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나비
맑은 물이 깨끗한 자갈 위를 지난다 볼때기가 파란 아
주 작은 꺽지 새끼가 흰 자갈 틈으로 얼른 숨고, 작아서
눈만 커다란 멍충이 새끼가 이 자갈에서 저 자갈 위로
자리를 얼른 옮긴다 흰 자갈 위에 어른거렸다가 사라지
는 어린 고기들의 얇은 그림자
강변에는 파란 풀밭이다 풀밭에 깨끗한 하늘색 돌들
이 띄엄띄엄 박혀 있다 돌 둘레에 노란 풀꽃들이 피어난
다 어디만큼 가면 강가에 희고 고운 모래들이 가만히 모
여 있다 모래 속에는 꼬막 조개들이 속살을 모래 밖에
내어놓고 숨을 쉬며 산다 다슬기들이 모래 속에 몸을 끌
며 느릿느릿 지나간 긴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다 그 아
름답고 느린 길 끝에 가면 틀림없이, 확실하게 다슬기가
있다 모래 위에는 까만 내장이 훤히 보이는 모래색 물
새우가 산다 인기척을 느끼면 새우들은 강물에 잠긴 풀
속으로, 강을 건너는 새 그림자처럼 얼른 숨기도 한다
두 손으로 새우를 떠보면 아, 살이 없는 것 같아서, 새
우 저쪽 내 손금까지 환히 비친다
그 모래에는 또 모래색을 닮은 알록달록한 물종개가
산다 강가에서 쑥을 뽑으면 하얀 긴 실뿌리가 나오는데
그 흰 뿌리로 올가미를 만들어 물종개를 올가미 안으로
가만가만 몰아 넣는다 올가미 속으로 물종개 목이 들어
갔다 싶을 때 얼른 휙 낚아채어 쑥대를 휙휙 돌리면 바
동거리는 물종개의 막막한 힘이 손에 느껴졌다
어디만큼 가면 물의 깊이가 발등을 적실까 말까 하는
여울가 잔 자갈밭에 붉은 불거지들이 짝짓기를 하며 논
다 빨갛고, 파랗고, 흰색 띠를 확실하게 두른 불거지들
의 거침없는 사랑놀이로 물결이 요동을 치고 부서진 물
살이 푸다닥푸다닥 희게 튀어오른다 물을 차고 오르며
물위로 온몸이 다 드러나도록 쫓고 쫓기다가 어떤 놈은
자기도 모르게 물 밖으로 튀어나가 그 붉고 당당하고 화
려하고 헌걸찬 몸뚱이로 뜨거운 자갈밭 자갈을 적시며
펄떡펄떡 뛰기도 한다 등등하고 퍼르르한 등이 물위로
나오도록 물을 가르고 헤치는 그 날랜 몸놀림 속에 맑은
해가 지고 산그늘이 내린다 강변 자운영 붉은 꽃들이 산
그늘 속에 서늘하게 뜬다
오월 강물에는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다
산그늘이 강물을 건너기 시작하면 종아리가 막 하얘
지기 시작하는 계집아이들이 소쿠리를 들고 풀밭을 걸
어가 냇물에 발을 담근다 해 지면 돌 밖으로 기어나오는
다슬기를 한 마리 두 마리 잡아 한주먹이 되면 소쿠리에
담는다 다슬기가 소쿠리에 떨어지는 찰삭찰삭 소리가
먼 데까지 들린다 하얀 종아리가 부끄러운 계집아이들
이 흐르는 강물에 치맛단이 젖도록 치마를 내리고 눈썹
이 흐르는 물에 닿을 듯 말 듯 물 가까이 눈을 들이대고
물 속을 들여다본다 아, 나비 같다 계집아이들은, 해 저
문 강물에 날개를 살짝살짝 적시며 강을 건너가는 하얀
나비 같다 하늘이, 서쪽 하늘이 붉고 계집아이들의 볼도
따라 붉다 불거지들이 사랑놀이로 일으킨 물살이 계집
아이들 종아리까지 와닿는다 물에 코를 박은 계집아이
들의 고운 등어리 저쪽 물위를 낮게 날아다니는 하루살
이들을 채먹으려고 물고기들이 물위로 펄쩍펄쩍 튀어
오른다 고기들의 그 몸짓으로 물에서는 소낙비 소리가
나고 물위에는 수없이 많은 동그라미들이 죽고 산다 얼
마나 큰 고기가 물위로 튀어올랐다가 떨어지는지 치르
륵치르륵 물소리에 계집아이가 고개를 살짝 들고 소리
나는 쪽을 본다 그 물고기가 떨어지며 만들어낸 물결이
다른 잔물결을 다 잡아먹고 계집아이들 치맛단에 닿아
죽는다 물이 어두워 다슬기가 안 보이고 물이 잠잠해지
자 한 계집아이가 소리없이 허리를 펴고 일어나 저만큼
엎디어 있는 아이를 부른다 처음같이, 세상에 태어나 제
일 처음 하는 말같이 “야, 거시가 우리 그만 집에 가까”
잡은 다슬기를 한번 채처럼 까불어 반들거리는 까만 다
슬기를 들여다보고 물가 낮은 돌멩이 위로 올라가 젖은
발바닥을 따뜻한 돌멩이에다가 닦는다 젖은 종아리는
닦지도 않고 물에 젖은 치마를 두 손으로 탈탈 털어 가
만히 내리고 오른쪽 발등을 왼쪽 치마폭에, 왼쪽 발등을
오른쪽 치마폭에 번갈아 살짝 문지르고 치맛단에 가리
워져서 보일 듯 말 듯한 하얀 맨발을 풀밭으로 내딛는다
싱싱한 풀짐을 짊어진 총각들이 제일 늦게 나오는 저 산
속까지 다 환해지는 서늘함, “어 남산에 벌써 거지별이
떴네” 계집아이 둘이 거지별을 올려다보며 발길이 빨라
진다
해가 뜨고
떴던 해가 지고
달이 떴다 지고
어제 떴던 곳으로 해가 또
떠서 지던
그런 하루가 있었다
꼴망태 가득 자운영 꽃을 베어 어깨에 메고 집에 오다
보면
검정 치맛단이 물에 저은 계집아이들이 티없이 맑은
눈을 내리깔고 종종걸음치는 모습에
곱게도 어둠이 덮여오는
그런 마을의 하루, 그런 하루가
있었다
나무
김용택, 창비시선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