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울라의 부잔타이는 자신의 영향력 확대, 세력 신장등의 목표를 가지고 1603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의 변경을 공격하는 동시에 조선의 번호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1603년 음력 8월 종성과 동관이 공격당했고, 음력 12월에는 온성을 포함하여 보다 광범위한 지역들이 공격을 당했다.
이 때 부잔타이가 조선까지 공격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육진의 조선군을 압박하여 자신들의 번호 흡수에 개입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조선에 자신의 세력의 무력을 과시하여 직첩을 받아내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만 해도 부잔타이의 주요 공격 목표는 번호들이었고, 조선은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그에 따라 부잔타이는 조선의 진보에 대해 본격적인 공격을 시도하진 않았다.
그러나 1605년 음력 3월에 있었던 부잔타이의 동관 공격은 확실하게 조선을 주목표로 삼은공격이었다. 부잔타이가 (조선의 입장에서) 급작스럽게 동관을 공격한 까닭은 이전에 설명했듯 자신의 직첩 요구가 조선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선에 확실한 무력행동을 가하여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동관은 1605년 음력 3월 15일 함락당했고, 첨사 전백옥을 비롯한 동관 수비대는 사실상 궤멸당했다.1
동관이 함락당하고 첨사 이하 주둔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은 조선 조정이 울라에 대한 태도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1603년에 있었던 울라의 침입에서는 비록 울라의 주요목표가 아니었던 탓은 있으나 최소한 조선 관하의 6진의 진보들은 모두 사수되었다. 그렇기에 조선 조정에서는 울라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논의 그 이상으로 진전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울라가 대놓고 조선을 주요목표로 삼아 치고 들어왔고, 그 결과로 실제로 동관이 함락되었기에 사태가 훨씬 심각해졌다. 조선으로서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북방경계가 무너지고 번호들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상실할 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 조정에서는 울라에 대한 반격을 진지하게 의논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해져 감정적인 의논을 할 법함에도, 조선측에서는 무리한 의논을 하지않았다. 조선 조정은 본인들의 북방동원역량과 원정역량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울라 본세력과 충돌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역량으로는 무리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로서 비변사에서는 이때의 공격목표를 어디까지나 울라의 중간거점인 건퇴로 놓고 논의를 진행했다.
건퇴는 울라가 번호 흡수를 위한 중간 거점으로 종성 건너편, 즉슨 조선의 국경 밖에 건설한 요새였으며 1604년에도 정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위에 언급했듯이 논의 그 이상의 진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관이 함락된 뒤 함경도 관찰사 서성이 건퇴에 대한 정토를 건의하였고 비변사에서는 '정토 자체는 반드시 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2
하지만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서성과 북병사 김종득을 비롯한 함경도의 행정관 및 변장들은 정토를 되도록이면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비변사 쪽에서는 충분한 준비 끝에 가을쯤 정토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함경도 쪽에서는 번호 추장 탁두의 진고를 바탕으로 건퇴의 울라군의 방비가 무척 약한 수준이라 판단하여 지금이 공격의 적기라고 판단하고, 비변사 쪽에서는 탁두의 진고의 진위여부가 확실치 않고 탁두가 배신할 지 안할지도 불확실하며 건퇴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원정이니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탓이다.3
당시 탁두의 진고에 의하면 건퇴에는 약 5백여명의 울라군만이 주둔하고 있었다.4함경도측으로서는 해당 정보가 사실이라면 현재 함경도에 배치된 병력만으로도 정토가 충분하며, 반면 시간을 끌면 울라군이 건퇴에 충원되어 정토를 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반면 비변사에서는 자칫 잘못하다가 작전이 실패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내외적 손실을 입을 수 있었기에 신중을 기하여 충분한 병력을 준비한 후 정토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함경도측과 비변사측의 의견이 갈리자 선조는 우선 함경도측이 정토의 시행여부를 결정하되 철저히 준비하여 만전을 이행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었다.5
이로부터 얼마 뒤인 음력 4월 16일 무렵, 김종득의 정토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해당 정토는 건퇴에 대한 직접적인 정토는 아니었으며 울라군의 침입 당시 울라군에 협조한 번호 부락인 '이항'과 '우허'에 대한 정토였다. 조선군은 해당 정토에서 80여급의 수급을 얻었다.6이 정토는 건퇴에 대한 공격에 앞서서 조선군을 방해할 만한 요소들을 미리 정리한 것이었다.
비변사에서는 이 보고에 대해 접한 뒤 김종득의 행동을 위와 같이 평가하며 건퇴를 정토하기 전에 필시 그들의 우방 번호들부터 처단해야 된다고 의견을 올렸다. 김종득 역시 이후 재차 서신을 보내면서 우선 건퇴를 공략하기에 앞서 울라의 우익이 되어버린 경원의 번호들부터 정리하고 건퇴를 공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내었는데 비변사의 의견과 일맥상통한 것이었다.7
위와 같은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어야 했지만, 상황은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음력 4월 15일경 건퇴에 주둔하던 울라군이 먼저 행동에 나서서 번호 부락인 벌이대와 독소를 공격한 것이다. 조선군은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정했고, 그 결과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다. 조선군 및 조선군과 함께 한 번호들은 해당 전투에서 6명의 울라군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으나, 이미 벌이대와 독소는 공략당한 뒤였다. 해당 전투에 관한 보고는 음력 4월 25일에 한양에 올라왔다.8
또한 같은 날에 탁두의 또 다른 진고에 관한 소식이 들어왔는데, 건퇴에 주둔한 적들이 조선과 번호에 대한 본격적인 재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건퇴에 주둔한 울라군의 수효가 최소한 아직까지는 450 정도라는 정보 역시 함께 보고되었다.9
벌이대 전투와 울라군의 재침 준비에 관한 정보는 함경도측이 건퇴에 대한 정토를 다시금 급하게 준비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울라군이 지속적으로 변방을 침범하고 또 다시 번호들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건퇴에 주둔한 울라군이 수효가 아직까진 그리 많지 않다는 정보가 일전의 탁두의 진고에 이어서 지속적으로 수집되었기에, 서성과 김종득이 판단하기에는 확실히 지금이 적기였다. 그리하여 함경도 주둔 조선군은 신중론을 파기하고 더 이상 정토를 미루지 않았다. 음력 4월 28일 건퇴에 대한 정토의 향후 진퇴 여부에 대해 상황을 살피며 적절히 치계하겠다는 서성의 서신이 한양에 올라왔고, 그로서 건퇴 정토는 초읽기에 들어갔다.10
1.이상까지는 1편 참조
2.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3일
3.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6일
4.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8일
5.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6일
6.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16일, 음력 5월 8일
7.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21일
8.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25일
9.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위와 같음
10.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28일
