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감나무 의자
강의실 문이 열려 있다
한 유령이 틈 사이로 들어간다
서른개의 의자가 유령을 반겨준다
줄도 반듯이 맞춰져 있네
유령은 지난 이십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죽음과 삶 두 공간 사이의 강의실을 유령은 방황했다
유령이 한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비스듬히 잘린 나이테 주위에 먹물이 번진 것 같은 의자
였다
오랜만이에요 다시 만나 반가워요
의자가 유령에게 얘기했다
유령은 깜짝 놀라며
우리가 처음 아닌가요? 물었다
잘 기억해봐요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미안한데 생각나지 않아요
기억에 1980년일 거예요
우리 나무들은 해를 기억하는 방법이 있어요
구시리에서 두달을 보낸 적이 있지요?
맞아요 그곳에서 시를 쓰면서 겨울을 보냈지요
작은 수목원과 우물이 있는 집
그 집에서 엉망진창인 고2 손자에게
팝송 가사를 가르치며 영어 과외를 하고
밥을 얻어먹으며 시를 썼다
아이를 처음 맡던 날
인마 고2가 담배가 뭐고 술이 뭐야!
여당 국회의원에 출마할 건축업자인 아이의 아비는
외제 승용차 안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와
아이를 후려쳤고 아비는 내게 다음번엔
선생도 가차 없오,라고 말했다
밤새 눈 내리고
눈 속에서 쓴 시를
아침에 아이에게 읽어주었는데
놀랍게도 아이는 그 시를 공책에 옮겨 적으며
시는 선생님 머리에 들어 있는 거예요
가슴에 들어 있는 거예요
라고 물어 나를 놀라게 했다
아이와 나는 매일 아침
땅끝 가까운 남창까지 구보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마음대로 피워라, 담뱃불을 건네주었고
아이는 내게 선생님도 피우세요, 성냥불을 건넸다
군대가 주권자인 국민을 향해 총을 난사하던 무지한 시절
퍽퍽 연기 날리는 현산 황톳길이 좋았다
어느날 아이와 나는 남창까지
십 킬로미터를 달려 해장 당구도 치고 국밥도 말고
할머니들이 갓 잡은 뻘 낙지 세마리를 들고 돌아왔는데
마당에 아비의 외제 차가 있었고
아비가 아이에게 이게 뭐야? 하며
아이가 숨겨놓은 담배 한보루를 꺼냈다
아비는 아이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둘렀고
나는 마루 위에 차려진 밥상을 들어 아비를 쳤다
음식 범벅인 밥상으로 얼굴을 맞은
아비가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한동안 나를 웅크려 보았다
선생 다음번에 이런 일이 있거든
작두로 손을 썰어버릴 줄 알아
아비는 차 시동을 걸고 광주로 떠났다
아이는 내게 그날 밤 집을 떠나라 했다
아비의 성격에 가만있지 않을 거라 했다
젊은 날 아비가 조폭의 행동대장을 하며
누군가의 손목을 작두로 잘랐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나는 그날 아이와 함께 잤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뒤 놀랍고 무서운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월급이 약속보다 이만우너 올랐던 것이다
삼십팔년 세월이 흘렀다
아이와 아비가 뭘 하는지 소식은 끊겼다
그 집 샘가에 있던
먹감나무 생각나세요?
그 나무가 먹감나무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두레박줄이 걸린 샘가의 그 나무를 나는 안다
벼락을 맞았구요 둥치가 부러져
목공소로 팔려오게 되었지요
그게 나예요
당신을 그때 처음 보았지요
의자 위에 엎드려 조용히 울었다
내가 유령이 아닌 때를
기억하는 이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강의실 창문을 다 열었다
바람이 훅 불어왔고
매미 소리의 파도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꽃으로 엮은 방패
곽재구, 창비시선 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