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힐F 분석 칼럼-3 : 시미즈 칸타, 폭력의 역사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사일런트힐F 4회차를 플레이하며 즐겁게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되었군요. 다만, 아직 제가 할수 있는 일이 하나 남은 것 같습니다. 바로 남겨두는 일 말이죠.
여러분들은 사일런트힐F의 스토리를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궁금하군요. 이 게임의 스토리는 '해석의 여지'라는 말을 아주 폭넓게 응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스토리를 해석하는 과정이 없으면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죠. 아무 생각하지 않고 진행하면 이야기의 앞뒤가 하나도 안 맞으니까요. 제작진들은 일부러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이야기했으며, 엔딩 역시 각자가 결정할 일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나름대로 해석하며 각자의 정답을 찾아 안개 속을 헤매이게 되었죠. 물론 저도 그 헤매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요.
그리고 이제, 저는 4회차 플레이를 통해 저 나름의 답을 찾아냈고, 제가 찾은 답을 정리해 이곳에 남겨두려 합니다. 제가 게임을 하며 찾아냈던 것, 해석했던 것, 그리고 고찰했던 것에 대해 정리해 남겨두는 이 몇 개의 칼럼은 사일런트힐F에게 바치는 제 작별 인사이며, 이 커뮤니티의 다른 분들께 바치는 선물입니다.
*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하기 위해 작성했던 글이며, 영어로 썼던 글을 다시 한국어로 수정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이제 본론인 "사일런트힐F 분석 칼럼-3: 시미즈 칸타:폭력의 역사”편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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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정당화의 문제
2. 가정폭력의 문제
(1) 미치광이 나이프 쓰로워의 문제
(2) 미치광이 나이프 쓰로워를 묘사하는 방식의 문제
(3) 미치광이 나이프 쓰로워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의 문제
(4) 트라우마 해소의 문제
3. 매매혼의 문제
(1) 매매혼은 어째서 '문제'인가?
(2) 지참금은 누구의 돈인가?
(3) 매매가 아닌 매매혼이 망가뜨리고 있는 것
4. 가정불화의 문제
(1) 기괴한 부부의 위험한 연극
(2) 가부장제에서의 여성의 권리
(3) 권리는 폭력에서 태어나는가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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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당화의 문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 마키아밸리, 군주론
사일런트힐F에는 총 세 명의 남성이 등장합니다. 아래의 셋이죠.
< 소년대표: "지옥의 약사" - 이와이 슈 / 청년대표: "사랑꾼" - 코토유키 츠네키 / 중년대표: "칸타 더 리퍼" - 시미즈 칸타 >
이 셋은 겉으로 보기에 청소년, 청년, 중년의 나이대를 대표하는,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개별의 인물들처럼 보이죠. 하지만 이 셋이 하나로 묶이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 히나코에 대한 사랑 말입니다.
이 세 남자들은 모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히나코를 사랑했습니다:
(1) 슈는 히나코를 여성으로서 사랑했고, 히나코가 '올바른 선택'을 내려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랬기 때문에 그녀에게 ㅁㅇ을 먹였습니다.
(2) 고토유키는 히나코를 여성으로서 사랑했고, 평생 함께하고픈 마음에 시미즈 가의 빚을 갚아주며 매매혼을 진행했습니다.
(3) 시미즈 씨는 히나코를 아버지로서 사랑했고, 히나코가 가부장제에 적응해 살아가길 바랬기 때문에 가정 폭력과 귄위있는 아버지를 연기했습니다. 그 이외에도 히나코가 부잣집에서 편히 살길 바랬기 때문에 결혼을 강권하기도 했죠.
그리고 이들의 '사랑'을 받은 히나코는 어떻게 되었죠? 최종적으로 그녀는 결혼식장에서 쇠파이프로 난동을 부리며 살인행각을 벌인 중증 중독자,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 때로는 그 사랑 때문에 끔찍한 일이 일어날수도 있다는 유감스러운 진실의 좋은 예시가 되었죠.
사람마다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저는 저 남자들의 의도-즉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어쨌든, 사랑은 좋은 거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좋은 의도와는 별개로 정신나간 수단을 사용했고, 결국 끔찍한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위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실은, 이 셋의 행보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아주 오래된 담론에 기초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오래된 담론의 결론부터 미리 말해두자면, 당연히,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정당성, 추가로 결과의 정당성은 모두 별개의 것이고 따라서 각각 따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일런트힐F 에서 위 남자들의 서사로 이루어지는 메시지는 그 정반대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이 게임은 "목적은 수단과 결과를 '상당 부분' 정당화한다."에 가까운 메시지를 형성하고 있어요. 저는 이 게임의 여러 부분을 여러 각도로 비판하는 사람입니다만, 이 게임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이 '오염된 메시지' 부분을 짚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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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타 더 리퍼" - 시미즈 칸타 씨가 저지른 악행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가정폭력의 문제: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특히 회칼)을 집어던지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둘째, 매매혼의 문제: 딸인 준코와 히나코에게 매매혼을 강요했습니다.
셋째, 가정불화의 문제: 아내인 시미즈 키미에 여사의 요리를 비웃거나, 여사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악행은 각각 '성차별'이라는 중심 주제를 관통하며 이야기의 큰 얼개를 형성합니다. 가정폭력의 지류는 히나코가 트라우마 때문에 성격이 뒤틀리게 만들고, 매매혼의 지류는 히나코가 억압당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며, 가정불화의 지류는 히나코가 결혼에 대해 망설임을 가지도록 만듭니다. 여기까지는 앞뒤가 맞아요.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으며, 그 결과로 일어난 참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4회차 엔딩 직전,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이 게임은 마침내 '숨겨두고 있던 최후의 진실'을 제시합니다. 바로 "사실, 시미즈 씨는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그 또한 나름 시대의 피해자였으며, 그의 '의도'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라는 반전이죠.
다시말해, 이 게임은 게임 내내 시미즈 씨의 악행들을 '나쁜 것'마냥 전시하다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방향을 휙 꺾어 "사실 시미즈 씨의 의도는 좋았어."라는 식으로 정당화하려 듭니다. 문제는 이 생뚱맞은 반전이 너무 급작스럽고,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죠. 바로 이 쌩뚱맞은 꺽기 때문에 전체 스토리의 서사 구조가 무너져버리고, 이 무너진 서사 때문에 메시지도 뒤틀립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게임이 시미즈 씨의 세 악행을 어떤 식으로 정당화하려 들었는지, 그리고 그 정당화가 어떻게 서사 구조를 무너뜨리는지, 그리고 그 무너진 서사에서 도출되는 메시지는 어떻게 뒤틀렸는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가정폭력의 문제
(1) 미치광이 나이프 쓰로워의 문제
"폭력은 다시 폭력을 부른다."
- 영화 '폭력의 역사'
시미즈 씨의 악행 중 가장 직관적인 것은 바로 가정폭력, 그 중에서도 나이프 쓰로잉입니다.
< 히나코는 운이 아주 좋았습니다. 저 칼이 몇cm만 빗나갔어도,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선택'할수 없었을 테니까요. >
위 사진은 1회차때 나오는 장면인데, 보시는 것처럼 시미즈 씨가 던진 칼이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히나코를 빗겨갔습니다. 칼끝이 다다미와 목재 바닥을 깊숙히 뚫고 박힌 것도 보이죠. 이 장면 이외에도 히나코의 회상이나 시미즈 여사의 메모, 그리고 벽에 남겨진 자국 등을 종합해보면, 시미즈 씨가 오랜 세월 동안 상당히 여러 번 칼을 던져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벽에 난 칼자국만 해도 수십 개는 되어보이니까요.
심지어 시미즈 여사의 메모를 보면 히나코의 머리 근처로 물건을 던진 적이 있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위 사진에서도 시미즈 씨가 히나코에게 직격하는 궤도로 칼을 던졌는데, 다행히 히나코의 자세가 무너지면서 빗나간 것입니다. 시미즈 씨가 칼을 던지기 직전 히나코는 일어서 있었고, 만약 히나코가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지 않았다면 저 칼은 히나코의 아랫배에 맞았을 겁니다. 이것만 봐도 그가 칼을 거리낌없이 던져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물론, 당연히,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것은 끔찍한 악행, 심각하게 정신이 나간 짓입니다. 칼을 던진다고요? 사람한테, 그것도 자기 딸한테? 저 큰 칼을?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만에 하나라도 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한거죠? 애초에 시미즈 씨는 서커스의 칼 던지는 광대 출신도 아닐 뿐더러, 설령 그가 나이프 쓰로잉의 달인이었다 해도 알콜중독자잖아요. 알콜중독의 대표적인 증상이 손떨림과 인지장애인데, 그런 알콜중독자가 술을 마시고 칼을 던지다뇨. 도덕과 윤리는 대체 어디로 간거죠?
시미즈 씨가 던진 칼을 봅시다 . 저게 사람이 맞았을 때 건강에 해가 되지 않는 크기인가요?
< 오른쪽의 남자는 자신이 쥐고 있는 칼을 사람에게 던졌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딸을 향해 던졌죠. 완전한 광인입니다.>
왼쪽의 남자, 존 윅이 들고 있는 칼은 영화 "존 윅-리로드"에 등장한 마이크로텍 사의 트로돈이라는 컴뱃 나이프로, 현실에서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트로돈은 날길이 10cm에 무게가 140g 정도인데, 이정도 스펙이면 대략 중형 컴뱃 나이프로 취급됩니다. 이에 비해 오른쪽, 시미즈 씨가 들고있는 참치회칼은 날길이가 대략 50cm는 되어보이고, 날폭도 트로돈보다 넓고 손잡이 부분도 굉장히 길기 때문에 무게도 대략 1kg을 호가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치처럼 거대한 생선을 손질하는 칼이니 날도 아주 날카로울테고. 원근의 문제도 있고 해서 정확한 스펙까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사람이 맞았을 때 건강에 썩 좋지 않을 위력을 지닌 것은 분명합니다. 한쪽만 날이 선 외날도라 찌르기에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위 사진에서 보이듯 다다미와 나무 바닥을 가볍게 뚫고 칼날의 5분의 2, 대략 20cm 정도 박히니까요.
그런 칼을 히나코가 맞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몸통에 맞았다면 그녀는 높은 확률로 사망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통은 나무바닥처럼 딱딱하지도 않고, 날붙이로 단 5cm만 관통당해도 충분히 치명적입니다. 심지어 위 회상 장면에서 보면 저 커다란 칼을 히나코의 아랫배쪽으로 던졌잖아요. 저 넓은 날이 여자애의 아랫배를 관통하면 당연히 치명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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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칼이 어디에 맞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맞으면 확실하게 치명상이니까. 그래도, 어디에 맞을지와 맞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좀 더 자세히 추정해볼수는 있겠죠. 그래야 시미즈 씨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른건지도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테니, 한번 검토해봅시다.
먼저, 바닥에 꽂힌 칼은 정면에서 봤을때 아래쪽 45도 방향, 히나코가 서 있었을 경우 아랫배를 관통하면서 엉덩이를 뚫고 나가는 궤도로 던져졌습니다. 따라서 심장, 폐, 간이나 위장 등 위쪽에 붙은 장기를 건드릴 가능성은 적다고 봐야 합니다. 아랫배니까 소장이나 대장 등 창자 부분을 크게 베어내면서 관통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요.
만약 위, 간, 심장 등을 관통당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낫지 않냐고 제게 묻는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유감입니다."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차피 맞은 시점에서 치명상이에요. 일본도보다도 넓은 날폭을 가진 1kg짜리 회칼에 아랫배를 관통당한 사람을 살려낼 방법 같은게 1960년대 일본 농촌에 존재할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그 마을에 외과적 수술이 가능한 의사 자체가 없는데. 그러니까 결국, 칼에 맞은 이후 그녀가 생존하는 시간은 전부 그녀가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즉사하지 않는다면, 그 지옥같은 시간만 늘어나는 거에요. 차라리 칼의 비행각도가 좀 더 완만해서 수평으로 날아갔을 경우, 그러니까 칼이 심장이나 간을 관통했을 경우 그녀는 길어야 몇분 내로 사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창자에 칼이 박혔을 경우, 그녀는 길면 몇 주 정도 씩이나 생존할수도 있어요.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 말이죠. 정말로,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는 칼이 히나코의 복부대동맥이나 장간막 혈관을 포함한 주요 혈관을 정확하게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럼 채 3분도 지나기 전에 의식이 혼미해질거고, 5분도 지나지 않아 출혈 쇼크로 사망할테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그게 제일 운이 좋은 케이스에요. 고통이 거의 없을 테니까. 운이 좀 덜 좋다면 그 칼이 히나코의 척추 신경을 베어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기적적으로 살아남더라도 반신불수가 되겠지만, 대신 고통이 아주 심하지는 않겠죠.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까지 파괴될 테니까.
반대로 히나코가 운이 좋지 않아 소장 쪽에 칼이 맞았다면 복압에 의해 창자가 밖으로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그녀는 칼을 뽑지 않거나, 삐져나온 창자를 뱃속으로 밀어넣고 상처를 틀어막는 것만으로 대략 1주일 남짓 생존할 수 있습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할복 후 배를 동여매고 2주일 가까이 버틴 사례도 있으니. 대신 그 1주일 동안 그녀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겠죠. 히나코가 운이 심하게 좋지 않아 칼이 대장 쪽에 맞았다면, 찢어진 대장 속의 똥이 뱃속으로 흘러나가 내장이 오염될거고, 그 오염은 곧바로 복막염과 패혈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후 히나코는 짧으면 하루, 길면 사나흘 내로 사망할 텐데, 그 기간 동안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는 칼이 히나코의 골반뼈를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골반뼈 골절의 고통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니까요. 골반뼈에 큰 손상을 입은 인간은 고순도 모르핀을 치사량 직전까지 투여해도 여전히 끔찍한 고통을 호소해요. 심지어 제4형 자율신경 뉴로파시 유전 체질, 통칭 '무통증 체질(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희귀 체질)'인 사람조차 골반뼈 골절을 당하면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 정도로 무서운 고통이에요. 근데 저 칼, 아무리봐도 골반을 관통하는 궤도로 날아갔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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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만약 히나코가 멀뚱히 서있거나 뒤로 엉덩방아를 찧지 않고, 제자리에서 털퍼덕 주저앉거나 무릎을 꿇는 식으로 무너졌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럼 저 칼은 히나코의 머리-가슴 사이를 관통하는 궤도로 날아가게 됩니다.
회상 장면에서 보면 시미즈 씨는 히나코보다 키가 머리 하나 정도 크고, 오른손잡이입니다. 그리고 그가 회칼을 던지는 장면을 보면 날이 아랫방향으로 향하도록 칼을 똑바로 잡은 다음, 머리 위까지 들어올렸다가 오버핸드로 찍듯이 던졌어요. 그 칼이 히나코의 머리에 맞았을 경우, 관자놀이나 인중처럼 통짜뼈가 아닌 부분은 충분히 관통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히나코는 다행히 즉사하게 되겠죠.
반대로 히나코의 이마에 맞았을 경우, 칼이 이마에 박혔다가 그 직후 이마뼈의 굴곡, 남아있는 운동에너지와 히나코의 움직임 때문에 미끄러져 스핀하면서 튕겨나갈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시미즈 씨가 오른손 오버핸드로 던졌으니 왼쪽 아랫방향으로 칼날이 스핀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나마 운이 좋을 경우에는 히나코의 얼굴 한가운데에 칼날이 / 모양으로 박히면서 끝나겠지만, 운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칼날이 코나 눈알, 입술, 혹은 얼굴 한쪽편을 싹둑 잘라내면서 튕겨나가겠죠.
덧붙여 이 경우 히나코는 성인 남자가 던진 1kg전후의 쇳덩어리를 머리에 맞은 것이니 그 둔력만으로도 심각한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인 남성이 오버핸드로 찍듯이 내려던지는 1kg짜리 쇳덩어리를 머리에 맞고 멀쩡하기를 바란다면 양심이 없는 거에요.
마지막으로, 칼이 던져진 그대로 히나코한테 직격하지 않더라도, 바닥에 맞았다가 튕겨져서 히나코에게 향할 위험성도 있습니다. 혹은 옆에 있는 시미즈 여사나, 칼을 던진 시미즈 씨 자신에게 튕겨져 날아갈 가능성도 있고.
시미즈 씨는 이런 위험한 행동을 아무렇지않게, 그것도 여러 번, 반복적으로 저지른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완전한 광인입니다. 다른 어떤 말로도 포장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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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만약 히나코가 칼을 맞은 다음 즉사하지 않고 어찌저찌 버텨냈다 칩시다. 얼른 치료를 받아야겠죠. 그런데, 혹시 그거 아시나요? 이 마을에 의료인이라고는 달랑 세 사람밖에 없어요. 아래의 세 사람 말이죠.
A. 전통의학을 구사하는 고령의 노파(특기: 무허가 성분-아마도 ㅁㅇ-을 거리낌없이 처방하기)
B. 그 노파의 손자(특기: 여성 청소년에게 ㅁㅇ을 먹여 유인약취하기)
C. 위의 ㅁㅇ딜러 듀오에게 찍소리도 못내는 신참 의사
과연 이 셋 중 누가 '1kg짜리 칼이 날아와 관통한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까요. 현대에도 쉽지 않을텐데, 저 시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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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시미즈 씨가 던진 칼이 히나코나 시미즈 여사에게 맞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칼을 던진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음주운전을 했음에도 사고를 내지 않았다면 잘못이 없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음주운전도, 나이프 쓰로잉도, 결과와는 완전히 별개로 행해진 시점에서 분명히 끔찍한 '악행'입니다.
(2) 미치광이 나이프 쓰로워를 묘사하는 방식의 문제
앞서 짚은 바와 같이, 저렇게 사람을 노리고 칼을 던져대는 것은, 현실에서라면 당장 체포된 후 신문에 대서특필될만한 끔찍한 악행입니다. 그러나, 창작물에 등장하는 빌런의 악행으로서는 평범한 수준이죠. 창작물에서 절대 사용될 수 없는 터부적인 주제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사일런트힐 시리즈는 원래 폭행, 감금, ㄱㄱ, 살인, ㅁㅇ, 불륜, 근친상간, 근친살해 등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들을 스토리에 사용하는 시리즈였습니다. 이전 시리즈를 보더라도 2의 안젤라, 아버지에게 ㄱㄱ당한 인물이었죠. 3의 헤더, 아버지인 해리가 죽이려고 했었어요. 홈커밍의 알렉스, 아버지인 아담이 처음부터 죽이려고 낳은 아이입니다. 그러니까 사일런트힐은 원래 그런 시리즈였어요. 당장 이 게임, 사일런트힐F만 봐도 ㅁㅇ, 살인 등 심각한 수준의 중범죄를 다루고 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이 게임이 시미즈 씨의 행동을 '악행'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나쁜 가정폭력이긴 하지만, 실제로 히나코를 맞춘 것은 아니잖아요..."라는 식으로 다루고 있어요. 혹시라도 제가 "칼을 던졌어도 실제로 맞지는 않았으니 된 거 아니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면, 정반대의 오해를 하고 계신 겁니다. 이 게임의 스토리가 그런 식으로 어설프게 변명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아이에게 1kg짜리 칼을 던져댄 시미즈 씨의 행동은 이야기 내에서 '좋은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다면 응당 그랬을 것처럼) 단죄받아 마땅한 끔찍한 악행, 당장 경찰에 신고가 들어갈 법한 아동 학대로 그려지지도 않아요. 시미즈 씨가 그 악행의 대가를 치르거나 보복을 당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렇다고 스스로 그 악행을 뉘우치거나 반성하는 것조차도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의 스토리는 그 부분을 슬그머니 넘어가버려요. 그 악행의 피해자인 히나코를 보더라도, 입으로는 칼이 무섭니 어쩌니 말하고 있지만 정작 그런 자신도 식칼이나 일본도 따위를 아무렇지않게 휘둘러대거든요. 어머니인 시미즈 여사가 그 문제에 대해 친구와 상담한 내용을 봐도 "내 남편이 아이를 향해 칼을 던지는 미친 사이코패스야..."라는 식의 절망감, 괴로움, 긴박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이 철없는 양반이 또 철없는 짓을 하더라..."류의 푸념에 가깝죠.
시미즈 씨의 끔찍한 악행이 이렇게 축소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시미즈 씨의 진정한 정체를 스토리의 핵심 반전 요소로 쓰고 있기 때문이죠. 즉 "시미즈 씨는 사실 딸들을 (내면으로나마) 사랑하는 자상하고 좋은 뜻을 가진 아빠'인데, 다만 개인적인 불행으로 인해 생긴 성격적 결함과, 권위적인 아버지상을 통해 딸들을 훈육시키려는 좋은 의도와, 시대에 의해 가지게 된 '좋은 아버지 모델'에 대한 왜곡된 생각 때문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식의 반전 요소로 활용됩니다. 이 '극적인 반전'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충격을 주는 장치로 설계된 인물이죠.
문제는, 그 반전이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가지기 위해서는 시미즈 씨의 행동이 '작은 실수'의 범주에 있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이를 향해 거대한 칼을 던져놓고 '작은 실수'라고 하려니까 앞뒤가 안맞잖아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시미즈 씨가 던진 그 칼은 히나코가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을 뿐, 히나코가 가만히 서있었으면 확실하게 맞는 궤도로 던져졌습니다. 그 시점에서 시미즈 씨의 행동은 "작은 실수였다.(또는 의도는 좋았다.)"로 정당화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리기 때문에, 반전이 등장하는 순간 역으로 앞뒤가 틀어지면서 전체 이야기가 설득력을 잃어버려요. 이 게임이 인세의 막장, 예컨대 현대의 소말리아처럼 윤리관이 무너진 디스토피아 지역이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조차 아니고. 1960년대의 일본에서 아이를 노려 칼을 던지는 악행이 '좋진 않지만 그럴수도 있는 일'이었나요?
결국,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토리 쓴 사람의 도덕관이나 윤리관이 고장나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3) 미치광이 나이프 쓰로워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의 문제
그러니까 이 나이프 쓰로잉 문제는 "의도가 좋았다."라는 식으로 넘어가기엔 너무 심각한 악행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제작진들도 어느 시점에서 그 문제를 깨달은 것 같아요. 게임을 한참 제작중일때는 깨닫지 못했다가, 완성 가까운 시점에서 갑자기 "어...? 잠깐만, 이게 말이 되나?"라는 당혹감을 느끼곤 어떻게든 얼버무려 수습하려 한 듯한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시미즈 씨에 대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지는 지점이죠.
< 이 게임에서 가장 나쁜 장면 3위 : 지금 그는 '무엇'을 '왜' 사과하고 있습니까? >
이 장면이 "워스트 장면 3위"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그가 사과하는 이유; 저 장면은 4회차 엔딩 직전에 볼수 있는 장면입니다. 게임 전체로 치자면 전체의 10분의 9를 넘어선 지점이죠. 그렇다면 당연히, '그동안 쭉 폭력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시미즈 씨가 어째서 갑자기 찾아와 사과하는가?'가 궁금해지는 것이 보통이죠. 물론, 이 게임에서는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게임이 제시한 그 '이유'는, 놀라지 마세요. 바로 아내인 시미즈 키미에 여사가 사과하라고 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4회차 '사일런트힐' 루트에 진입하면, 히나코가 집으로 가는 중간에 거치는 공원(어린 코토유키와의 추억이 나오는 공원)의 오른쪽 골목에 있는 라디오에서 시미즈 여사가 사과하라고 협박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라디오에서 들리는 소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 1회차 자업자득 루트: 소방관들의 현장 파악 무전 >
"....의 경우 의식불명 상태로, 호흡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 카나 소방서 구급 8, 상황 파악했습니다. / 이상 카나 소방서 본부... / 10명 가량이 쓰러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 / 현재 확인 중입니다... 잠시 대기 바람. / 이상..."
이 부분은 자업자득 루트의 엔딩에서 경찰들이 '남자 1명이 심정지 상태'라고 무전으로 말하는 부분과 대구를 이룹니다. 즉, 츠네요시 신궁의 결혼식장에서 히나코가 쇠파이프와 식칼로 사람들을 습격해 10여명을 쓰러트리고 한명을 살해한 후 도주한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죠.
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4회차에서는 아래와 같이 바뀝니다.
< 4회차 사일런트 힐 루트 : 시미즈 여사의 협박 >
"여보, 히나코에게 사과해요. 히나코가 용서하지 않는 한, 당신은 절대로 그녀를 배웅하지 못할 거에요!"
네, 이것이 시미즈 씨가 4회차에서 갑자기 히나코의 방에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는 이유입니다.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나요? 이 협박을 제외하고, 게임 내에서 시미즈 씨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생각이 바뀌거나, 히나코에게 미안함을 가지거나, 히나코에게 사과할만한 계기는 단 하나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4회차를 제외한 모든 루트에서, 시미즈 씨는 히나코에게 사과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어요.
이 시퀀스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시미즈 씨가 히나코에게 미안한 마음, 사과하려는 마음을 가진 것이 묘사되거나, 혹은 그런 마음을 가질만한 사건이 복선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 중간 과정이 있어야 "시미즈 여사가 협박조로 강하게 말하자, 내심 히나코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괴로워하던 시미즈 씨가 못이긴 척 가서 사과했다."라는 식의 개연성이 생기죠.
근데 그게 없으니까, 이야기가 '시미즈 씨는 여전히 미치광이지만, 아내의 협박에 굴복해 딸에게 가서 사과했다.'는 식이 되잖아요. 그 이야기에서 결국 시미즈 씨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그저 아내가 시키니까 히나코에게 가서 '딸에게 사과하는 아버지'를 연기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시미즈 씨가 그렇게 시미즈 여사에게 굴복해 살아가는 나약한 인물이었다면, 히나코의 회상에 등장하는 시미즈 여사는 왜 그렇게 비굴하게 굴었던 거죠? 시미즈 씨가 딸의 결혼식조차 참가할수 없게 찍어누를 수 있는 '강력한' 시미즈 여사가, 그의 칼 던지는 버릇은 왜 고치지 못했죠? 설마...음, 만약, 지금 뭔가 어두운 심연을 얼핏 바라본 듯한 느낌이 드신다면,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신 겁니다. 이 주제는 아래 4.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2) 그가 사과하는 방식: 시미즈 씨가 사과하는 방식은 간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과오를 하나로 퉁쳐서 "잘못했다."로 넘어가려 해요. 만약, 사과의 동기가 어쨌건 간에 그에게 진정으로 사과할 마음이 있다면, 그는 먼저 자신의 '어떤 행동'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명명백백히 밝힌 다음, 그 잘못을 이제 어떻게 수습할 것이며 히나코에게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죠.
그는 자신의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는지 결코 말하지 않아요. 히나코가 '칼'이라는 주제를 대놓고 들이대도, 시미즈 씨는 "아이들이 조금 무서워할 수준이 되어야 권위있는 아버지라고 착각했다."라고 흘려넘깁니다. 아니, 칼을 던진 걸 사과해야죠. 거기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나 과오에 대해서도 그 '착각' 이외의 다른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수습하고 보상할지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아요. 그는 그 부분을 건너뛰고 슈나 코토유키를 언급하면서 "그저 히나코가 마음가는 대로,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라는 말로 퉁치고 넘어가려 합니다. 아니, 걔네들이 히나코와 뭘 어떻게 할지는 걔네들과 히나코가 상의할 문제죠.
이 게임의 대사가 대체적으로 그렇지만, 그 장면에서 시미즈 씨의 말은 너무 뭉뚱그려져 있고, 듣기 좋은 허황된 말, 추상적인 이야기만 가득할 뿐 내용이 없어요. 그가 자신의 나이프 쓰로잉을 사과했나요? 아니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과오와 그 원인에 대해 히나코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했나요? 그것도 아니오. 그럼 최소한, 그가 재발 방지를 약속하거나, 사과의 의미로 어떤 보상을 제시했나요? 그것도 아니오. 그럼, 그가 그간 히나코를 억압한 것을 사과하고 열린 자세로 히나코의 의견을 들으려 노력하기라도 하나요? 그것조차 아니오. 시미즈 씨는 이마를 땅에 비비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늘어놓을 뿐,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논의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저 "히나코 마음대로 하면 된다."라고 말할 뿐이에요. 그 광경 어디쯤에 시미즈 씨의 '진정으로 사과하려는 마음'이나 '소통의 자세'같은 게 있죠?
3) 히나코가 그의 사과를 듣는 방식: 위에서 말한 대로, 시미즈 씨의 사과방식은 교활했습니다. 그런데 그 변명을 들은 히나코는 "우리는 피가 이어져있잖아,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지."나 "나는 불효녀일까?"같은 소리를 하면서 그를 가볍게 용서해버립니다. 물론, 아버지의 잘못을 용서하는 건 그럴수 있습니다. 당연히 용서할 수 있죠. 가족이니까요. 하지만 단 한번의 사과, 그것도 대충 뭉뚱그려진 사과로 가볍게 용서해버릴만큼 히나코의 '마음의 상처'가 작았다면, 그 작디작은 마음의 상처로 삐뚤어진 히나코 자신의 정당성이 무너지잖아요. 특히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 즉 플레이어블 히나코의 정당성이.
그 장면이 히나코 내면의 갈등, 그러니까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은 딸로서의 마음과, 그간의 가혹한 고통 때문에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대립하는 상태을 묘사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가 시미즈 씨의 변명을 납득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고, 그걸 현실의 히나코(시미즈 씨에게 사과받고 있는 히나코)에게 설득하려는 말도 이상했어요. "아빠의 마음만은 알아줘!"라뇨. 바로 그 '마음'이 삐뚤어져서 시미즈 씨가 이상한 사람이 된거고, 그 결과로 히나코를 학대했던 거잖아요.
이 사과 장면에서, 시미즈 씨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그나마 "시미즈 여사의 협박에 굴복했다."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근데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는 왜 갑자기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변한거죠?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는 아버지 시미즈 씨에 대한 분노와, 증오와, 트라우마를 일기에 열심히 적어두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사람입니다. 게임 내에서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바뀔만한 어떤 계기나 사건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장면에서, 그녀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태도를 바꿔 "아버지의 마음만은 알아주자!"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이게 앞뒤가 맞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 장면에서 에비스가오카 히나코의 급격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은 '그녀는 중증 ㅁㅇ 중독으로 인해 원래의 정신에서 해리된 자아, 일종의 정신분열 인격이기 때문에, 정상인처럼 사고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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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미즈 씨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면서 "아버지가 잘한 건 아닌데, 시대가 그런 모습을 강요한 것도 있고, 착각한 것도 있고, 아무튼 딸을 사랑하기는 했어."라는 식으로 뭉뚱그려 넘어가는 그 뒤편에서, '딸에게 칼을 던지는 미치광이 가정폭력범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중대한 문제는 스리슬쩍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제작진들도 그 문제를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슬그머니 넘어가버렸어요. 바로 이 부분이, 제가 위에서 "제작진들이 당혹감을 느끼고 어떻게든 얼버무리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4) 트라우마 해소의 문제
히나코가 회칼에 트라우마를 가졌다는 것은 시미즈 부부 보스전 컷신에서 제대로 표현됩니다. 시미즈 씨가 회칼을 들어올리자, 히나코는 바닥에 꽂힌 과거의 회칼, 일렁이는 잔영을 보며 무너져버리죠.
< 시미즈 씨의 회칼은 아직도 그의 손에 단단히 쥐어져 있지만, 히나코는 그 칼이 자신에게 날아왔던 기억에 찔려 무너집니다. >
트라우마를 표현한 의도는 알겠어요. 연출도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후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어요. 히나코는 회칼의 트라우마를 정면에서 마주하고 극복했나요? 아니오. 그럼, 반대로 회칼의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나요? 아니오. 회칼 트라우마 자체가, 이 장면에서 한번 쓰이고 그대로 사라져버려요. 이후엔 안나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히나코의 회칼 트라우마는 대체 어떻게 해소된걸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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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의 해소란, 그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보는 과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회피하는 것으로는 결코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 없어요. 왜냐하면 트라우마는 회피를 통해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이 불꽃을 피해다니다보면 어느새 빨간색만 봐도 공포에 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트라우마의 대상을 회피하다보니 뇌의 피드백 회로가 트라우마 대상을 '최우선으로 피해야 할 것'이라고 학습한거죠. 그래서 트라우마 대상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차단하기 위해 플래시백, 과각성, 과민감 등의 회피 기재를 사용하는 것이고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트라우마라는 것을 완전히 없애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별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에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능한 방법이 하나는 있죠. 트라우마든 이별한 사람이든 어차피 뇌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니까, 물리적인 방법으로 뇌를 파괴해버리면 확실하게 사라집니다. 다만, 그 경우 뇌 안에 들어있던 다른 것들도 전부 같이 사라지죠. 따라서 트라우마의 완전한 소거는 (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의 해소라는 것은 트라우마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그것을 경고 신호가 아니라 경험의 일부로서 내면에 통합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 끔찍한 경험이 내게 고통을 주었지만, 나는 괜찮아. 그 경험은 지나갔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의 극복, 승화인 것이죠. 물론 그렇다고 대놓고 트라우마 상황을 재현해서 뛰어들거나, 혼자서 통합을 이루려고 시도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오히려 정신적 재외상, 재트라우마같은 위험한 일이 발생할수도 있어요. 그게 바로 위에서 히나코가 처한 상황입니다.
근데, 그 다음 부분이 없어요. 회칼 트라우마는 이후 다시는 등장하지 않고, 히나코의 트라우마 이야기는 마치 회칼에 뚝 잘려나간 것마냥 사라져버립니다. 결국, 이 회칼 트라우마라는 소재 또한 다른 많은 소재들, 성차별, 매매혼, 가정폭력처럼 수많은 소재들이 다뤄졌던 방식대로 다뤄진 거에요. 자극적인 소재로 들이밀어져 눈길을 끈 다음, 제대로 활용되거나 이어지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는 방식 말이죠.
3. 매매혼의 문제
(1) 매매혼은 어째서 '문제'인가?
이것은 위의 칼 문제와는 전혀 다릅니다. 칼을 던지는 것은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는 악행'이며, 문제는 그 악행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시대가 그랬다."라는 식으로 어설프게 덮는 방식에 있었습니다.하지만 매매혼 문제는 정반대로 시미즈 씨의 사과 장면 때문에 '악행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시미즈 씨는 딸의 매매혼 값으로 집안 살림을 나아지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반대로 딸들이 좋은 집에서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시미즈 씨는 매매혼을 '강요'한 것조차도 아니에요.
준코를 봅시다. 준코가 키누타 가문에 강제로 팔려간 거에요? 아니에요. 중매인을 통해 여러 신랑 후보를 만났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한겁니다. 당시 시대상으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의 인생은 매우 암울했습니다. 어차피 준코가 결혼하지 않고 시미즈 가에 계속 눌러앉아 산다고 해서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최종적인 선택을 내린 건 엄연히 준코 자신입니다. 심지어 좋은 집안으로 이사가서 친정 살림에도 보탬을 줬어요.
히나코를 봅시다. 히나코가 츠네키 가문에 강제로 팔려갔어요? 아니에요. 시미즈 씨는, 비록 말이 거칠긴 했지만 게임 시작부터 히나코를 말로 설득하려 했어요. "너한테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잖아요. 부모 입장에서 딸이 부잣집에 시집갈 기회가 생기면, 당연히 하라고 식으로 권유하지 않나요? 부모가 그정도 권리는 있잖아요. 자식의 인생에 대해 조언하고 권유할 권리.
시미즈 씨가 히나코의 의견을 완전 묵살하고 결혼을 진행했다면 모를까, 시미즈 씨가 히나코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녀를 설득하려 한 시점에서, 그것은 악행으로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결혼 상대자인 고토유키 또한 히나코가 싫다고 하니까 자신이 모든 리스크를 짊어지고 결혼식을 파토내주잖아요. 결국, 아무도 히나코에게 강요하지 않았어요. 히나코 자신이 제대로 의견을 피력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미즈 씨가 "너한테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걸 봐서는, 결혼이 탐탁치 않다는 식의 태도는 보인 것 같아요. 다만 그 대화가 있던 것이 결혼식 전날이라는 점, 거기다 이후 그녀가 고분고분 결혼식장에 끌려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른다는 점을 보면, 히나코가 첫 구혼으로부터 결혼식이 벌어지는 사이의 몇년 동안의 기간에 결혼을 거부하거나 반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히나코가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했으면 시미즈 씨나 고토유키는 분명 파혼을 진행했을 테니까요.
시미즈 씨와 결혼에 대해 대화한 내용이 있으니 히나코가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인해) 거부 의사를 표시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볼수도 없고. 애초에 히나코는 자신을 그토록 억압한 가부장, 아버지 시미즈 씨한테도 대놓고 대들면서 하고 싶은 말 따박따박 쏟아내는 성격이니까, 진짜 싫다면 거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역시, 그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상황에 휩쓸렸다는 설명이겠죠.
이처럼, 이 게임은 여러 은유와 상징,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준코와 히나코의 결혼을 '가축을 파는 듯한 매매혼이었고, 나쁜 짓이었고, 여성은 가축이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게 나쁜 이유는 제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에서 매매혼이 나쁜 가장 큰 이유는 '강요되기 때문'인데, 준코도 히나코도 결혼을 강요당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신부에게 강요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 결혼은 매매혼이 아닙니다. 그냥 신랑쪽 지참금이 많은 결혼일 뿐.
(2) 지참금은 누구의 돈인가?
자녀들의 결혼 문제에서 시미즈 씨의 악행처럼 보이는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준코의 지참금으로 세탁기를 사거나, 히나코의 지참금으로 집의 빚을 갚은 일이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행동들은 악행이 아닙니다. 키누타 가문이 준코한테 준 돈을 시미즈 씨가 뺏어가서 세탁기를 샀으면 그건 악행이죠. 근데 아니잖아요. 고토유키가 히나코를 위해 쓰라고 준 돈을 시미즈 씨가 자기맘대로 썼으면 분명히 악행이죠. 근데 그것도 아니잖아요.
부잣집으로 시집간 딸들의 지참금을 어디에 쓰건, 뭐를 사건, 받은 시점에서 그 돈은 시미즈 씨의 것이니까 시미즈 씨 마음대로 쓰는 돈입니다. 간섭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내인 시미즈 여사 뿐인데, 시미즈 여사도 반대했다는 묘사는 전혀 없죠. 애초에 반대할 사람 같지도 않고. 아니, 애초에 그 시절의 중년 남자가 세탁기 같은 것에 신경이나 썼겠어요? 자기가 빨래를 하는 것도 아닐텐데. 아무리봐도 시미즈 여사가 시미즈 씨를 조종해서 세탁기를 사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드는데요.
결국 이 지점에서 게임의 서사가 급격하게 흐려집니다. 시미즈 씨가 한 행동이 '악행'이 아니게 된 순간, 그거 가지고 가축 운운하는 히나코가 '싸가지없는 멘탈리스 불효녀'가 되버리니까요. 히나코는 '준코를 팔아치운 돈으로 세탁기를 산 아빠'에 대한 증오심을 일기에 써뒀지만, 그 세탁기는 히나코의 옷도 빨았을 겁니다. 그녀가 발로 마구 짓밟은 후 내버린 빨간 원피스도 포함해서 말이죠.
(3) 매매가 아닌 매매혼이 망가뜨리고 있는 것
역으로 말해봅시다. 히나코가 결혼을 끝내 거부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녀는 누구 돈으로 먹고 사는 거죠? 히나코는 20대 성인인데다 따로 직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현대처럼 여성에게 취업문이 활짝 열린 시대도 아니었고. 그럼 히나코가 먹고, 자고, 입고, 돌아다니고, 사회생활하는 비용은 어디서 나오나요? 부모님이 내주는 거잖아요.
히나코가 10대 소녀였던 50년대 당시, 일본의 가난한 농촌에서는 실제로 아이를 파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예 아이를 전문적으로 매매하는 회사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그렇게 팔린 여자아이들은 하녀, 가게 점원, 청소부 등 하급 노동자가 되거나, 운이 나쁘면 창녀가 되기도 했어요. 그런 일이 엄청 흔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창녀가 된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 창녀들을 구제해주자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어요. 그보다 딱 10년전인 1940년대,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옷살 돈이 없어서 밀가루 포대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그래서 제분소에서 밀가루 포대를 예쁘게 디자인하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전 세계적으로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히나코는 20대가 될 때까지 집에서 깨끗한 옷 입고, 학교 친구들이랑 놀러다니고, 자기 방도 따로 있고, 굶주리지도 않으면서 살았잖아요. 엄마가 구해온 옷을 마구 짓밟고는 "디자인이 마음에 안드니 이딴 옷은 내다 버려!"라는 배부른 소리를 외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시미즈 부부가, 자신들이 빚더미에 올라앉아 괴로워하면서도, 히나코에게는 돈을 썼으니까 그렇죠. 거기에 대고 '여자는 가축'이 어쩌고 말해봐야, 정당성을 잃는 것은 히나코 자신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위해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빚 때문에 허덕였음에도 아이가 굶지 않고, 매춘부가 되거나 팔려가지도 않고, 오히려 옷 투정을 할 정도로 마음편히 살 수 있게 해줬잖아요.
물론, 시미즈 부부가 아주 잘 사는 갑부였고, 그래서 아예 빚이 없었거나,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면 히나코에게 훨씬 좋았겠죠. 하지만 시미즈 부부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나쁜 부모의 증거'나 "여자는 가축이다."의 근거로 들이댈 수는 없습니다. 부모 역시 그들의 아이처럼 단지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니까요.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고, 그건 누군가의 부모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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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시미즈 씨의 문제 중, 사기를 당한 것은 시미즈 씨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건 사기를 친 사람이 잘못한 거니까요. ㄱㄱ당한 여성에게 "네가 ㄱㄱ을 당한 건 ㄱㄱ당할 만한 짓을 해서 그런 것이니, 니 탓이야."라고 말할수 있나요? 없어요. 똑같은 의미에서 시미즈 씨도, 물론 사기를 안 당했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어쨌든 사기를 당한 것이 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 시미즈 씨는 그 빚을 지고도 아이에게 나가서 돈을 벌어오게 시키거나, 아이를 팔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가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옷투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편히 자랄 수 있게 키웠어요.
또한 시미즈 씨의 문제 중, 앞서 파트 1에서 짚은 시미즈 씨의 나이프 쓰로잉-그러니까 가정폭력의 문제는, 물론 끔찍하고 추악한 죄악이긴 하지만, '여자에 대한 폭력'이 아닙니다. 히나코가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였어도, 시미즈 씨는 똑같이, 혹은 더 끔찍한 가정 폭력을 휘둘렀을 겁니다. 예컨대 식칼을 던지는 위협이 아니라 아예 직접적인 폭력을 가한다거나. 당시에는 남자아이에 대한 가혹한 물리적 체벌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폭력을 당하며 자라야 '강인한 사나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여자는 가축이다"라는 말이 나올 근거가 될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국 히나코가 '여자는 가축이다'라고 노래를 불러대는 이유가 뭐죠? 이 게임엔 그에 대한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시미즈 씨(와 그 시대의 남자들)에게 어설픈 면죄부를 주려다가, 원래 메시지가 오염되서 사라졌어요. 남은 것은 정당성을 잃은 히나코와 약물중독 뿐입니다.
노파심에 다시 강조하지만, 위의 내용은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닙니다. 이 게임의 내러티브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그것으로 인해 메시지가 어떻게 오염되어 있는지 짚고 있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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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실제로 그 시대에 매매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걸 게임의 주제로 사용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미즈 씨의 사과라는 반전 요소의 활용이 너무 어설퍼서 "오히려 히나코가 문제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문제입니다. 최종적으로 그 결혼이 히나코의 살인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그건 사이코패스 ㅁㅇ딜러가 유인약취를 목적으로 히나코에게 ㅁㅇ을 투여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궤가 다른 이야기죠.
결국 이 게임은 '매매혼'이라는 일견 자극적인 주제를 던지기만 할 뿐, 그게 왜 악행이었는지 설득력있게 보여주거나, 그 주제가 현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고찰할만한 부분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아니, 애초에 그 매매혼이란 주제를 스토리에 녹여내지조차 못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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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이 게임의 스토리는 설명하기 애매한 부분을 오컬트 쪽으로 넘겨서 얼버무리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 '매매혼'이 그 정점에 있습니다. 게임 내에서는 주술적인 매매혼에 대한 언급아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매매혼이 히나코에게 연결되는 지점이 애매해요. 당장 고토유키가 어릴 적 자신을 구해진 히나코에게 반해서 구애했다는 정보와 정면에서 상충되잖아요. 고토유키가 여우신에게 홀려서 그랬다고 설명하자니, 그는 히나코를 위해 여우신을 직접 거스르고 결혼식을 파토내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여우신은 명백히 '오랜만의 결혼식에 과음한 인간 남성'으로 설명되기도 하죠.
그러니까, 애초에 이 게임의 전체 스토리 자체가 '이렇게 해석해도 말이 되고, 저렇게 해석해도 말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현실 너머로 보내서 완전한 하나의 해석이 불가능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해석하려 하면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빈틈을, 오컬트 요소로 가려버리는거죠. 오컬트는 현실에 없기 때문에 제대로 앞뒤를 맞출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부분을 닥치는 대로 오컬트에 묻어서 숨기다보니, 역으로 오컬트끼리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겨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오컬트 요소를 완전 배제하고, 오컬트처럼 나오는 모든 요소들은 현실의 요소들을 비춘 그림자거나 상징이라는 전제하에 스토리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4. 가정불화의 문제
(1) 기괴한 부부의 위험한 연극
이건 위의 두 문제와는 결이 전혀 다릅니다. 앞선 (1) 칼을 던지는 버릇은 '악행인데 어설프게 지나가는 것'이 문제였고 (2) 매매혼 강요는 매매혼도 아니고 강요도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악행이 아니었던 것'이 문제였어요. 하지만 시미즈 부부 사이의 문제는 '부모님의 괴상한 역할극 놀이와 그에 속아 트라우마를 얻게 된 멍청한 딸'이라는 식으로 귀결됩니다.
앞선 문제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라면, 이 (3)의 문제는 '이상한 부분'입니다.
앞서 1.에서 설명했듯, 시미즈 씨는 시미즈 여사가 '히나코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결혼식도 못 가게 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으니까, 히나코를 찾아가 바닥에 이마를 대면서 사과했습니다. 사실, 시미즈 여사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시미즈 여사는 걸레를 빤 물로 탄 차를 시미즈 씨에게 먹이거나, 시미즈 씨가 싫어하는 반찬만 먹이거나, 아예 대놓고 며칠씩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시미즈 여사는 시미즈 씨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시미즈 씨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막을 수 있다구요. 그래요, 뭐 그럴 수는 있다고 칩시다. 항상 남자가 리드하고 여자가 따라간다는 것도 낡은 고정관념이고, 아내가 리드하고 남편이 따라갈수도 있습니다.
< 아내에게 굴복해 '고개숙인' 약한 남자 시미즈 칸타 씨(50세, 무직) >
그런데, 그 시미즈 여사가 정작 딸 앞에서는 마치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것처럼', 혹은 '폭행당하는 것처럼' 연기를 하면서 살았어요. 시미즈 씨가 시미즈 여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비꼬거나, 위협하는 식으로 '연기'를 펼치고, 시미즈 여사도 그걸 '접수'해서, 부부가 함께 히나코 앞에서 합을 맞춘 역할극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무려 20년을 넘도록. 히나코가 그 역할극에 완전히 속아넘어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끝내 "여자는 가축이야."같은 소리를 하는 정신병자가 될 때까지 말이죠. 이사람들 제정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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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사이에는 부부 사이에만 보여주는 얼굴이 있고, 자녀 교육을 위해 어느 정도 사회적 가면(페르소나)를 쓸수 있다는 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부부가 현실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역할을 맡아서 자식 앞에서 20년을 넘게 역할극을 했고, 그 역할극을 진지하게 믿은 딸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중증 약물중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면, 글쎄요. 저는 '그건... 정말 미치광이 같은 이야기군.'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아요. 그 이야기를 웃긴 비극이라고 불러야 할지, 슬픈 희극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대로 된 이야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약 사이코패스 ㅁㅇ상이 없었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돌아갔다면, 히나코가 결혼해서 집을 떠난 뒤 시미즈 부부는 과연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이제 관객이 없으니 역할극 놀이도 그만뒀을텐데.
< 그가 왜 울고 있을까요? 딸이 모두 결혼하면서, 그의 유일한 낙이었던 "강한 남자" 역할극 놀이가 영원히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죠.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구정물로 우려낸 찻물 뿐입니다. >
(2) 가부장제에서의 여성의 권리
이 부분에서 스토리 쓴 사람이 하려던 이야기는 "가부장제의 여자가 꼭 억압당하고, 일방적으로 피해입고, 주눅들어서 살던 것은 아니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입니다. 시미즈 여사가 무슨 대단한 진리라도 말하는 양,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시작하니까요. 하지만 이 게임의 스토리는 그런 의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의미있는 메시지를 엮어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시미즈 여사가 시미즈 씨를 통제할 수 있게 된 순간, 그러니까 '시미즈 씨가 딸의 결혼식에도 갈 수 없도록 강제할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 시미즈 가족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은 시미즈 여사의 것이 됩니다. 그녀는 남편을 강제할 강력한 권력이 있었는데, 남편이 딸한테 칼을 던지는 것을 막지 않았어요. 남편에게 구정물을 먹일 정도의 배짱이 있었는데, 그 남편이 딸 앞에서 자신을 구박하는 것도 막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철저히 무시할만큼 인격적으로 강인했지만, 이웃들에게는 남편 욕을 하고 다녔죠.
인과의 선후가 맞으려면 주도권과 결정권이 시미즈 씨에게 있어야 했어요. 시미즈 여사가 시미즈 씨를 강제로 억압할 수 있다면, 시미즈 씨가 한 모든 악행들은 시미즈 여사의 조장에 의해 벌어진 일이나, 묵인 하에 일어난 일이 됩니다. 결국 히나코가 회칼 트라우마에 걸리고, 여자는 가축이라는 이상한 신념을 가지게 되고, 인성이 비뚤어진 아이로 자라난 것이 전부 시미즈 여사의 책임이 되는 거에요.
시미즈 여사는 대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설마 그녀는 배드애스에게 농락당하고 싶다는 뒤틀리고 음습한 여성향 판타지에 심취해있던 걸까요? 이게 무슨 공포, 기괴, 끔찍한 이야기인가요. 저는 사일런트힐F보다 시미즈 여사가 훨씬 더 무섭습니다.
(3) 권리는 폭력에서 태어나는가?
방법론적인 측면을 봅시다. 시미즈 여사가 부부관계에서 발생하는 트러블을 해소하고, 부부관계의 유지를 위해 사용한 방법은, 놀랍게도, 시미즈 씨에게 걸레빤 물로 탄 차를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대체 뭐죠. 남성은 힘으로 싸우고 여성은 독으로 싸운다는 이야기인가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꿀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남성을 독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결국 이 부분이 등장하면서 게임 전체의 메시지는 극도로 오염되어 버립니다. "남자는 여자를 학대하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음식에 구정물을 타서 보복한다."라는 식이니까요. 이건 여성 서사나, 여성을 존중하는 서사나,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라고 볼 수가 없어요.
아니, 오히려 여성에 대한 굉장히 차별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먹을 것에 독을 타는 여성이라니. 그거야말로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같은 이야기를 하던 악당 왕비가 등장하는 백설공주 시절에나 사용되던 '성차별적 인식' 그 자체가 아닌가요? 이 게임에 대한 최초의 분석에서 말했듯, 이 게임은 여성을 굉장히 성차별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독살녀' 시미즈 여사고요. 제가 살면서 경험한 모든 창작물을 다 꼽아도, 주인공의 엄마를 이렇게까지 뒤틀린 사람으로 묘사하는 작품은 정말 희귀합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여성을 왜곡하는 이야기를 과연 어떤 여성이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 이 게임에서 가장 나쁜 장면 1위: 남편에게 걸레 짠 물을 먹인 경험을 설명하는 아내의 환한 미소 >
세상에, 그 길고 지루한 이야기의 대단원에서 짐짓 감동적인 것처럼 나오는 이야기가 '여자가 무시당하지 않는 이유는 여자가 남자를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면 안되죠. 애초에 이미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감할만한 관념적인 가치를 들이밀어도 한계가 뚜렷한 지점이잖아요.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감할만한 관념적인 가치, 예컨대 대화, 소통, 공감, 이해 같은 것으로 이야기를 꾸린다고 가정해봅시다. "사실 시미즈 부부는 서로 대화와 소통을 통해 금슬이 좋았는데, 시미즈 씨가 서툴러서 표현을 거칠게 하다보니 히나코가 오해한 것이다."라는 식이 되겠죠. 그럼 그 순간 "시미즈 부부 사이에 그런 좋은 것들이 있었다면 어째서 시미즈 여사는 시미즈 씨의 행패를 막지 못했는가?"라는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 생겨납니다. 근데 심지어 거기서 독살 이야기를 하니까, 어거지 감동으로 대충 뭉개고 넘어가지도 못하게 되버립니다.
히나코는 '엄마 요리에 시비를 거는 아빠'를 경멸하지만, 그런 히나코도 엄마가 걸레빤 물을 마시라고 주면 싫어하고 욕하지 않겠습니까? 저라도 싫어하고, 저라도 화낼것 같아요. 그리고, 진지하게, 제가 만약에 이런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같은 여자와 결혼했다면, 저도 무서워서 회칼을 손에서 놓지 못할 것 같습니다. "행여라도 내 입에 독이 들어오면 나는 너한테 칼을 던질거고, 결국 우리 둘 다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러니 제발 내 먹을 것에 독 타지마."라고 비례억지전략이라도 써야 물 한잔이라도 안심하고 마실 수 있을테니까. 어쩌면 시미즈 씨도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칼던지기 연습을 하던 것은 아닐까요?
심지어 우리는, 시미즈 씨가 걸레빤 물을 마시고 배탈이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는 66.6%라는 높은 확률로 ㅁㅇ딜러 듀오 중 한 사람에게 치료(라는 이름의 ㅁㅇ 투여)를 받게 될거고, 결국 중독자가 될 가능성이 높죠.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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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의 스토리 작가가 해당 부분을 구성한 의도는 "남자도 여자도 모두 강점과 약점, 부부 사이에만 숨겨두고 보여주는 진정한 모습이 따로 있으며, 그 진정한 모습은 때론 남자가 이기고 때론 여자가 지면서 서로 아웅다웅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았다." 쪽에 가까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의도를 구현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으니, 그 소박한 의도는 간데 없고 "남자는 여자를 학대했고, 여자는 음식에 독을 타서 보복한다: 폭력살인자와 독살녀의 긴장 넘치는 부부 생활"같은 식으로 메시지가 왜곡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위에서 말한 메시지의 오염입니다.
또다시 말하지만, 위의 내용은 게임의 내용을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위와 같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건 여러 해석 중 하나일 뿐 유일한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애초에 저는 저 해석을 지지하지도 않고. 그저 이 게임의 이야기 구성이 얼마나 이상하게 망가져 있는지, 그리고 그 망가진 구성으로 인해 메시지가 어떤 식으로 뒤틀려버리는지를 보여드리기 위해 '또다른 방식의 해석 방향'을 보여드린 것입니다.
5. 결론
결론적으로, 이 게임에서 시미즈 씨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상당히 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끔찍한 악행을 슬쩍 묻고 넘어가는 방식, 악행이 아닌데 마치 악행인것처럼 포장하는 방식, "의도는 선했다."라는 식으로 면죄부를 주는 방식 등,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앞뒤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설득력도 없으며, 자세히 살펴볼수록 점점 더 이상한 점만 늘어나요.
이 게임은 거의 똑같은 내용을 4회차나 플레이하면서 틀린그림 맞추기를 해야만 전체 스토리의 맥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그 4회차 각각의 내용이 전부 이상하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1회차일때는 아예 서사가 제대로 성립이 안되니까 이상하고, 4회차에서는 앞뒤가 너무 안맞으니까 이상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제 생각엔, 바로 그래서 다회차를 한 사람일수록 대체적으로 이 게임을 안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고.
저는 일찍이 3회차 플레이를 마치고 간단한 감상문을 쓰면서 이 게임에 대한 점수를 10점 만점에 4점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스토리에 한정해서는 10점 만점에 1점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4회차를 끝낸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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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위의 해석은 '완전한 정답'이나 '유일한 해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작진들은 이 게임의 스토리가 여러 방식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구성했다고 이미 밝혔어요. 그래서 게임의 수많은 요소들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도록' 굉장히 애매하게 짜여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 제가 해석한 것들은 그 애매한 것들 중 제가 마음에 드는 몇 가지를 골라내어 짜맞춘 결과물일 뿐, 정답이 아니에요. 말투도 굉장히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매번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를 붙이자니 글이 너무 난잡해져서 잘라낸 거고요.
그러니, 위 해석 또한 읽으시는 분 각자의 '정답'을 찾는 과정에서 재미로 읽어볼만한 여러 생각 중 하나로 여겨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게임을 플레이한 각자가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고, 각자가 내린 결론이 진실입니다. 제 생각에, 스토리 짠 사람 포함해서 제작진 대부분(혹은 전부)도 하나의 완벽한 정답 같은건 모를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의 일관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못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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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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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감사함미다.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아주 기쁘군요ㅎㅎ 사실, 글 자체는 이미 다 써둔 상태인데, 게시판 도배글이 될까봐 최대한 페이지를 넘겨서 업로드하는 중이에요. 기다리시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ㅠ | 25.11.12 19: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