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07년 음력 3월 누르하치가 피오 호톤으로 파견한 3천여명의 군대는 오갈암 일대에서 본인들을 상대로 적대의식을 표출한 울라군 1만여명과 조우하여 이틀여에 걸친 싸움끝에 그들을 격퇴했다. 이 '오갈암 전투'로 말미암아 누르하치는 두만강 유역의 세력 우위를 차지했으며,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고 많은 수의 번호들을 건주에 내속시켜 세력 신장을 꾀하게 되었다. 동시에 누르하치는 논공행상과 그 이후의 처벌을 통해 자신의 동생인 동시에 세력내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던 슈르가치에 대한 확실한 우위 역시 점유하였다.
누르하치의 오갈암 전투 승전에 대해 조선의 변경에서는 누르하치가 울라를 격퇴한 것을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가 다소나마 존재했다. 변장들 중 몇몇은 울라의 패배를 긍정적으로 여겼고1, 나아가 몇몇 주민들은 오히려 누르하치와 건주 세력에게 사례를 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의 고위급 지휘관 및 조정에서는 누르하치의 승리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울라는 비록 군사적으로는 강할 지언정 조선으로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한 반면 누르하치 세력은 그것이 제대로 통용되지가 않는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 개인은 이미 너무도 위험한 상대였으며, 그의 세력 역시도 무척이나 고강한 상대였다. 이 시기 북병사 이시언이 올린 장계에 첨언된 '승냥이가 제거되고 호랑이가 왔다'는 글로 표현된 그의 오갈암 전투에 대한 감상은 누르하치의 승리에 대한 당시 조선의 불안감을 보여준다.2
누르하치는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오갈암 전투의 정황에 대해 명의 분수도를 통해 요동아문에 통지를 보내고 상황을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했다. 통지를 보낸 자세한 정황은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이전에 조선이 명나라측에 자신에 대한 선유를 요청한 경험을 떠올리고 오갈암 전투에 관한 전말을 자신의 입장에서 먼저 해명하며 혹시모를 명나라의 의심과 압박을 불식시키려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3
누르하치가 오갈암 전투에 대해 떳떳한 입장을 견지하던 것과는 반대로, 건주는 음력 4월 무렵 명나라의 요동아문으로부터 두만강 유역에서 울라와 교전하고 조선의 번호들을 허투 알라로 호송, 이후 조선에 직첩을 요구한 것에 대한 질책 및 해명요구성 선유를 받게 되었다. 조선이 오갈암 전투의 정황 정보들과 건주의 번호관속권 개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자문화, 요동아문에 누르하치에 대한 선유를 요청한 탓이었다. 그것은 지난 1605년 무렵 조선이 요동아문에 대해 노정을 보고하고 누르하치에 대한 선유를 요청한 것에 이어 실질적으로 2차로 노정을 보고하고 선유를 요청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4
조선의 선유 요청 자문은 음력 4월 초 무렵에 발송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이후 순무 조즙은 음력 4월 29일에 조선에 회답을 발신했다.5이를 통해 이 사이에 누르하치에 대한 선유가 진행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40년 음력 4월 2일
2.조선왕조실록 선조 40년 음력 4월 4일
3.원본은 소실되었으나 사대문궤 권 48 만력 35년 6월 24일자 자문에 인용되어 있다. 장정수, 宣祖代 末 朝鮮의 對明 ‘虜情’ 보고와 그 여파, 명청사연구 51, 명청사학회, 2019, p.102. 해당 사실에 대해 조선은 당해 음력 5월 25일에 파악했다.
4.장정수, 앞의 논문, 2019, pp.97~102
5.사대문궤 권 48 만력 35년 음력 4월 2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