투 알라에 들어간 것은 1월 11일이며 그가 코르친의 영토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약 1달여 뒤라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음력 2월 10일 전후 며칠 정도의 사이이다. 그렇기에 이를 기반으로 사건의 서순을 생각해 보자면 동해 여진에 대한 정사년 원정 당시의 후금군은 2월 18일에 허투 알라를 출병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구만주당을 살펴보자면 2월 18일 설보다도 1월 18일 설에 보다 힘이 실리게 된다. 구만주당에는 코르친의 밍간이 후금에 방문한 것을 서술한 정사년 음력 1월의 기사와, 밍간을 허투 알라로 초청한 뒤 그에게 큰 잔치와 작은 잔치를 연이어 베풀며 1달간 허투 알라에 머물게 하였고 그 뒤에 밍간을 본래 영토로 돌려보냈다는 기사 사이에 4백여명의 군병을 차출하여 동해 여진에 원정을 보냈다는 서술이 존재한다. 음력 1월 10~11일과 음력 2월 10일 전후 사이에 '18일 날' 동해 여진에 대한 원정군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면, 후금군의 동해 여진 출병은 음력 2월 18일이 아니라 음력 1월 18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뿐만 아니라 만약 이들이 2월 18일에 출병했다면, 구만주당과 만문노당상에서 이들이 출병했다는 기사 다음에 존재하는 '(파견된 4백명의 군대가) 2월에 해안에 흩어져 있던 동해 여진인들을 공격했다'는 기사와 맞물리지 않게 된다. 만일 이들이 정말로 2월 18일에 출병했다면 행군 시간을 고려해 볼 때에 최소한 3월 초쯤에야 작전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병대를 중심으로 하여 빠르게 움직였다면 모르겠지만 당시 동해 여진 세거 지역에 숲이 많고 길이 적고 험했음을 생각해 보자면 2월 18일에 출병한 군대가 2월 내에 작전지역에 도착하여 작전을 실행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 것 같다. 즉, 허투 알라에서 출병한 4백여명의 원정군은 1617년 음력 1월 18일에 출병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문노당 상에서 이들의 출병 기사가 밍간의 코르친령 복귀 기사 뒤로 밀린 것은, 당시 후금에서 일어난 사건의 순서가 번잡했기 때문에 정리를 위해 '코르친의 수장 밍간의 허투 알라 방문 기록'과 '후금군의 동해 여진 출병 기록'을 일부러 분리한 탓으로 보인다. 본래는 밍간이 허투 알라를 방문하여 1달여간 향유를 즐기고 있을 때에 후금군이 동해 여진으로 출병했지만, 밍간과의 외교에 관한 사건을 다루는 사이에 후금군의 동해 여진 출병 기술을 끼워 넣자면 사건의 서술이 번잡해지므로 일부러 두 사건을 분리하여 밍간이 코르친 영토로 돌아간 기사 뒤에 후금군의 동해 여진 출병 기사를 오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 만문노당 상에서도 엉거더르와 순다이간의 정혼에 관한 기사에서야 사료상 표기월일이 1월에서 2월로 확실하게 넘어간 만큼 후금군의 정사년(1617년) 동해 여진에 대한 출병 시기는 만문노당 상에서도 1월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니만큼 이들의 출병은 1월 18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실록에서는 어찌하여 엉거더르와 순다이의 정혼에 관한 기사(1617년 2월) 이후에야 후금군의 동해 여진 출병 기술이 나올까. 그것은 이들이 음력 1월 18일에 출병한 뒤 동해 여진에 대한 공격을 최초로 단행한 것이 음력 2월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들의 출병과 그에 이은 작전을 하나의 기사로 다루기 위해 1월에 행해진 출병과 2월에 행해진 작전을 모두 2월 기사로 몰아서 작성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실록의 기록만을 보자면 이들이 음력 2월에 출병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청태조고황제실록 천명 3년 음력 2월 1일, 만주실록 음력 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