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쯤 전 대학교에서 국제정치 강의 들을 때 교수님께서 이야기해주셨던 경험담임.
이미 오래전이라 디테일은 좀 많이 잊었고 좀 잘못된 부분도 있긴 하겠지만,
재밌는 경험담이기도 해서 더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 좀 남겨두려는 차원에서 써보려고 함.
교수님은 학생 시절 소련 관련 전공을 하고 계셨는데, 당시 국내에서 소련 관련 전공자들이 가장 힘들었던 건 현지에 가서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없는 점이라고 하셨음.
그런데 당시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문호를 열게 되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 교수님도 소련에 가볼 기회가 생겼다고 함.
체류 비용이나 기타 등등의 사유로 그리 오래 있을 수는 없었지만, 본인이 공부하던 국가를 처음으로 실제 가볼 수 있게 되어 굉장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소련에 도착했는데...
'이게 정말 미국과 세계를 양분한 제2세계의 맹주인가?' 싶은 느낌이 드셨다고 함.
도로 정비도 잘 안 돼있고, 사람들은 빈곤하고, 전반적으로 상당히 우울해 보이는 느낌이었다던가.
당시 소련은 배급경제가 오래 지속되던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셋 정도만 나란히 서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맨 뒷 사람에게
'당신이 줄 맨 끝이오?'
하고 묻는 게 일상이었다고 함.
뭘 나눠주는지 또는 뭘 파는지 몰라도 일단 줄을 선다는 거임. 어차피 모든 물자가 부족하니까 줄서서 기다리다 뭔가 받으면 이득이라고.
쨌든 주어진 기간 동안 교수님은 여기저기 다니고 공부하고 하면서 바쁘게 지냈고, 출국예정일을 며칠 앞두고는 숙소에서 짐을 싸는 등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큰 일이 생겼던 거임.
당시 교수님이 있던 숙소는 한국인 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갑자기 한 명의 학생이 피칠갑을 한 채로 숙소로 돌아왔던 거임. 안경도 깨지고, 머리도 깨지고, 옷에는 핏자국도 제법 있었다고 함.
한국인 학생들이 놀라서 모여들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그 사람 얘기로는 비행기 표 사러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거임.
당시가 교수님 말씀으로는 1991년이었는데, 당연히 인터넷 같은 걸로 표를 살 수 없어서 직접 표를 사러 가야했음.
그 학생은 판매소가 여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줄을 서 있었는데, 개점 시간을 얼마 안 남겨두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들이 군용 트럭 같은 걸 타고 와서 내렸다고 함.
그리고 이 사내들은 줄 맨 뒤로 가서 '당신이 줄 맨 끝이오?' 하고 묻진 않았고....
'내가 아까 네 앞에 있었지?'
하고 말했다고 함.
암만 봐도 양아치나 마피아 같은 위험해 보이는 남자들 여러 명이 와서 저렇게 물으니 줄서 있던 사람은 겁먹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음.
그러면 그 깡패들은 바로 앞으로 가서 또 '내가 아까 네 앞이었지?'하고 묻고.. 이런 식으로 이 불량배들은 가게가 열리기 직전에 줄 맨 앞까지 갔다고 함.
미리 줄 서 있던 사람들은 다 저 양아치들이 표를 매점매석해서 되팔이를 할 생각이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느꼈다고 함.
그렇게 판매소 문이 열리자마자 줄 서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표를 사려고 줄을 무너뜨리고 가게 안으로 달려들었고, 말그대로 피 튀기는 전쟁이 난 거임.
비행기표를 사러 갔던 한국인 학생은 그 과정에서 다치게 된 거고....
이 얘기를 들은 교수님은 크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는데, 왜냐면 다음날은 본인이 표를 사러 가야 했기 때문임.
얘기를 들어보니 그 깡패들은 아무래도 상습범 같은데 내일도 오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다음날 교수님은 숙소에 있던 장우산 하나를 신문지로 둘둘 말아서 겨드랑이에 끼고, 찐한 선글라스를 쓰고 굉장히 이른 시간에 판매소에 나갔다고 함.
여기서 하는 말이지만 교수님은 인상이 그리 녹록한 사람은 아니었고, 저런 복장을 했다면 삼합회 중간보스급으로 보이기에 충분했을 거임.
교수님이 비행기표 판매소에 이른 시간에 나가자 아직 줄 서 있는 사람은 없었고, 근처 과일가게에 빈 상자를 하나 얻어서 판매소 문 앞에 거꾸로 엎어놓고 문을 등지고 앉았음. 신문지로 둘둘 만 장우산을 팔에 끼고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고 함.
시간이 지나서 교수님 뒤로 줄이 생겼고, 이제 좀 있으면 가게가 열릴 무렵이 되자 아니나 다를까 양아치들이 나타난 거임.
양아치들은 그날도 뒤에서부터 차근차근 앞까지 왔는데 교수님을 보고 흠칫했다고 함.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게, 차이니즈 마피아 같이 생긴 동양인이 사시미칼 같은 기다란 걸 들고 가만히 앉아 있는 그림은 상상도 못했겠지....
그래서 그 양아치들은 교수님의 기세에 눌린 건지,
'내가 아까 네.... 뒤에 있었지?'
라고 물어봤다고 함.
교수님은 그 말에 양아치들이 쫄았다는 걸 캐치하고, 여기서 기선제압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함. 물어보는 양아치들을 처다보지도 않고 단답형으로 '아니'라고 한 마디만 대답했다 함.
양아치들은 교수님의 말을 듣고 줄에 끼어들지 못하고 살짝 떨어진 자리에 서서 줄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함.
하지만 줄서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교수님도 다른 양아치 그룹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양아치들이 줄 바로 근처에서 서있으니 또 불안감이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고 함.
교수님은 사람들이 또 문 열리자마자 뛰어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자기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표를 구해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음.
그러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교수님은 벌떡 일어나서 앉아 있던 상자를 줄밖으로 냅다 발로 차서 단체 스턴을 걸고,
본인은 잽싸게 문 안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문을 잠궜다고 함.
문을 잠군 채로 직원에게 가서 한국행 표를 사고..
'여기 뒷문이 어디에요?'
'저쪽이요.'
'고마워요. 저기 사람들 기다리니까 문 좀 열어주세요.'
하고 뒷문으로 빠져나와서 숙소까지 뛰었다고 함....
당시 들으면서 와 비겁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뭐 결국 안 다치고 귀국한 건 현명하다고 해야 할지.
더군다나 교수님이 귀국한지 얼마 안 돼서 소련에서는 '8월 쿠데타'라고 하는 대규모 쿠데타가 발생해서, 까딱하면 출국을 못했을 수도 있었다고도 하심.
그리고 교수님은 무사히 돌아오셔서 경험과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열심히 논문을 쓰셨는데, 하필 그해 말에 소련이 붕괴돼서 논문의 가치가 폭락하는 사고를 겪으셨다고 함.
결국 그 뒤로 전공 노선을 상당부분 수정해야 해서 상당히 고생하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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