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숙사에 성능 심히 안 좋은 노트북만 있어서 설치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스팀 들어가 본 것도 코로나 이후 처음이나까 엄청 오랜만이네요...일단은 이걸로 인증을...)
흐린 하늘 아래, 마악 정오가 지난 버려진 도시는 을씨년스러웠다. 멸망 후의 어느 폐허가 안 그렇겠냐마는, 레프리콘은 여기는 특히 더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방사능 범벅인 곳에서는 길가의 조약돌조차도 우울해 보이니까(위험하기도 하고.). 그녀는 투덜거리며 그 조약돌을 걷어찼다.
“여기가 정말 거기 맞습니까, 병장님?”
“틀림없어요. 여기가 한 달 전에 구조 신호를 보냈던 곳이에요”
“가이거 계수기가 하늘을 찌르는데요?”
멸망 전부터 함께 해 온 동료에게 이죽거리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도시까지 오는 데 들인 시간과 수고가 얼마며, 그 와중에 써버린 식량이며 소모품은 또 얼마란 말인가. 그런 와중에 이 쓸모없는 도시는 수거해 갈 만한 물자조차 없었다, 아무 것도. 전부 다 방사능에 푸욱 절여져 있었으니까. 이래서야 고생해서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다.
“구조 신호가 여기서 왔다니요. 이런 방사능 범벅인 곳에 살 미친 바이오로이드가 있을까요?”
“글쎄요…일단 주변에 철충은 없으니깐….”
실키가 말끝을 흐렸다. 철충이 이 주변에 전혀 없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녀 자신이라도 이런 지옥 같은 데서 살고 싶진 않았으므로.
솔직히 그녀도 한달 전에, 오래된 무전기로 신호가 수신되었을 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자기들 무전기 배터리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첫 번째로 놀랐고, 그 받은 신호가 누군가가 광범위하게 뿌리는 애타는 구조신호라는 것에 두 번째로 놀랐으며, 그 신호가 온 곳이 이, 광활한 대평원에 숨겨진, 그리고 방사능에 절여진 도시라는 것에 세 번째로 놀랐다. 레프리콘은 그 신호에 응해 신호 발신지까지 이동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실키의 의견은 달랐다.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했다면 구해야 한다고. 설혹 늦을지라도, 가야만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끙. 그런데 정작 와 보니 아무도 없네요”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모르죠…철충이라도 왔다갔나?”
“이 주변엔 철충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없었잖아요?”
문제는 멸망 후의, 낙오된 두 스틸라인 패잔병에게 남겨진 이동수단은 자신의 두 다리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 먼 거리까지 이동할 물자를 구해서 이 곳까지 걸어오는 데는 거의 한달 가까이나 걸렸다. 그리고 도착한 그녀들의 눈 앞에 남은 것은,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없는, 철충이고 뭐고 아무도 없는 그냥 폐허였다.
“하기야 한달이면 뭔 일이 일어나도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죠”
“음, 일단 조금 더 둘러보죠”
방독면과 방호복을 뒤집어쓴 두 스틸라인 병사는 걸었다. 이 답답한 걸 다시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군말 없이 실키의 의견에 따랐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쓸 만한 물자를 찾기 위해서라도 여길 돌아봐야 하는 건 맞았으니까. 오로지 그녀들의 두 다리로만 말이다.
“어우. 우리는 왜 알보병인 걸까요”
“스틸라인이니까요”
“극동 쪽에 라비아타 저항군네 애들은 드랍포드도 있다던데요. 기동형 애들이 태워주기도 하고.”
방독면 아래서 실키가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인간님이 있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말이죠? 레프리콘, 뜬소문을 너무 믿으면 안 돼요.”
“암요. 누구한테 호구 잡힐 일 있나요”
멸망 후의 세계에서는 아무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을 함부로 해하진 못하지만, 같은 바이오로이드들끼리는 얼마든지 서로 속이고 등쳐먹고 해칠 수 있다. 법도 사라진 세상에서 아무나 덥석 믿었다간 낭패보기 십상이다.
‘델타라든지 말이지’
철충으로부터 살아 보겠다고 유럽 방면의 레모네이드 델타 밑으로 들어간 이들이 어떤 꼴을 당했던가. 레프리콘과 실키는 델타의 꼬드김에 넘어갔던 스틸라인 동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멸망 후의 세계에서는, 정말 믿을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으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한테 온 이 무전은 사실이니까요. 누가 보냈던 걸까.”
”누군진 몰라도 괜찮은진 모르겠군요. 끙. 뭐든지 간에 빨리 찾고 돌아갔음 좋겠는데”
무겁고 거추장스런 방호복과 방독면을 쓰고 방사능 지대를 수색하는 것은 질색이다. 멸망 전에도 이런 임무는 고역이었는데, 멸망 후에 제대로 된 보급도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단둘이 이런 짓을 하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우와, 뭔 일이 일어나긴 했던 모양이네요”
그래도 도시를 조금 돌아보자 그저 한적하기만 한 듯한 도시 곳곳의, 심상치 않은 상흔들이 드러났다. 무너진 돌벽, 무언가 무거운 것에 부딪혀 찌그러진 듯한 폐차, 도로 곳곳에 패인 구멍들, 무언가에 의해 찢겨진 듯한, 혹은 잘려나간 듯한 상처들… 그제야 두 병사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둘의 눈에는 보였기 때문이다. 이, 온 사방에 흩어져 있는 무너진 자국이 어디서 온 건지.
“이것 봐요, 레프리콘”
실키가 버려진 건물의 한 켠을 가리켰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에도 깊은 상처를 낼 만한 예리한 자국을. 레프리콘도 그걸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콘크리트에 이 정도 크기의 자국을 낼 만한 존재라면 어지간히 크고…또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을 것이다.
“상당히…크고 힘센 뭔가가 여기 있었어요.”
주변의 짜부라진 차량이나 도로위에 남은, 뭔가 내동댕이쳐진 자국을 봐서라도, 여기 뭔가 거대한 것이 있었다는 걸 추측하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들이 아는 한 그럴 만한 존재는…
“이런 종류의 철충이 있던가요? 우리가 아는 한?”
실키는 잠시 생각했다. 수십 년 동안 살자고 구르면서 그녀들도 이런 저런 철충들을 보아 왔다. 이 부근 지역에서 어지간한 녀석들은 다 보았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이런 건…
“글쎄요. 칙이나 팔랑스 계열이라 하기엔 너무 크고…매머드 계열은 이렇게 예리하게 할퀴는 것들이 아니고.”
갑자기 으스스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정체 모를 것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건 바이오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이 위협적인 발톱자국을 낸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는 몰라도,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은 유쾌한 게 아니었다. 레프리콘은 경기관총을 고쳐잡았다. 그러나 실키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적어도 우리 주변에 없는 건 확실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온 지 벌써 반나절이 흘렀어요. 이 정도로 큰 녀석이면 우리 눈에도 보였을 거고, 또 진즉에 우릴 습격했겠죠”
합리적인 설명에 레프리콘은 긴장을 약간 풀 순 있었지만, 그래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이 정도 크고 강력한 그 무언가가 있다면, 아마도 이 도시 안에서는 적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 지금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모르죠. 죽었을지도. 혹은 어디론가 가버렸을지도.”
“그런 거대한 놈들이 무슨 이유로요?”
그것에 대해서는 실키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싸움이 있었던 것 같네요, 아주 큰.”
그건 레프리콘도 동의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발견한 것은, 마치 지진이라도 지나간 것과 같은, 짓뭉개지고 무너진, 박살난 폐허였으므로. 골판지 상자 으깨듯이 부서진 잔해와 균열투성이 도로, 사방에 붕괴된 벽체와 기둥들. 지금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지만, 한때 이곳에서 뭔가 거대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만큼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이것 봐요. 바이오로이드들도 있었어요.”
실키가 바닥을 가리켰다. 정말로 거기에는, 대강 인간 정도 크기의 물체가 뛰고 구르고 드리프트 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전문 추적자는 아니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 온 군인들인 그녀들의 눈에도 아는 만큼은 보였다.
“굉장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인 것 같아요. 다만 땅에 흔적이 남은 걸 보니 날아다니는 기동형은 아니네요.”
“음, 기동 방향이 지그재그고 보폭이 다급한 걸 봐선, 뭔가에 쫒기는 거 같은데…”
“…..”
그녀들이 무엇에 쫒기고 있었을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그녀들이 누군지, 그녀들의 끝이 어떻게 되었느냐지만, 거기까지 알 만큼 그녀들의 추적 전문가인 건 아니었다. 다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든지 간에, 꽤 치열했던 건 분명했다. 실키는 짧게 평했다.
“가끔은, 우리 발이 느린 게 도움이 될 때도 있군요.”
더 빨리 이 도시를 방문했었다면, 이, 도시 한 구획을 박살낸 그 정체불명의 재앙에 휩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게 우리가 찾던 그녀들일까요? 우리에게 통신을 보낸?”
“모르겠네요. 설혹 아니더라도, 그럼 그녀들은 왜 여기 있었고 지금은 어디 있을까요”
“설마….”
레프리콘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 흔적을 남긴 이들은, 결국 그 정체 모를 거대한 것에게 붙잡혀 처참한 꼴을 당한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정체 모를 거대한 것은 지금 어디 있는 걸까? 그녀는 불안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빨리 돌아보고 여길 뜨는 게 낫겠습니다”
그 재앙이 뭐였는지, 무엇이 그걸 일으켰는진 모르지만, 모른다면 최대한 그 자리와 거리를 두는 게 오래 사는 방법이니까. 그러나 실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생존자를 찾아야 해요”
“저 싸움에 휘말려 죽었을 수도 있잖습니까.”
“하지만 다 죽었다는 증거도 없죠.”
방독면 아래 레프리콘의 얼굴이 구겨졌다. 스틸라인에서 구르면서, 그리고 멸망 후에 그녀가 배운 사실이 있다면 위험한 일은 사절이라는 것이다. 누가 책임져주는 것도 아니니까.
“한 달이나 흘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만 그 무전을 받은 게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실제로 그 무전은 딱히 그녀들을 노리고 발신된 것이 아니었다. 사방팔방으로 무차별적으로 구조요청이 송신되고 있었고, 그저 그녀들은 우연히 그걸 수신했을 뿐이다. 발신지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들에게까지 그 전파가 닿을 정도면, 다른 누군가가 그걸 수신했을 수도 있잖은가. 뭐…물론 이 도시까지 오는 길에는 철충이고 바이오로이드고 이상하리만치 아무것도 없긴 했지만…
‘그래서 더 기분나쁘다고요’
아무것도 없는 무인지대라니, 마치 망자들의 나라를 걷는 기분이었다. 이 유령 같은 도시까지 포함해서. 그 한 달 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녀들이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더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바이오로이드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지만, 정체 모를 그 무언가가 아직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그러나 실키가 레프리콘의 어꺠를 짚었다. 방독면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결의마저 어려 있었다.
“레프리콘. 초조한 건 알지만, 만약 여기 생존자가 있다면 우리가 마지막 희망이에요.”
“…”
“찾을 수 있을 떄까지는 찾아봅시다”
레프리콘은 떨리는 눈으로 실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실키의 마음을 알았다. 사실은 실키의 그 따뜻한 성격 덕에 레프리콘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던 거니까. 그 누구도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도, 싸울 수도 없다. 보급병 실키가 레프리콘을 건사해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오래 전에 죽어 넘어졌을 것이다.
“적어도 여기에 바이오로이드가 있었다는 건 확실해졌잖아요. 그들이 어디서 왔건, 다시 여길 빠져나갔건, 여기 누가 아직 있는지만 확인합시다.”
레프리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아무 이득도 없을 게 확실하기에. 죄다 방사능에 절여져서 여기서 뭘 주워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그녀들에게 이 세상도 이 유령 도시와 그다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방사능 범벅과 같이, 온갖 위험으로 푹 절여진 세상. 이유 없이 두렵고, 불안하고, 어떤 공포가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것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저 어두컴컴한 세상. 알 수 없는 세상. 레프리콘도 실키도 왜 여기가 이렇게 방사능투성이인지, 이런 곳에서 통신을 보낸 게 누구인지 모른다. 그녀들은 이 도시에 얽힌 사정도, 사연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래도 실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울지라도, 확신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의 사람다운 구실은 하고 떠나자고. 비록 그녀들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성을 논할 인간은 사라졌고, 아니 사실은 정의니 법이니도 문명과 함께 사라졌을지라도. 비록 세상이 위험과 공포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배고픈 이가 있다면 밥 한 끼 먹여 주자고. 아, 그래, 그렇다. 레프리콘은 인정했다.
‘병장님도 스틸라인이죠’
두려움이 저 문 앞에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죽음의 위협이 귓가에 속삭일지라도. 똑바로 서서, 공포에 맞서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실키는 보급병이다. 총포탄이 머리 위를 날아다닐지라도, 누군가 추운 이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누군가 배고픈 이에게 밥 한 끼 먹여 주는 것. 그게 그녀의 할 일이다. 그랬기에 멸망 전쟁의 그 날 레프리콘은 살아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이 끔찍한, 이 무서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이. 실키가 그녀를 먹여왔다. 그녀는 레프리콘의 엄마나 다름없었다. 밥 먹는 자는 밥 해주는 자를 거역할 수 없다. 단순하지만,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하아. 어쩔 수 없네요.”
그녀는, 경기관총을 움켜쥐고 그녀의 '엄마'에게 작게 뇌까렸다.
“.....해 지기 전까지만 수색하겠습니다”
…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정말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으레 이런 버려진 도시라면 떠돌이 야생동물이라도 있을 법 하건만, 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보이는 건 여기저기 부서진 잔해와 잡동사니들뿐. 그녀들은 가끔 탄 자국 – 누가 기름을 뿌리고 불이라도 붙인 듯했다 – 과 비교적 최근에 쓰인 듯한 탄피 몇 개를 발견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창백한 잿빛 도시는, 정말 너무할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여기가 마지막 구획이네요”
해가 져 간다. 저녁도 그 끝에 다다랐다. 마치 게걸스럽게 시간을 먹어치우는 허기진 야수마냥 어둠이 깔려오고 있었다. 하루 동안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은 돌아다녀 봤지만 결국 생존자를 찾지는 못했다. 실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진 못했다. 어쨌든 그녀들은 할 만큼 했고, 도시의 방사능 수치가 무시 못하게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그 한 달 사이에 무사히 이 도시를 떠난 거라면 좋으련만’
실키가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행운을 빌어 주는 사이에, 방사능 계측기를 점검하던 레프리콘이 투덜거리며 한마디했다.
“으, 빨리 마저 둘러보고 떠납시다. 기분이 안 좋아요”
“기분이요?”
“방사능 수치도 점점 치솟고 있고요, 자꾸 누가 우릴 보고 있다는 기분 안 듭니까, 병장님?”
“그냥 여기가 너무 조용해서 그럴 거에요. 분위기가 생소하면 기분도 이상해지기 마련이죠”
이 정도로 거대한 콘크리트 폐허가, 쥐새끼 한 마리 없이 조용한데다, 석양이 져 가며 어두워져 가고 있다면, 그리고 방독면 너머로 위험한 방사능이 펼쳐져 있다면 그런 기분이 들 법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실키는 레프리콘의 불안을 일축했다. 바로 이곳이 방사능 범벅이기에, 그런 존재는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생물체라면 살아 있을 수가 없고, 철충이라면 진즉에 그녀들을 공격했을 것이고, 방호장비를 갖춘 바이오로이드라면 오늘 하루종일 발품을 판 그녀들이 찾아냈을 것이다.
“그냥 기분일 뿐이에요, 레프리콘”
“끙, 그렇긴 해도 더 이상 여기서 얻을 건 없으니, 빨리 둘러보고 나갑시다.”
하필 밤안개도 끼는 것 같았다. 해가 져서 기온이 떨어지면서 도시에 안개가 끼는 게 분명했다. 그 때, 실키가 저만치, 안개와 저녁의 어둑어둑함 속에 흐릿하게 가려져 가는 길목 건너편을 가리켰다.
“저게 뭐죠?”
땅바닥에 구르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버려진 파일벙커에 걸려 투덜거리던 레프리콘이 고개를 들었다.
“…보육원이네요”
멸망 전에 세워진 보육원이었다. 그건 그녀들도 알 수 있었다. 보육원이라는 간판이 달린 건물이 보육원이지 무엇이겠는가. 다만 인간 어린이를 위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보통 인간 어린이를 위한 보육시설이 이렇게 삭막하지는 않으니까. 우중충한 도시 분위기 때문에 그녀들이 그렇게 느끼는 건진 몰라도.
“아동용 바이오로이드를 돌보던 곳인 것 같네요.”
“엄청 크군요”
”이 정도로 큰 곳이면 마리아도 한둘쯤은 있었겠는데.”
“그러고보면 오다가 마리아 모델이 쓰는 치마 같은 걸 보지 않았습니까?”
실키는 잠시 생각했다. 마리아 기종들의 튼튼한 형상기억합금 치마는 쉽게 손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들이 거리에서 발견한 것은 갈가리 찢겨져 넝마조각이 된 그 무엇이었다. 워낙 심하게 뜯겨져서 그게 마리아 기종들의 치마인 줄도 모르겠다.
“…글쎄요. 그건 너무 손상이 심해서 뭔지 알기 힘들었잖아요. 속단할 수는 없지요.”
그것도 그랬다. 뭐, 하의실종 마리아라면 꽤 볼만한 구경거리였겠지만, 사실 마리아의 치마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인지도 몰랐다. 방사능은 고에너지 파장이다. 그것은 만물을 삭아 흐뜨러뜨리고 훼손한다. 여기서는 뭐가 뭔지 제대로 확인하기가 도무지 힘들었다. 결국 레프리콘은 판단하길 포기하고 그냥 다시 보육원으로 관심을 돌렸다.
“여긴 뭐하던 곳인데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필요했을까요”
그건 실키도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여기서도 누군가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그녀들은 이 보육원을 마지막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기로 했다.
건물을 돌아보던 실키의 눈에, 문득 무언가가 들어왔다. 보육원 벽에 무언가가 쓰여져 있었다. 쓰여진 지 꽤 시간이 지난 듯한. 그녀가 그걸 가리키고선 물었다.
“레프리콘, 러시아어 읽을 줄 알아요?”
“어…시베리아 쪽에서 뛰었던 프로스트 레프리콘 기종들 기억을 좀 받아 놓은 게 있긴 합니다. 어디보자…”
점점 어두워지는데다 안개까지 스멀스멀 끼어 가니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쪽은 방독면까지 쓰고 있으니, 보육원 벽에 쓰인 글씨, 뭘로 쓰였는지도 알기 어려운 그 빛바랜 글씨들, 어쩐지 이상한 비린내가 나는 듯한 – 착각일 것이다. 그녀들은 방독면을 쓰고 있으니 – 그 글씨들을 읽기 어려운 건 당연했다.
“디…디티…얌 누즈, 노…”
누가 쓴 건진 몰라도 꽤 오래 전에 쓰여진 것 같았다. 해 져 가는 석양의 햇살에 의지하여 눈을 게슴츠레하게 찌푸린 레프리콘이, 점점 어둠에 잠겨 가는 그 글씨를 떠듬떠듬 읽었다. 해가 져 가서, 무얼로 쓰였는지, 무슨 페인트로 칠해졌는지도 알지 못할 그 글씨를.
어쩐지 몸이 떨려왔다. 밤이 오니 추워서일까, 누군가가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괜한 기분이 들어 레프리콘은 자신도 모르게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점점 자욱해져가는 안개 너머에 무언가, 무언가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니, 착각이야, 착각일 거야. 병장님 말이 맞아. 그저 착시일 뿐이야’
그래도, 마침내 그녀는, 최후의 햇살이 던져주는 마지막 빛줄기에 의지하여, 그 짧은 문장을 다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Детям нужно мясо.(아이들에게는 고기가 필요하다)”
실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에요?”
“그건…”
다음 순간, 해가 졌다, 완전히, 고요함 속에.
어둠이, 찾아왔다.
<.E N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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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카라차이! 를 모두 읽으신 분들은 대강 사정을 아실 겁니다. 파일벙커라든지, 탄피라든지.
1편을 보면, 무대가 된 도시에서 사방팔방으로 구조신호가 퍼져나갔다고 했지요. 오르카가 아닌, 멀리 떨어진 다른 누군가가 그 통신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만약 오르카의 호드가 먼저 이 도시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찾아온 이들은 괴물들 밥이 되었겠지요.
다만, 역시 마리아와 괴물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열린 결말로 남겨두겠습니다. 그 결말에 따라 저 두 스틸라인 병사들의 운명도 갈리겠죠.
p.s: 그림은 2월 이후, 3월에 다시 삽입하겠습니다...너무 바쁘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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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나 염세주의에 물들어 합류를 피하거나 되려 사령관을 거부하는 이야기도 써보고 싶네요 | 22.01.29 2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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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선정 감사드립니다 | 22.01.29 21:15 | |
(IP보기클릭)2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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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ㅎㅎㅎ | 22.01.29 21:15 | |
(IP보기클릭)1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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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꼭 속편이 나올 듯한 뒷맛 불편한 후일담이 공포영화 국룰 아니겠습니까ㅋㅋㅋㅋ | 22.01.30 02:0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