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 하늘
한 손에 태극기
다른 손에 성조기 들고
아비야 시방 어디 가느냐
반도의 가을 햇살 임자도 소금밭인 듯 환한데
한 손에 펄럭이는 조국의 깃발
다른 손에 펄럭이는 이방의 깃발
나란히 외치는 모습 씁쓸하구나
녹두꽃 피고 지던 갑오년
보국안민 깃발 든 농민군들
일본군 기관총에 추풍낙엽 쓰러질 때
그들 손에 로스케 깃발 청나라 깃발
들렸다는 말 듣지 못했다
백설기보다 하얗고
배꽃보다 순결한 조선 처녀 총각들
3ㆍ1 독립만세 외칠 때
그들 손에 펄럭이는 것
하겐다즈도 유니언잭도 성조기도 아니었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
태극의 깃발 방방곡곡 펄럭였지
4ㆍ19, 부마항쟁, 5ㆍ18 때
우리 손에 들었던 것 조선의 깃발 태극기였지
5ㆍ18 때였지 미국 항공모함 푸에블로호가
광주를 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오고 있다는
격문이 금남로 거리에 붙었었지
미국 항공모함이 광주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과 계엄군을 위해 왔다는 사실을 그땐 알지 못했지
절박한 그때도 단 한명 광주 사람 미국 깃발 흔들지 않았지
홍콩 사람들 요즘 성조기 흔들며 싸우지
미국이 저희를 도울 거라 생각하지
망상이 망상을 부를 때 그보다 슬픈 일은 없지
미국은 미국 이익을 위해 싸울 뿐
겉과 속 완전히 다르지
외세에 기댄다는 것
괴혈병을 막으려고 흑사병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은 법
아비야 가을 하늘 파랗구나
흰 구름은 자꾸만 어디로 가자 손짓하는구나
산언덕 구절초꽃
바람에 날리는 생비단인 듯 푹신하고
억새꽃 은하수보다 신비한데
아비야 한 손에 태극기 들고
한 손에 억새꽃 구절초 꽃다발 들고
주말에 광화문 광장도 가고 서초동도 가자
미 대사관 정문에 흙탕물 젖은 이방의 깃발 수북이 쌓아
두고
천지인 우리 깃발 펄럭이며
팔천만 우리 힘으로 좋은 세상 만들자
꽃으로 엮은 방패
곽재구, 창비시선 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