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는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인 퉁갸 씨족의 하하나 자칭으로부터 세 명의 아이를 보았다. 여식으로는 첫째 딸인 동고 거거1, 그리고 장남 추영과 차남 다이샨이다. 이 중 추영은 1598년 안출라쿠 공략전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서기 시작하여 많은 전공을 쌓아나갔으며, 1600년대 중반쯤에는 숙련된 지휘관으로 성장하여 누르하치의 큰 기대를 받았다. 안출라쿠 공략전에서는 훙 바투루(hvng baturu)의 칭호를 받고, 1607년 오갈암 전투에서는 아르가투 투먼(argatu tumen)의 칭호를 받아 자신의 칭호를 기존보다 한 단계 더 올리면서 명실상부히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서는 최고의 지휘관중 한 명 이었을 지언정, 정치에 있어서는 부족한 면이 많은 인물이었다. 누르하치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으며, 여러 여건을 고려하여 그런 추영의 정치적 역량을 성장시키기 위해 그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하지만 추영은 대리청정 몇 달여만에 친족 버일러, 암반들을 상대로 불협화음을 일으켰고 그 결과 근신조치를 받게 된다. 여기서 반성을 했더라면 작게나마 기회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결국 부친에게 반기를 드는 발언까지 할 정도로 선을 넘었고 그 결과 숙청되었다. 1613년에 위리안치되었고, 1615년 처형되었다.
(오갈암 전투도)
앞서 서술했듯이 추영은 1607년 오갈암 전투에서 승전을 하면서 기존의 훙 바투루 칭호를 뛰어넘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당시 동생 다이샨이 구영 바투루 칭호를 부여받고, 숙부인 슈르가치가 다르한 바투루 칭호를 부여받은 것에 더하여 추영은 아르가투 투먼의 칭호를 받았다. 아르가투는 몽골어로 '지혜로운'을 뜻하며 투먼은 '만(萬)'을 뜻하는데 적절히 의역하자면 '현명하기 그지 없는' 정도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 하다.
1607년 오갈암 전투에서 승전하여 아르가투 투먼 칭호를 부여받은 뒤, 추영은 후금과 청의 기록상에서 계속해서 '아르가투 투먼'이라고 지칭, 서술되었다. 이는 한 번 칭호를 부여받으면 이름보다도 칭호를 통해, 혹은 이름과 칭호를 병렬하여 서술하는 후금/청의 국내 사료 특성 때문이다.2이는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여서, 후르한의 경우 다르한 히야 칭호를 부여받은 뒤에는 보통 다르한 히야로 서술되고, 안피양구의 경우 보통 숑코로 바투루라고 서술되었다.
기록상에서는 이렇게 아르가투 투먼으로 호칭되는 추영이었으나, 과연 실제로 당대에는 어떻게 호칭되었을까. 사실 국내(후금/청) 기록상이라면 몰라도, 추영이 생존해 있던 당대의 사람들은 1607년에 수여된 아르가투 투먼이라는 호칭보다도 추영이 이전에 받은 칭호인 훙 바투루로서 그를 더 많이 호칭한 것 같다.
후금에 포로로 잡혔던 조선 지휘관인 이민환의 건주문견록에는 누르하치의 장남이 홍파도리(紅破都里)로 기록되어 있으며, 6~7년전에 죽었다고도 서술되어 있다.3홍파도리는 추영을 지칭하는데, 그의 구(舊) 칭호인 훙 바투루를 조선식 한자음역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민환이 홍파도리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후금인들로부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그렇다면 당시(1619년~20년) 후금인들은 추영에 대해 훙 바투루라고 호칭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하여, 추영이 반역혐의로 숙청되고 이어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후금 시기에는 아르가투 투먼의 칭호가 한 단계 깎여 이전의 칭호인 훙 바투루로 호칭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추영의 위세가 한참 강력했던 시기에도 추영이 훙 바투루라고 호칭된 흔적이 파악된다.
1610년 음력 3월 조선의 평안병사 유형이 자신에게 전해진 만포첨사 김응서4의 보고 내용을 조정에 재차 치계할 때에 언급하기로, '홍소토리(弘所土里)가 안질로 인하여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5홍소토리 역시도 홍파도리와 마찬가지로 추영의 칭호 훙 바투루를 지칭하는 것인데, 여기서 소는 음이 아니라 뜻인 '바'를 읽은 것이다. 즉, 쓰기는 홍소토리이나 읽을 때에는 홍바토리라고 할 수 있다.
김응서의 보고 역시, 정황상 김응서의 정탐병들이 직접 파악한 것이 아니라 여진인들의 진고에 의한 바로 파악된다. 1610년은 추영의 위세가 한창 강하던 시기이므로, 이 때에도 여진인들 사이에서는 추영이 훙 바투루라고 호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해당 진고는 번호 계통으로 건주에 내속되거나 내속될 예정이었던 여진인들의 진고일 가능성이 있는 만큼, 수십년전부터 건주의 주민으로 살고 있던 진짜배기 건주인들의 직접적인 시각은 반영치 못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민환의 기록 사례와 결부시켜 보았을 때, 추영의 생전과 그 이후 후금 초기 시기에는 추영이 본인의 두 번째 칭호인 아르가투 투먼이 아니라 첫 번째 칭호인 훙 바투루라고 더 많이 호칭되었을 가능성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후자의 가능성을 사실로 놓고 본다면 이 경우 어째서 추영이 아르가투 투먼의 칭호를 부여받은 뒤에도 훙 바투루라고 더 많이 호칭된 것일지도 유추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훙 바투루 칭호의 경우 족히 9년 동안 써온 칭호인 반면 아르가투 투먼 칭호의 경우야 길어야 5~6년 정도를 쓴 칭호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추영 본인 특유의 호전성으로 인해 '지모'에 관련한 칭호인 '아르가투 투먼'보다 '무용'에 관련한 칭호인 '훙 바투루'를 더 마음에 들어하여 여전히 이 칭호를 앞세웠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추영의 호전성이야 실제로 기록상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대인들에게 어떻게 불렸고 추영 스스로가 자신을 어떻게 칭했건 간에, 추영의 최후 호칭은 아르가투 투먼이 확실했다. 누르하치가 자신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며 붙여준 그 칭호는 불명예 아래에 잠식되었으나, 누르하치 본인이 추영을 결국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추후 시신을 수습해 거둔 것을 생각해 보자면 그는 추영에 대해서 결국 마지막 정까지 거둘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동고 씨족의 호호리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이렇게 호칭되며, 실제 이름은 실록의 기록을 기반으로 '눈저'라고 호칭된다.
2.예) 만문노당 무신년 음력 3월, 만주실록 동년 동월
3.이민환, 건주문견록, 有子. 長曰紅破都里, 六七年前, 爲奴酋所殺
4.김경서의 개명 전 이름.
5.조선왕조실록 광해군 2년 음력 3월 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