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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며칠간의 휴식은 꿈만 같았지만 이제 다시 떠나야했다.
"이제 내려가서 차 찾자"
우비를 입은 태린은 마찬가지로 우비를 입은 차태신과 차태연에게 말했다.
미르는 태연의 등에 업혀 곤히 자고 있었다.
그들은 사뭇 결연한 듯이 제각기 무기를 손에 쥐고 농막을 나섰다.
내리막길을 30분 정도 걸어 내려가니 시내가 보였다.
좀비가 드문드문 보였지만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리 안나게 하이브리드 차로 찾아. 그리고 이왕이면 SUV 큰걸로. 애좀들도 태워야 하니까"
태린은 최대한 빨리 목적지인 속초에 도착하고 싶었기에 쓸데없는 소란은 피하고 싶었다.
"하이브리드? SUV? 어떻게 생긴건데?"
태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SUV는… 하아…. 그냥 뚱뚱해보이는 차 보이면 말해."
태린은 최대한 쉬운 설명을 택했다.
"하이브리드는 어떻게 찾는데?"
차태연은 또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고야… 차 뒤 범퍼에 하이브리드 라고 영어로 적혀있어"
태연과 태신은 끄덕하면서 멀지 않은 거리로 걸어나갔다.
"아 맞다. 이왕이면 키 꽂힌걸로 찾아!!"
태린의 말에 그들은 다시금 끄덕이며 차를 찾기 시작했다.
태린은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그냥 믿기로 했다.
10분정도 지났을까. 몇분간 안 보이던 차태신이 이태린 쪽으로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태린은 갑작스레 뛰어오는 차태신을 보며 도끼를 꺼내 임전 태세를 갖췄다.
"찾았어! SUV! 하이브리드!"
태린의 걱정과 달리 태신은 해맑은 표정으로 네잎 클로버를 찾은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태린은 숨을 돌리고, 다시 도끼를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다 같이 모여 태신이 찾은 차를 보러 갔다.
차는 주유소 옆에 있었고, 연식이 얼마 안되어보였다.
내부를 살펴보자 키까지 안에 있었다. 아마 급하게 주유소 화장실이나 편의점을 가다가 놓고 내렸다가 좀비에게 당한듯 했다.
이태린은 하이브리드 차를 처음 몰아보기에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 어떻게 조정하는 것인지 감을 익혔다.
주유소 바로 옆이어서 그런지 휘발유도 가득 차 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 준비가 됐다고 느낀 태린은 창문을 열었다.
"야! 타!"
태린으로서는 나름의 '야타' 개그였지만 그녀들은 이제 그 말 뜻도 모르는 듯이 그냥 차에 올라탔다.
태린은 혼자만 뻘쭘하게 세대 차이를 느낀 채로 다시 내려 애좀들과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와서 엑셀을 밟았고, 자동차는 스으으윽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본격적으로 떠나기 전에 태린은 지난번에 사내가 있던 마을을 들렀다.
혹여라도 좀비들이 농막을 망칠까봐 부탁을 하려던 것이었다.
태린은 미안한듯이 말했지만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주에 한번씩은 들르겠다고 자신있게 얘기했다.
농작물을 조금 따먹어도 된다고 하자 사내는 굉장히 좋아했다.
짧은 담소를 끝내고 태린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와이퍼는 소리 없이 열심히 움직였다.
태연은 조수석에 앉아 말없이 유리창의 습기를 손가락으로 모으며 물방울을 만들고 있었다.
태신 또한 한손에는 미르를 안은채로 유리창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근데… 저번에 그 폭발은 뭐였을까? 삼성쪽 아니었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태신은 말했다.
"...중대장이랑 관련있는거 아냐?"
다시금 자신의 엄마와 할아버지 생각이 난 태신은 짜증나는 듯, 화가난 듯, 두려운 듯이 말을 꺼냈다.
태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고, 태연은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지. 그냥 신경 꺼. 누가 그랬는지 알아도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그리고 니가 왜 나 따라왔는지 기억해.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믿어"
태린이 비로소 답을 하자 태신의 불안은 조금 가시는 듯 했다.
"일단 60번 고속도로 타고 쭈욱 갈거야. 가다가 도로 막혀 있으면 주변 국도 찾아서 동쪽으로 쭈욱 갈거고."
태린은 대충의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 그리고 핸드폰 충전시켜라. 나중에 쓸 일 있을수도 있어. 노래도 틀고."
이태린은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며 조수석에 앉은 태연에게 핸드폰을 충전기와 함께 건냈다.
곧이어 태연은 블루투스로 핸드폰을 연결하고, '제주도의 푸른밤'을 틀었다.
오랜만에 타는 차 때문인지 여행느낌을 내고 싶어했다.
태신과 태린 또한 노래 선곡이 맘에 든듯 립싱크를 하다가 따라 불렀다.
한참을 노래를 부르다보니 고속도로 입구에 와 있었다.
수도권으로 향하는 반대 차선은 난장판이었다.
온갖 차들이 뒤엉켜 있었고, 곳곳에 그을음이 보였다.
차 안에는 사람인지 좀비인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를 인간의 형체가 있었다.
때때로 나가지 못해 아사한 사람인 경우도 있었고, 창문을 뚫고 들어온 좀비에게 물려 감염된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대부분 안전벨트를 잘 메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태린 일행에게 다행인것이었다.
안전벨트가 족쇄가 되어, 도망치지도 못하고 좀비에게 물려 변해버린 사람들.
이태린 일행이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 이태린은 차 속도를 줄일 수 밖에 없었다.
그 광경에,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할말을 찾지도 못했다.
태신은 미르의 눈을 가렸고, 태연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태린의 심장만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예술작품을 구경하듯이 한점 한점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열심히 머리속에 새겨넣었다.
환희의 미소를 짖는 것을 겨우겨우 참아내었다.
태린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차 속도를 올려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반대편 차선의 차들은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은채로 엉켜 있었다.
조용한 차 엔진소리임에도, 비오는 날임에도, 몇몇 좀비들은 태린 무리를 눈치챘는지 어떻게 해서든 차안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차가 지나갈수록 뒤에서 들리는 차창을 때리는 소리는 조금씩 커졌다.
여전히 노래를 틀고 있었음에도 태린 일행은 그 소름끼치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진행방향의 차선에는 차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다만 곳곳에 좀비들이 탑승한채로 멈춰져 있는 차들이 많아서 조심스레 피해가야 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달렸다.
한동안은 정지되어 있는 차들이 적어서 편히 갈 수 있었다.
시속 70Km로 정속주행을 하다가 갑자기 저 멀리서 검은색 띠 같은 것이 보였다.
태린은 혹시 몰라서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검은색 띠는 더욱 두꺼워지고, 볼록해졌다.
"씨발"
태연은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검은색 띠로 보였던 것은 사람들의 시체였다.
5열 횡대로 가지런하게 질서있게 놓여져 도로를 막고 있었다.
목을 따인 것인지 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빗물에 씼긴 피는 길가에 난 배수로에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태린은 차를 세우는 듯 하다가 다시 속도를 내어 시체들을 밟고 지나갔다.
타이어에는 사람들의 피와 육편이 끈적하게 들러붙었으나 비 덕분에 금방 다시 씼겨져내려갔다.
"이태린! 뭐하는 거야?"
태연이 질색하며 말했다.
"딱 보면 몰라? 저기서 멈추면 우리 다 죽어."
태린의 말에 태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주변에 좀비들도 없었고, 피도 흐르고 있었어. 죽은지 얼마 안된거야. 게다가 저렇게 가지런히 죽을수가 있어?"
태린은 자동차 속도를 100Km까지 올리며 얘기했다.
태신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십수명의 사람들이 비옷을 입고 고속도로 옆 차단석을 넘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아쉽다는 듯이 허탈하게 가만히 서있었다.
그중 한명은 손을 들어 흔들었다.
태신은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1분정도 지나자 휴게소가 보였다.
경계석 너머로 휴게소를 보니 그곳에도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게다가 십수명의 사람들은 휴게소 테라스에서 태린 일행의 차를 주시하고 있었다.
태린은 더욱 속도를 높여 빠르게 휴게소를 지나쳤다.
10분정도가 지난 뒤에야 태린은 속도를 다시 60Km로 줄이고 정속주행을 시작했다.
누군가 따라오는 기색은 없어보였다.
'그래, 어차피 덫에 걸린거 꺼내먹을려고 덫을 놔둔건데 괜히 귀찮게 우리를 쫓아올 이유는 없겠지.'
태린은 한숨을 돌리며 생각했다.
차태연과 차태신은 그 광경에 피곤함을 느꼈는지 곤히 자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자 다시 휴게소가 보였다.
허기를 느낀 이태린은 최대한 경계를 하며 차를 천천히 휴게소로 몰았다.
휴게소는 조용했다.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휴게소 앞에 차를 세운 태린은 핸드폰의 카메라를 사용해 화면을 확대했다.
몇분동안 휴게소 전체를 샅샅이 살핀 태린은 문제 없다는 생각이 들어 태연을 깨웠다.
"태연, 태연! 일어나봐"
태연을 흔들어 깨우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나 식량 찾으러 휴게소 갔다 올테니까. 20분내로 안 돌아오면 크락션 누르면서 주차장 계속 돌아. "
"뭐? 나 운전할 줄 몰라. 그리고 같이 가. 왜 혼자가?"
"고립되면 구해줄 사람은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자동차 게임 한번은 해봤을거아냐? 크락션은 저 버튼 누르면 되고, 액셀은 저기 있어, 브레이크는 왼쪽이고. 기다리는 동안 연습이라도 해보든가. 아 그리고 핸드폰에 20분 알람 맞춰놨다."
"식량? 가방에 많이 있잖아! 위험해!"
"가능할때 많이 확보하는게 좋아. 그리고 벌써 주변 둘러봤어."
"아니! 잠 ㄲ.."
태연이 말하기도 전에 태린은 문을 닫고 나가 트렁크에서 가방을 찾아 메고는 휴게소로 향했다.
"아이씨.."
태연은 궁시렁대며 운전석에 올라타서 엑셀과 브레이크를 눌러보기 시작했다.
급정거와 급출발을 계속하던 태연은 대충 감을 잡았다.
그리고 이 때문에 태신은 잠에서 깨어났다.
"뭐하냐? 이태린은?"
태신이 한손으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식량 찾는다고 나갔어."
"식량? 가방에 많이 있잖아?"
"그러니까..."
태연은 다시금 연습을 재개했다.
휴게소 계단 앞으로 가자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꺼림칙했지만 무시하고 테라스로 향했다.
외부 상점에는 신발, 옷 등이 있었고 카시트도 있었다.
'미르 태우면 되겠다.'
태린은 미르를 생각하며 카시트를 챙겼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얼마 젖어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카시트를 챙긴뒤에 편의점을 찾아 들어갔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었고, 문도 열려있었다.
식량도 꽤나 있었기에 태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단 몇개만 챙기자는 생각에 물과 빵 등 식사가 될만한 것을 카시트에 집어넣었다.
대충 다 챙기고 콜라나 마시자고 생각하며 냉장고를 열었을때, 반대편에서 괴성을 지르며 좀비의 손이 튀어나와 태린을 잡으려 했다.
태린은 피했지만, 튀어나온 손으로 인해 진열되어 있던 유리병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큰소리를 내며 깨졌다.
10초 동안 떨어졌고, 태린은 무언가를 할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아… 시발"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는 휴게소 깊숙히 있던 화장실에도 들렸고, 휴면 상태이던 좀비 무리를 깨웠다.
좀비들은 어슬렁 거리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태린은 서둘러 진열대 반대편 좀비를 처리하고, 나가려 했으나 이미 좀비들은 태린을 포착했다.
그들은 뛰어서 유리창에 달라붙기 시작했고, 태린은 편의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이태린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미친.. 어떡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